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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새벽부흥회 전야제(주후 2022년 10월 30일)-전야제

제목: "하나님의 의"
말씀: 로마서 3:23-31

설교자: 박영선 목사님(남포교회 원로)-초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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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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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 목사님(남포교회 원로)
-올 때마다 늘 감동스럽다. 거두절미하고 본문으로 들어갑시다. 구원에 관해서는 여러분들이 익히 알고, 마음으로 믿고 이미 충분하겠지만 오늘 다시 본문을 읽어보면 놀라운 것이 구원에는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나타난다. 그 구원이 방법론이고 운명에 관한 것이고 보상에 관한 것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누구신가?’ 를 증명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 의로우심을 나타내고 자기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신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하면 믿음이라는 것이 방법론을 넘어서는 것을 불구하고 우리는 믿음이 자꾸 조건이 되는 이해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금 구원을 선포하는 자리는 믿음은 율법이 아니다. 그러니까 법이 아니다. 이다. 법이 아니고 내 마음대로다. 그렇게 하는 건 너무 심하지만 말하자면 그런 수사학적 역설이 들어있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다시 이야기해서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의 증거이다.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래서 이 부분을 이해하기 좋게 하나님의 의라 하면 예수를 믿어 의롭게 되는 것이라는 표현이라는 것이 부족해서 말을 하나 만들었다.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서 우리에게 의리를 지켰다. 의리라 하면 어디에서 많이 쓰냐하면 도덕과 윤리가 없는 조직에서 쓰는 말이다. 법으로는 말이 안 되는 것에서 그들이 질서와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의리라는 말을 쓰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데는 우리의 조건과 자격을 넘어서는 것을 썼다는 것이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의 의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리란 다시 생각해보면 신앙이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감동시킬 것인가? 내 책임은 무엇인가? 어떤 결과를 낳을까 하는 문제이기 이전에 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도대체 구원을, 자기 아들을 잡는 방법을 쓰는가? 좋은 말로 하면 우리가 못 알아 듣냐? 이런 생각을 마땅히 해야 되는데 그냥 너무 쉽게 거기가 은혜의 부분이다. 은혜는 말이 안 되어서 나중에 설명을 하라고 하면 다 각각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한다. 다 한국어를 쓰지만 거의 방언 같이 통역이 없으면 해석이 안 되는 말들을 여기다가 이 말을 쓰자면 지껄인다. 다시 생각을 해야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다우시다. 그런 말에 대표적인 표현이 여러분이 잘 아는 요한복음 3:16절, 17절이다.
 
*요한복음 3:16,17,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건 그냥 선포이다. 조건이 없다.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구원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부차적인 설명이다. 그래서 17절을 보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베푸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하나님과 특별하심이 전개되고 증명되는 사건인데 이렇게 하나님의 의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구별을 지어서 자신을 증명을 한다. 나는 믿었고, 너는 안 믿었다. 이런 시비가 생긴다. 구원을, 믿음을 지켰는데 어떻게 보상이 시원치 않다. 신앙생활에서 제일 우리를 혼란시키는 것이 예수를 믿어도 형통하지 않다는 현실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시련을 이겨야 된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왜 하나님이 이렇게 이따구로 일하시는지 우리는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우리끼라만의 비밀로 털어놓아야 되는 것이다. 왜 이렇게 하시는가? 좋은 배우자를 위해서 20년을 기도했는데 왜 후보하나 안 나타나냐? 이런 건 현실이라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이따구로, 저는 천국에 가면 만나보지 못할 사람이 많다. ㅋㅋㅋ
 
이런 하나님은 베푸는 하나님이고, 너희는 그 은혜를 이제 알게 되었으니 하나님이 법을 따지는 분이 아니고, 자격을 따지는 분이 아니고, 이렇게 베풀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너는 안 믿는 사람들 보다는 나아야 할 것 아닌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뭐에서 나아야 하는가? 열심, 충성, 이런 것은 다 어디나 쓰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본문이 아니다. 무슨 충성, 누구에게 무엇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라는 맞는 차원이 다른 구별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무언가? 하나님이 죄인을 구하러 오신 것이다. 아무도 그를 찾지 않고 우리 로마서 5:8절을 이야기해서
 
*로마서 5:8,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런 시제를 보라. 우리가 몰랐을 때, 구하지 않았을 때, 믿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다우심을, 하나님이 의리를, 하나님의 책임을 먼저 실천하신다. 왜? 하나님이시니까, 구원이 성립하는가? 창조주이시니까, 창조주가 피조물의 반란의 의해서 쫓겨 갈 일도 없고, 손해 볼 일도 없다. 창조주는 창조의 책임을 지기로 했다. 인간이 만든 우상들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 불쌍히 여기신다.
 
“내가 너희들에게 화를 낸들 무얼 하겠느냐? 내가 하나님인데, 돌아오라, 내 집에 거할 곳도 많고 먹을 것도 많다. 마스크도 샌삥이다. ㅋㅋㅋ 기독교 신앙인의 가난함은 풍요한 자인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어떤 업적을 남기고 실적을 남기는 이상으로 우선해서 인간이 달라져야 한다. 우리는 인간이 달라져야 한다. 어디에서 달라져야 하는 것의 표가 있냐면, 하나님의 의리는 앞에서 이야기 한 것 같이 율법이 아니다. 행위가 아니다. 조건이 없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그 의리에 동료, 의리의 근거가 사랑이라고 한다. 사랑은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된다. 상대방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주는 게 사랑이다. 그렇다. 그렇지만 이 사랑, 하나님의 의리, 우리에게도 그 의리, 사랑을 하는, 사랑을 베풀고, 사랑의 대상이 되라고 하는 사랑은 상대적인 것이다. 상대적은 절대적이라는 말의 비교되는 말이 아니라, 상대의 반응이 있어야 한다. 사랑은 혼자 할 수가 없고, 사랑이 사랑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반응하라고 한다. 여기가 어렵다.
사랑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13장이 생각이 난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우리의 기대와 많이 다르다. 왜 어떻게 다른가?
 
 첫 째는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은 우리의 기대와 많이 다르다. 왜 어떻게 다른가? 이건 사랑이 아니다. 세 가지의 예를 든다. 천사의 말을 하는 것이 사랑 아니다. 아니다. 이다. 나발 부는 것 사랑이 아니다. 사랑을 고백하고 남자들은 늘 이래서 실패하는데 남자들은 강아지 같이 사랑하고 여자들은 고양이 같이 사랑한다고 한다. 남자는 자꾸 진심을 보이려고 한다. 그래서 앞에서 가슴을 찢고 심장을 꺼내서 “식기 전에 드세요.” 그러니까 다 도망간다. 얼마나 무서운가? 어떤 미국 언론인 하나 북한에 초청을 받아서 북한 사회가 인민들이 얼마나 만족해하는가를 보이기 위해서 이제 불러놓고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다. 마스게임도 보여주고, 열병식도 하고, 어떤 필요한 데마다 가서 구경을 시키고 그가 돌아와서 북한에 대해서 비난을 할 수가 없다. 비난을 할 수가 없으니까 이런 것도 멋있고, 저런 것도 멋있다고 한다. 마지막에 한 마디를 뭐라고 붙였냐면 “그런데 이상하게 공포가 있더라.” 그걸로 다한 것이다. 공포가 있더라고 한다.
 
사랑의 반대말이 공포이다. 공포란 칼부림을 하는 게 아니고 비정해지고 무정해지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집중을 하면 이상하게 무서워진다. “너 안 믿어, 죽어볼래? 지옥 가!” 이건 굉장히 가난한 것이다. 사랑할 줄 모르는 것이다. 사랑을 하면 눈빛만 봐도 알아서 기어야 되는 것 아닌가? 상대방이 나를 맞추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을 사랑이라고 그러는데, 강요하고, 그를 통제하고 무릎 꿇리려는 사랑, 감동으로, 진심으로, 이렇게 털어놓는다는 것이다. 사랑은 천사의 말을 하는 게 아니다. 환상의 말이 아니다.
 
둘째는 산을 옮기는 능력이 사랑 아니다.
셋째는 내 몸을 불사르게 내 주는 것은 사랑 아니다.
-아까 심장 꺼내주는 이야기, 이제 휘발유 붓고 불 지르게 생긴 것이다. 그럼 무엇이냐?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정의이다. 영어 번역이 더 좋다. Love is long suffering. 끝없는 고통, 공감이 안 하는 이유는 안 살아봐서 그렇다. 살아보면 심장을 꺼내고 불도 붙여서 한 결혼인데, 해답이 없다. 이 사람만이 아닌 누구하고 살아도 낫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이 든다.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아주 다르다. 감성적이지 않고 감동적이지 않고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무력하고 실망스럽고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이어서 맞는 말이 나온다. “무례히 행치 않고 성내지 않고 ~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이 견뎌야 되는 거라면 하고 싶지 않다. 요새 젊은이들이 결혼을 안 한다. 실례했다. ㅋ ㅋ ㅋ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이런 거라면 그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느냐? 이게 뭐냐? 문제에 대해서 에베소서 5장에서 22절 이하에 세 가지 경우를 이야기 한다. 사랑이 어때야 되는가를...
 
부모와 자식 그리고 직장에서 관계에서 사랑을 논한다. 그 사랑을 논하는 것이 있다. 우리가 다 결혼을 하면 사랑의 종착점이라고 생각하고 행복이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혼을 하면 사랑의 종착점이고 행복은 영원히 외면 한다. 현실이다. 그러니까 ‘잘 할 수 있어’ 안 살아봐서 하는 이야기이고, 살면 누구나 아! 어른 말씀이 틀린 게 없구나.! 다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느냐? 시작이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여자들이 싫어하는 성경구절이다. 에베소서에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그런데 안 한다는 것이다. 주님만 사랑하기로 하고 사내들은 사랑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 같이 하라.” 벼락같고 거두절미 하고 명령으로 시작한다. 무슨 사랑이야기를 배경이야기를 무슨 클린트이스트우드가 나오는 것 같이 한다. 법도 양심도 없는 총잡이를 아는가? 서부영화 클린트이스트우드를 모르다니.... 구약을 모르구만,,, ㅋㅋㅋ 왜 이렇게 이딴 명령의 요구를 하시는가? 내가 너희를 부부로 삼았기 때문이다. 내가 네 아내를 준비한 하나님이고 내가 내 남편을 너에게 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전제가 있는 것이다. 그럼 하필 이 사람을 그리고 이 현실을 뭐라 말인가? “기다려봐!!!” 사랑을 배우고 믿음을 배우고 신앙의 모든 덕목들, 신앙만의 문제가 아니고 인생에서 인간됨에 많은 덕목들을 만드는데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시간이란 자라나고, 시련을 겪고, 후회하고 하는 과정을 말한다. 그 시간에 걸려서 나무가 자라듯 열매가 맺듯 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무시하고 초월적 개념으로 간구하면 즉시 필요할 때마다 즉시, 결과를 요구하는 바람에 뭐가 오느냐면, 문맥이라는 것이 없어진다. 문맥이 없다는 것이 없어진다는 것은 스토리가 없으면 본문을 담을 수가 없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그 설명을 여러 가지로 할 수 있다. 그 아들을 보내셨다. 십자가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모두 좋지만, 벤허 영화만큼 잘 만들 수가 없다. 우리는 거기서 주인공이 복수 하나만을 위해서 견뎌내고, 그리고 복수를 해서 답이 되지 않는 인생, 존재에 대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데까지 끌려가야 된다. 복수를 하고, 권력을 잡으면 답이 되는 게 아닌, 그 자리, 부인이 이렇게 이야기 한다. 메쌀라를 죽인 후에도 남편이 계속 어쩔 줄을 모르니까 “당신이 메쌀라 같아요.” 한다. 안 봤다 이것이다. 그 리메이크 된 것은 구라이다. 거기는 증오도 없고, 거기는 배신도 없고, 거기는 아무 드라마틱한 설정이 없다. 그게 없으면 본문을 다룰 수가 없다. 인생이 여러분의 기대대로 다 진행이 되면 아무 뜻 깊은 동복을 만들 수가 없다. 행복하고 형통하면 여러분이 기르는 강아지나 고양이 같이 된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밥 주시고 처먹으면 된다. 그딴 소리 말고 점잖게 하라고 제 아내가 평생을 저한테 해준 충고이다. ㅋㅋㅋ “당신은 어떻게 잘 나가다가도 그딴 말씀을 하세요?” 한다. O형이라 그렇다. 오정현 목사님도 O형이다. ㅋㅋㅋ!!!
 
붙잡혀 있어서 할 수 없이 견디는 것이다. 인내심이 있어서 믿음이 있어서 견디는 것이 아니라 헤어져 아무 쓸데가 없어서 붙들려 사는 것이다.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 아들을 보낼 때, 육신을 보내신다. 환장할 노릇이다. 뭐든지 하실 수 있는데 딱 묶어서 시간과 공간을 잡아놓아서 그 조건으로 해라. 시간이 가야되고 시대에 권력과 충정에서 따르는 자와 배척하는 자 속에 섞일 수밖에 없는 문맥들 속을 걸어서 십자가에까지 가는 것이다. “당신이 남을 살리면서 스스로는 죽음의 길에서 내려오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오셔 보십시오.” 그러자 내려오신다. “내려와서 따귀라도 때리고 다시 올라가면 될 것 아닙니까?” 그렇게 안 하신다.”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소서!“ 현실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ㅋㅋㅋ 저와 오 목사님 외에 아무도 없다.
 
사랑의 교회를 사랑하는 첫 번째 이유가 유머가 통하는 이유이다. 유머가 통한다는 것은 아량이 있고, 용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웃는 것은 재미있어서만이 아니다. 넘어갈 때 웃는 것이다. 핏대를 세우지 않는 것, 그것이 인간의 고급한 성품이다. 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한심한 것들이 아닌가요?” 그렇게 그 말은 안 하신다. 그렇게 우리를 몰아가는 것이 문맥 속에 잡혀 있기 때문에 도망을 갈수가 없어서 배울 수밖에 없다. 화도 낸다. 밥상도 엎고...
 
제목이 멋있는 ‘우아한 세계’라는 영화가 있다. 그 유명한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송강호씨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조금 전까지 알아듣다가 이제는 못 알아듣는가? 조폭 서열 3위쯤 되는 고위 조폭인데 아내와 딸이 아버지가 조폭인 것이 꼴 보기가 싫어서 늘 사람 취급을 안 하고 경멸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버린다. 여기는 매일 시달린다. 조폭은 밤낮 주먹으로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권력 다툼 속에서 어떻게든 돈을 뜯어내는 이쪽 편과 저쪽 편 사이에서 공갈도 쳤다가 도망도 갔다가 하는 것을 계속해야 되는데, 그날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왔더니 아무도 없다. 아내랑 딸이랑 이민가고 도망을 갔으니까 TV를 켜놓고 마누라가 보내준 동영상, 딱 그것만 가지고 노는 것을 보면서 손수 끓인 라면을 먹고 있는데 물장난을 치는 깔깔 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저 그냥 자기 처지가 너무 한심하고 너무 비참하고 분통이 터져서 밥상을 걷어찬다. 울면서 “아이 썅!!!” 그 다음 장면이 명장면이다. 그게 어떻게 했겠는가? 일어나서 치웠다. 누가 치울 것이여, 자기밖에 없는데... 이 부분을 굉장히 이해하지 못한다. 이 특별한 미션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조폭이 된 것은 조폭 세계를 승화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건 넌 센스이다. 우리 전문 용어로는 불신앙이다. 여러분이 기대치 않은 컨테스트 속에 조건 속에, 정황 속에, 환경 속에 여러분을 붙들어 맨다. 여러분이 부모를 택하지 못하면, 자식을 택하지 못하면, 심지어 친구도 택하지 못한다. 친구는 어쩌다 친구가 되냐? 학교 짝 하는 바람에 친구가 된다. 저 새끼가 내 연필을 쌔벼갔는데 나이 들어보니까, 그까짓 것 뭐, 지금도 만나면, 이 새끼가 당구 치면서 속이기도 하는데 그냥, 저 새끼는 왜 그러냐? 옛날에도 그랬잖아, 이렇게 넘어가게 되어 있지, 뭐 골라서 뭐 이순신, 강감찬, 이렇게 친구를 선택할 수 없다.
 
그 속에서 절망, 비참, 그리고 자신의 한계, 처지의 부름, 같은 것들이 여러분을 위협하고 흔들어서 어쩔래? 아직도 살아있을래? 넌 뭐야? 이런 도전을 계속 하는 것이다. 편안하면 절대로 받지 않을 도전을 받는 것이다. 나는 뭐야? 인생은 뭐야? 인간이 뭐야? 이렇게 깊은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구약을 읽으면 다 오해 하는 게 구약 이스라엘은 왜 이렇게 밤낮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을 안 들어서 포로가 되도록 병신 짓들을 해서 그렇게 했을까? 거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평안하게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계속 왜적이 와서 두들기게 만든다. 사사기 때는 이웃 나라들을, 또는 원주민까지 남겨 두었다가 옆구리에 가시가 되게 하고, 열왕기 때는 이웃 나라들, 아람, 나라 자체도 둘로 나뉘어서 북 왕조와 남 왕조 사이에서 싸움이 그치질 않고 아람이 등장하고 뒤에 앗수르가 등장하고 바벨론이 등장해서 포로까지 되는 그 도전들 속에서 “난 뭐야? 우리는 뭐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뭐야?” 이렇게 묻게 만드신다. 공식적으로 답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얼 만들어 냈냐면, 우상을 만들어 낸다. 우상은 뭐냐면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이 우상을 이렇게 놀린다. “네가 나무 잘라다가 적당하게 뗄 감 만들어서 밥 지어 먹고 그 중에 일부를 조각해서 앉혀놓고 말도 못하고, 입도 없는 놈에게 절을 하나? 이러한 말도 안 되는 놈들이 있어.” 이렇게 꾸짖는데도 그것을 한다. 왜? 하나님은 답을 안 주시거든,
 
맨 먼저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나 내일 수술 받으러 가는데 의사가 보고 기도 많이 했으니까 ”멀쩡한데요? 뭐 때문에 수술하기로 했죠?” 이렇게 말하게 해 주십시오“ 한다. 그런 일은 안 일어난다. 하나님은 답을 안 하고, 현실은 급급하니까 말 듣는 신을 만든다. 끝없이 말 듣는 신을 만들고 종교 개혁을 해도 종교개혁이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아는 결과까지는 가지 못하고 그럼, 우상을 섬기는 것과 방불한 정서, 절기를 지키고, 율법을 지키고, 제사 제도를 완비하고 성전을 수리해도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백성은 깨닫지 못했음을 끝이 난다. 예수님이 오시기까지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전 인류가 답을 찾을 수가 없게 된다. 우리의 인생 속에서도 이런 붙잡힘 속에서야 비로소 믿는다는 게 무언가? 까지 질문이, 의심이 생겨야 정상이다.
 
이렇게 열심히 믿고 하나님과 다 하는데 ”왜 제 기대와 다른가요? 왜 하나님, 저하고 박자가 안 맞는가요?“ ”하나님 계속 제 발을 밟으시잖아요?“ 춤도 안 추어본 뭐 어쩌라는 건가? 이렇게 시간이 걸려야 ”왜 이 사람을 주었습니까? 왜 이 자식을 주었습니까?“ 그들의 아우성과 그들의 분노와 그들의 심한 반발을 겪으면서 사람이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고 사람이 자기 한계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겸손히, 겸손히는 결코 경험을 빼놓고 쓸 수 없는 단어이다. 겸손히 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행복, 편안함이 답일 수 없다. 그것보다 더 깊은 답이 나와야 내 일생에 고통과 분노가 해결될 수 있다. 형통하자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몰랐을 때 찾았던 일반적인 보상으로는 인간을 만족시켜서는 안 된다. 그 이상으로 하나님 가십시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한 것만큼 인간은 어때야 하는가를 누구에서 보는 게 아니라, 내가 가게 해 주십시오. 라고 외치게 된다. 이것을 순종이라고 한다. 순종이라는 것은 ‘하나님, 내 욕심을 다 내려놓았으니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는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얼 하라는 것인가는 시험문제나 도덕법 같이 나오지 않고 현실에 주어지는 것이다. ”이 사람과 계속 살라구요? 이런 때는 어떻게 견뎌야 합니까?” “어떻게 할래? 전 나가겠습니다.” 한다. 친구네 갔다. “야, 너 왜 왔니? 심심해서, 야 이 시간에 무슨 심심? 너 정신이 있냐 없냐?” 갈 데가 없는 것이다. 탕자가 왜 돌아오는가? 정신이 들지 않는다. 갈 데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온다. 아버지가 환영을 한다. 탕자의 비유에서 뭘로 치냐면, 큰아들 같이 군다. 다 말아먹고 소를 잡고, 나는 오늘도 일하다가 들어왔는데 나는 염소새끼 하나 잡아주지 않는다. 아버지가 말씀하신다. “내 것이 네 것이다.” 돌아와서 환영을 하는 것이지, 잘 했다고 환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온 다음에 이 큰아들의 말처럼 늘 고생만 하는 것이다. 왜 고생만 시키는가? 욥은 욥기를 잘못 읽는 가장 큰 이유는 1장에 설정을 놓친다. 욥기 1장에 설정은 욥은 의인이다. 욥은 잘못하지 않았다. 시작에 욥의 고난에서 친구들이 와서 회개하라고 남발하는 이유는 난 회개할 게 없다 였고 친구들이 욥의 꼬투리를 잡는 것은 말을 그따구로 하는 것만 봐도 너는 죄는 졌다 였다. 그래서 계속 싸운다. 몇 가지 중요한 구약 성경에 그 보석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13장에 이르러 욥이 드디어 자기 생애를 저주하고 나 죽어버리겠습니다. 하고 남발하다가 비로서 어디까지 가냐면
 
 
우리 계급장 떼고 만납시다.” 거기까지 간다. 나중에 결말에 보면 결말에 뚜렷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다. 대부분 놓치고 마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묻는다. “너는 무슨 근거로, 너는 잘못한 것이 없고 나는 잘못한 것이 있다고 하나님께 대드냐?” 네가 무슨 근거로 하나님게 잘못 했다고 하느냐? 그러니까 욥의 대답이 이것이다. “난 잘못한 게 없어요.” 거기서 딱 틀리다. 무얼 틀리는가? 나중에 하나님이 욥을 데려다가 창조 세계를 보여주신다. 대표적으로 “세상의 기둥들을 어디에 세웠는지 아느냐? 산양이 새끼 치는 것을 보았느냐? 네가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악어의 창고가 어디서 나오는지 보았느냐? 이런 이야기들을 왜 하냐면, 이 욥을 옆에 세워놓고 설명을 하는 것이다. “너는 이것들과 다르다. 너는 이런 것들을 알아야 한다.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내 후사이다. 네가 잘못하지 않으면 네가 다가 아니다. 너는 창조 세계의 관리인이고 주인이야. 당연이 훈련을 받아야 한다. 네게 잘못 한 것이 없으면 다냐?” 그게 욥기의 가장 중요한 핵심 된 결론이다. 욥이 마지막에는 회개한다. 내가 주께 대해서 이렇게 하니 “이제는 눈으로 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지껄였습니다. 회개 하나이다.” 듣기만 하다가 봤다는 것은 무엇인가? ‘장님 코끼리 만지기’ 라는 우화를 알지 않은가?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코끼리는 기둥이야, 코끼리는 부채야, 이야기 하는 것은 저것들은 코끼리의 한 부분만 만져보고 저러네, 라고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권리는 코끼리를 보니까, 코끼리가 뭔지 아니까, 기둥이라고 해도 우습고, 호스같애 해도 우습다. 왜 봤으니까,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서 당연한 거쳐야 할 단계이긴 하지만 너무나 확실한 것 하나 붙잡고 난 다 알았어, 나는 하나님은 이거야, 하나님은 계속 우리를 만족과 완성 속에 놓아두시지 않고 밀어 붙이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요한복음 9장에서 실로암 사건이 나온다. 날 때부터 장님이 된 자가 이제 예수님에 의해서 눈이 뜨인다. 그 예수를 반대하는 자들이 와서 예수가 정말 고쳤느냐? 네가 예수이냐고 묻는다. 예수가 고친 게 너무 본 사람이 많아서 반대할 수 없다. 그에게 말하기를 진짜 너 장님이었냐고? 묻는다. 너는 눈을 감고 예수님과 짜고 이렇게 기도하니까 딱 뜨고 처음으로 눈을 떠서 사기 쳤지? 이렇게 한다. 뭐라고 할까? 그가 뭐라고 답하느냐면 “안 보이든 게 보여요.” 그렇다. 안 보이던 게 보인다. 그때는 빛을 본 것, 뭐가 보이는 것에 놀라지만 이렇게 말한다. ‘나무 같은 게 걸어 다녀요.“ 신앙이 어디까지 커야 되는가 말할 때, 크기라든가 진정성의 문제라든가 안목이 커야 된다. 안목이 커야 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무한대에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이다. 책임이 해결하라는 것이 아니라 견디라는 것이다. ‘네 자리를 지켜라. 우리가 둥글게 손을 잡고 원을 그렸을 때, 손 붙잡고 있는 것을 놓지 말아라.’ 말하자면, 사랑을 우리의 실력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것은 성육신이며 그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육신의 제한 속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만들 수 있는 방법으로 펼치신 기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기적과 초월은 문맥은 벗어나서 있지 않고 문맥 속으로 들어온다. 제한 속에 초월이 들어온다. 우리로서 상상이 안 간다. 초월은 한계를 벗어나는 게 초월로 알고 있는데, 그 초월이 무한이 유한 속에 들어왔다. 네 인생, 네 조건이 아무것도 네가 불만할 필요 없다. 그저 미혼모가 난 자식은 평생 얼마나 그러하겠는가? 처녀였다. 미혼모보다도 못한, 처녀가 낳았다. 그런데 우리는 기적으로써만 이해하는데 처녀가 등장하고 있지 원래 애도 못 키우는 자가 낳았다. 조건이 그렇다. 하나님이 거기다 놓았다. 그리고 그 조건 시작부터 말구유이다. 말구유, 헤롯에게 쫓기고, 나중에 공생애에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쫓기고, 로마 행정권에 치이고, 하는 길들을 걸으시는 지고, 지고, 지고 또 지고 또 져서 상대를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들 수 없는 문맥이 만들 수 없는 그 문맥 속에 들어온 기적을 부활로, 죽음으로, 죽기까지 순종하는,
 
빌립보서 2장 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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