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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2022년 1월 22일)

제목: "약속, 그리고 믿음에서 소망까지"
말씀: 베드로후서 1:1-7
기도: 권명수 안수집사님(교통봉사부 총무)
말씀읽기: 이신영자매(청년2국),이승학 형제(대학5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김도훈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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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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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약속, 그리고 믿음에서 소망까지“ 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겠다.

사도 베드로가 이 편지를 주님의 흩어져 있는 백성, 성도들에게 보낼 때, 그때에 상황은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베드로가 사용하는 그 말씀과 그 사용하는 단어, 그 내용들이 굉장히 그 당시 성도들이 핍박과 어려움에 처해 있음을 잘 드러내 주기 때문에 그러하다. 로마 황제와 유대인들로 말미암는 많은 핍박으로 성도들의 심령가운데 근심이 더해갔다. 안에서는 거짓 선생과 거짓 선지자들이 곳곳에서 일어나 말씀보다 본인의 생각을 더욱 높였고 그러다보니 영적으로 삶으로 특별히 도덕적으로 해학을 끼치고 있었다. 이에 당시 일부 성도들은 핍박을 피해서 비교를 하거나 거짓 교사들에게 넘어가 이전에 살던 방식대로 정욕과 탐심으로 살아갔었던 것이다. 참으로 놀랍게도 여러 부분 그 때와 다르지 않다. 이 땅 곳곳에서 물리적인 핍박이 여전하다. 지난 신문에서 가장 기독교를 물리적인 핍박이 심한 나라를 알아보니 아프가니스탄이라고 하는 기사를 보았다. 아프카니스탄 뿐이겠는가? 세계 곳곳에서는 가장 가까이 북한 땅에서는 여전히 물리적 핍박이 가해지고 있고 주님 보시고 이후 지금까지 그 핍박이 끊어진 적이 없다. 게다가 현대사회가 지닌 가치관으로 말미암아 더욱 교묘하게 이어지는 유혹과 핍박은 시에스 루이스(C.S. Lewis) 스쿠르 테이프에 나오는 것처럼 달콤하고 은밀하게, 하지만 더욱 강력하게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 주위에도 거짓 선생과 거짓 선지자들의 활동에 많은 성도들이 신음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이 새벽에 이 말씀을 주시는 이 말씀은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분명히 알려주신다. 본문 4절을 보면,
 
*베드로후서 1:4,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무슨 말씀이냐면 우리 주님께서 주신 큰 약속을 통해서 우리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더 잘 아는 표현으로 바꾼다면 신성한 성품에 참여 한다는 것은 더욱 주님을 닮아가는 것으로 이해를 해도 된다. 담임 목사님께서 늘 말씀하시고, 지난주에도 말씀하신 것처럼 거룩한 영적 습관으로 나아가는 것, 거룩한 영적 습관으로 무장하는 것이 바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일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당시 베드로 사도가 편지를 쓸 때에 그 시대나 지금 현대의 이 시대나 동일하게 우리 주님께서 이 절에 나온 것처럼 보배로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고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더욱 많아져야 하는 근거가 되면서
 
*베드로후서 1:3,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토비새 참여하는 믿음의 4세대는 이렇게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기 위하여 거룩한 습관을 사모하기 때문에 더욱 주를 닮아가기 때문에 모두가 자고 있는 이때에 새벽을 깨우며 힘들고 어려운 섬김의 자리에서 묵묵히 계심을 확신한다.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사한 일이다. 세상에서 썩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하나님의 성품에 신성한 성품을 거룩한 인격을 받아 누리게 된다는 것이 놀랍지 않는가? 신기하지 않는가? 저만 신기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모두가 신기한 것을 느끼면 좋겠다. 만약 제가 이 자리에서 스파이더맨처럼 우리 높디높은 안아주심의 본당 천장을 기어 다니거나 3층에서 2층으로 줄을 타고 다닌다면 굉장히 신기하게 느낄 것이다. 사람들이 왜 히어로 물을 스파이더맨이다, 트르나, 어벤져스 주인공들, 왜 이렇게 좋아하는가?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을 왜 좋아할까?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내가 가질 수 있는 능력 말고 초월적인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아무리 힘이 세도 우리가 헐크만큼 세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스파이더맨처럼 건물 사이를 끈끈이 줄로 멋지게 다닐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정말 초월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을뿐더러 비교할 수 없는 초월적인 외모도 가지고 있다. 얼마나 흠모할만한가? 그들이야말로 그리스신화나 로마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그런 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적 능력을 받아 사용하는 것 같다. 영화에서 보면,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나오는 이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단어가 영어로는 네이쳐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이 피쉬스라는 단어는 성품, 인격, 성질, 본질 일, 이러한 모든 본성에 관련된 부분들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캐릭터들, 스파이더맨이나 헐크는 정말 그리스신화, 로마신화에 나오는 그런 신들의 성품 그들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 같다. 신이 다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말하는 것이라면 지금 이 영화 캐릭터들은 그리스 로마신화의 그 놀라운 하늘을 다니고 산을 쪼개는 그러한 신의 능력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들을 갖고 있는 것이다.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도 그렇다는 것이다. 외모도 좀 딸리고 그들처럼 그렇게 뛰어다닐 수도 없지만 우리는 주님의 약속으로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사역으로 나를 위해서 받으신 고난과 나를 위해 돌아가시고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지금도 떠나지 아니하시고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우리가 원조 어벤저스이다. 이제는 좀 신기해졌는가? 많이 놀라고 신기해지길 원한다. 우리가 그런 존재이다.
 
그래서 지극히 큰 약속이 여전히 우리에게 소망으로 살아서 숨 쉬고 있다. 이미 이루신 구원으로 말미암아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된 우리는 이제 이 땅에서 질고가 모두 끝나고 주님을 뵈올 때까지 이 큰 약속을 붙들고 날마다 더 거룩해지고 시마다 때마다 더 예수님 닮아가야 되는 것이다. 그것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과 은혜를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는가? 안 주셨는가? 주셨다. 그리고 지금 그렇게 주님은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그러면 더 거룩해지고 예수님을 닮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해야 된다는 이런 어려운 말이 성경에 나오면 그렇다면 이렇게 해보라고 항상 말씀해 주신다. 서신 서를 보면 실제로는 이렇게 생각하라. 교회서는 이렇게 하라 이웃 간에 이렇게 살아라, 말씀들이 나온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주신다.
오늘 본문에서도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그러므로 말씀으로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 되는지 5-7절을 통해 말씀한다. 바로 그 유명한 말씀이다.
 
*베드로후서 1:5-7,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처럼 유명한 구절이다. 말씀한 대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한 번 외워보자.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렇게 잘 외우는가? 잘 외운다. 이 아홉 가지 열매를 외우려면 애가 많이 쓰인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처음에 3개라서 잘 외워진다. 뒤에가 쉽지 않다. 전에 한 번 말씀 드린 적이 있다. 오래 참음은 글자가 4개여서 4번째 위치한다. 그래서 오래 참음은 절대 안 잊는다. 사랑과 희락 화평 오래 참음 그 다음에는 자,양,충, 온,절, 이라고 외웠다. 벌레는 손절도 한다. 이렇게 혼자서 외웠다. 어떻게든 외워보면 좋다. 왜냐면 외우면 이것이 우리 안에서 되 뇌이고 살아 역사하시고 언제든 은혜 위에 은혜가 되는 것이다. 우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또 그렇게 외웠다. 저절인경형사라고 외웠는데 우리 성도님들께서도 어떤 방식으로도 좋다. 이렇게 주시는 말씀을 외워서 가슴에 담아보도록 하기를 바란다. 이 여덟 가지 요소를 우리는 잘 볼 필요가 있다.
 
사도 베드로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서 이렇게 하라고 하는 부분이니까 잘 보아야 한다. 이렇게 여덟 가지 요소로소 우리가 먼저 확실히 해야 할 될 것은 이 여덟 가지 요소가 우리 힘을 얻는데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안에 절제가 하나도 없는데 다른 데서 절제를 가져와서 우리 안에 절제를 탁 붙이라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이 본문은 이미 보배롭게 지극히 큰 약속을 주셨다 라고 말씀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음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이 여덟 가지 요소의 시작이 무엇으로 되는가? 마지막으로 무엇으로 끝이 나는가? 사람으로 끝이 난다.
 
그런데 이 믿음은 이미 1절에서 보배롭고 귀한 믿음을 우리가 이미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동일하게 3절에서는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보면 믿음도 받았고 능력도 받았고 생명도 받았고 경건에 속한 모든 것도 다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이미 주셨다. 물론 받아서 우리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을 때에 그 성장할 수 있는 그 씨앗과 그 근거를 주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 한 번에 사도 바울처럼 하루 만에 바로 그렇게 될 수 있는가? 사도 바울도 시간을 두고 주님과 씨름하고 훈련받고 주님 앞에서 훈련받고 순종하고 그렇게 주님을 닮아간 것이다. 그래서 분명한 것은 너희가 7절에서 더해라 라고 했을 때 우리가 다른 곳에서 꾸어와 보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믿음, 소망, 사랑 안에서 걸어가면서 이미 우리 안에 주신 이런 요소들이 얼마나 제대로 얼마나 아름답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라고 말씀해 주신다. 그리고 부족하면 주신 것을 기도하고 애씀으로 드러내어 보라고 말씀하신다. 확인하고 드러내어 봐!!~ 이미 우리 안에 주신 덕의 요소를, 믿음을 주실 때 우리 안에 함께 주신 지식의 요소들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보고 잘 드러내 보라고 애를 쓰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하나 붙잡아야 한다.
두 번째는 이 여덟 가지 요소들이 많은 신학자들과 종교 개혁자들과 믿음의 선조들이 보았을 때 이 시간적 대로 논리적 순서대로 하나씩 구비해야 될 그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서 이번 1월 달에는 믿음을 제대로 내 심령 가운데 제대로 장착을 했으니까 2월 달에는 이제 덕을 완성하면 되고, 3월에는 이제 지식차례다. 이렇게 생각하면 굉장히 훌륭한 생각이 맞다. 그런데 지금 말씀과는 딱 맞지는 않다. 안하는 것 보다는 물론 낫다. 예를 들자면 인내를 이번 달에 완성해야 되는데, 실수로 경건을 먼저 해버렸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확실히 들지 않는가? 여기에는 나오는 시간적 순서라든가 논리적 이렇게 되어야 된다는 부분은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확인해야 하는 큰 흐름은 있다. 여덟 가지 요소를 가만히 보면 무엇인가 점차 확장 된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다. 처음에 믿음 덕 지식 절제와 같은 부분들은 믿,덕,지,절, 절제와 같은 부분은 아무래도 개인의 내면에 일어나는 성품으로 볼 수 있다. 믿음도 그렇고 선에 대한 개념들,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식들, 그리고 스스로 겸비하여 절제하는 것들은 개인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인내의 부분도 개인적이다. 그런데 인내는 주로 외부의 핍박이나 환경적으로 굉장히 어려울 때에 반응하는 성품이라고 볼 수 있다. 경건에 대한 것도 만찬가지다. 경건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있을 수 있지만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한 어떻게 보면 세계관적으로 파전을 하나 구워도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주님 안에서 삶에 모든 환경과 부분에 대한 성경의 올바른 반응을 우리는 경건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인내와 경건에서는 개인에 대하지만 외부적으로 더욱 확장되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걸은 더 나아가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형제 우애이다. 지금 벌써 일곱 번째까지 왔다. 형제 우애는 이제는 나 개인에서부터 다른 부분에 확장된다. 형제와 자매들로 넘어가는 것이다. 내 안과 밖 뿐 만이 아니라 이제는 다른 존재로 넘어간다.
 
오늘 우리가 교통부 찬양대가 찬양하기 전에 본 영상은 아마 섬기는 성도님들로부터 형제우애를 확인하신 분들이 이렇게 고백해 주신 것이다. 이렇게 형제우애, 형제와 자매에 대한 우애와 사랑을 느낀 것이다. 여기 다음에 나오는 이 사랑이 마지막에 나온 사랑이 모든 것을 덮는 것이다. 오늘 날 이 험악한 시대에 가치관이 그리고 다른 것으로 이 현란한 상황에 우리 주님께서는 이러한 여덟 가지 요소를 가지고 신성한 성품에 우리 모두가 더욱 더 풍성하기를 원하신다.
 
그 여덟 가지 요소가 얼마나 드러나고 있는지 확인하기를 원하는가? 지식이 있는가? 그러면 절제하고 있는지를 우리 안에 물어보아야 한다.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로 무장되어 있는가? 그러면 나의 생각과 나의 눈이 오직 믿음으로 경건함 안에 있는지, 이 모든 세상을 자녀의 문제를 기업을 경영함까지도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감당하는지를 한 번 확인해야 한다. 나의 세계관과 나의 신앙인격이 원숙하다고 생각되고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렇게 이야기 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주신 형제우애라는 요소도 확인해야 한다. 내가 얼마나 공동체 안에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말이다. 저는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기를 우리가 사랑으로 더 풍성하면 좋겠지만 그 사랑은 모든 것을 덮는 것이라면 우리 안에 많은 요소들을 다 확인하겠지만 가장 소원하는 것은 확장되고 확인되는 개념, 형제우애를 자매 사랑을 내가 잘 드러내고 있는지를 꼭 확인할 수 있기를 소원한다.
 
나를 위한 것은, 나의 가정을 위한 것은, 우리가 생명을 걸고 소원하지 않는가? 하지만 우리의 영 가족은 어떠한가? 이 귀한 교회, 천국 가서도 함께 나눌 이 공동체는 우리가 어떻게 섬기고 있는가? 형제우애는 이웃을 향한 기도, 섬대접, 공동체를 위한 섬김과 헌신으로 나온다. 저는 평신도 리더들, 우리 성도님들이 교회를 섬기며 성도들을 몸으로 섬기며 본인들과 친하지도 않고 관계도 없는 이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때로는 가슴을 먹먹히 하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심방 중에 자주 보게 된다. 급하게 듣게 된 지인의 암 소식, 방황하는 지체들을 위하여 밥을 먹이고 함께 울고 함께 웃는 동지들이 바로 안아주심의 본당에 있다. 예배 때마다, 새벽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기면서 애쓰고 땀을 흘리는 주의 제자들이 바로 우리 공동체 안에 있다. 때로는 알아주지 않는 사역을 주님께서 하명 받아 겸손히 섬기며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수십 년을 섬기고 있는 귀한 주님의 자녀들이 우리 사랑의교회 안에 너무나 많다. 바쁘고 힘든 세상 쉬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쉼과 능력이 있으면 좋은 것 많이 먹고 신나게 놀면 되는데 왜 같이 아파하고 왜 수고를 사서 해야 하는가? 실상 마음을 주고도 돌아오지 않을 수고이고 고생하고 애써도 대부분 칭찬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형재우애 자매 사랑은 이것이 풍성하면 더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 있다. 무엇인가? 첫 새벽 서늘한 공기에 감사와 상쾌함을 잘 알고 있다. 헌신하면서 생긴 근육통의 기쁨도 잘 알고 있다. 전력을 다하고 섬기면 후회함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얗게 불태운 곳에 그리스도의 눈물장만 남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명확히 그 섬기는 분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은 우리 주님을 섬기면 알게 되는 것처럼 우리 귀한 형제와 자매들도 섬기면 섬길수록 더 귀하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나누면 나눌수록 더 풍성해진다는 것도 알게 되고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주님의 마음을 더욱 알게 되고 더욱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미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에게 주심은 이 여덟 가지 요소가 풍성하고 아름답게 드러나기를 지금 원하신다. 모든 요소에 풍성하시되 특별히 형제우애가 더욱 풍성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나중에 우리 모두가 주님을 뵈올 텐데 못 박히신 주님의 손과 발을 붙잡을 때에 우리의 손과 발이 지금보다 더 거칠어져 있기를 우리는 소망한다. 마지막 말 우리의 심장을 주님께 드릴 때 우리의 심장이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로 말미암아 아파함으로 더 많은 상처가 있기를 원한다. 너무나 귀하게 섬기시는 우리 봉사자 여러분, 주님께서 주시는 내밀한 은혜와 약속된 영광을 기대하고 소망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이제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성경은 절대 대충 지나가지 않는다. 형제우애가 충만하다거나 사랑을 이루셨다고 생각한다면 성경을 펴서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라.
거기에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다 이룬 것 같은데 다시 절제와 인내가 시작된다. 믿음 소망 사랑 안에서 우리의 신성한 성품을 형제자매 사랑으로 나타내며 주 안에서 함께 울고 웃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신성한 성품으로 드러나길 소원하면서 찬송가하기를 ‘내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를 찬송하자. ~~~
 
요약
한 결 같이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모든 봉사자는 하나님의 따스한 위로의 옷을 덧입고 섬김의 그 자세를 끝까지 잊지 말고 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대하며 기도하고 헌신하여 가정과 일터와 모든 문제 앞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승리하길 소망한다. 공동체에서 서로 믿어주고 서로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모든 덕목을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을 안다’라는 표현의 의미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성품에 대한 지속적이고 포괄적인 인식을 말한다. 이 인식을 통하여 천국에 관한 잘못된 사실을 구별할 수 있고 거짓 교사와 유혹자들에게 담대히 맞설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다. 성도의 덕목은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이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이같은 덕목이 믿음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믿음을 통해서 그 외의 덕목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사랑으로 모든 것을 완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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