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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7월 24일)
제목: ''새 계명, 사랑의 온전함''
말씀: 요한복음 13:30~35
찬양인도: 오준석 전도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김홍장 선교사님(러시아, DMI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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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30-35,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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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장 선교사님(러시아, 전 DMI 대표).
-지난주에 너무 큰 은혜를 많이 누렸다.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밝게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섬기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은혜를 누렸는데, 오늘은 큰 은혜를 못 누리더라도 설교를 못하지만 큰 은혜를 누리도록 하겠다. 제 가치가 변하지 않는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가 가진 전부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제가 설교를 잘한다고 해서 가치가 올라가거나 못한다고 해서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라 여기지 않는다. 먼저 성경에 주요한 태초라는 말이 나오는데, 하나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태초’이며, 이것이 가장 ‘태초’를 말씀이 물론 아니다. 가장 오래된 태초‘는 요한복음 1:1절에 나온다.
 
*요한복음 1:1절에,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태초’라는 것은 하나님만 계시던 때를 말씀하는 것이며, 이 때 말씀이 계셨다.는 것은 말씀이 ‘하나님’이시다. 라는 선언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엄청난 선언이시다. 이 말씀과 하나님이 함께 계셨으니 어떻게 보면 평범하게 느껴지지만 ‘함께’라는 말을 찾아보면, 헬라어로 프러스라는 말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냐면 영어로는 Indeed fellowship with, 이 성자 하나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깊은 친밀한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를 하지만 별로 강조하지 않는 것 중에 하나가 세 분은 어마어마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인간창조의 하나의 단서를 주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실 때 그것이 단순히 그냥 인간이라는 하나의 존재를 짓는 것이 아니라, 분명이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은 아담과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 그 사랑을 통해서 말할 수 없는 행복을 아담이 누리게 하는 그런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셨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이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아담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똑같은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창세기 보면 사랑은 대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이 혼자서 아무리 누리더라도 사랑의 대상이 있어서 주고받을 때에, 그 엄청난 행복은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은 20세기 초 실존주의 철학이 있다.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은 던져진 존재다.’ 그렇지 않다.
 
*잠언 8:31절에 보면,
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여기서 주어는 지혜이지만, 지혜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니, 함께 있었다는 것이 하나님 자신을 지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아직까지 땅은 만들어졌는데, 거처할 것은 아직까지 인간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거기서 하나님께선 굉장히 기뻐하셨다는 것이다. 기쁨을 이기지 못하셨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제 만들어질 사람으로 인해서 그런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쁨 가운데, 말할 수 없는 기대 가운데, 존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말할 수 없는 깊은 사랑, 표현할 수 없는 그 친밀함을 통해서 행복을 전제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좋았다’라는 의미의 뜻과 같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 때에,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과 깊은 친밀함을 나누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가져야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 마음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온전히 우리를 드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니 인격을 주셨다. 인격에는 지, 정, 의 세 개가 요소가 있다. 그것은 사랑의 지적인 차원, 사랑의 정적인 차원, 사랑의 의지적인 차원을 다 누리게 하기 위해서 만드신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요한복음 13:30절에,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본문은 이 시점을 알라는 것이다. 시점이 마지막 만찬이다. 이제 가롯 유다가 떡 한 쪽을 받고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기 위해 나가는 장면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가시기 바로 직전이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유명한 말씀을 하신다. 그 말씀은 ‘새 계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 내용이 새 계명인데 ‘사랑하라’이다. 사랑이란 말은 신명기에도 나오고 자주 나오는 말씀이다. 그러면 왜 새 계명이 되냐면, 지금까지 있던 사랑을 왜 여기서 다시 새 계명이라고 그것을 바꾸어서 말씀하시는가?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리기 전인, 이 시점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굉장한 분수령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는 율법시대가 끝나고 은혜의 시대가 되는 것이며,
▷또 하나는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나라가 끝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시대이고 하나님 나라의 여명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새 계명은 새로운 차원이다.’ 지금까지 율법시대에서 갇혔다가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걸 새로운 차원을 알려면, 이제 율번시대가 언제이고 율법시대를 알아야 한다. 그 시대는 인간이 타락한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혼자서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하게 살 수 없기 때문에, 하나의 잣대를 주신 것이다. 모든 행위를 율법에 비추어봐서 잘못되면 고치고 치우쳤으면 다시 돌아가지 않게 해주시는 것이 율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행실을 율법에 비춰보게 되어있다. 그런데 율법에 비추어봐서 어떤 판단이 나오면, 그것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5:38절에,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눈을 다치게 한 손은 그 눈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이상의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남의 일을 그르치면 자기를 내 놓아야 한다. 이것이 율법이다. 사랑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어떤 사람이 사랑스런 일을 하면 사랑을 하는 것이고 사랑스럽지 않은 것을 하면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율법에서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사랑은 행위라는 조건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남에게 선하게 잘 대해주면 선한 결과를 받게 되는 것이며. 그렇게 살지 못하면 미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래서 선과 악의 판단인 그 기반위에 서있다. 그래서 우리가 ‘선악과’를 율법이라고 가르키며 말하기도 한다. 물론 구약에서도 이런 선한 경우를 벗어난 것을 말씀하신다. 호세아를 보면 알 수 있다.
 
*호세아 3:1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여기서 나오는 사랑은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여인이 가서 다른 남자들과 어울리고 음행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보통 율법에 한계 안에 갇힌 사람들은 율법에 판단, 율법의 판단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다. 시실은 그 하나님 말씀 안에는 이 예수님의 사랑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포함되어 있지만, 율법의 눈을 가지고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을 가지고 율법의 한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그 무한한 갇혀있는 자는 하나님의 그 무한한 사랑을 깨달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님의 주관하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율법시대와 이스라엘 나라의 한계였다. 그 제자들도 이 시점이 오기까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까지 그 이스라엘을 나라를 알지만, 하나님 나라를 듣기만 했지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너무나 먼 나라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잘 부르지 않고 그때는 야훼라고 불렀고, 하나님의 관한 것은 그렇게 멀게만 생각하고 자신들과 상관없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는 지금 로마의 통치에서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회복하기엔 정말 급박한 현실이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요한복음 12:16절을 보면,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제자들도 사실은 예수님 같은 직감을 받으면 바로 깨달을 것 같지만 그게 아니었다. 성령께서 오셔서 가르치기 전까지는 몰랐다.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니 생각을 해보니 그때를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제 부활하셨다가 승천하시려고 하는 순간 ‘예수님의 나라가 이때이니이까?’라고 묻는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이스라엘 나라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사흘 뒤에 부활한다는 것을 들었을 때에, 사실 돌아가신다는 것은 귀에 들어왔어도 부활하신다는 것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베드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사실 제자들의 삶은 꽤 살만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다 버렸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수만 명이 예수님을 만져보려고 난리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문등병자, 눈먼 자, 앉은뱅이를 고치시는 그 영광이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니네들이 예수님을 쫓아다니는 것이 할 만한 것이다. 뭐 베드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왜 예수님이 뭐가 부족하셔서 그런가 했다. 사역이 안 되는 것이 없고 나타나시면 말할 수 없이 모여드는데, 그 당시 수만 명이 지금의 수십만 명이다. 예수님의 아무리 1대 제자라도 성령님께서 그 눈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가 되어서 헌금도 많이 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하나님 나라의 사랑은, 율법시대 나라와 그 사랑이 다르다. 성령시대의 사랑은 율법시대 사랑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힌트를 주신다. 여기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는 어떻게 사랑하는 것인가?
우리가 예수님의 원수였을 때에,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가 죽음에 처에 있을 때에, 그때 우리를 위해서 대신 돌아가시고, 그래서 죽음은 예수님이 맞으시고 생명은 우리에게 나누어주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이 시점, 이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새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열기 전에는 이 말씀이 소용없다는 것이다. 이 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너희가 옛날에 율법적인 것, 그때가 아니라 이제는 새 나라가 시작되고, 새 사랑이 시작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을 잠시 보겠다.
 
*요한복음 15:12~13절을 보면,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사람이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예수님께서는 친구만을 위해서 버리셨다고 하신다. 우리가 원수를 위해서 버리신 것이다. 바로 이 사랑을 가장 최초로 실현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하나님 나라가 열리면서 가장 최초로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들과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랑이 임하면 모든 관계가 바뀐다.
 
*요한복음 15:14~15절에 보면,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종이란 윗사람 앞에서 편한 경우가 거의 없다. 직장 생활에서도 그렇다. 자기 생존을 위해서 잘 보이는 것도 편하지 않다. 그런데 친구는 무엇인가? 제가 미국에 있을 때에, 아이들이 놀러오면 안 가려고 한다. 못 떨어진다.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못 떨어진다. 그런 사랑이 임하면, 관계가 일 중심이 아닌 사랑의 관계가 된다. 더 이상 일로는 정리가 안 된다. 그리고 율법의 심판은 예수님께 오면 끊어지고 없어진다. 대표적인 경우가 간음한 여인이다. 서기관들이 끌고 오면서 몇 번이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간음한 여인을 쳐 죽이라고 했지만, 이런 확신한 경우는 예수님은 피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확신을 갖고 함정에 빠질 것이라는 확신으로 끌고 왔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되 그때 마치 엠마오로 내려가는 그 제자들을 열어주신 것 같이 그 들의 마음을 열어주시는 것이다. 그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신다. 그런데 간음한 여자가 심판이 멈추었다. 예수님은 그 죄를 자신이 품으시고 자신의 생명을 내 주셨기 때문이다. 이제까지는 원수를 미워하라고 했다.
 
*마태복음 5:43~44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지금까지는 율법의 한계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지만,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이 율법이다. 선악의 판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사랑은 그것이 아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만든 새롭게 열어주신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길을 가시고 하나님 나라의 사랑의 온 차원을 갖게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아닌 인과응보였다면, 하나님 나라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율법에서는 이해가 안 되지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는 이해가 되는 것이다. 왜?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성령님께서 어떠한 사랑인 것인가를 깨닫게 하신다. 그래서 이해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이스라엘 나라에 사는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라. 아무리 교회를 나오고 주일 예배를 나와도 우리가 영성이 깨어있지 않으면, 여전히 이스라엘 나라에 살 수 밖에 없다. 사람을 칭찬하고 못하면 미워하고 자신에게 잘 대해주면 좋아하고 못하면 미워하면 손가락질 하고 그것은 아무리 예수님 믿는다고 하더라도 새 계명이 아닌 율법안에 있는 것이며 이스라엘 나라에 사는 자들이다.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다. 온전함이란, 테리오스란, 목적, 목표, 목표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완전히 이루어지고 인간이 엄청난 행복을 누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목표이고, 우리가 그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텔레이오스’이다.
 
천국의 행복은 사랑이 완전히 회복이 되어서 우리가 사랑장이라고 하면 고린도전서에 보면, 지금 우리가 깨닫는 것은 그 때가 오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고 했다. 그 말은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이 다 드러나면,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 두렵다. 그것처럼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사랑의 원형적인 것을 깨닫기에 서로 사랑이다. 기쁨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그렇다. 다락방, 봉사 부서에서 만나면 반갑듯이 그것이 수천 개가 되면 말할 수 없이 기쁜 것이다. 그 기쁨이 사랑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그 모든 사랑의 한 가운데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우리도 비로소 우리도 예수님을 깊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는 슬픔이 있다. ‘케리케본은 말한다. 우리는 죽음이 있다.’우리의 슬픔은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지 못한 것이다.
 
고린도후서에 예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것은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를 안다는 것, 달리 표현하면 예수님이 나를 사랑한 것 같이 나도 예수님을 사랑할 것이다는 것이다.
 
그 기쁨이 정말 크다. 우리가 이야기 하는 그 새 계명은 온전한 사랑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사랑이다. 자연적인 상태, 십자가의 사랑이다. 자연적으로 사랑스러운 사람은 천연기념물처럼 많지 않다.
 
*마태복음 16:24절에 보면,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십자가의 사랑은 험하고 고통스럽고 험하지만, 그런데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고는 이렇게 생각된다.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한 판단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사랑을 드러내서 그 사람을 사랑해서 드러내는 것이 사랑이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락방에 다 괜찮다고 하면서 딱 한 사람만 빼놓고요..라고 한다. 그 한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 한 사람을 위해서 순원들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한 사람을 위해서 순장님에게 맡기는 것이고 제자의 삶이며 새 계명이다. 예전에 장로님께 목사님의 속을 많이 썩였다. 그래서 정식으로 목사가 되면서 사죄를 했다. 지금은 제자훈련을 하면서 교역자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지금도 러시아에서 목사님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안 해주었는지를 모르겠다. 제자 반을 다시 하고 싶다. 제자훈련이 쉽지는 않지만, 두 가지 경우이다. 열심히 가르치려고 하면 여기가 마음이 커지지 않고 머리만 커진다. 그런데, 과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조건 품고, 사랑하고, 만져주고, 애정을 가지면 변화한다. 제자훈련은 사랑하면 변화한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파라칼레오로란 말이 있다. 제자들이 힘들게 돌아오면 옆에서 쓰다듬어 주시고 수고했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 애정 표현이 큰 힘이다. 거기서 나온 단어가 파라클레이오스이다. 러시아에 간 것은 건물을 짓거나 뭐 바라는 것으로 간 것이 아니다. 러시아 분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갔다.
 
사랑이 없으면 기독교가 아니다. 남가주 사랑의 교회에서 대표총무로 있을 때, 미주를 담당할 당시에 옥한흠 목사님이 캠페인을 하게 했다. 엄청나게 교회가 부흥이 되었다. 남미에서 유행하는 것이 무너졌다가 부흥된 것이다. 남미에서 일어나는 부흥을 보고나서 소련 선교를 위해 유명한 교회였다. 소련교회 판의 번역을 요구했다. 지금 러시아 판권을 달라고 했는데 없다는 것이다. 겁도 없이 판권을 달라고 한 것이다. 그 나라에만 넘어가기에 한 사람이 달라고 하기에 그 나라 사람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려했다. 한국 사람이 달라고 하니 나중에야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복음화를 책임지게 했다. 그리고 나서...
 
사흘 후에 하나님께서 저희 둘째아이를 데려가셨다. 토요일에 데려가셨다. 바로 어제가 소천한 기일이었다. 예배를 드리길 원했는데 예배를 드리지 못했다. 마음에 정립이 안 되었다. 그 아이가 갑자기 가게 되니 가장 궁금했다. 어떤 신앙생활을 했는지를 궁금했다. 과연 천국에 갔는지가 궁금해서 그 친구헤게 물었더니 신학교에 가서 열심히 살겠다고 베프(베스트 프렌드)에게 그런 약속을 말했다고 했다. 그 이후로 그 판권을 가지고 러시아 사람들을 위해서 사역을 하면서 두 사람의 몫을 하고 있다. 하나는 아이가 하지 못한 것과 두 몫을 하고 있다. 러시아에 가게 된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아뭏튼 모든 성도님들이 사랑이 온전함을 회복해서 한국교회와 이민교회와 세게 교회에 온전한 사랑을 비추는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를 바란다.
 
♣요약
새 계명을 주신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삶의 현장에서 서로 사랑하고 온전하여져서 주님의 제자답게 살고, 이웃을 품고 사랑하고 살리며 치유하는 자가되어야 한다. 그것은 사랑의 지적인 차원, 사랑의 정적인 차원, 사랑의 의지적인 차원을 다 누리게 하기 위해서 만드신 것이기에, 이 흔들리는 세상에서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한 판단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사랑을 드러내서 그 사람을 사랑해서 드러내는 것이 사랑이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는 사랑이다.
 
-예수님의 영광은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다. 사람의 가장 큰 영광은 희생에서 오는 영광이다. 전쟁의 최고 영광은 살아 돌아오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지 못하는 영령에게 주어지며, 의사의 영광은 환자의 치유와 의료 발달을 위해 헌신하는 데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순종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 자녀가 부모에게 사랑과 존경을 보이는 길은 순종이듯이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최고의 영광을 돌리셨던 것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의 이 말은 관심을 가지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세상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심같이 서로 관심을 갖고 돌아보라는 뜻이다. 또한 귀중히 여기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중히 여기셨듯이 남을 귀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희생하라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희생하셨듯이 상대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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