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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7월 24일) 제목: "인생은 고 스톱" 말씀: 민수기9:15~23 대표기도: 신성식 부목사님(1부) 찬양인도: 쉐키나, 이 다니엘 부목사, 영광찬양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설교자: 이동원 목사님 초빙(지구촌 교회 원로 목사님) ------------------------------ * 민수기9:15~23, 15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의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16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 17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18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진영에 머물렀고. 19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진하지 아니하였으며. 20 혹시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영에 머물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으며. 21 혹시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있다가 아침에 그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그들이 행진하였고 구름이 밤낮 있다가 떠오르면 곧 행진하였으며. 22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 23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 ------------------------------ ▶오늘 설교 제목이 무엇인가? ‘인생은 Go, Stop이다. 우리가 연상하는 그 게임이 아니다. go and stop이다. 오늘 본문의 주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인생은 어쩌면 도전과 승부라는 go의 연속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다가 걷다가 달리다가 종종 달려갔던 길을 설계하기 위해서 멈출 필요가 있다. 스톱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진이 그랬다.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 민수기9:17, 17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보면 성막을 덮고 있던 구름이 떠오르면 가라는 것이다(That means go!). 머무는 것에서 멈춘다. 그리고 진을 친다. 자 17절에 말씀을 같이 한 번 읽을까 한다. 구름이 성막에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본문에 두 단어가 반복된다. 행진하였고 머물렀고, * 민수기9:18, 18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진영에 머물렀고. -행진하였고, 머물렀고, 가 반복이 아닌가? go, stop의 반복이다. 이것의 반복이 아니겠는가? 이 행진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한 하나님의 도구가 구름이었다. 구름, 이 광야의 뜨거운 열사의 태양이 내려 쪼일 때, 구름은 얼마나 그들의 시원한 보호막이 되었을까? 동시에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구름의 색깔과 형태는 그들이 가는 길에 얼마나 멋진 인도의 그림이었겠는가? 오죽하면 한국의 우리가 사랑하는 시인, 박목월에 시 가운데 인생의 길을 가리켜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라고 표현을 했을까? 그런데 밤에는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밤에도 사실은 진행 할 필요가 있었다. 밤에도 계속해서 앞으로 가야할 필요가 있었다. 행진의 필요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밤중에 또한 쉬어갈 필요가 있었다. 이런 시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의 또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으로 사용된 자연의 도구가 불빛이었다. 본문에는 불, 모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민수기9:15~16, 15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의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16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 -불 모양이라고 계속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의 기사를 출애굽기에서 읽어보면 거기에서는 불기둥이라고 칭하고 있다. *출애굽기 13:21,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그들에게 비추 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 그렇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있다. 사막의 밤은 춥다. 뼈가 시리도록 춥다. 무섭도록 추운 광야에서 불기둥은 얼마나 그들의 따뜻한 도구가 되었을까? 또 불기둥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스텝바이 스텝, 옮겨가는 그 행진은 얼마나 신나는 모험이었을까? 이 광야를 지나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진을 한 마디로 우리는 구름 따라 불빛 따라, 혹은 구름기둥 따라, 불기둥 따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의 삶, 광야의 행진은 행진하다가 멈추고, 행진하다가 머무는 고우 앤 스톱의 리듬을 조화시키는 행진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삶, 저와 여러분의 광야의 삶은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있다면 행진을 왜 하는지, 행진의 의미를 알고 멈춤, 왜 멈추어야 하는지, 멈춤의 의미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첫째로 행진의 의미는 I. 행진(Go)의 의미. -왜 행진하고 있는가? 이 행진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행진을 이해하는 두 가지 키워드는 열쇠의 단어가 있다면, ▷행진의 두 가지 열쇠-(약속과 순종)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광야의 행진은 약속의 땅을 향한 나아감이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삶의 주인공을 만난 순간부터 우리에게도 약속의 땅이 있다. 궁극적인 약속의 땅이 우리의 궁극적인 본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 우리는 그 본향, 하늘나라 본향을 바라보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외국인처럼, 혹은 나그네처럼, 순례자로 살아간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히브리서 11:13,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천국이 궁극적 본향이 된 순간 우리는 외국이 되는 것이다.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외국인이고 나그네이며 순례자이다. 우리는 어디를 바라보고 행진을 하는가? 히브리서 11장 16절을 같이 읽어보자. *히브리서 11:16,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한 성, 시온성이라고 또는 새 예루살렘 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바로 그 성이 약속의 땅의 종착역이다. 저와 여러분이 모두 부끄러움이 없도록 들어가기 위해 광야를 행진하기 위해 주신 선물이 약속의 말씀이다. 우리는 이제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걸어가는 것이다. 걸어가면서 기대하시는 중요한 행진에 목적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순종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우리는 이 말씀을 순종하는 백성으로서 날마다 성숙해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행진은 그냥 앞으로만 빨리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돌격 행진이 목적이 아니었다. 사실 애굽 땅에서 가나안 땅까지 직진으로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다. 두 주간이면 가능하다. 그런데 광야를 40년 동안 하나님이 뺑뺑 돌리신 이유, 순종을 배우게 하시기 위해,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순종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한국사람 같으면 40년을 우리는 견디지 못한다. 우리는 4년이면 가버릴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이 걸렸다. 그러나 이 광야의 방황을 통해서 가르치신 중요한 순종이다. 다시 한 번 18절을 보라. * 민수기9:18, 18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진영에 머물렀고. 19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진하지 아니하였으며. 20 혹시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영에 머물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으며. *민수기9:23, 23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가는 것이 중요하다. 순종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심지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인류의 구원이다. 또 하나는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그리스도 백성들에게 순종의 본을 보이시고자 하셨다. *히브리서 5:8~9,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여러분, 우리 오 목사님을 통해서 ‘온전함’의 제자훈련을 많이 공부한 것으로 들었다. 그런데 온전케 되는 것이 순종을 배워야 온전케 된다. 또 순종을 배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고난을 주셨다.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배울 필요가 있었다면 여러분과 저는 얼마를 더 배워야 온전해지는가? 순종을 배워야 순종이 된다. 잘 이해가 되는가? 조금 더 이해를 위해서 따라해 보라. “순종을 배워야 잡종이 되지 않습니다.” “순종을 배워야 순종이십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사역한 엔드류 모레이는 늘 이것을 강조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하나님의 학교에 입학한다. 이 학교에서 평생 배워야 할 중요한 레슨이 순종의 레슨이다. -엔드류 모레이- -그래서 고난이 필요했고 광야의 수많은 방황이 필요했던 것이다. 한 걸음 한걸음 순종을 배우라고 그런데 한 마디로 광야의 고(go), 행진의 목적이 무엇이냐면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을 배우기 위한 행진이다. 여러분 믿는가? 그런데 광야의 행진 속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go하는 것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명령을 따라 멈추는 것도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명령 속에는 멈춤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행진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러면 멈춤의 의미는 무엇인가? II. 멈춤(Stop)의 의미. -왜 멈추어야 하는 것인가? 행진의 의미는 약속과 순종이었다면 멈춤의 의미는 무엇인가? 멈춤은 우리의 행동을 그치고 쉬는 것을 뜻한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런 멈춤을 ‘셔바트’ 라고 말한다. ‘안식’이다. 이 셔바트를 정하신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셨다. 그는 엿새 동안 만물을 창조하신 다음에 일곱 째 날에 안식하시면서 너희도 이렇게 쉬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매주 안식일이 탄생한다. 매주 한 번씩, 한 날만 휴식이 아니라 6년을 지나고 제 7년에는 안식년이 기다리고 있다. 7x7=49, 49년이 지난 다음에 50년 해에 안식하는 한 해가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은 인생이란 무엇이냐? 매주 안식일을 지키다. 7년마다 안식년을 지키다. 희년을 지키고 영원히 안식하러 간다는 것이 그게 인생이다. 요즘 사람들의 수명이 길어져서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도 희년을 두 번 지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게 인생이다. 자 그렇다면 구약의 이스라엘이 아닌 신약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는 셔바트의 의미, 오늘 우리의 셔바트의 의미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중요한 목적을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초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게 너희를 쉬게 하리라.” 물론 이 힘은 구원의 다른 그림 언어 일 수가 있다. 구원 받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시는 것이다. 너희는 나의 멍에를 매고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셔바트, 오늘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셔바트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오리지널 셔바트의 의미를 존 성찰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 명문 대학인 위튼 대학에서 기독교 문학을 가르친 롸이켄 교수, 아들은 총장님으로 지냈는데 그 오리지널 셔바트의 의미를 알아야 오늘 이 시대의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안식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도록 세 가지 R이라는 단어를 통해 설명해 주셨다. ▷셔바트의 세 가지 정신(Ryken) 1. (reflection/리플렉션-과거를 돌아봄). -반영시킨다. 돌아본다. 과거를 돌아본다. 이며 안식의 첫 번째 의미는 과거를 돌이켜 보는 것이다. 엿새 동안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제7일에 안식하신 이유, 그가 창조하신 것을 다시 돌아보기 위해서 사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하루하루 창조가 진행될 때마다 기도가 끝나면 성경은 기록하기를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루 끝나고 돌아보시는 것이다. 좋은데 하루를 돌아보셨다. 그리고 엿새 동안 마침내 마지막 날 하나님이 형상을 닮은 아담과 하와, 남녀를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은 만물을 마무리 지으시면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고 하신다. 오늘 이 자리에도 부부가 나란히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 보시기에 심히 좋지 않는가? 부부가 분명히 있는데도 혼자 와서 덩그러니 있는 분을 보면 과히 좋지 않지 않는가? 또 우리가 코로나 시대라고는 하지만 부부로 와서 떨어져 계시고, 자,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움,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반영할 때인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얼마나 보시기에 좋아하시는지, 그런데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우리 인생을 열심히 살면서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 그것을 돌아보면서 ‘아참 좋은데, 감사하구나!’ 여러분의 성취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 돌아볼 수 있는 기쁨, 돌아볼 수 있는 기도가 있는가? 너무 바쁘게 살다보니 자신의 성취도 돌아볼 여유가 없다. 돌아보고 기뻐하고, 돌아보고 감사하고, 돌아보고 찬양할 여유도 없이 그냥 바쁘게만 허우적거리면서 살고 있는 인생은 아닌가? 그래서 안식이 필요하다. 돌아보기 위해서, 안식이 필요한 두 번째 이유는, 2. (Refreshment/리프레쉬먼트-현재를 새롭게 함). -미래를 새롭게 창조하는 시간, 그것이 안식인 것이다. 우리가 안식일의 목적이 단순히 안식만 하였다면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일을 마치시고 그리고 쉬셨다. 하나님도 쉬시고 하나님의 창조물인 아담과 하와도 안식했다. 그리고 끝나야 된다. 2장 3절에서 성경이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 지속된다. 하나님이 만두시고 창조하신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 동산에 두셨다. 그리고 창세기 2:15절을 보자. *창세기 2:15,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경작하게 하셨다는 말이 영어성경에는 Cultivation/Cultivated-경작하다. 그런데 같은 단어에서 나온 단어가 Culture-문화이다. 다시 말하면 안식하고 나서 아담과 하와가 문화생활을 시작한다. 자, 문화라는 것은 진정한 문화는 태양이 내려쬐는 그곳에서 땀을 뻘뻘 흐르면서 문화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쩌면 비오는 안식일, 아담과 하와가 동굴에서 하염없이 내리치는 빗방울을 멍 때리고 바라보다가 마음속에 스쳐가는 아이디어, 거기서 문화의 불꽃이 생겼을 것이다. 라고 말한 문화 학자가 있다. 그러니까 멍 때리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불 멍이 필요하다. 불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것,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시간도 필요하십니다.” 왜? 리크리에이션을 위해서,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 우리의 진정한 창조적인 인생을 위해서 그러한 멈춤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주간의 성경적 구조는 안식일을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한 주간 열심히 일하고 월,화,수,목,금, 토요일과 일요일은 쉬고 그런데 그것이 한 주간의 구조가 아니다. 한 주간의 성경적 구조는 먼저 쉬는 것이다. 여러분 아담의 인생의 첫 번째 날은 안식일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여섯 째날 지음을 받았다. 아담과 하와가 지음을 받고 해가 저물었다. 그리고 안식일이 밝아온다. 그것이 아담과 하와의 첫 번째 날이다. 이미 그때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만들어 놓으시고 아름다운 꽃을 만들어 놓으시고 딱 보니까 안식일이다. 안식일에 에덴동산을 엔조이 하시고, 즐거워하시고 그리고 아담은 역사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우리 달력도 성경적인 이런 안식일을 반영한 구조이다.. 대부분의 달력이 월,화,수,목,금,토,일이 아니다. 일월화수목금토이다. 일요일이 먼저오고 그 다음에 온다. 쉼이 주는 여유, 쉼이 주는 창조성을 가지고 우리는 다시 인생의 도전을 시작한다. 이제 이번주간과 다음주간에는 여름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우리 시대의 영성의 스승 가운데 한 분이 한 이야기 중 ‘켄 가이어’라는 분의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멕시코 시장에 인디언 노인 이야기이다. 멕시코시티 어느 한 골목에 시장에서 양파를 파는 자인데 그 양파 스무 줄을 걸어놓고 장사를 하는 포타모라라는 인디언 노인이 있다. 관광객이 그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고 한다. “양파 한 줄에 얼마인가요? 대답에 10센트라고 답한다. 두 줄을 사면 얼마인가? 하니 20센트, 세 줄을 사면 얼마인가요? 하니 30센트라고 답한다. 안 깎아 주시네요?“ 했다. 그러면 여기 스무 줄 다 사면 얼마나 깎아주겠냐고 하니 인디언 노인은 그것을 다 사도 안 깍아 준다고 답한다. 아니 왜요? 양파를 팔러 나온 거 아닌가요? 하니, 노인은 저는 양파만 파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려고 여기에 나왔습니다. 지금 양파를 다 팔아버리고 집에 가면 이 시장에 북적대는 사람들을 더 이상 볼 수가 없고, 이 시장의 쏟아지는 찬란한 햇빛, 종려나무의 그늘을 즐길 수 없구, 저기 뛰어놀고 있는 천진난만한 노래 소리,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어요. 어쩌면 나를 만나러 오는 내 친구들을 만나지도 못합니다. 지금 양파를 다 팔아버리면 저는 인생을 다 잃어버립니다.” “양파를 팔고 돈을 버는 것이 집채가 되더라도 저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렇다. 참으로 복된 인생, 거룩한 인생을 살기 위해선 가던 걸음을 멈추고 쉴 줄 알아야 한다. 한국인들은 휴가 간다고 하면 정신없이 돌아다닌다. 한 군데 있지 않는다. 돌아올 때는 파김치가 되어서 지쳐서 돌아온다. 그리고 직장 가기 싫다고 한다. 그건 휴가가 아니고 셔바트도 아니다. 기독교 문화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다르다. 한 군데 가서 푹 쉰다. 가족들끼리 밀렸던 대화도 하고 가까운 곳에 가서 예배도 드리고 리프레쉬 한다. 다시 남은 생을 멋지게 살아야지 한다. 이게 휴가이다. 이게 베이케이션이다. 이게 셔바트이고 안식일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된 인생, 거룩한 인생을 살기 원하는가? 이제 한 걸음 멈추라. 멈추어 생각하라. 멈추어 기도하라. 멈추어 여러분이 내일을 설계하라. 그래서 이번 여름 후회 없는 진정한 휴가, 진정한 베이케이션, 진정한 셔바트의 복을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God bless you.!!~~ ♧요약 우리가 주님 안에서 행진을 알고, 멈춤도 알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걷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모습으로 멈추는 지혜를 허락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이번 여름 온전한 회복으로 하나님이 주신 나머지 인생 앞에 거룩한 도전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소원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과 달리 육체를 갖지 않은 순수한 영이시지만, 인간과 유사한 모습과 품성으로 묘사하는 것을 말한다. 처음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았기 때문에 타락한 지금도 하나님의 성품이 부패한 채 남아 있다. 이에 제한된 인간의 성품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근심(창6:6), 진노(출22:24), 질투(민25:11), 맹세(사62:8) 등의 표현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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