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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4년 05월 12일) 제목: "사르밧 과부에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말씀: 열왕기상 17:13-22 대표기도: 이철민 장로님(3부)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할렐루야 찬양대 사회: 이기호 부목사님(3부) 설교자: 김지찬 목사님(前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교수님) ㅡㅡㅡㅡㅡ *열왕기상 17:13-22, 13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 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17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9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기적(奇蹟) 스토리를 불편해합니다. 밀가루와 기름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죽은 아들이 살아나는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음식(飮食)이 저절로 생겨나는 일은 없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사르밧 과부(寡婦)의 이야기는 도대체 현대 그리스도인들과 무슨 상관(相關)이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疑問)이 생깁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는데, 마지막 떡을 먹고 죽으려는 가난한 과부에게 엘리야를 보내 숙식(宿食)을 해결(解決)하도록 한 것은 이해(理解)하기 힘듭니다. 게다가, 엘리야는 떡을 만들어 같이 먹자는 것도 아니고, 왜 자기 것부터 먼저 만들어 달라고 할까요? 왜 사르밧 과부의 아들은 또 죽어야 했을까요? 죽을 예정(豫定)이라면 마지막 떡을 먹고 차라리 죽게 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요? 이런 의문들이 꼬리를 뭅니다. 그런데 사르바과부의 이야기는 우리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매우 불편(不便)한 스토리였습니다.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會堂)에 들어가서 성경(聖經)을 읽으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28절 29절에, *누가복음 4:25-26,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인제 사르밧 과부 이야기를 하자, 고향 사람 예수님을 낭떠러지로 끌고 가 떨어뜨려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원래 히브리어로는 ‘사르파트’인데 헬라어로 ‘사랩다’로 번역을 하는 바람에 한글에서는 신약성경에서는 ‘사랩다’ 라고 된 거예요. 또 혹시 이게 왜 틀리냐, 이래서 고민하는 분들이 혹시(或是) 계실 것 같아서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아니 왜 이런 위험(危險)을 무릅쓰고 사르밧 과부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하셨을까요? 회당(會堂)에서 인제 이 말씀을 하기 전에 읽은 이사야(61:1) 성경 본문에 답이 있습니다. 뒤에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19”) -그러니까 나사렛 사람들이나 현대 우리가 보기에 굉장히 낯설고 불편한 이야기지만, 많은 이스라엘 과부가 있었음에도 엘리야를 이방 시돈 땅 사르밧 과부에게 보낸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사야 본문을 언급(言及)하셨듯이 가난한 샤르밭 과부에게 복음(福音)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이해하기 힘든 스토리 안에는 복음이 도대체 뭔지, 복음을 받아들이면 무슨 일이 가능한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며 어떤 자세로 일해야 하는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제 단서들을 가지고 오늘 오전에 저와 함께 엘리아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를 함께 해석해 가면서 복음의 풍성한 은혜를 맛보는 축복의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수많은 과부(寡婦)를 제쳐놓고 왜 쉬돈 땅 사르밭 과부에게 엘리야를 보내 그곳에 머물게 하셨을까요? 이스라엘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不順從)하니까 엘리아 시대의 하나님이 그의 구원 사역을 이방 땅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하신 거예요. 유대인을 배제(排除)한 게 아니라 이스라엘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니까 엘리야 시대에는 이방(異邦) 땅으로부터 인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시작하시려고 인제 사르바 과부를 이제 에게 보내신 건데 그러니까 인제 나사렛 사람들은 수많은 이스라엘 과부가 있는데, 이방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를 보냈다 그러니까 갑자기 자존심(自尊心)에 상처(傷處)를 받은 거죠. 그래서 죽이려고까지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방과 과부를 통해 가지고 하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사르바 과부에게 보여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신 차리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인제 바알를 숭배(崇拜)를 하니까 인제 엘리야가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걸고 자기의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거다. 이렇게 맹세(盟誓)합니다. 여기 보면 내 말이 없으면 이라고 돼 있거든요. 물론 뒤에 가면 내 말이 여호와의 말씀과 연결(連結)된 건 사실이지만 그냥 아합 왕이 들을 때에는 엘리야가 내 말이 없으면 수년간 비가 오지 않을 거라고 어리석게 맹세하는 바람에 수년 동안, 3년 반 동안 이스라엘과 인근 땅에 기근(饑饉)이 일어 낮기 때문에 엘리야를 보자 뭐라 그래요. 아합 왕이 ‘너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다’ 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엘리야는 정반대 말을 하죠. 열한 기상 18장 18절에, *열왕기상 18:18, 18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왜 농경 생활에서 비를 관장한다는 바알 신이야말로 국가 경제의 가장 중요한 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아합 왕은 쉬던 왕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바알 숭배를 크게, 이스라엘 안에 들여오게 한 것이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궁극적인 장본인은 아합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상황(狀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정치(政治) 지도자(指導者)들은 여당(與黨)과 야당(野黨)으로 나뉘어 서로 국민을 괴롭히는 자라고 비난(非難)하고 있습니다. 선거(選擧) 때만 되면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 라고 강조하며 자신들이 정권(政權)을 잡으면 달라질 것이다. 민생(民生)이 달라질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해방(解放) 이후 거의 70년 동안 여러 번 정권이 바뀌었지만 국민들은 정권이 바뀌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고 힘들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치, 권력의 취향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이 진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인지 영적으로 분별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使命)을 감당해야 됩니다. 우선 한국 시민(市民)으로 국민들의 생명(生命)과 재산(財産)을 보호(保護)하는 이 일을 잘 감당(堪當)해내며 천국 시민으로 복음(複音)을 전하며 부활(復活) 소망(所望)을 잃지 않고 경건(敬虔)하게 살아 하는 일에 최선을 다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설명을 감당하려면 엘리야처럼 우선 자기가 누군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됩니다. 왕상 17장 1절에 보면, *열왕기상 17:1, 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그러니까 엘리야가 자기를 소개(紹介)를 하는 거잖아요. 아합 왕에게, 내가 섬기는 여호와, 여호 앞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자기 인식(認識)이 분명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무슨 뜻일까요? 우선 여호와 앞에 서는 것은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블레셋의 법계가 빼앗긴 다음에 괴가 이스라엘에 돌아오니까 베스미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櫃)를 열어 보았다가 괄호 열고 5만 닫고, 70명을 여호와께 죽이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 괄호가 5만에 둘러싸여 있는데, 어떤 사본은 5만70 인이고, 어떤 사본은 70 인인데, 5만이 굉장히 많아 보이잖아요. 5만 70이? 그래서 이제 괄호를 쳐서 이제 학자들은 아마 70명일 것이다. 라는 쪽에 이제 무게를 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인제 이 벧세메스 사람들이 그냥 여호와 기회를 열어본 것뿐인데 5만 70명이 죽으니까 이 거룩하신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앞에 서는 것은 위험(危險)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 앞에 서는 것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늘의 능력(能力)을 받을 수 있는 강력(强力)한 존재(存在)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직무(職務)상 여호와 앞에 서서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을 제외(除外)하고는 엘리야 이전에 하나님 앞에 선 자는 딱 두 사람 아브라함과 모세뿐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아브라함과 모세 다음으로, 이렇게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선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가리켜 맹세(盟誓)하며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선언을 한 거죠. 여기에 ‘서다’ 이런 단어가 인제 랍비들이 볼 때에는 유대인들이 서서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인제 내가 앞에 서서 섬기는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이거를 이제 기도로 본 것이에요.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왕 앞에 딱 서서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을 거다. 이런 담대함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근데 실제로 하늘이 닫혀가지고 3년 만 동안 비가 오지 않은 거예요.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건 신약 시대에는 세례 받은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선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유일하게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고, 천사를 가리킬 때 사용해요. 그런데 요한 계시록에 보면 5장 10절에, *요한계시록 5:10, 10 그들로 성도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라고 한 것이고요. **요한계시록 7:15,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하 아브라함과 모세와 엘리야의 전통(傳統)을 따라 하나님 앞에 선 왕 같은 제사장(祭司長)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못에 제사장들과 엘리야가 누렸던 건세, 하나님 앞에 서서 기도로 하늘을 닫고 여는 능력을 소유(所有)하게 된 거죠. 그래서 야고보는 5장 17절 18절에서 이렇게 선언해요. *야고보 5:17-18,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인제 산에 올라가서 엘리야가 머리를 이 다리 사이에 이렇게 넣고 기도(祈禱)하고, 인제 비가 오는 조짐(兆朕)이 보이냐 이렇게 사원에게 물어보잖아요? 그러니까 땅에 엎드려서 인제 머리를 다리 사이에 이렇게 넣고 기도하는 간절(懇切)한 기도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인제 야구부는 이렇게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었다. 이렇게 선언(宣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니까 우리가 어떤 정부든지 간에 국민이 투표(投票)를 택한 정부와 또한 정치 지도자들 위해 기도해야 되지만, 정치 지형이 바뀌는 것에 너무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선 왕 같은 제사장으로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면 하늘이 닫히기도 하고 하늘이 열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정치가들은 하늘 못 닫고 하늘을 못 엽니다. 따라서 세상의 변화와 세속의 권력에 눌려서 세상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때로는 말씀으로 때로는 기도로 세상에 담대(膽大)하게만 앞서는 엘리야와 같은 믿음의 용사들이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쨌든 이제 큰 기근(饑饉)이 들자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리심 시냇가에서 까마귀가 가져다주는 고기로 연명(延命)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제 하나님께서 다시 명하셨어요. 17장 8절에 보면, *열왕기상 17:8, 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그래서 이제 엘리야가 사르밧 성문에 도착을 했는데, 그곳 과부(寡婦)가 성문(城門)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왜 하필로 나뭇가지를 성문에서 줍냐 하면, 성문은 좁아요. 그렇죠? 좁으니까 사람들이 오고 가면 수레를 싣고 오고 가고 그러면 이제 나뭇가지나 이런 것들이 부딪혀 떨어지는 거죠. 그 성문이 아니면 뭐 이 그러면 이제 엘리야가 이거 과부를 수소문하고 다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제 성문에서 나뭇가지를 줍는 과부를 본 것인데, 이 과부가 가지고 있는 것은 통(桶)에 남은 한 움큼의 가루와 그리고 병(甁)에 남은 기름 조금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제 나뭇가지를 주워가지고 나중에 나뭇가지 두 개를 줍는데, 나뭇가지 두 개를 주워 가지고 불을 피워서 떡을 만들어서 아들과 함께 먹고 죽으려고 한 거죠. 그런데 엘리야는 그날 처음 본 과부에게 마지막 떡을 자기에게 먼저 달라고 요구(要求)를 한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선지자인 사람이 이렇게 무례(無禮)할 수 있을까요? 그래 가지고 뭐 이렇게 인제 뭐 유튜브나 이런 데 보면 뭐 기독교를 막 욕하는 사람들이 목사님들은 원래 이렇게 목사나 뭐 이렇게 과부들까지 뭐 이렇게 달라고 그런다고 그러는데, 아 여러분, 아니 뭘 얻어먹으려면 부잣집 가서 얻어먹지, 왜 과부집 가서 하나 남은 거 그거를 뭐 얻어먹겠습니까? 저는 초등학교 때에는 꿈이 목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6학년 생활기록부에 보면 미래 희망 란에 성직자(聖職者)라고 적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저는 어렸을 때도 목사라는 단어보다 성직자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약간 묘한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목사가 되고 싶지 않았죠.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그중에 하나는 성미(誠米) 때문이었습니다. 하루에 밥은 한 끼 정도 먹고, 두 끼는 인제 뭐 국수나 주로 이렇게 수제비 이런 거를 먹던 시절에 어머니가 밥을 할 때마다 소주잔 같은 거로 쌀을 담아가지고, 그것도 식구 수대로 성미 주머니에 넣는 거예요. 식구가 7명이었거든요. 작은아버님 뭐 할머니 이렇게까지 하니까 그렇죠. 저는 아니 왜 목사님들은 가난 성도들의 쌀을 가져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사실상 성미는 목사님들이 거두는 게 아니고, 목사님들에게 사례비를 줄 수 없는 초대 교회 시절에 한국 교회 시절에 경제력이 없는 부인들이 여성 성도들이 경제력이 없으니까 쌀은 이제 그래도 간대로 할 수 있으니까 목회자의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려고 시작한 일이기 때문에 교회 사가들은 이 성미가 한국 한국의 자립 교회 전통이 되면서 한국 교회의 자랑 중 하나라고 봅니다. 게다가 성미은 뭐 캐자가 성도들의 경제적(經濟的) 상황(狀況)을 직관적(直觀的)으로 알 수 있는 일종의 실존적(實存的) 삶의 온도계(溫度計)예요. 성미(誠米)가 늘어나고 줄어드는 모습, 쌀과 보리쌀이 섞이는 비율(比率), 이런 거를 보면 성도들이 삶이 어렵구나, 좀 나아졌구나! 를 알 수 있는 온도계인 거죠. 그러니까 초대(初代)교회(敎會)에 있는 목회(牧會)자들과 성도들의 삶이 굉장히 긴밀(緊密)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성미가 가진 이런 목회 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어머니께서 가난 가운데 성미를 떼는 게 못 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게다가 목사님들이 교인들의 성미에 의존(依存)하는 모습이 처량(凄涼)해 보였어요. 불쌍하지는 않은데 약간 처량한 거예요. 그래 가지고 목사 때려 쳐야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오늘날 성미를 하는 교회는 거의 없죠. 그런데 성도님들이 목회자의 사례비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지금도 목회자들의 모습이 처량해 보입니다. 그런데 때로 처량해 보이는 이런 묵회자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음 전파자들의 삶과 너무나 일치(一致)해요. 예수님이 70명을 파송(派送)하시면서 전도대로, 누가복음 10장 3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3, 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4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6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싹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집으로 옮기지 말라 그러니까 인제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라는 것은 열두 제자와 마찬가지로 70인에 전도 돼도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라는 거죠. 게다가 이제 동양에서는 문안 인사할 때 말을 많이 하면 시간을 오래 끄니까, 문안 인사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는 게 중요하니까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다짜고짜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라고 말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평안’을 전하는 거 이게 복음 아닙니까? 여기서 말하는 평안은 정서적인 안정이나 심리적인 편안한 감정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나 세례 회당에서 선포한 대로 포류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하는 게 이게 복음이죠. 주의 은혜에 희년을 선포함으로 땅을 잃어버린 자들이 땅을 회복하고, 종 된 자들이 자유롭게 되고, 빚진 자들이 빚을 탕감(蕩減) 받는 거 이게 복음이죠. 그러니까 이런 복음의 소식과 평안, 해방과 자유를 선언하면 무슨 일어납니까? 자동적으로 축복과 은혜가 집에 임하는 게 아니에요. 만약에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 평안이 거기에 머물 거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고 하시면서 복음을 전하라는 거죠. 이렇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다음에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어떻게 음식과 숙소를 해결해야 하는지를 설명하셨습니다. ‘그 집에 유하여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삯을 받는 게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집으로 옮기지 말라.’ 그러니까 인제 음식이 고급이든, 아니면 아니든 상관하지 말고, 그냥 집에 유(留)하며 함께 먹고 마시라'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결과로 성도들과 성도들로부터 묵을 거처(居處)와 음식을 공급(供給)받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격은 묵을 거처와 음식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포함하는 게 아닙니다. 그니까 이 집에서 집으로 옮기지 말라는 명령은 더 나은 잠자리와 더 좋은 음식을 위해 다른 집으로 옮기지 말라는 거죠. 그러니까 한마디로 복음사역은 더 나은 삶의 수단(手段)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야도 똑같은 거죠. 사르밧 과부에게 가라고 하니까, 사르밧 과부를 보자마자 문안 인사 안 해 잘 지내냐 이런 거 안 해요. 그냥 두려워하지 말라. 이렇게 선포하잖아요. 복음을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내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위에 너와 내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두려워하지 말라. 이게 엘리아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 던진 복음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늘이 닫혀 있어서 비가 내리지 않아도. 한 움큼의 가루와 기름 조금밖에 남지 않았어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죠.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권면(權勉) 이게 바로 복음이에요. 그런데 이 복음에는 요구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와 복음(福音)을 받는 자가 함께 좋은 것을 나누는 이거 좋은 거는 화려(華麗)한 것, 사치스러운 거, 이런 걸 의미(意味)하는 게 아닙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선한 것을 나누라는 거죠. 그러니까 엘리야가 먼저 자기를 위해 떡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이거를 이행(移行)하지 못한 사람들이 뭐 어떻게 과부한테 가서 떡 달라고 그러냐고 그러는데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뭔 소리인지 이해를 못 하는 거죠. 하나님들이 그러시려면 그냥 사르밧이여 부자한테 가라. 이러면 될 거를 왜? 떡 한 번 먹고 죽을, 왜 집에 왜 보내냐고, 뭐 때문에 가고 싶으십니까? 여러분 사르밧 과부는 이 복음의 선언과 인류와 요구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말대로 순종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럼 왜? 마지막 떡을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떡을 왜 먼저 엘리야에게 만들어 주었을까요? 아니 같이 먹자 그러면 더 떡 만들어 먹자 하면 되는데, 그럼 훨씬 나을 거를 왜? 먼저 달라고 그러죠? 어떤 사람들은 과부의 순종(順從)이 매우 가벼운 순종이었다고 말합니다. 사르밧 과부의 순종이 그렇게 힘든 것이었나? 사실 아무것도 아닌 매우 가벼운 순종이다. 한 끼 먹고 죽으나, 안 먹고 죽으나,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 인간은 자기가 자기 상황이 아니라고 마음대로 내지르고 있는 거예요. 우리 같으면 어차피 한 번 먹고 죽을 거니까 다른 이에게 마지막 음식 곱게 나눠주시겠습니까? 우리 속담에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 라고 하지 않아요. 저도 안 줍니다. 아니 이제 걔가 어린아이거든요. 나중에 죽은 다음에 이렇게 품에 아는 걸 보면 큰아이가 아니에요. 이 과부도 젊은 과부 같아요. 먹을 게 없어 가지고 이제 딱 한 끼 먹고 그리고는 이제 아이와 함께 죽을 요량으로 지금 왔는데, 떡을 쉽게 준다고요? 제가 보니까 이분 부자 같아요. 이 해석하는 분 성경 기자는 사르밧 과부의 순종이 쉬운 순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을 이렇게 읽어보시면 엘리야가 떡을 먼저 만들어 가져오라고 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전하거든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콩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약속과 약속의 성취 사이에 엘리아의 말대로 그가 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어떻게 쉬운 순종정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서 어린 아들과 함께 나뭇가지 둘을 죽고 있던 이 여인에게 다가온 복음의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약속을 듣자 불가항력(不可抗力)적인 은혜를 경험하며 순종한 거예요. 그러니까 엘리야와 과부의 이야기는 복음을 받은 자가 순종하면 어떤 일이 가능한지를 보여주고 있는 거죠. 엘리야를 통해 복음을 들은 이 과부가 엘리야의 말대로 순종했더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는 하늘이 닫혀 있어도, 통에 가루와 병에 기름을 공급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시돈의 신인 바알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자기 백성을 먹일 수 없는 신이에요. 그런데 여호와는 비가 내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을 먹이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거죠. 잘 아는 청도 여러분 오늘날 많은 분들이 절망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헬 조선이라고까지 말하죠. 그만큼 청년들의 절망감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민소득은 3만 불을 훨씬 넘어섰는데, 선진국 계열에 들어간 것 같은데, 왠지 내게는 하늘이 다친 것 같은 느낌이 드십니까? 이런 느낌 들어도 결코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앞에 서서 섬기는 여호와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이 다친 것처럼 보여도 자기 백성을 직접 먹이시는 하늘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죠.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것을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원동력으로 삼아 하늘이 다친 것 같은 기간에서도 승리(勝利)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집안의 형편에 따라 좋은 것을 함께 나누며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복음을 받은 자들이 그 형편 안에서 함께 좋은 것을 나누니까 하늘이 닫혔어도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한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런 문맥 없이 그냥 하나님을 믿으면 통에 가루와 기름의 병이 떨어지지 않냐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나누고, 복음을 받고, 또 복음을 또 삶 가운데서 나누는 이런 사람들이 여기저기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더 좀 잠자리와 더 좋은 음식을 위해서 이렇게 쫓아다닌 게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받고 하나님의 살아계신 기적(奇蹟)을 경험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든 상황에서 삶을 함께 나눌 때 하나님께서는 통의 가루와 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신다는 거예요. 이게 초대 교회에 한국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 뭐 회사와 성도들이 함께 삶을 나누며 기적을 경험한 것이고요. 지금도 동일하게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는 거죠. 그들의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상관없이 그러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먹는 음식 음식을 먹고 그들이 사는 잠자리에 누우면서 삶을 나누게 되면,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집에 기름과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이 다친 큰 기근(饑饉) 중에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을 경험해 살 수 있었던 사르바카부 집에 갑자기 문제가 생겼습니다. 17 자리 보면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症勢)가 심히 위중(危重)하다가 숨이 끊어진 질환(疾患) 그러니까 아마 병이 들고 좀 시간이 걸렸겠죠. 위중해지고, 그다음에 호흡(呼吸)이 끊기는 와중에 엘리야가 있었는데, 아무런 역할을 못 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제 드디어 과부가 와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요.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相關)이 있기로 내게 오셨나이까? 내 죄(罪)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십니까? 내 죄가 뭐예요? 과부가 이야기하는 어떤 해석자들은 엘리하고 과부 사이에 부적절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과부가 죄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해석해요. 또라이들이에요. 진짜, 이거 유튜브 보면 나와요. 유튜브에 이렇게 설교하는 사람들 잘 듣지 마세요. 왜냐하면, 유튜브는 과장되고 선정적이고 도발적이니, 들으니까 맨 이딴 소리 하는 거예요. 맨날 드라마 보고 영화 보다 보니까 과부랑 누가 나오면 항상 불륜 뭐 이런 이상한 짓을 하는 건데 성경 읽을 때 이렇게 의심에 해석하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지적하면 그건 죄지만 언급을 하지 않고 있잖아요. 이 과부의 죄가 뭔지 성경 언급하지 않아요. 아마도 우리가 재앙(災殃)을 당할 때 경험하는 것처럼 무슨 죄가 원인(原因)인지 구체적으로 몰랐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냥 내가 죄가 많기 때문에 혹시 그런 게 아니냐, 막연하게 생각 갈 수도 있어요. 아들이 죽었으니까 이유는 잘 모르겠고 혹시 내 죄 때문 아니야. 부모님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게다가 사르밧 과부가 볼 때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 집에 머무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안 머무면 그냥 하나님이 신경 안 쓸 텐데 하나님의 사람이 머무니까, 그 집을 유심히 보다 보니까 요 과부가 죄를졌네. 이래 가지고 왜 쓸데없이 우리 집에 와 가지고 머무는 바람에 하나님이 내 죄를 드러내셨냐? 라고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얘기 자세하게 성경 원래 얘기하지 않아요. 그래야 굉장히 실제적이죠. 여러분 아십니까? 자녀가 죽으면 왜 죽었는지, 자녀가 죽은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죄인지, 성경은 그런 얘기 안 해요. 그러니까 엘리아도 왜 내 제일 생각나게 합니까? 왜 왔습니까? 네 아무런 해명하지 않고 그냥 아들을 달라고 한 다음에 여인의 품에서 받아서 취해 가지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 올라가요 여기에 취하다 받다 데려가다는 동사와 올라가다는 동사가 엘리야가 승천(昇天)하는 장면에 나옵니다. 열왕기하 2장 여호와께서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에, “베델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나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그러니까 엘리야가 과부의 품에서 이렇게 아들을 취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로 취하시는 것과 같은 평행이고요. 아들을 품에 안고 이렇게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은, 위층이 다락방은 위층이니까. 하나님께서 하늘로 글을 올리시는 것과 같은 거예요. 그래서 인제 엘리야가 다락방에 올라가죠? 두 번 기도합니다. 우선 왜 내가 무고하는 지,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시느냐고 질문해요. 하나님의 사람이 머무는 곳이라면 재앙보다는 축복을 죽음보다는 생명을 하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자신에게 떡과물을 가져다주고 숙소를 제공해 주었는데 아니 어떻게 그런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시느냐 이렇게 지금 과부의 입장에서 하나님께 항변(抗辯)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죽은 아들을 위해 두 번째 기도를 드리는데 두 번째 기도를 하기 전에 엘리아가 세 번 죽은 아이 위에 이렇게 몸을 엎드려 펴서 엎드리는 제스처를 취해요. 세 번 그러니까 몸 전체의 접촉(接觸)을 통해 가지고 몸 전체의 어떤 생명을 아이에게 전달(傳達)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것은 엘리야의 제자인 엘리사가 수냄 여인의 아들이 죽었을 때에 죽은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는 자세를 취하거든요.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 침상에 눕혔는지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7번 재채기하고 눈을 뜨는지라.” -그러니까 엘리야랑, 엘리사랑 굉장히 비슷하죠? 엘리야가 세 번 이제 이렇게 엎드려 가지고 눈과 코와 손을 이렇게 엘리사처럼 만진 건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떻게 보면 눈 이건 시력이고요. 코는 호흡이고, 손은 우리가 일을 해야 되는 손의 이런 기술을 의미하는 건데, 온몸에 접촉 교육을 통해 가지고 이 아이에게 온전한 생명력, 활력을 불어넣으려고 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바딜리 터치가 굉장히 의미가 있는 거죠. 그리고는 기동하죠. ‘내 하나님 여호하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 나니라. 성경을 유심히 읽으면 여호와께서는 죄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으세요. 먼저 과부가 죄를 회개해야 된다는 조건 다시지 않습니다. 성경 기자는 그냥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아이가 살아났다 이게 전부예요. 전 이게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죄의 심각성을 이야기하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항상 더 크게 강조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점을 가 강조해야 돼요. 실제로 엘리야 스토리는 죄를 언급하기는 하지만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 라는 사실과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데 더 큰 방점을 찍고 있어요. 그래서 야고보는 5장 15절에서, *야고보서 5:15, 15 믿음에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상하심을 받으리라. -혹시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돼요. 혹시 죄를 통해 죄를 범해 병이 생겼다고 해도 걱정하지 말라는 거죠. 왜 믿음의 기도는 죄 용서를 받게 할 뿐만 아니라, 병 고침까지 받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질병이 죄 때문에 생기는 건 아니죠. 그런데 혹시 병(病)과 우환(憂患)이 집에 있으면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혹시 죄 지은 그런 게 생각날 수도 있죠. 그럼 이때 죄책(罪責)감으로 인해서 낙심(落心)하고 좌절(挫折)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 죄 때문에 아들이 죽고 내 죄 때문에, 뭐 남편이 문제가 생기고, 내 죄 때문에 부모님이 어려움이 생기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혹시 이게 중요한 죄를 짓더라도 단어입니다. 혹시 용서(容恕)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낙망(落望)하거나 절망(絶望)하지 말라는 것이죠. 이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의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최근에 이렇게 주변의 기독교 방계에 흐르고 있는 이상한 흐름들이 막 죄를 엄청 많이 강조해요. 뭐 마지막 때다 뭐 마지막 신호다 막 이러면서 죄를 엄청 강조하거나 후원계자, ㅋ ㅋ ㅋ ~ 이런 사람들 위험한 사람들이에요. 성경의 핵심(核心)은 뭐냐 하면 죄를 강조하는 죄송하지만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기 때문에 일리 과 사르밧 과부가 죄를 언급하지만 엘리야도 그걸 반복하지 않아요. 하나님도 반복하지 않으세요. 혹시 죄가 있을지라도 사르밧와 과부의 가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죽은 아들을 살리시는 뿐이고, 따라서 하루 먹고 하루 산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중요한 일은 우리가 죽은 후에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 아니에요. 그러니까 사람아 과부의 집에 보내서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 어떤 일을 하시는지 보여준 다음에 그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문제만이 아니라, 마지막 이 세상 떠날 때 우리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훨씬 더 중요한 관점이기 때문에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하나님은 아들을 죽게 하시고 끝내는 엘리야를 통해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 죽은 아들을 살려내시는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르밧 과부의 핵심 메시지가 뭐예요? 살아난 아들을 되돌려 받은 다음에 엘리야에게 말한 과부의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그러니까 사실은 오늘 이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는 문자적으로 우리의 우리에게 그대로 일어나지 않아요. 병에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통에 가루가 사라지지 아니한 그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죽은 아들도 살아나지 않습니다. 어차피 이 아들도 살아났지만 죽었습니다. 중요한 거는 이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는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에 권세(權勢)가 얼마나 위대(偉大)한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말씀을 전하는 묵회자들과 이를 세상에 선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고 거예요.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병들고 죽은 것은 이스라엘의 오랜 동안 불순종(不順從) 인해 병들고 죽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상징(象徵)입니다. 어떻게 보면 현대교회도 마찬가지죠. 개인이든 교회든 불순종하면 병에 걸립니다. 병에 걸려 위중해지면, 위중(危重)해지면서 호흡이 사라진 과부의 아들처럼 개인이나 교회 안에 생명의 호흡이 멈추게 되죠. 이럴 때 생명을 회복시키는 유일한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반복적(反復的)으로 가르쳐야죠. 그래서 엘리야가 세 번 죽은 아들 위에 엎드린 것이고요. 엘리사가 입과 눈과 손 세 군데에 대고 죽은 아이와 온몸으로 접촉한 후에 살려낸 것처럼 우리도 살아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持續的)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의 반복적(反復的)으로 접촉시켜야 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께서 이미 신명기 6장 6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신명기 6:6,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첫째, 오늘 내가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내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이든지 길에 갈 때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둘째, 너는 또 그것을 내 손목에 메어 기호를 삼으며 내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셋째, 또 네 집과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그래서 옛날 유대인들이 여기다 뭐 견문을 여기다가 붙이고 팔에 차고 옷 술에다가 이렇게 매달고 성 문 집 앞바께 문 옆에 붙인 거예요. 하나의 말씀을, 근데 이거를 그냥 유대인들의 교육법 이렇게 생각하고 멈추면 안 되구요.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는 끊임없이 읽고, 이해하고, 주해하고, 적용하면서 말씀과 에이 삼중(三中) 접촉(接觸)을 끈이 끊임없이 반복해야 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죽은 과부의 아들의 몸에 생명의 호흡이 돌아온 것처럼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은 내적인 활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는 하늘이 3년 6개월 동안 다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어떻게 우리에게 임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늘이 닫힌 것처럼 보여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딱 두 가지가 남아 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야고보서 5장 13절 이하에 보면, *야고보서 5:13b, 13 너의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라. -야고보가 이렇게 말한 이유가 뭐예요? 우리가 찬송할 때, 하늘이 응답하고 우리가 기동할 때, 하늘이 닫히기도 하고 하늘이 열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애지중지(愛之重之)하듯 인간적 희망이 모두 사라져 죽은 것처럼 보여도 낙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품고 다락방에 올라가서 기도한 것처럼 우리 역시 기도의 골방에 올라가기도 하면, 엘리야를 하늘로 끌어올리셨던 하나님께서 우리의 죽어가는 희망도 한을 소망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부모로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最高)의 유산(遺産)은 신앙(信仰)입니다. 우리가 찬송하고 기도할 때, 하늘이 닫히기도 하고 하늘이 열리기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 이것이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축복(祝福)입니다. 남은 생애(生涯) 우리가 기도하고 우리가 기쁠 때 찬송하고 고난당할 때 기도함으로 하늘이 닫히고 하늘이 열리는 기적을 자녀들과 함께 경험(經驗)하며 남은 생의 자녀들과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복된 가정과 교회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약 우리에게 주신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스토리의 핵심을 깊이 인식하고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신 대로 우리의 전 생애(生涯)가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받는 자들과 함께 삶을 나누며 끝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 부활(復活)의 소망(所望)을 가지고 경건(敬虔)하게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엘리야에게 친절을 베푼 과부에게 더욱 귀한 보상이 있게 된 것을 보게 된다. 즉 그녀의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그는 과부의 불평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답변도 없이 그 문제를 하나님께로 가져와 내어놓았다. 그 자신도 그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죽은 아이를 어머니의 품에서 취하여 자신의 침상으로 데리고 왔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의하여 이 아이의 소생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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