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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4년 01월 07일)
제목: "기쁨이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말씀: 요한1서 1:3~5
찬양인도: 쉐키나(이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하상범 부목사님
사회: 임병영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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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서 1:3~5,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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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스러운 신년 첫 주 신년 주일 예배에 이렇게 나올 수 있도록 하나님 건강 주시고 믿음 주시고 환경 주시고 은혜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한 해 동안 이 강단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심정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선포함으로 말미암아 매주 마다 도전과 치유가 나는 그런 영광스러운 감각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일부 찬양에 우리가 아침 8시에 이렇게 영광스러운 찬양을 들을 수 있다는 게 축복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주님께 감사합시다. 늘 하나님께 잘 영광 돌리지만 오늘은 베스트 오브 베스트(Best of best!), 매주 마다 이렇게 할 수 있겠어요?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이 주 근데 내 마음대로 하세요. 2부도 하고 3부도 하고 4부도 다 하고 싶은데, 또 2부는 2부대로 3부는 3부대로 4부는 4부대로 은혜 주시길 주님을 찬양합니다. 저는 담임 목사로서 담임 목회자로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덕담을 하나 하고 싶은데요. 뭐냐 하면 올해가 몇 년이죠? 24년 아저씨 무슨 해가 됐는지 이제 올해가 2024년, 2024년에 제가 좀 이런 생각이 좀 들었어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은 이 한 해 동안2024번의 감사가 있게 하여 주십시오.

목사님, 그게 진짜 가능할까요? 가정에 하루에 6번씩 가수 하루에 6번씩 어떤 분은 이제 목사님 1년에 100번이라도 ‘감사’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1년에 100번은 일주일에 두 번씩인데 일주일에 두 번 감사하는 사람과 하루에 6번 감사하는 사람은 삶의 퀄러티가 삶의 질이 완전히 달라요. 그래도 안 믿어지시죠? 가능해요. 아침 점심 저녁 드시면서 기도하시면 감사하시면서 하루에 세 번이 진심으로 그러니까 올해 식사 기도는 옛날하고 달라야 합니다. 아시겠죠? 그러면 여러분들이 음식 자체가 달라질 것이에요. 그리고 식사 기도할 때도 시작할 때, 감사하시고 마칠 때 감사하시고, 그러면 하루에 6번 자동적으로 이 한해 완전히 달라지는 거에요. 알 사람은 알도다. 그리고 오늘 제목을 이제 그래서 어떻게 하면 감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냥 감사는 안 되고 기쁨에 감사하면 되죠. 그렇죠? 기쁨이 있어야 감사가 되지. 그래서 사실 제가 기쁨이 없는 그분은 그 부분이 아니라 제가 이 설교자를 붙이면서도 어마어마하게 부담이 됐어요. 이래 놓고 우리 의원들은 기뻐하지 못하고 나는 원래 죽는데 참 좀 어떻게 보면 리스크가 큰 위험이 내재된 그런 설교 제목인데 하여튼 오늘 이 예배를 마치고 나갈 때는 기쁨이 충만해서 나가셔야 됩니다. 다음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는가? 사실은 기쁨이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능력이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또 어떻게 보면 감사가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은혜가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이해가 되시죠? 그런데 이게 과연 가능한가? 가능한 거예요. 왜 가능한가,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고린도후서 3:6,
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영이라는 것은 성령 성령은 우리를 다시 뭐예요? 살리는 것 살린다는 말은 우리를 능력 주시고 새롭게 하시고 이렇게 하시는 어떻게 살립니까? 성경에 보시면 먼저 사도행전 2장에 보니까 제일 먼저 오순절 성경 강의 일어났을 때, 우리 사도행전 2장 17절에 뭐라 하냐면,

*사도행전 2:17,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주의 영이 임하면 주의 영이 우리 몸에 임하면 우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다른 우리 아이들이 벌써 예언을 말씀을 깨닫는다. 그 말이에요. 너희 젊은이는 환상을 본다. 젊었을 때 꿈을 꾼다는 것이 그리고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 그러니까 성년이나 나이 드신 분이나 상관없이 하늘나라 비전과 꿈을 갖게 된다 이 말이에요. 주의 영이 임하면 그 꿈이 있는 곳에는 기쁨이 생길 수 있고 감사가 생길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이가 많아도 하나님 나라의 꿈을 꾸면 성령이 임하시면 모두가 다 뭐가 되는 거예요? 청년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 주시는 꿈을 꾸는 이 예배이기 때문에 여기는 뭐가 없다고요? 세대 차이가 없어요..

교회가 제가 한 번 그 얘기 드렸는데, 제가 이스라엘 대사관에 사바디너라고 금요일 날 초청을 받아 왔는데 대사관에 거실에 어떤 여자 분이 앉아 있는 거예요 앉아 있는데 보니까 중동 여자 분이에요. 얼굴도 좀 그렇고, 이스라엘 대사관 안에 이스라엘 대사님은 뭐냐 하면, 어떻게 중동 분이 사모님이시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모님 예멘 출신이시래요. 예멘이라는 나라 아시죠? 예멘이라는 출신이시랍니다. 어떻게 된 거냐 그러니까, 예멘 출신 그러니까 현 대사는 미국의 콜롬비아 대학 가고 뉴욕 출신 백인인데 웨베 출신하고 중동 출신도 거기하고 뉴욕 출신하고 이렇게 서로 잘 되신 거냐고 물었더니요. 그러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십니다. 우리 어릴 때는 똑같은 토라로 교육받고 똑같은 성경 공부하고 똑같이 하니까, 컬처 계획도 없고, 신학의 교육도 같았다고 해요. 제가 어마어마한 정신을 받았어요. 그래서 제 마음에 사랑의 교회 모든 성도들은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문화 차이가 없게 하여 주십시오. 어떤 세대 차이를 갖게 하여 주십시오. 왜 동일한 말씀이니까요.

저는 꿈을 가져요. 앞으로 사랑의 교회 주일 학교 교육 정책, 사랑 글로벌 아카데미가 제대로 되면 전 세계가 다 통일될 수 있는 전 세계에 있는 코리안 디아스포라 750만과 한국에 있는 모든 주일학교 아이들 모두가 다 똑같은 커리큘럼 똑같은 신학, 사원 똑같은 문화, 똑같은 어떤 수준 똑같이 하면 어디 출신이든지 다 똑같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거기에 사는 아이들끼리 서로 결혼하면 한국 교회가 보존되는 것이 저는 좋은데 여러분이 보통이 아 그러면 한국 교회는 도전되는 것이에요. 이게 우리나라의 꿈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있으면 그러니까 성령이 역사하시는 곳에는 뭐가 있든 없다고요. 세대 차이가 없고, 여러분들 모두는 다 나이가 들어도 영적인 청년들이 되는 것이에요. 우리 자리에 계신 어른들 다 영적인 청년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어떻게 우리는 영적 청년의 기백을 끝까지 유지하지 않아요. 늙으면요. 웃지를 않아요. 늙으면 이게 웃음이 많이 사라져요. 무표정이에요. 청년들은 조그마한 웃고 까르르 웃고, 특별히 어린 아이들은 더 잘 웃고, 그러니까 오늘 이 예배 끝나고 난 다음에 우리 나이 드신 분들은 다 젊은이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몇 가지 좀 정리를 하겠습니다. 오늘 다시 한 번 기쁨이 없는 복음은 뭐가 아니라고요? 복음이 아니다.

제가 오늘 본문을 쓴 요한에 대해서 얘기하기를 먼저 우리 베드로는, 사도 베드로는 뭐든지 선봉장이고 개척자이고, 그다음 바울은 집을 세우는 지을 집 짓는 세우는 자이고, 요한은 어떻게 된다고 그랬죠? 사도는 치유하는 자라고 그랬어요. 제가 한 3주일 전에 말씀을 드렸는데 기억이 안 나십니까? 베드로는 개척자 선봉장이고 바울은 집을 짓는 자로 우리가 비유를 한다면, 사도 요한은 그물을 고치고 짓는 거에요. 사람들을 고치고 치유하는 사람인데, 그 당시에 요한일서를 기록한 이 배경은 에베소 지역에 있습니다. 에베소에서 이 기록이 에베소 교육 자체가 철저하지만 첫 사랑과 첫 기도를 이루는 그리고 이단이 바로 하고, 그런 상황에서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 말씀을 듣는 성도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듯이, 이건 에베소 교회뿐만 아니라, 21세기를 살아온 우리 교회도 동일하게 그리고 머리로만 하는 신앙이 아니라 지금 내 가슴에 불이 지르듯이... 그러면서 먼저 그렇게 되기 위하여 이 복음과 생명의 역사 복음에 대해서 입체적으로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데 오늘 뭐라고 돼 있습니까? 3절에,

*요한일서 1:3,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에게 전함은 우리와 뭐가 있게 하려니 사람들이 우리의 사임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림이라고 그랬어요. 여기 보니까 내가 아니라, 우리가 공동체가 사랑의 교회라는 이 공동체가 누리는 기쁨인데 주님과의 교재가 공동체에서 교재가 되면 무슨 일이 있느냐 이걸 이 교재의 은혜가 있을 때, 제가 교재 주님과의 교제 권에 들어갈 때에 제일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트랜스퍼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주님과의 교제를 누리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좋은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제가 에베소서 1장 3절에 찬송하리로다.

*에베소서 1:3,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 했을 때, 그 신령한 복을 주신 결과가 뭐냐 자연스러운 결과가 뭐냐면 1장 4절에,

*요한일서 1:4,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아멘.. 저와 여러분에게 뭐가 있게 하기 위하여 기쁨이 충만하게 하신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죽하면 오죽하면, 시편 16편 11절에 똑같이 나오는데요.

*시편 16:11,
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정리하겠습니다. 잠깐만요. 시편 16편을, 사도행전 2장에 성령 충만한 베드로가 다시 그대로 설교를 해가지고 반복을 하는데 저게 사도행전 2장도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저 말씀이 나와 있는데 뭐라고 말씀하는가, 주님과의 올바른 교재가 있고 우리의 복음이 입체적이 되고 우리의 복음의 능력이 있을 때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주님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거기에 나타나는 중요한 현상 중에 하나가 주의 앞에는 뭐가 있고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손에는 뭐예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에 모든 것이 주님 앞에는 즐거움과 기쁨이 충만한 줄로 확신합니다. 이거는 뭡니까? 그게 없어요. 이거는 저기 뭡니까? 에누리도 없어요. 이거는 디스카운트도 안 돼요.

모든 온 모든 머리부터 발끝까지 있어요.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이 들어가는 곳마다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걸 깨닫고 난 다음에 빌립보서 4장에 보면요.

*빌립보서 4:1,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바울은 그리스도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나의 기쁨이며,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 이라는 이 표현을 함으로 말미암아 구체적으로 문법 적으로는요. 기쁨과 면류관은 카이라고 엔드로 연결되는 동격이에요. 그러니까 바울은 사랑하는 빌립보 교인들을 기쁨이라고 부르고 있는 거에요. 여러분, 빌립보 교우들은 어떻게 형성되었습니까? 빌립보 교회가? 빌립보 감옥의 간수, 루디아 또 류오디아 선두계, 류오디아 선두계, 이런 그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이름이 다 우리 나와 있는데 사실은 다시 빌립보 4장 1절에 다시 보면,

*빌립보서 4:1,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이름이 기쁨으로 바뀌는 거예요. 기쁨 간수, 기쁨은 류디아, 기쁨 선두계, 기쁨 류오디아, 그리고 그 그 기쁨과 면류관이 동격이 되는 것이에요. 깊이 들어가면 기쁨을 면류관처럼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실체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빌립보 교인들에게 바울은 그저 기쁨이 멋진 수사나 논리적인 이론이 아니요. 기쁨 자체로 기쁨 실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지난주는 여러분들이 이 한 해를 걸어갈 때에 지난주에는 여러분 놋과 철로 된 문빗장이 있었지만 매일매일 저녁에는 그것으로 보호받고 아침에는 강철 신발을 신고 나가라고 그랬잖아요.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는 그렇다면 신발은 강철 신발을 신고 나간다면, 오늘부터 여러분 머리에 모자와 머리는 머리는 뭐예요? 기쁨의 면류관, 기쁨의 모자를 쓰고 나가는 것이에요. 하늘을 날을 때 다 아침마다 기쁨의 모자를 쓰고, 또 신발 강철 신발을 신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주님이 신겨주시고 주님께서 씌워주신 그 기쁨을 가지고, 이 한해가 여러분들의 삶으로 연결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에요. 이게 저도 이걸 고민 좀 많이 했어요. 우리 교회 부모들이 어떻게 하면 매일 아침마다 머리에 기쁨에 관을 쓰고, 신발은 강철의 신발을 신고, 매일매일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제가 말하는 이 기쁨은 성령이 주시는 기쁨인 줄로 믿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기쁨은 오직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뭐예요? 희락이라. 기쁨은 이 성령이 역사에서 끊어질 수 없는 것이고, 그다음에 성령이 역사할 때, 성령의 열매 가운데 오직 성령의 열매는 첫 번째는 사랑이고, 두 번째는 뭐예요? 희락이라, 사랑과 희락 이 희락과 사랑과 기독교의 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존속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의 기쁨이 어떤 존재의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기쁨은 여기에 성경에 기록된 언어 정도가 아니고, 또 우리가 기대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늘 이걸 손으로 만지고 매일 매일 마다 쓰고 나갈 수 있는 실체가 될 수 있는 것이에요. 실체가 돼야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안에서 경험하는 기쁨은 자가 발전된 고양된 감정 정도가 아니에요. 그냥 뭔가 없던 상태 그 정도가 아니에요. 여러분과 저의 신앙의 근본을 세우는 실체가 되는 것이에요. 기쁨은 복음의 열매이고 성령의 열매이고 하나님의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 앞에 주님의 모두에서 우리에게 트랜스퍼 되는데, 주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동선자(同船者)구의 기쁨으로 주님을 다,,, 그리고 이 기쁨은 2024년도 한 해를 매일매일 살아가는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우리를 살게 하는 능력으로서의 실체인 줄 믿으셔야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성도가 누리는 기쁨은 어떤 느낌 정도가 아니에요? 현실에서 실제적으로 우리 자신을 회복시키고 살아가는 강력한 힘으로서의 실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거는 구약시대 때부터 우리를 너무나 잘 알지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은 너희의 뭐예요? 힘이라, The joy of the Lord! 하나님과 하나님을 통하여 얻는 이 기쁨이 우리의 삶에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안토니 캄폴로’ 라는 크리스천 사회학자는 ‘하나님의 나라는 기쁨의 잔치다.’ 그분은 필라델피아 빈촌에 들어가고 정말 어려운 사람들 막 도우면서 고생하고 있잖아요. 빈자들을 섬기는 그런 분이에요. 그런데 만약에 그분이 인상 확 바뀌면서 왜 다른 사람들은 왜 다른 사람들은 교회가 말이지 뭐 화려하고 이러면서 왜 영원한 어려운 사람 안 섬기냐, 그런 것을 뭐라 삿대질하면서 자기가 그렇게 하는 사람이 아니고, 기쁨이 충만해 아주 자연스럽게, 그는 그게 내 역할이 있는 거고, 나는 내 역할이 있다 면서 기쁨으로 빈자들을 섬기는 거예요.

이해가 되십니까? 무슨 말인지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잔칫집이라는 것이 그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잔치 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 제가 목사님 이 기쁨은 예수님 처음 믿을 때 기쁨만을 얘기합니까? NO! 예수 믿고 나서도 수많은 고통과 고난의 연속에 있어도 우리가 기뻐한 것이 이게 바울이 그렇게 고백하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12장 9절 너무 잘 하는 말씀 다 함께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2:9,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지금 어떤 순간입니까? 바울이 바울에게 이런 가시가 있어가지고,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다. 그랬어요. 제발 다시 없애달라고요. 그런데 1장 9절은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지기 때문에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은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한 자랑이라. 약하고 힘들고 어렵고 문제된 것들도 오히려 기쁨을 앗아갈 수가 없고, 오히려 그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력과 박해와 어려움을 기뻐하며 그 기쁨이 나를 온전하게 하고, 강하게 하고 내 삶을 풍성하다는 것을 확신 있게 선포하는 것이에요. 약해도 약한 가운데서도 하나님 사랑하고 약한 가운데서도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하니까, 기쁨을 저는 확신하는 게 하나 있어요. 뭐냐면요. 하나님이 주시는 거는 나쁜 게 없어요. 다시요. 철저한 믿어요. 하나님이 주시는 건 나쁜 게 없어요.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비에게 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들에게 살짝 믿을 거 하나님이 주신 거는 나쁜 게 없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주신 이가. 우리에게 모든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니, 그러니까 제가 어려울수록 설렌다 그랬잖아요? 그러면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기쁨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하나님 삶의 원칙인 줄 믿으셔야 되기를 바랍니다. 만일 성도가 누리는 기쁨이 그저 고취된 감성이나, 수사적 표현이라면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변화무쌍한 새해 환경에서 변치 않는 확고한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냥 적당한 감정, 그렇다면 그게 어떻게 환경을 초월하여 삶을 회복시키고 움직이는 힘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이 기쁨이 그리스도의 적당한 감정이라면 그게 어떻게 한 해 내내 시련과 고통조차도 삶의 풍성한 자원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것이 적당한 감정이라면 이 땅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기초석을 우리가 기쁨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비 콕스라는 좀 자유주의 신학자고 이렇게 이분이 사신 신학이라고 그분 강의를 한번 들어봤는데요. 제가 그 과목을 듣다가 무릎을 친 내용이 있어요.

이 하바드에 있는 하비 콕스는 유명한 책이 있어요. 지금도 살아 계시고, 신학을 하는 거는 하비 콕스의 사진 신학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근데 그분이 리서치를 한 거예요. 학자니까, 기독교 예배에서 그다음에 기독교 신앙에서, 기쁨의 축제성이 사라진 다음부터 하나님의 죽음의 신앙이 나왔다 그랬어요. 저는 너무 어려운 얘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기독교의 기쁨의 실체가 사라지고 난 다음부터 실제로는 교회 내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이 능력이 사라지고 난 다음부터 죽음의 신학, 하나님이 죽었던 사신 신학이라고 해요. 사랑하는 우리 영 가족 여러분들의 기쁨의 은혜 때문에 복음의 신앙이 다시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 기쁨이 예수님이 갖고 계시는 것, 주님이 우리에게 세워주신 면류관이 우리의 삶에 2024년의 실체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이게 있어야 여러분들을 흔들 때 붙들어주고 넘어질 때 이렇게 세워주고, 고통으로 찢겨진 가슴을 떼워 줄 수 있도록 다른 길이 없어요. 남은 자 올해는 제가 실체적으로 우리 성도들과 함께 계속 제가 강조하고 싶은 건 그것이 뭐냐 하면 여러분들의 장래가 뭐냐 여러분 장래는 제가 대가는 아니지만 지금 앉아 있는 여러분들의 얼굴 표정이 여러분들의 장래이에요. 무표정이 장래가 뭐가 될 겁니다. 여러분들의 얼굴 표정은 설레이고 기쁨의 면류관을 쓰고 예수님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에 내가 주님과 영적 교재와 주님의 은혜가 있을 때, 주님의 그 은혜가 내게도 최소 된다고 하고, 주님의 기쁨이 내게 들어와서 변소 별로 주님의 기쁨이 내게 들어왔을 때, 거기서 갖는 얼굴 표정, 그게 여러분들의 장래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죽을 때가 우리의 삶에 피크가 될 수가 있는 것이에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는데 여러분과 저는 바울이 고백한 대로 주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오늘 여기 여기 1 2 3층니까, 우리 모든 중직자들 다 여러분들 이름이 저는 오 기쁨이에요. 오 기쁨, 제 이름은 기쁨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요. 내 마음이 너무 가슴 찌릿찌릿하고 감사한 거에요. 이래도 안 되는 분들은 오늘 여기서 안 깨지면 희망이 없어요.

*시편 51:8,
8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꺾어진 뼈는 극심한 고통과 절망적 상태를 보여주는 거에요. 꺾어진 뼈는 고통의 소리를 말할 뿐이지 결코 즐거움의 노래를 부를 수가 없어요. 우리가 그 스스로 오실 때는 다윗이 범죄하고 난 다음에 책망 받고 눈물로 회개하는 시대 아닙니까? 가슴 찢어지는 회개기도 가운데 오죽하면 주의 성령을 내 곁에 거두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비탄을 열심을 하고 있는데 오늘 8절에 다윗은 주님 그래도 주께서 꺾으신 자들도 즐거워하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합니다. 이게 없으면 살 수가 없어요. 살에 난 상처도 고통스럽지만 뼈가 꺾어졌다. 뼈가 뭉개질 정도로 부러질 때, 오는 고통은 극심한 겁니다. 이 고통으로 밤이나 낮이나 편할 수가 없습니다. 뼈 하나가 부러져도 고통스럽겠는데 오늘 주께서 꺾어진 뼈들도 복수 여러 개의 뼈들이 부러져 있는 상태입니다.

다윗이 더 이상 당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그런데 지금 다윗은 고통 중에 있습니다.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과 회복될 증거가 즐거워하게 바라고, 회개의 증거가 뭡니까? 즐거움이에요. 이 수준을 저와 여러분이 올라가야 돼요. 한국에 잘난 사람들 교회 향하여 선지자 들고 하는 사람들, 홰개 하라, 회개하라 하는데, 그러면서 그 얼굴에는 기쁨이 하나도 없어요. 여러분, 회개의 수준에서 회개에 진짜 올라가면 즐거운 일이에요. 진짜 회개하면, 즐거운 게 있는 거예요. 사랑하는 교회 모든 중직 자들과 모든 교육자들과 직원들, 오늘 나오신 모든 분들 여러분, 우리가 회개조차도 즐거움으로 승화돼야 되는 것이에요.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뭐 하게 해달라고요? 우리 가운데 죄로 인해서 세상에 걸친 돌풍으로 인해서, 뼈가 꺾어지는 고통 속 분들이 있다면, 항암 치료로 고통 가운데 계신 분들이 있다면, 그것이 즐거워하게 하여 주십시오. 인간관계에서, 재정에서, 하고 있는 일에서 얻어진 수많은 영혼들을 즐거움으로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기도를 다시 주목하십시오. 다윗은 꺾어진 뼈에 고통이 잦아들고 잠잠해져서 편안해지기를 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 꺾어진 뼈들이 무감각하게 되어가지고 고통을 덜 느끼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더 높은 수준, 주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여 주십시오. 기가 막힌 차원이에요. 아마 우리 생애에 회개가, 회개의 가장 강력한 표현은 즐거움이다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을 거예요. 저는 이 말씀을 듣고, 아, 회개와 성숙과 주님 앞에서의 자세를 제대로 한 사람은 즐거움이 넘친다. 여러분 상황을 제가 다 모릅니다만 심히 고통하고 있습니까? 그런 고통 가운데 어떤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까? 고통이 없기를 기도하십니까? 고통을 못 느끼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연약함으로, 자신의 잘못으로 겪는 고통 중에서도 꺾으신 뼈도 즐거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합니다. 불을 지른 뼈들이 하나님을 기쁨으로 노래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기쁨이 있어야, 기쁨이 있는 복음이 되는 것이 이것이 진짜 복음이 될 수가 있는 것이에요. 찬송이라는 거는 꺾으신 뼈들이 즐거워하는 거예요. 여러분 다시오. 하나님이 주신 거 나쁜 거 있어요. 없어요. 아마 여러분 고통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 주신 건 나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꺾으신 뼈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하고 기뻐하면 여러분 그 순간 그 환경이 여러분 인생의 베스트가 될 거예요.

골든타임이 될 거에요. 최고의 기쁨이에요. 우리도 우리 교회도 지난 시간을 보면요. 우리가 어려울 때가 최고 시간이에요. 나비처럼 그게 최고의 시간이라는 것이에요. 주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기쁨이 회복되며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심지어 다윗처럼 꺾어진 뼈들도 심히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는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새초부터 새말까지 우리는 한 번도 걸어가 보지 못한 설렘, 미담의 길을 걸을 때 예기치 않은 일들로 인생의 뼈들이 부러질 정도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그럴 때마다 다시 한 번 이 강력한 복음에 선포를 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주여, 부러지는 은혜도 즐거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이때 복음의 능력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이 없는 복음은 복은 아닙니다. 이 한해를 즐거워할 수 있도록 그 수준에 올라갈 수 있도록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입혀주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제가 주중에 우리 교회 집사님께 이 메일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2033-50 비전을 이루어 가려는데 전도도 해야 되고, 복음 선포도 해야 되고, 우리가 북한 사역, 북한 하루아침에도 그렇게 해가지고 앞으로 10년에 우리 민족의 50%가 구원받게 하여 주십시오. 그런데 진짜 끝까지 뼈들이 뭘까? 제 마음에 인적이 아들, 영적 고아들, 한국에 지금 고아들이 너무 많아요. 미혼모들 아이들도 그렇고, 꺾어진 뼈들이 많아요. 그리고 영적인 고아들, 저는 어릴 때 고아원 옆에 제가 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교호 앞에 그 고아원이 있어요. 우리 고아들 그 얼굴을 나는 늘 눈빛이 나도 들을 수가 없어요. 걔네들은 부모의 사랑을 못 받으니까, 그 사랑하는 눈빛이 그러니까 기쁨이 안 생기는 거예요. 기쁨이 없는 빛이 꺾어진 거에요. 그리고 영적인 고아들 젊은이들 가운데 아이들 가운데 심한 것이 아동학대도 있고 이런 거 있지만 OECD 가입국 가운데서 우리 청소년 가운데 자살률 1위, 고독사도 1위에요. 코로나로 사망한 사람보다도 자살로 사망한 사람이 더 많아요. 그래서 고아를 긍휼히 여기시고 꺾으실 때도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이 육적인 고아, 영적인 고아, 여기 자녀분들이 없는 분들은 혹시 은혜가 젊은 분들 가운데 입양할 수 있으면 입양하면 너무 좋겠어요. 그럴 때 그 인간적으로 생기는 입양해 가지고 생기는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 안에 주시는 이 영광스러운 복음의 기쁨이 충분하게 될 거예요.

미국에 이에나 버거가 있습니다. 1948년도에 캘리포니아 첫 번째 헴버거 가게를 열었습니다. 제가 미국 가면 꼭 그 가게를 들립니다. 드라이브 쓰루(Drive Thru)로, 몇 사람이 따라올 것을 거의 드라이브 쓰루로 이렇게 받는데 그 주인이 신실한 크리스천입니다. 이네라 버거의 기업 정신이 뭐냐면요. 이네라 버거를 사서 가게 문을 열고 나갈 때는 행복하고 기뻐해야 한다. 이에나 버거 이걸 통해서 사람들이 행복하고 기뻐한다. 엄청나게 줄을 섭니다. 그는 식사를 점심시간 때면요. 줄을 서거 자동차가 십 대가 줄 서 있어요. 거기서 감자튀김을 주문하는 싱싱한 감자를 그 자리에서 잘라갖고 튀겨주고 엄청나게 맛있습니다. 근데요 내가 기가 차요. 사이 모르는 사람 모르는 거예요. 그 프렌차이점, 감자튀김 박스 밑에다가 뭘 써놨는지 압니까? 잠언 24장 16절입니다. 시작

*잠언24:16,
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햄버거 프로파일 밑에다가 그리고 햄버거 봉지 안에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써놨어요.
*요한복음 3:16,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한국에서 안 써놓고 팔면 그거 사기예요. 이 햄버거 하나를 팔아도 이거 하나 갖고 기쁨이 있기를 바란다고 해요. 그러면 우리는 복음을 바꿔야 돼요. 우리 사랑의 교회 많은 제자들을 가지고 수많은 영적인 훈련들이 이런 말씀을 가지고 다른 영혼을 섬길 수 있도록 준비가 돼 있는데 여러분 때문에 다른 영혼의 기쁨이 없다면 이건 사기예요.

여러분들 은혜 오늘 우리 한국교회 우리 교회 성도들 주위에 수많은 기쁨의 능력이 충만해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7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게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다시 기쁨이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꺾어진 뼈들도 즐거워하는 이 복음을 가지고 신발은 뭘 신고요? 모자는 뭘 쓰고요? 기쁨의 면류관, 뚜벅뚜벅 걸어가면 2천 24번의 감사가 되는 것이에요. 그 어떤 해보다도 영광스럽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의 은혜를 주시를 믿습니다. 할렐루야!

♬매일 내 마음에 기쁨이 넘치네. 더욱 섬길수록 더 구한 주님!!!!!~~~~
다음에 제가 오늘 오전은 찬양을 안 했어요. 다음 주에 하겠습니다.

♣요약
주님의 영이 임하여서 하루 여섯 번이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로 예배드리고, 불붙는 가슴으로 영적 청년의 기백을 유지하는 인생으로 살아가야 한다. 날마다 머리에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의 면류관을 쓰고, 발에는 강철신발을 신고 걸어갈 때, 나의 꺾어진 뼈들도 즐겁도록 기쁨과 감사로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육신의 고아, 영적인 고아들을 기쁨으로 섬길 때,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을 내려받는 은혜의 한 해가 되기를 간구하자.
-우리는 주님과의 교재를 더한 기쁨이 우리에게 전수되고, 기쁨이 우리에게 와 닿으면 꺾어진 뼈 같은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꺾어진 뼈들도 기뻐하게 하시는 복음의 능력을 통하여 날마다 승리하는 2024년 되어, 이 땅에 육신의 고아도, 영적인 고아도, 경제적인 아픔이나 질병의 고통을 끌고 있는 인생들도 주님께서 주신 기쁨으로, 복음으로 다시 살아나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나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믿고,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우리에게 충만히 주실 줄로 확신하며, 기쁨의 원천이신 주님과 진심으로 우리는 교제하면서 주님의 가장 귀한 모든 것을 풍성히 받아들이는 자로 기쁨의 복음을 가지고 헌신하는 올해를 만들어가야 한다.













※  위 영상은 2부예배입니다. 1부 예배와 약간의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설교 내용 맥락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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