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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8월 7일)
제목: "놀라우신 주님의 그 큰 은혜"
말씀:  갈라디아서 3:13-14
찬양인도: 쉐키나( 이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박단열 부목사님(1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설교자: 박성규 목사님-초빙(부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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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3:13-13,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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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규 목사님-초빙(부전교회)
-폭염 가운데 하나님 사랑하며 경배하며 나온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축복한다. 들어오면서 주차하시는 성도님들을 보니까 마음에 참 감동이 되었다. 폭염 가운데서도 헌신해 주시는 주차 안내 하시는 여러분들 깊은 감사를 드린다. 예배 실 안내에도 감사하다. 찬양대 1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오케스트라는 새벽부터 나오셨을 것 같다. 모두 진심으로 주님께 감사드리며 은혜로운 찬양에 감사하다.

오늘 기독교의 한 일간지에 나온 한 인물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영어를 잘 가르치기로 유명한 정철 선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독교 신문에 실린바가 있다. 집안은 기독교였지만 본인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할머니가 최현숙 전도사님이셨다. 그 유명한 그 김익두 목사님과 동역을 했던 아주 훌륭한 전도사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작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대학 입시에 실패했다. 그는 청소년 시절 키가 작아서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골똘이 생각하다가 그는 철학을 연구하게 되었고, 동양철학에 빠지다보니까 무속종교에 깊이 빠져들었다. 대학입시에 실패를 하면서 그는 산으로 갔다. 도사가 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도를 닦다가 식량이 떨어져서 내려왔는데, 경기고등학교 동창을 만난 것이다. 미군들에게 자기가 영어 배우러 가는데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따라갔더니 미군 장교와 그가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는 한 마디도 알아 듣지 못하는데 자기보다 고교 때 영어를 더 못했던 그 친구가 너무 잘하는 것이다. 좀 속에서 불타는 마음이 생겨서 모임을 마치자마자 책방에 가서 영어회화 책을 잔뜩 샀다. 그리고 산으로 올라가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보름 만에 이제 어느 정도 됐다 싶어서 그 친구를 만나 보름만에 미군을 만나자고 했다. 완전히 사람이 바뀐 것이다. 영어를 한 마디를 못했던 정철이 영어를 너무 잘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말을 잘하는데 듣기는 못한다. 그 미군 존슨데이와 말하는데 들리지가 않는 것이다. 안 되겠다 싶어서 미국 방송 AFKN을 듣게 되었고 자막을 보지 않고 영어를 들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는 1년 만에 AFKN 뉴스가 귀에 들리고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알고 지내던 영어 학원 원장님이 한 선생님이 강의를 해야 되는데 지금 일이 생겨서 일을 못하게 되는데 대타를 쳐달라고 했다. 그래서 가서 본인이 터득하던 방법으로 가르치니까 학생들이 너무 좋아했다. 그래가지고 그때부터 영어강의를 시작한다. 그리고 1983년도에 정철학원을 세웠는데 그리고 테이프를 팔면서 1989년 1년 수입이 백억이나 되었다. 놀랄 일이다. 그런데 국세청 세무조사를 받다가 30억 원의 세금을 내고 부도가 나버렸다. 이것 가지고 재판을 벌였는데 10년 만에 무죄가 판결이 되었지만, 이미 학원은 다 끝나버린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1990년도에 강남에 다시 정철 어학원을 세운다. 그 시련을 견디고 난 다음에 세운 학원이기에 더 학원을 운영할 수 있었고, 어린이 영어까지 가르치고 전국에 300여 개의 체인 영어 학원을 세운다. 95년 경에는 사업이 굉장히 많이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두 아들을 영국으로 유학을 보내면서 당부하는 것이 있었다. 두 아들에게 두 가지를 당부하신다. ‘절대로 서양 섹시는 데려오지 말 것’과. ‘절대로 서양종교를 믿지 말 것’이라고 했다.


큰 아들이 런던에 갔다가 대학 생활을 하면서 선배의 따라 김치 먹으러 한국인교회를 갔다가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거기서 1997년대에 IMF가 터지면서 유학비를 보내기가 어려우니까 귀국을 하라 해서 군대를 가게 되는데 군대를 가기 위해서 신체검사를 받을 때마다 불합격이 된다. 그래서 무려 1년 뒤에 군대를 가게 되는데, 그 기간 동안 아들이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면 아버지에게 끊임없이 전도를 한다. 밥 먹고 나면 예수님의 믿음의 나눔을 전했고, 정철 선생은 쓸데없다고 일축했다. 토론이 일 년 가까이 계속 되면서 정철 선생의 반대 논리는 점차 옹색해지기 시작했다.

“좋아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치고, 이제부터 성경책을 읽어 본다. 단 교회는 가지 않는다.” 단전호흡을 하면서 성경을 읽었다. 그러자 아들이 이야기 한다. “아빠, 휴대폰 성능이 아무리 좋아도 기지국하고 연결이 안 되면 휴대폰이 안 터지잖아, 아빠가 하나님과 통하려면, 이 휴대전화와 달리 신앙생활을 기지국하고 무선 통신이 아니라 나가야 돼, 기지국에 나가야만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어” 라고 한다. 이 말을 듣고 정철 선생은 그럼, 이제 이번 주부터 기지국에 나가보겠다. 그래서 교회에 나가게 된 것이다. 교회 와보니 특별한 것은 없었다. 강사가 나와서 강의하고 그리고 강의가 끝나면 모두가 합창하는 것이었다. 학원과 비슷했다. 그렇게 2년째 될 때, 그동안 그를 지탱해왔던 샤머니즘의 무속신앙의 껍질이 점점 벗겨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내가 사는 길은 나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속죄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여야겠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그는 2000년 말 한밤중에 자신의 집에서 무릎을 꿇고 만난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였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니까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평안한 잠, 숙면을 누리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세상이 달라져 보였다. 예수님을 영접한 다음에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창밖의 나무가 살아있다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온 통 모두가 기적 덩어리라는 것이 느껴졌다. 밥을 먹는데 그것이 에너지로 바뀌는 것이 기적이라고 느껴졌다. 내 가슴 속에 심장이 자연스럽게 뛰고 있다는 것이 기적으로 느껴졌다. 사물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모두를 머릿속으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기적으로 느껴졌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직접 만지고 계심을 느꼈다고 한다. 들러보니 온 세상이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는 이 사도바울의 갈라디아서 2:20절의 고백이 자신의 고백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속에 더 깊고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마음 한 구석에 항상 웅크리고 있던 불안감과 공허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기쁨과 확신이 넘쳤고, 무슨 일이든 하나님께 기도드리면 신기하게도 지혜를 주셨고, 그 문제를 또 해결해 주셨다. 풀지 못 할 때면 마음이 평안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그는 여기서 예수님과 친해졌다. 과거에 그가 신음하던 민속적 종교는 엄청 높았다. 저 높은 곳에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었고 인간은 그 아래 비는 모습이었다.

기독교의 신은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은 찾아오시고 인간을 위해서 죽어주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된다. 항상 돌봐 주시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예수님은 피조물인 우리들의 친구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었다. 성경에서 읽은 이런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감격했다. 여러분은 그렇다. 기독교는 타종교와 비교하면 무엇이냐면, 신이 우리를 위해서 찾아오시는 것이다. 그리고 신이 우리를 위해 죽어주시는 신이 기독교이다. 타종교 어떤 신도 인간을 위해서 죽어주지 않는다.

 
저는 유명한 성가 곡 ‘생명의 양식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게 되었다. 성찬식을 앞둔 어느 주일, 어떻게 하면 성도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생명의 양식을’이라는 성가곡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가사가 원래는 라틴어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신학을 공부할 때 조금 배웠던 라틴어로 초보적인 라틴어 수준이지만, 이 문장이 그리 어렵지 않아서 번역을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본래 나와 있는 지금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는 ‘생명의 양식을’ 의역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드러내는 것에는 좀 아쉽다는 생각을 깨닫게 되었다.

자, 이제 지금의 우리말과 라틴어를 부족한 종이 번역한 것을 화면을 통해 비교해보자. 현재 가사는 ‘생명의 양식을, 하늘의 만나를 이지만, 직역하면 천사들의 빵이 인간들을 위한 빵이 되셨다. 천사들의 빵이 만나이다.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올 때 천사가 전해주었다. 라고 시편의 기록에 나온다. 그래서 만나를 가리키는데 요한복음 6장 32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진짜 만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 가사의 천사들의 빵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님이 인간들을 위한 빵이 되셨다. 빵이 인간들의 입에서 부서지고 깨지면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게 도와주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깨어지고 부서져 주시므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기념하는 것이 성찬식이다. 빵이 우리 입안에서 깨지고 부서진다. 그 다음의 가사는 마음이 빈자에게 내려주소서! 라고 직역하면 하늘의 빵이신 예수님이 모든 상징을 종식시켰다. 이 모든 상징은 구약의 메시아가 오실 때, 이런 역할을 하실 때 상징되었던 것들을 실제 그분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종식시켰다는 것이다.
 
여러분 구약에는 창세기에서 범죄 한 아담에게서 가죽옷을 지어주듯이 이것이 장차 피 흘려서 우리의 죄를 가리워 주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그 가죽 옷이 바로 예수님이고 십자가이다. 유월절 어린양의 죽임을 통하여 이집트에서 해방을 얻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처럼 유월절 어린양처럼 유월절 절기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이루실거라는 것을 그 상징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그 다음 가사는 저는 이 가사를 번역하다가 울어버렸다. 감탄했다. 오, 놀라운 일인가? 이야기는 그가 먹는 도다. 라틴어 동사에는 인칭동사가 들어가 있다. 그가 먹는 도다. 그가 먹는 도다. 놀랍게도 주님을 먹는다. 기가 막히다. 그가 주님을 먹는 도다. 저는 이 가사를 번역하다가 그냥 울어버린 것이다. 가난하고 비천한 종이 주님을 먹는 도다. 박성규가 바로 가난하고 비참한 종이 아닌가?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고,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영생의 사랑을 받았다. 주 안에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는 가난하고 비천한 우리가 영생할 수 있도록 생명의 사건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이 놀라운 은혜를 받았다. 이 사실을 오늘 본문은 말씀한다.
 
*갈라디아서 3:13,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 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여기에 ‘우리를 위하여’는 ‘우리를 대신 하여’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우리를 대신 한 것이다. 내가 받을 형벌을 그분이 대신 받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속량(贖良)하셨다. 속량의 뜻은 역사적으로 보면 조선왕조 때도 종을 풀어서 양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양민은 선량한 백성을 말한다. 더 이상 노예가 아니고 이제는 평범한 시민으로 자유를 누리게 한 것을 역사서에 속량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속죄라고 말한다. 헬라어는 ‘엑세고라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다시 사다. 노예를 해방시키다. 그리스도가 속죄하다. 해방하다. 구해내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여러분, 엑세고라센, 센이라는 이 용어가 부정함을 의미한다. 영어나 우리 단어에 없는 단어이다. 현재나 미완료 진행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부정과 단정적인 것, 확실한 것을 말할 때 쓰는 표현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량했다는 것은 확실히 우리의 속죄를 이루었다. 할렐루야!!~~우리의 속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완전히 이루어졌다. 엑세고라센,이다.
 
제임스 패커 박사는 이 예수님의 속죄는 형벌 대속이라고 불렀다. 그 뜻은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죄의 형벌을 받으시므로 대신 속죄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므로 우리가 속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만약에 형벌 대속이 없었다고 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삶의 목적도 없이 방황하고 성공한다 할지라도 그 깊은 허물을 이기지 못하고 그러다가 죽고 지옥갈 수밖에 없고 영혼이 먼저 지옥을 간 다음에 예수님 재림 때에 목숨까지 심판의 부활을 영혼과 육신이 영원히 지옥에서 형벌 받을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생명의 빵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누리며 산다.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다만 우리가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다만 우리가 하나님과 접속하지 않기 때문에 은혜를 누리지 못하지만 접속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얼마든지, 우리는 이 땅을 천국처럼 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다 죽는다. 그러나 우리는 죽자마자 우리의 영혼은 천국을 가게 될 것이다. 몸은 흙으로 돌아가겠지만 이 몸이 성화가 완성되는 날,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이 몸과 연합되어 우리는 진정한 전인적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 놀라운 일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다고? 십자가 때문에 예수님의 속량으로, 예수님의 속죄의 은혜 때문에, 생명의 빵이 되어주신 십자가 사건 때문에 이 은총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 제임스 패커는 예수님의 대속의 특징을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대속을 한 단어로 설명하는 것보다 이렇게 여러 측면으로 이해하다보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더 깊게 되는 것을 경험했다.
 
◆예수님의 대속의 특징.
1. 우리 형벌 받는 것-형벌적인 것.
2. 우리를 대신 한 것-대리적인 것.
3. 우리를 대체한 것-대체적인 것.
4. 우리 모두를 대표할 것-대표적인 것.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형벌적, 대리적 대체적이 우리 모두를 위해서 대펴해서 대속해 주셔서 승리한 줄 믿는다.
 
*고린도후서 5:21,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14,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이와 같은 대신하여 대리적 대표적이라는 것이며 형벌적이라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형벌적, 대리적 대체적 대표적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그렇다면 이것을 무엇을 위한 것인가?
 
*갈라디아서 3:14,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무엇인가를 보여주신다.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이 성경에서 말하는 유대인이 아닌 모둔 세계의 사람들, 모든 민족이다. 이 말씀에서 두 가지를 이야기 한다.
첫 번째는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한다.
두 번째는 성령을 받는 것,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는 목적이다. 이 두 가지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첫 번째의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본문의 앞 절에 나오는 3장 6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았던 이신칭의 복, 즉 구원의 복을 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을 우리 한국 사람인 우리를 위해 받게 하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한 번 따라해 보자. 나를 위해 예수님이 죽으셨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받았다고 나온다.

*갈라디아서 3:6,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갈라디아서 3:8,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성경을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했다. 복음이 신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도 나왔다. 우리가 노력에 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말미암음을 믿음을 말한다.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복을 받는다고 한다. 아브라함과 히브리인을 선택한 이유는 그들을 통하여 세상과 모든 열방이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구원에 빠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내가 잘되고 우리 식구가 잘 되고 우리 자녀가 잘 되고 우리 교회가 잘 되는 그것이 전부인가? 아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마음은 열방에 가 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옆에 앞에 살고 있는 지옥갈 사람에게 다가가 계신다. 코로나 시대라고? 아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러기에 더 필요하다. 그리고 이 코로나의 위기를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늘로부터 오심을 믿는다.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의 복, 이 구원의 복이 믿지 않는 내 가족과 친구들에게 해외 선교지에 전파되길 바란다. 9월에 한국 교회를 섬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광고를 듣고 너무 기뻤다. 사랑의 교회는 이제까지 사랑의교회로 만이 아니었다. 한국교회와 세계 교회를 위해서 헌신해 오신 여러분의 교회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우리가 더더욱 아브라함의 복이 열방에 미치게 하기 위하여 우리 모두 기도하며 헌신할 수 있기를 축복한다.
 
두 번째는 성령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어주시는 목적 중의 하나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찾아오신다. 내주. 그리고 그분이 충만하게 임재하도록 말씀 묵상과 기도할 때, 성령이 충만, 순종할 때, 더더욱 충만을 주신다. 순종이 그래서 중요하다. 성령으로 그럴 때 성경이 깨달아진다. 성경 말씀이 튀어나온다. 성령으로 기도가 깊어진다.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심을 경험한다. 성령은 사람의 인격을 바꾸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가 우리 가운데 맺혀진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영이 전도의 영이기에 다른 사람을 위한 불타는 구원의 열정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어주신 것은 구원 복 뿐만이 아니라, 놀라운 성령 충만의 유익을 주기 위하심이었다. 그런데 모든 복의 출발점이 어디 있냐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다. 십자가가 출발점이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것을 화해케 했던 그 십자가, 오, 주의 십자가가 우리 모든 구원과 인생의 진정한 복의 출발점이 된다. 최근에 이 강단에서 말씀을 한 전하셨던 김지찬 교수님이 번역하신 화해의 아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을 들려드림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주신 화해의 놀라운 사역을 소개하고자 한다.
 
던 리처드슨 선교사는 1962년부터 네덜란드령의 뉴기니에 사위(Sawl)족, 사위부족은 아주 잔인했다. 그래서 전투를 벌이다가 적의 머리를, 그 해골을 머리게 배고 자는 사람들이다. 정말 얼마나 잔인한 부족인가? 그리고 이들은 아주 호전적이기 때문에 부족들과 전투를 자주 벌이고 그들은 같은 식인종이기 때문에 함께 보족을 하는 전투가 끊임없는 이런 보복의 악순환이 되는 부족이었다. 리처드슨 선교사가 사역할 때, 부족 간의 피를 흘리는 심각한 전투가 있었다. 그들의 문화 속에는 오랜 갈등, 그렇게 5개월 동안 전투가 지속되었다. 많은 사람이 죽어나간다. 이런 갈등, 전쟁을 종식시키고 원수가 화해케 되는 관습이 있었다. 그것은 A라는 부족과 B라는 아들들을 맞교환을 하면 그때부터 화해가 시작되고 전투가 종식된다는 것이다. 이 때 교환하는 아이를 ‘평화의 아이, 화해의 아이’ Peace child라고 불렸다. 그런데 그때는 5개월 동안 전투가 계속 되고 있었지만 상대 부족에게 자기 아들을 내어놓는 사람이 단 한 명이 없었다. 갈등은 계속 되고 있었다. 마침 그 때에 ‘카이오’라는 사람이 자기 아들을 내놓는다. 6개월 밖에 안 되는 자기 아들을 내놓는다. 외아들 ‘비아카돈’을 상대 부족에게 보낸다. 그리고 상대 부족의 아들 양자로 ‘마니’를 받아온다. 이렇게 화해의 아들이 교환됨으로 더 이상 전투가 일어나지 않고 화해가 성립되었다. 이 때의 화해의 아들을 사위부족의 말로 한다면 ‘타로프’라고 불렀다. 한 번 따라해보자. 타로프, 화해의 아들이다. 그들은 이 타로프 아들을 교환하지 않고는 절대로 평화가 올 수 없었다. 이 사실을 근거해서 던 디처드슨 선교사는 사위 부족을 앉혀놓고 복음을 전한다.
 
그 선교사는 이런 메시지를 전한다. 나는 비아카돈을 다른 부족에게 전할 때, 비아카돈의 엄마가 진흙 구덩이에서 몸부림치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는 바아카돈을 빼앗아 그 엄마에게 돌려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나는 계속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렇게 아들을 남에게 주는 고통스런 단계 없이 화해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렇게 남에게 주는 고통스런 단계 없이 화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방도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옳았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화해의 아이가 있어야만 평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분은 여러분 만이 아니었다. 바로 하나님이셨다. 사위적 언어로 미아오코돈, 미아오코돈(사위적 언어로 하나님)이 같은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미아오코돈은 사람들이 자기와 화해하기를 원하셨고 사람들끼리도 화해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일시적인 기간의 화해가 아니라 영속되는 화해를 위하여 그는 화해의 아들, 타로프 아들, 화해의 아들을 택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문제는 누구를 선택하느냐가 문제였다. 이 땅에 사는 가운데 화해의 아들을 선택한다면 그는 완전한 타로프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완전한 타로프를 찾고 계셨다. 원주민들이 묻는다. 도대체 누구를 선택 하냐고 묻는다. 우리 리처드슨 선교사가 되묻는다. 카이오가 다른 사람의 아들을 주었나요? 아니면 카이오가 자신의 아들을 주었나요? 자신의 아들이다. 선교사가 말한다. 미아오코돈께서도 자신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리처드슨 선교사는 아시야서를 읽어준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매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 타로프라 할 것이라.” 이어서 요한복음을 읽어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원주민들이 묻는다. “당신이 말한 그가 그 사람인가요?” 라고 한다. 예수스 말이요? 선교사가 대답한다. “바로 그분이요. 미아오코돈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인간들이 자신의 아들을 죽일 줄 알면서도 그 아들을 타로프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속죄를 얻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할 때 족장 하토가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하토의 아들이 설명했다. “당신이 우리 부족에게 오기 전에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 부친이 저의 형을 화해의 아이로 카야가를 부족에게 주었습니다. 그 아들을 데리고 가서 잡아먹었습니다. 그제서야 카야가족이 우리 사위족과는 다르게 화해의 방식을 택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부족은 머리에 안수를 화해가 성립되는데 캬야가르족은 화해의 아들을 잡아먹음으로써 평화가 시작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토의 음성이 부드럽게 들려왔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이렇게 그는 말한다. “미아오코돈, 즉 하나님께서도 나처럼 슬펐을 것임에 틀림이 없어.” 라고 했다. 리처드슨 선교사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그렇다. 이 화해의 아들을 통해서 두 부족이 화해하는 것처럼, 우리의 화해의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화해하게 되었고 원수 되었던 다른 사람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폭염 속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지 않은가? 우리의 전 생애를 그분을 위해 드려도 아깝지 않은 것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독생자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해케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후 5:15,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정철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다. 하던 일을 하고 있다. 다만 이제는 순서가 바뀌었다. 전에는 영어만 가르쳤다면 이제는 영어를 통해 하나님을 전한다.”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우리가 삶의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이라도 우리가 받은 이 엄청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독생자를 바친 성부 하나님의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더 이상 우리를 위해 살지 말고 그분을 위해 살기를 소망한다.
 
 
*디도서 2:14,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성도라 하지만 내 삶 속에 악한 일이 있다면 그것을 벗어버려야 한다.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 우리가 버젓이 예배드리고 있지만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죄의 문제가 있다면 이 엄청난 십자가의 속량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악한 일을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지 않은가? 회해의 아들, 타로프가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로 엄청난 구원을 받은 우리, 다시금 십자가의 감격을 회복하면서 오늘 가장 의미 있게 살아가가길 축복한다.
 
♣요약
우리가 미천한 가난하고 종들을 생명의 빵으로 오셔서 구원해주심에 감격하며, 이제는 살아도 죽어도 내 삶과 인격에서 내 발이 딛는 데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예수 제자로 살기를 소원해야 한다.
-성령의 약속이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약속을 가리킨다. 이 약속은 오순절에 성취되었으며 오늘날도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내재하셔서 성도의 삶을 인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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