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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6월 5일)
제목: “K부흥 가능한가?”
말씀: 사도행전 11:19-30
대표기도: 정상익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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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1:19-30,
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 사랑의 교회가 창립 44주년을 맞이했다. 그래서 오늘은 교회의 사명이 무엇일까? 우리 성도들 한 분 한 분의 신앙의 우선순위가 무엇일까? 오늘 본문을 통하여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소망한다.
 
오늘 설교제목은 “K부흥 가능한가?” 무슨 다큐멘터리 제목 같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붙인 이유는 부흥은 초대교회 역사부터 지금까지 보면, 부흥은 우리가 뭐 어떻게 하는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되는 것이다. 성령님이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면 성령님은 진리의 말씀을 주시고 인도하시고 생명의 역사를 허락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초대교회부터 보면 성령님을 통해 부흥의 역사를 통하여 부흥이 일어나는데 예수님께서 공생하시는 기간 동안 그 갈릴리에서 대단한 부흥이 일어났다. 그 갈릴리 지역에서,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다음에 오순절 성령강림의 강력한 역사가 예루살렘 교회에 임하였다. 그래서 마가의 다락방을 통하여 예루살렘 부흥이 일어나고, 그 예루살렘 교회의 부흥이 지금 이 안디옥 교회와 연결되며 이 안디옥교회의 부흥이 성령님의 인도를 통하여 빌립보로 가게 하시고 빌립보에서 유럽의 부흥의 첫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유럽의 부흥을 통해서 평양 부흥으로 갈 것이다. 그래서 제가 이름을 이렇게 붙여보았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부흥을 일으키실 때, G부흥이며... 갈릴리... 그다음에 갈릴리 부흥이 예루살렘 부흥으로, 그다음에 제2 부흥으로 제2 부흥이 안디옥교회 부흥으로, 안디옥이 앤티오니까 A부흥으로, A부흥이 빌립보 부흥은 P부흥이며, 그래서 우리에게 다시 와 P부흥인 평양부흥으로 오게 될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가 뭐 K푸드, K컬쳐, K드라마, K뷰티가 있지만 진짜 우리가 사모할 것이 K부흥인줄로 믿는다. 강남부흥도 G부흥이 되게 하시고 K부흥이 되기를 소망한다. 오늘 이제 이 말씀이 시작되는 배경은 19절에 이렇게 나와 있다.
 
*사도행전 11:19-20,
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이것이 이제 안디옥교회의 부흥의 시작의 재출발이 되는데 여러분 많은 경우 예수님 때문에 핍박 받고 환난 받고 고통 받으면 그건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새로운 부흥의 기폭제, 점화 장치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스데반의 일로 예루살렘 교회가 큰 핍박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스데반으로 인해 일어나는 환난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안디옥교회에 부흥을 일으킬 수 있는 어떤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생각의 틀을 바꾸게 하신다. 그래서 19절을 보면 당시의 이 생각의 프레임은 생명의 역사와 복음의 역사는 유대인끼리만 가능하다고 했다. 심지어 오늘 11장 앞에 10장에는 베드로조차도 그런 생각이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고넬료가 이방인인데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하나의 예를 보여주시고, 그리고 그것을 안디옥에 이르러 몇 사람들이 요즘으로 말하면 강남사람, 강북사람, 인천사람, 일산사람, 이름 없는 이런 사람들이 생각의 틀을 바꾼 것이다. ‘아,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전해질 수 있구나, 헬라인에게도, 그리스 사람에게도 전해질 수 있겠구나’, 이런 식으로 생각의 틀을 바꾸어 가지고 부흥이 일어나는 곳에는 항상 페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 무명의 사람들이었다. 지난 44년간 사랑의 교회도 보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무명의 사람들이 이 부흥의 열망과 페러다임 쉬프트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신 그 역사가 오늘 44주년 은혜의 주일이 된 것인 줄 믿는다. 이제 환난을 기폭제로 삼고 생각의 틀을 바꾼 사람들이 부흥의 시발점을 일으키게 되는데 진짜 부흥을 일으키는 강력한 엔진이 무엇인가? 뭐 부흥의 두 날개가 무얼까? 부흥의 강력한 슈퍼엔진은 이야기 하겠다. 이것이 사랑의 교회의 44주년을 맞이하여 교회적으로 또 어떻게 보면 이제 코로나 펜데믹 이후에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가야하는데 이 부흥의 역사에 있어서 어떤 날개와 엔진을 달아야 할 것인가? 그래서 회복을 넘어서 부흥으로 가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지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11:21,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사도행전 곳곳마다 노른자위 같이 부흥의 역사가 있다. 노란 펜을 그어야 할 만큼 그런 부흥의 자리에 대한 표현은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이다. 그런데 그 이유는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며 첫 번째는
 
I. 부흥은 주의 손이 함께 해야 부흥한다(성령의 역사).(21)
 
-성령의 능력과 역사를 말한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본문의 핵심은 주의 손이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더라. 여러분 다시 우리가 마음속에 강조하고 확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부흥은 누구의 손이 함께 한다고 했는가? 주의 손이다. 가정도 개인도 그래서 용어를 하나 만들었다. 자수성가가 아닌 신수성가이다. 개인적으로 잘하는 것이 아닌 신수성가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셔서 부흥하는 것이다. 신수성가이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드리면, 오래된 사람들은 ‘그렇지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해야지, 당연한 것이지,’ 하며 너무나 당연시하고 실제적으로 주의 손이 함께 하시는 강력함이 뭔지를 잘 모르며 체득하지 못할 때가 많다. 다시 말하면 부흥은 주의 함께 해야 한다. 하나님의 손이 짧지 않으심을 오늘 우리가 경험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 오래 한 사람들은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맞지만, 이것을 실제로 체험을 못한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백성들이 광야에서 출애굽해서 나와서 광야에서 어려우니까 애굽에서는 고기도 먹었는데 광야는 고기도 없다며 어디가 고기가 있느냐며 모세를 원망한다. 모세가 기가 막혀서 ‘이 고기를 어떻게 주나?’, 하나님께서 “그래, 내가 백성들에게 한 달 동안 그 입에서 신물이 나도록 고기를 먹여 주리라.”고 하셨다. 모세가 그 말을 듣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해야 되는데, 모세가 그 믿음의 고수가 안 믿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얼마 전에 홍해를 기적처럼 건넌 모세가 하나님께서 “내가 고기를 주겠다. 입에서 신물이 나도록 먹여주겠다.” 그래서 모세가 말한다.
 
*민수기 11:21-23,
21 모세가 이르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 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한 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22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장정만 60만이다. 여자, 어린아이들, 합치면 200만이 넘는다. 이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고기를 정말 풍성하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가능한 것인지? 모세가 뭐라고 하냐면 모세 생각이 안 된다는 것이다. 23절에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내가 내 말이 너에게 그대로 응하는 것을 보리라.” 내 손이 짧으냐며 하시면서 하나님은 내 손이 짧지 않다고 하신다.
 
*민수기 11:31,
31 바람이 여호와에게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영 곁 이쪽저쪽 곧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 쯤에 내리게 한지라.
- 감이 안 잡힐 것이다. 진영 하룻길, 하나님께서 메추라기를 몰아가지고 어떻게 하냐면 사방 30킬로니까 동서남북이 30킬로씩 해서 거기다가 메추라기를 1미터씩 산처럼 쌓아가지고 그냥 여러분, 메추라기를 1미터씩 산처럼 수원까지 쌓였다고 생각해 보라. 별로 반응이 없는 것 같지만 이것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다. 모세가 두 손을 들었다. 모세 같은 고수도, 홍해를 건넌 사람도 주의 손이 함께 한다고 그랬을 때, 잘 믿어졌다.
 
특별히 오늘 44주년 우리 교회 초창기 때 있었던 많은 분들이 교회에서 기적 같은 역사를 많이 경험했다. 우리 오늘 우리도 모르게 약간 메너리즘에 빠진 그런 약한 성품이 있다면, 오늘 다시 어린 아이처럼 순전하게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 주의 손이 함께 하는 기적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메추라기를 동풍에 몰아서 사방 30킬로를 1미터로 쌓아서 한 달 동안 입에서 신물이 날 수 있을 정도로 실컷 먹여주는 것이다. 호주에 여러 도시에서 특별히 호주가면 메추라기가 맛있다. 그 고기를 한 달 동안 200만 명이 주야장창 먹여준다는 것이다. 호주 시드니, 여러 도시에서 메추라기 요리가 있다. 엄청 맛있다. 닭보다 훨 맛있다. 여러분 그것을 2백만 명이 그냥 주야장창, 여러분 제가 강조한 이유를 알아야 한다. 우리도 모르게 이 순전함이 사라진 것이다. 주의 손이 함께 하시길 기대하자. 오늘 이 자리는 주의 손이 함께 하시는 현장이다.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 자체가 주의 손이 함께 하시는 증거이다.
 
이 안디옥교회는 주의 손이 함께 하셔서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와서 대 부흥을 일으켰다. 이 안디옥이라는 이 장소에 제가 두 번을 가 보았는데 그 당시 로마 제국 시대에 제 3의 도시였다. 두 번째 도시는 알렉산드리아, 세 번째 도시는 안디옥이었다. 인구가 50만 이상이 되었고 요즘 같은 부산 같은 항구이고 뉴욕 같은 항구였다. 여기는 상업이 발전되어 있고 대신 부패하고 타락한 도시였다. 그 부패하고 타락한 도시에 4세기에 유명한 설교자, 황금의 비의 설교자이자 교회 사가였던 ‘크리스소스톰’은 안디옥 교회가 얼마나 부흥을 했는지 안디옥 교회 출석이 십만 명이었다. 그것도 수평이동이 아니라 다른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시 오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완전히 회심성자이다. 그래서 기가 막힌 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도 이런 부흥을 경험한 평양 부흥을 경험한 한국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이런 메추라기를 30킬로미터에 1미터씩 주시는 여호와의 손이 짧지 않는 그 은혜가 우리 가운데 접목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느끼는 것은 목회도, 가정도 자녀교육도 주의 손이 함께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주의 손이 함께 하지 않으면 헛된 것이다. 부모가 아무리 잘나고 잘 준비가 되었어도 자녀만큼은 마음대로 못한다. 부모가 좋은데 자녀가 문제가 나올 수 있고 또 부모가 형편없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 자녀가 하나님 앞에 나와 가지고 예수 믿고 하나님 손과 함께 하시면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제가 부모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그 자녀들이 혼자 예수를 믿고 잘 된 케이스를 말하라고 하면 저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수많은 그런 사람들이 그런 많다. 여러분, 주의 손이 함께 하시므로 여러분들이 삶의 개인과 가정에 부흥이 일어나기를 원하다. 그러면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교회 내에 똑똑하다는 사람들 가운데 “주의 손이 다한다면 우리가 할게 뭐있나?”라고 한다. 그리고 요즘 이런 질문도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삶은 전적위탁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할게 뭐있냐고 할 수 있지만, 주의 손이 함께 하시면 할수록 할 일이 더 많아진다. 이게 뼈 때리는 이야기이다. 주의 손이 함께 하시고 우리가 주님께 전적 위탁하면 할수록 창의력을 주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통찰력을 주시고, 우리에게 더 귀한 일을 하도록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계산과 생각을 가지고 신앙을 판단하면 안 되고 주의 손이 함께 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저는 어제도 “주여 내일 예배를 살려주시옵소서!” 여러분 저는 예배를 많이 드린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가정예배, 주일 예배, 등 수많은 예배를 드렸고 하루에 여섯 번씩 많은 예배를 드린 사람이지만 지금도 주의 손이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매 예배마다 벌벌벌 주님 앞에 녹는 것이다. 말도 안 된다고 하지만 주의 손이 함께 하면 은혜가 있는 것이다. 모든 예배 가운데 “주의 손으로 내일 예배를 살려주시옵소서!” 한다. 주여 성령의 은사들을 오늘도 내려 주소서. 이 귀한 성령의 은혜와 축복들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기를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내 생애가 끝나는 날 우리가 감사로 끝나게 해주시라고 해야 한다. 내 삶이 목표가 주님의 손이 함께 하여주셔서 내 삶의 부흥을 체험한 생애가 되도록 도우신 주님의 은혜를 찬양한다.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한 번이라도 주의 손이 함께 하지 않으면 부흥을 언제 체험했는가? 저와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보통 사람들이 갖는 삶의 목표가 있다. 뭐 잘되고 정말 좋은 그런 인생도 다 구하지만 여러분 진짜 마음속에 주의 손이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역사가 우리 가운데 체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 지금 중요하다고 생각이 든다. “내 삶의 주의 손이 함께 하시므로 내 생전에 부흥을 체험하는 것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주의 손이 함께 하심에 내 가정과 내 일터에 부흥이 일어난 줄 믿는다. 주여 성령의 은사들을 오늘도 내리어 주옵소서. 이것이 한국교회가 받는 독특한 영성이다. 이것이 첫 번째 부흥의 엔진이다. “주의 손이 함께 평생 함께 하는 부흥의 엔진이 되게 하옵소서.” 사랑의교회와 한국교회가 주의 손이 함께 하는 증거가 있도록 도우시길 기도하자. 두 번째는 24절이다.

*사도행전 11:24,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저 노른자위가 사도행전의 부흥의 중요한 기록이다. 그 이유는 바나바는 성령이 충만하다고 했듯이 이름 없는 무명의 사람들을 통해서 개척한 멤버들인데, 그중에서도 그분들뿐만이 아니라, 바나바라는 저 사람의 신앙 인격 때문에 착한 사람이라는 것은 본래 성품이 착한 사람이다. 참 법 없이도 살 수 있다. 이런 좋은 성품과 거기다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의 어떤 자연적인 인격과 그의 성령과 믿음의 인격이 잘 조화가 됨으로 말미암아 바나바의 신앙인격 때문에 부흥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분명이 능력이다.
 
II. 바나바 같은 신앙 인격자를 통해 부흥한다(성령의 사람).(24절)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될 때에 교회는 부흥하는 것이다. 교회 내에 보면 어떤 분들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분들이 많이 계신다. 물론 속은 안 그렇지만 겉으로 볼 때는 정말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분들도 있다. 문제는 이런 분들이 소위 영적인 은혜라 할까? 영적인 센스라 할까? 감각은 무디고 느려터지는 분들이 많다. 사람은 착하고 좋은데 말씀의 은혜와 생명의 역사와 성령의 은사와 신앙의 복음과 이런 것들이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듣는다. 새벽기도의 은혜와 뭐 영성이 있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그리하는데 새벽기도 갔다가 오는 길에 남의 밭에 들어가서 호박하나 딱 따서 가지고 집에 와가지고 된장찌개 끓여 먹으면서 “주여 감사합니다.” 이러면 되겠냐고??? 이게 말이 아닌 것이다. 한국교회가 이제는 140여년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바나바와 같이 자연 인격적인 성품과 어떤 기름부음의 충만함과 신앙의 인격의 두 가지가 잘 조화가 되어서 부흥의 원천을 새롭게 경험할 줄로 믿는다. 어떤 분은 교회서는 은혜도 많고 축복도 많은데 집에서는 아빠, 엄마로서 존경을 못 받는 것이다. 가슴이 아프다. 우리는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자연인격과 신앙인격이 조화가 되어가지고 우리가 부흥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우리 한 분 한분을 붙잡아 주시길 원한다. 그러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다. 그 다음에 착한 사람이라는 것이 추상적인데 이것을 구체적으로 23절에 설명을 하고 있다.
 
*사도행전 11:23,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성경에서 바나바의 자연인격과 신앙인격을 구체적으로 세 가지 동사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는 은혜를 본다. -witness, 은혜를 본다.

두 번째 기뻐한다. -rejoice.
세 번째는 권하다. 잘 권하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44주년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 번 기도제복으로 삼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면, 이 방송과 여기 참여한 모든 분들은 “하나님 아버지, 평생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은혜를 보는 자 되게 하소서. 그리고 함께 기뻐하는 자가 되게 하여주시고 남들이 앞세우는 자 되어야 한다. 바나바가 바울을 앞세우듯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앞세우고 권면하고 스카웃하고 세워주는 그런 사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첫 번째는 은혜를 본다. -witness, 은혜를 본다.  바나바의 이름은 권면하다. 권위의 아들이다. 위로하는 아들이다. -son of consolation.
은혜를 본다는 말이 뭐냐면, 안디옥 교회는 개척교회였다. 개척 교회는 문제가 많다.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 개척교회에 문제를 먼저 본 것이 아니라 은혜를 먼저 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흥하고 성령이 충만하고 내 인생의 가치와 보람을 갖고 살기를 위해서는 은혜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첫 번째는 우리는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우리는 수많은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은혜가 눈에 보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남의 단점보다 장점이 보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떤 사람은 진짜 미스터 폴더 파인더, 그냥 단점만 발견하는데 전문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하시옵소서!~
 
두 번째는 기뻐한다. 남 잘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썩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쟁 사회에 살다보니까 한반도 오천 년을 살다보니까 우리는 경쟁구도이다. 왜냐면 남이 내 파일을 가져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 남 잘 되는 것을 기뻐하지 못한다. 한국 사람들은 밥 먹으러 가면 화장실을 못 간다. 화장실 가 있는 동안에 씹기 때문이고, 그리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8촌이 땅을 사면, 그냥 샀구나, 남이 땅을 사면 꽃다발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남 가까운 사람끼리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생애를 다하는 그날까지 우리가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했는데 가까울수록 남들을 기뻐해 주고 그들과 함께 기뻐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우리가 권했다. 착한 사람이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다는 것은 좀 추상적인데 이것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는 은혜를 보는 것이며, 기뻐하는 것이며, 권면하고 위로하는 것이다. 여기 대표적인 것은 25절에 나와 있다.

 
*사도행전 11:25,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사울은 그 당시 사도행전 9장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다가 꺼꾸러져가지고 자기 고향에 가서 다소(터키)에 가서 사울의 고향인데 바울의 우물물이 지금도 있다. 그런데 안디옥에서 다소까지 택시로 몇 시간 걸린다. 먼 거리이다. 거기를 바울을 데리러 갔다 오는 것이 보통 정성이 아니다. 그런데 바울을 바나바가 데리러 간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을 아니까, 자기는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라서 아주 그냥 앗사리 하고 강력하고 분명한 리더쉽을 원하는데 자기보다 더 사울이 더 좋겠다고 생각하고 정통 신앙과 말씀의 깊이가 더 잘하는 것을 자기가 알고 사울을 데리고 오면 더 좋겠다고 이리 생각한 것이다. 자기가 데리러 가는 것이다. 그게 쉬운일이 아니다. 혼자 있으면 자기가 안디옥 교회에 리더이다. 그러면 나중에 11장과 13장부터는 그 전에는 바나바와 바울이었지만 바울과 바나바로 바뀐다. 바울은 능력, 리더쉽, 성경에 대한 깊이, 생각하면 안 데리고 오고 혼자하려고 하는 마음이 왜 없었겠나? 이 바나바는 부흥을 경험하는 사람이다. 부흥의 능력의 원천인 사람이니까, 권면하고 위로하는 사람이니까, 남이 잘되는 것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바울을 데려와서 리더를 만든 것이다. 남을 성공시키는 자이다. 사랑의 교회는 오래된 형제자매들, 같이 은혜를 보고 기뻐하고 권면하는 부흥의 현장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 K부흥을 위하여 내가 데려올 바울이 어디 있는가? 내가 스카웃 될 바울이 어디 있는가? 내가 앞세워야 할 바울이 어디 있는가? 그래서 바나바처럼 이 신앙인격은 부흥의 불길을 일으키는 점화장치와 같다.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이다. 시편을 보자
 
*시편 24:3,
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을 체험하고 영적인 갈망이다.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것은 하나님 만나려고 그런 것이다. 하나님께 내 삶을 튜닝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내 삶을 가득 채우는, 부흥을 체험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인가? 부흥의 산에 오를 자 누구인가? 부흥의 장소에 설 자가 누구일 것인가? 오늘 우리의 마음의 소원에 하나님 우리 모두가 다 부흥의 산에 올라가길 소원한다. 어떤 사람일까? 4절에
 
*시편 24:4,
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순전한 신앙인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의 인격이 부흥을 통하여 다듬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러분, 한국교회의 지금 윤리 문제를 많이 이야기 하는데 윤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기독교 윤리는 유교적으로 또 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 기독교 윤리는 부흥을 체험해야 해결되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평양부흥을 경험하고 나니까, 거기에 축척제도, 노비제도 거기에 어떤 불의한 물질의 부의 문제들이 부흥을 체험하고 나니까 자연스럽게 축척제도 노비문제, 수많은 물질로 인해서 부흥을 경험하고 나니까, 은혜를 받으니까 자연스럽게 마음의 인격의 정결함을 통하여 해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윤리 문제를 유교적 윤리 문제로 접근 하면 안 되고 부흥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것이 한국 교회가 전 세계 교회에 보여주어야 할 K 부흥의 DNA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윤리학자들의 논리를 뛰어넘는 K부흥의 기름 부으심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부흥의 은혜는 항상 부흥의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주의 손이 함께 하셔야 되고,. 그것을 통한 성령의 사람들이 되어서 신앙인격이 준비가 되어야 하고 그럴 때 마지막 부흥의 표상, 역할모델, 이그젬플(example.)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안디옥 교회였다. 안디옥교회는 먼저는 이렇게 나와 있다.
 
II. 부흥의 표상 안디옥 교회(성령의 공동체)(26).
 
*사도행전 11:26,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부흥의 표상이다. 안디옥 교회가...그 이전까지는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나사렛 땅이다. 혹은 무슨 팔로우다. 이런 식으로 있었는데 처음으로 안디옥 교회에서 크리스천(그리스도인)의 이름이 시작이 되었다. 크리스천이 뭔가? ‘Christian’은,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 한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 =Belong to Christ!,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Christ I am nothing.=예수님이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안디옥 교회로부터 시작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고, 말씀을 가르칠 때, 그냥 드라이한 말씀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골로새서 3장에 있는 것처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과 말씀으로 서로 화답하는 것이다. 말씀과 찬양과 기도가 어우러져서 거기에 생명력 있는, 기름부음 있는 말씀의 공부가 된 것이다. 그게 안디옥 교회이다. 그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들이 배출되었다. ‘잉나티우스’라는 여러분, 바나바, 바울 다음으로 초대교회 교부 가운데, 우리 교회 제자훈련 세미나 할 때, 제일 먼저 ‘교회 론’을 이야기 하는데, 교회 론의 창설자, 교회 론을 전체 정립을 한 사람이 ‘잉나티우스’로부터 시작했다. 나중에는 원형 경기장에서 순교당하셨는데, 잉나티우스 안디옥 교회 출신이고 4세기의 초대교회의 ‘황금의 비’라고 설교의 황태자, 크리스소스톰이 안디옥 교회 출신이다. 그 이후에 어거스틴, 루터, 칼빈, 메튜 헨리, 웨스트 코트, 라이트 푸트 알포드, 라는 근대 들어서 알포드 성경 해석 집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고 훈련하는 안디옥 교회의 역사를 그대로 이어 받는 종들을 통하여 부흥을 계속 이어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회 역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스큐로바 안디옥, 안디옥 학파, 당시에 초대교회는 두 종류의 성경을 보는 어떤 눈이 있었다. 하나는 스큐로바 알렉산드리아, 알렉산드리아 중심으로 해서 필로, 오르겐, 클레멘트라는 교부들이 있었는데, 그분들을 중심으로 해서 영회를 했다. ‘알레그리카’라고 풍미적인 해석을 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부활해 고기를 몇 마리 잡았냐?, 153마리, 153마리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냥 153마리 많이 잡은 것이다. 거기다. 꼭 예수님 공생애 33년이다. 그다음 150문도 기도한 것, 그래서 153, 와 은혜가 된다. 등, 이런 게 건강하지 못한 해석이다. 그런데 스크로바 안디옥은 성경은 문법적으로 문자적으로 역사적으로 아주 균형 감각이 있게 제대로 해석한 것이다. 사랑의 교회 제자훈련은 스크로바 안디옥의 후예가 되는 줄로 믿는다. 한국교회도 길선종 목사님, 박현종 박사님, 박유선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우리교회 옥한흠 목사님, 이런 우리가 44주년을 맞이해서 이런 귀한 흐름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균형 잡힌 말씀의 축복을 주시길 바라는 것이다. 사역도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한때 한국교회 성령운동을 할 때 불로, 불로 하면서, 반대로 말씀으로, 말씀으로 서로가 막 이렇게 맞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의 역사와 말씀의 기름 부으심이 균형을 잡아야 할 줄 믿는다. 두 가지가 균형이 잡히니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사도행전 11:28-30,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두 가지 사건이 나오는데 아가보의 예언(豫言) 사건이 나오고, 그다음에 구제(救濟)에 대한 문제가 나온다. 이 구제문제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앞에 6장에 보면 초대교회의 예루살렘 교회가 막 싸우고 내부분열이 일어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그리고 예언의 문제, 성령의 사역은 깊이 들어가다 보면, 많은 경우 이 성령의 사역은 예언의 문제로 흘러가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너무 치우치면 그런 일이 일어나는데, 이 예언과 구제의 문제가 안디옥 교회의 균형 잡힌 부흥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해결된 줄 믿는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다. 모든 부흥은 두 가지 엔진이 있다. 주의 손이 함께 하시고 그 손이 함께 하신 성령의 사람들을 통하여 성령의 공동체가 될 때에 부흥이 되는 것이다.
▷부흥은 성령의 능력을 받은 성령의 사람들이 성령의 공동체를 이룰 때 일어난다. 아멘,
-그러면 한국교회가 부흥의 은혜를 나누어줄 DNA가 무얼까? 우리에게 4가지가 있다.
 
▷ 한국교회 부흥의 DNA 4가지.
 
1. 첫 번째는 순교의 영성(순교의 피).
-양화진에 가면 145명의 선교사님들이 거기에 순교하시고 피 흘린 분들이 많이 계시는데, 전 세계 어느 나라가 피선교지에 한 지역에 145명의 고생하고 순교하시고 돌아가신 그런 선교사님들이 묻혀있는 나라가 별로 없다. 우리 광주에도 있다. 하나님께서 독특하게 이 순교의 피를 흘린 곳이 우리나라이다. 6.25때에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공산당에게 순교를 당했는가? 예수 믿는다고... 지금도 북한의 지하교회는 순교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 순교의 영성의 기름부음과 강력함이 계속해서 한국교회를 통하여 역사해야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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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두 번째는 기도의 영성(새벽기도, 독특한 영성, 구국기도, 산기도, 금식기도, 철야기도).
-수많은 한국교회는 특별히 구국기도, 나라를 위한 기도, 이 나라를 위한 한국교회의 기도의 강력한 복음의 DNA가 이 민족을 살려주시고 아직까지 우리가 침공 받지 않은 줄로 믿는다. 기도의 영성이 한국교회의 K부흥의 놀라운 역할을 할 줄로 믿는다.
 
3. 세 번째는 주일성수 영성.
-세계 교회 어느 나라에 비교해서 한국교회는 주일예배를 지키는 주일 성수의 유산이 있는 것이다. 사업이 어려워도, 내일 시험이 있어도,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주일예배는 지켜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세계교회 앞에 K부흥의 어떤 중요한 유산으로 펼쳐야 될 것으로 생각이 되는 것이다. 지난 2년 반 동안에 코로나 펜데믹 가운데, 혹시 한국교회 가운데 이 생명을 걸고 위그노들처럼 생명 걸고 주일예배를 지키는 이것이 좀 약화 되었다면, 하나님께 다시 한 번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동체를 통하여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아멘!!~
 
4. 네 번째는 말씀의 영성.
-세계 어느 나라에 비해서 우리나라는 선교사님이 들어오기 전에 말씀이 먼저 들어왔다. 제가 말씀이 들어온 것을 연구하다 보니까 처음에 한국의 성경이 들어올 때, 눈물겨운 과정이 있었다. 가슴이 찡한 것이다. 국경 검문소를 통해서 성경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중에 하나로 성경 낱장을 그냥 가지고 오면 안 되니까, 금서(禁書)니까, 한 장 한 장을 낱장으로 집신으로 만들어서 가지고 엑스트라가 있어도 상관이 없으니까, 그래서 나중에 그것을 가지고 들어와서 집신을 해체해서 다시 하나하나 펴서 인두로 다려서 책으로 제본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래가지고 선교사님 들어오기 전에 그 성경 가지고 은혜 받아서 세례 받는 사람들이 생겼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한국교회가 이 은혜를 다시 회복하기를 바란다. 세 가지 기초위에다가 한국교회의 순교적 영성, 기도의 영성, 주일예배(성수)영성, 그리고 말씀의 영성이 잘 조화된 사랑의 교회, 우리 자신이 됨으로 말미암아 주님 앞에 큰 온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에 새롭게 하소서. 할렐루야,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오~~~영광 가득한 새날 주소서 오~ 주님 나라 이 땅에 임하소서.♩


♣요약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서 간절하게 원하여야 할 것은. 우리가 참으로 갈망하는 심령으로 이 시대의 부흥을 소원하는 부흥의 점화장치가 되어야 한다. 환경적으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주님 함께 하심을 믿고 그 고통과 어려움이 부흥의 기폭제가 되게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길 기도하고, 우리 모두가 바나바처럼 자연인격과 신앙인격이 균형을 잡아서 공동체를 살리는 일에 쓰임을 받아야 한다. 성령께서 진실한 일꾼들로 삼아주셔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말씀으로 무장되어서 우리가 교회와 한국교회에 네 가지 영성이 K부흥으로 세계 교회의 진원지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들은 헬라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했다. 전에는 사람들이 베니게와 구브로, 안디옥에 와서도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으나 이제는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져, 안디옥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혼합된 교회가 되었다. 안디옥 교회의 교회에 파송을 받은 사람은 바나바이다. 바나바는 사도들이 인정하였던 신실한 자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또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된 곳도 이곳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크리스티아노스’에서 온 말이다. 이는 이방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지칭할 때 쓰던 단순한 호칭으로 경멸의 의미가 담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스러운 이름이었던 것이다. 신자들은 이 호칭을 2세기경에 정식으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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