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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12월 26일)"

제목: "한 해를 어떻게 마무리 할까?"
말씀: 마태복음 18:21-35
기도: 남동우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 영광찬양대(축복)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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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21-35,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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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일 추운 날이다. 영하 20도 체감온도이다. 강추위를 뚫고 나온 성도님들을 영광과 존귀이신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3일 동안 금요일, 토요일, 오늘이 다 주일 같다. 이날은 주의 날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이 날은 주의 날이기에 기쁘다. 하늘로부터 말씀의 능력이 내려오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마태복음 18:23,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예수님의 비유에 가장 중요한 특징은? The Kingdom of The God. 하나님의 나라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했다. 그래서 천국이라는 말로 했다. 오늘 하나님의 나라는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는 어떤 임금과 같다고 말한다. 오늘 한 해의 마지막 주일날에 마무리 하는 이 시간에 이 말씀이 위로부터 부어주시길 원한다. 오늘은 용서의 기적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겠다.
 
I.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이다.
 
-용서는 하나님께서 시작해서 우리에게 내려온 것이다. 그래서 복음의 은혜가 없으면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용서를 깨닫지 못하면 결국은 우리 마음이 지옥이 되는 것이다. 특별히 기독교의 용서의 주체는 내가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가 시작됨을 확신한다. 보통 우리가 용서를 이야기 할 때 우리는 세상적인 판단으로 말한다. 기독교의 용서는 피해자가 자기희생을 통하여 용서의 문을 여는 것이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이 세상은 용서하려고 할 때, 그 용서의 조건이 충족 되어야 용서한다. 회개한다든지 사람이 바뀐다든지 용서의 실마리가 풀려야 하는데 기가 막히고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기독교의 용서는 피해자가 자기희생을 통해 용서의 문을 여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다. 피해자가 자기희생을 통해 용서하는 것이다. 마칠 때는 이 말씀이 반드시 이해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로 인해 최대의 피해자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독생자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용서의 방식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용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다른 어떤 때보다도 용서에 관한 한 몇 배가 필요한 것이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니, 기가 막힌 일이다.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용서에 관해서 오늘 새 판짜기가 우리에게 일어나야 하는데 될 수 있도록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담아야 한다.
 
*마태복음 18:21,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가 어떤 질문을 한다. 예수님께,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 하냐고 묻는다. 일곱 번 째하냐고 묻는다. 당시에 유대 율법인 토라는 형제를 세 번까지는 형제를 용서하지만 네 번째 죄를 지으면 그 형제를 경멸하고 용서하지 말고 증오하라고 그렇게 가르쳤기에 완전수인 일곱 번을 용서하라고 하면 자신은 아주 관대하고 긍휼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약간 으쓱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야기 했다. 그러니까 일곱 번 이야기 한다. 예수님은 대답하기에 일곱 번이 아닌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도 하라고 하신다. 우리는 흔히 이야기하는 490번이다. 어떤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인가? 핵심은 용서에 관한한 무한대이다. 좀 더 하나님의 나라는 무한대이니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으로 살려면 뼈에 새겨야 한다. 용서에 관한한 무한대이다. 이 무한대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해결할 수 있는데 그 뜻은 기존 관념은 쇠몽둥이로 내려치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해가 잘 되도록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이 시몬이라는 바리새인 집에 가셨다.
 
*누가복음 7:44-46,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거기에 죄 많은 여인이 들어와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신 후에 그 여인은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고 그 위에 향료를 뿌린 사건이 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시몬이 생각했다. 누가복음에 이 사람은 메시아가 아니야! 라고 말한다. 만약 선지자라면 이런 여인이 자기 발을 만지도록 내 주겠는가? 한다. 그때 예수님께서 시몬의 생각을 아시고 누가복음에 나온다.
 
*누가복음7:47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용서에 관한한 누가복음 이 7장 47절에 이 원리가 그대로 접목된다. 많이 용서함 받음 사람이 많이 용서할 수 있다. 적게 용서함이 적게 용서함을 받고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이 큰 사랑을 할 수 있다. 이 용서에 관한한 내가 용서하는 수준이 남을 용서하는 수준과 정비례한다. 내가 용서받은 수준이 남을 용서하는 수준과 같다.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서 이 말씀이 이해가 되어야 한다. 핵심은 바리새인인 시몬은 정죄함에 관심이 더 많았고 예수님은 구원에 관심에 있다. 하나는 정죄에 관심이 있고 하나는 구원에 관심이 있다. 이것이 21세기의 코로나 펜데믹을 이기는 우리들과 꼭 같다. 우리는 정죄하고 용서하지 아니하고 비판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그게 아니야, 이제는 정말에 구원의 차원으로 올라가라고 하시며 마음을 열고 은혜의 주류에 서는 것이다. 어느 때까지 용서에 관한한 날마다 찔끌찔끔 하는가? 믿음으로 용서하는 것, 용서로 에너지를 주는 것, 용서로 여기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정죄보다는 구원의 관심을 갖기를 원해야 한다. 정죄보다는 남을 세우고 용서하는 것, 믿음의 눈을 갖게 되기를 소원한다. 문제는 우리가 남을 비판하는 마음이 앞선다. 수많은 어려운 일들을 겪었어도 손 볼 사람이 몇 명이 있다. 그러나 주님이 내 마음을 친다. 그러고 손볼 사람이 여럿 있다고 말을 하는데 선수이고 상처 받는데 선수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영이 비판한 것을 용서하지 않는 한 우리의 영이 무기력하고 무능력해지고 헤매게 되어 있다. 한국 교회가 서로 비판의 칼날을 주고 받는 한 한국교회는 무능력하게 되어 있다. 한국교회가 격려하고 기도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우리 주님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 대해서 그 여인의 정죄에 관심을 기울이신 것이 아니라 다시는 범죄하지 말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은 이와 같이 죄를 지적하고 교만을 하지만 바리새인은 죄를 비판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전문이지만 예수님은 죄 때문에 힘들어하는 자를 비판하는 적은 없으시다.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자를 예수님은 뭐라고 하신 적이 없다.
 
*요한복음 8:11,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바리새인은 정죄하는 일이 전문적이다. 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고 율법으로 하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여인의 죄를 사소하게 여기거나 죄가 아니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 죄지은 여인에게 정죄의 형틀을 씌우지 아니하고 그 여인이 다시 살아날 길이 뭔지 그 여인이 어떻게 하면 살 수 있고 구원 받을 수 있는지를 거기에 관심을 갖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래서 이 내용을 한 해를 결산하는 시간에 다시 한 번 말한다.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한 해를 제대로 마무리를 하고 싶은가? 무능력을 벗어나고 싶은가? 용서에 관한한 많이 받은 용서를 하고 싶은가? 그 눈에 뜨려면 이 비유를 제대로 깨달아야 한다.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결산할 때 만달란트 빚진 자를 데리고 왔다. 왕에게 만달란트 빚진자가 있었다. 만 달란트는 달란트는 고대 근동사회에서 가장 큰 무게 단위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당시의 무게는 한 사람이 짊어지고 가는 무게정도이다. 얼마나 큰 무게인지 모른다. 일만 달란트는 천문학적인 수치이다. 어느 정도인가면 당시에 사마리아, 갈릴리, 뵈레아, 팔레스타인, 전 지역에 일 년의 전체의 징수가 800달란트였다. 그 전체 국가의 12년 예산보다 더 크다. 전체를 합친 것이다. 일만 달란트면 전국가의 예산의 열 두 배 이상이다. 역대하 25장에서 유다 왕 아마샤가 용병 10만 명을 고용했다. 용병 10만 명을 고용했는데 지불 그 삯이 은 일백 달란트였다. 그러니까 용병을 천만 명을 고용할 수 있는 엄청난 액수이다. 그 백배를 고용할 수 있는 것이다. 어마무시한 수치이다. 측정 불가의 수치이다. 무한대의 빚이다. 그래서 아마 이 빚진 자는 조정의 관리로서 권력을 가졌던 자인데 왕의 종이지만 대단한 사람인 듯하다. 임금이 종에게 갚으라고 하니 갚을 것이 없는지라 그 왕이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물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한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갚을 수가 없다. 입만 살아서 다 갚는다고 한다. 그나마 하나님의 관심은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는 데에 관심이시고 살리는데 관심이시기에 그를 불쌍히 여겨서 그를 놓아주고 탕감했다. 탕감 받으는 이 사람이 돌아가서 우리 식으로 말하면 한 십 만 원정도이다. 십만 원 빚진 자에게 갚으라고 한다. 십만 원은 언제든지 갚을 수 있다. 그런데 그 것을 안 갚는다고 그 동료를 옥에 목을 잡고 감옥에 넣었다.
 

*마태복음 18:27,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감사하다고 나가는데 그 동료가운데 이 일만 달란트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자가 있었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이니까 백 데나리온은 천만원 정도 될 것이다. 그 돈을 갚으라고 잡아서 말하니 그래 갚겠다고 한다. 그런데도 옥에 잡아 넣어버렸다. 왕이 그 소식을 듣고 이 배은망덕한 자식아, 하시면서 아래 말씀을 하신다. 

*마태복음 18:32-33,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II.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바로 우리이다. 

-용서에 관한 내용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문학적인 빚을 탕감하시고 용서하신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죄를 짓고 있다. 매일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가리운 적이 하루도 없다. 매일 죄에 썩은 냄새를 내뿜고 산다. 하나님의 영광 가리운 것, 썩은 냄새 피운 것, 다 합치면 우리는 일만 달란트가 넘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용서하시지 않으면 우린 못 산다. 여러분과 우리 모두가 그렇다. 매일 죄를 짓고 산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다. 간단히 정리하면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시면 못 산다.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죄를 짓는 것이며 스스로 고통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자신을 스스로 다치게 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용서하지 않는 죄가 우리를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고 우리의 영혼을 산산이 조각을 낸다. 이 고통을 처리해야 하지 않는가? 용서하지 못하면 하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고 하신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고 비통하게 붙잡고 있으면 하늘에 축복이 날아가 버린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두려운 것은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과 멀어진다.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우리가 용서하지 않고 증오와 비통함의 영에 사로잡혀 있으면 하늘의 축복이 날아가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일 두려운 것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축복이 날아가 버리고 주님과 멀어지는 것이다.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용서하지 않으면 옥에 갇힌 것처럼 부자유한 인생이 된다. 참 용서는 참 자유를 가져다 주는데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자유가 없이 억압되고 딱딱하게 굳은 인생이 될 수 밖에 없다. 마음이 감옥에 갇힌 것처럼 되는 것이다. 감옥에 들어가면 꼼짝 못한다. 그러면 이 사실이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이다. 일만달란트 빚진 자이다. 이 사실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접목되어야 하는가? 

 
III. 용서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정리해야.

-오늘 이런 말씀을 드려도 많은 사람이 이렇게 반을 할 수 있다. 지금도 그 못된 인간이 나를 괴롭힌다고 할 수 있다. 제가 손볼 인간이 나를 지금도 괴롭힌다. 우리 가족이 당한 일을 알면 목사님도 열 받으실 겁니다라고 하며 그들도 우리가 겪은 만큼 그들도 겪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수치를 당했는데 어떻게 용서하냐고 한다. 그러나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여러분은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용서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잘못을 허락한다는 것이 아니고 악한 행동을 용서한다는 뜻도 아니다. 그들의 죄를 간과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이 상처를 준다고 할 때 그걸 덮어주는 것도 아니다. 그 못된 사람이 짓밟고 가고 일어난 일을 잊으라는 것도 아니다. 상처 받지 않았다고 일부러 가식을 떨라는 것도 아니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것처럼 일부러 화해가 되었다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람에게 가서 용서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핵심은
 
▷용서란 나는 더 이상 과거에 메이는 삶을 살지 않겠다고 용기 있게 결단하는 것이다.
-죄를 지은 사람을 풀어줌으로 내가 영적으로 자유로워지는 단호한 결단이다. 용서에 소심한 사람은 용서가 안 된다. 영적으로 담력과 기백을 가지고 결단을 해야 가능하다. 의식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의 용서가 고통을 바꾸거나 과거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를 감옥처럼 옥죄이고 고통의 부자유를 깨버리는 것이다. 용서는 미래를 날아오르겠다는 독수리의 용맹의 날개 짓이다. 쓴 뿌리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오늘이 마지막 주에서 다 용서의 아픔을 용서의 강에다 흘려버리라.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라. 과거에 대해서 얽매이지 않고 내가 미래의 이력서를 쓰길 결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나에게 피해를 끼진 사람이 고백하지 않아도 우리는 용서할 수 있다. 심지어 관계 회복이 있어도 우리는 용서할 수 있다. 용서는 마치 구원과 같아서 다른 사람이 용서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아도 용서할 수 있다. 너무 신비하다. 상대방이 몰라줘도 용서할 수 있다. 용서는 내 마음의 문제이기에 남이 청하지 않아도 용서할 수 있다.
 
※요셉은 자기 형제들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잘못을 한 형제들에 대해서 용서를 하지 않았다면 감옥에 갇혔을 것이다. 요셉이 형제를 용서함으로 자기 아버지 당대 최고의 바로 왕을 축복하는 자리까지 올라갔다. 야곱은 조그만한 족장이었다. 그런데 당대 최고의 황제에게 손을 얻고 축복하는 안수를 하게 된 것이다. 증오는 감옥에 갇히게 하지만 용서는 최고의 황제를 축복하는 미래의 자리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요셉도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기독교의 용서는 이러한 것이다. 용서는 미래의 문을 열어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믿음의 자리에 차원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용서가 내 남은 인생의 질을 결정하고 나뿐만이 아니라 내 아버지, 내 자식, 내 가족의 미래도 결정한다. 내 가족과 공동체의 미래도 결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중요한지 알면서도 감정이 따라가지 않는다. 나를 괴롭히고 나를 어렵하고 지금도 그렇게 하는 자 때문에 내가 구렁텅이에 빠지고 내가 죽는다고 해도 그 사람도 상처받고 그 사람도 나처럼 괴롭고 그가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것을 반드시 보고 싶다고 한다면 그것이 마음속에 또 아리를 틀고 계속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에게 용서가 어려운 이유가 있다.
 
▷용서가 어려운 이유는 용서를 막으려는 ‘사탄의 결사 항전’ 때문이다.
-용서는 구원의 길로 가는 것이고 용서는 미래로 가는 것이다. 그래도 용서가 안 되는 이유는 사탄이 용서를 막으려고 한다. 결사적인 함정이다. 용서하지 않는 사탄의 마음을 생각하면 섬찍하다. 용서의 문이 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사탄은 영원히 지워버리고 싶은 첫 단어이다. 용서만큼 주저앉히고 사탄을 철 천지 원수가 되는 무기가 따로 없다. 모세의 기도처럼 내 생명책에서 버릴지라도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한다.
 
*마태복음 18:34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옥졸이 뭐냐면 원어는 고문하는 자들이다. 용서가 안 되면 마음을 가두고 마음을 고문할 것이다. 고문을 어떻게 하는지 알듯이 살점을 뜯어내고 이빨을 뽑고 심지어 눈알을 빼내고 다리를 자를 것이다. 나중에 말을 아 안 들으면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한 조각 한 조각 포를 뜰 것이다. 여러분들에게 용서하지 않으면 내면을 갉아먹는 분노와 비통함이라는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당한 일을 곱씹으면서 밤새 잠을 뒤척이며 밤낮 삶의 고문을 하게 할 것이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왜 이런 고문을 당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자녀가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 그래서 우리는 용서의 새 판짜기가 있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원하시는 용서는 인간적으로 가혹하기 짝이 없다. 불공정하고 억울한 것 같다. 무한히 용서하라는 것은 참으로 가혹하고 우리 인간의 본성과 감성으로는 너무 괴리가 크다. 감당할 수 없다. 한두 번도 아니고 수 백 번, 아니 무한대로 하라는 것은 인간을 너무 잘 아시는 예수님의 입에서 하실 말씀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무한정 용서하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힘으로는 어림도 없지만 십자가의 용서를 깨닫는 자만이 용서가 된다. 이런 십자가의 용서를 깨달은 자만이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여 주시라고 기도해야 한다. 누구를 용서해 주시옵소서가 아니라 날마다 은혜의 물로 씻어주셔야 한다. 위조지폐는 수없이 만져봄으로 안다. 진짜 지폐와 위조지폐를 본능적으로 안다. 누구를 용서하고 싶으면 진짜 하나님의 은혜로 심령을 젖게 해야 한다. 일상에서 은혜의 샘이 마르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죄는 평생을 갚는다 해도 못 갚는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 갚아주실 것이다. 영적으로 소심한 사람은 용서가 잘 안 된다. 믿음의 담력을 가지고 진리의 말씀으로 강하게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용서에 관한한 어얼리 어댑터가 되어야 한다.
 
♣요약
나의 죄 때문에 최대의 피해자가 되어 주님은 십자가에서 무한대로 용서를 주셨으니 우리는 억울해도 자기희생을 통해 평생용서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정죄의 비판의 마음은 무기력과 무능의 사슬이니 용서하고 사랑하여 은혜의 기쁨으로 우뚝 서서 주님이 주신 진리로 마음의 쓴 뿌리를 용서의 강에 던져야 한다. 한 해의 마지막에서 용서하지 못한 좁디좁은 마음을 십자가의 용서를 깨달아서 다시 한 번 용서의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바다같이 넓고 우주 같이 광활한 하나님의 한이 없는 용서를 제대로 깨달아서 십자가의 은혜에 적셔져서 은혜 받는 선수가 되어야 한다. 새해에는 새로운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에 근거할 때 끊임없는 용서는 가능하다. 성도들 가운데 남을 진정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의 형제 사랑은 결국 하나님과의 사랑이 선행되어야만 온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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