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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는 울고, 이야기는 흐른다

어릴 적 할머니는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해진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이야기는 재밌는 건데, 좋아하면 왜 가난해지지? 예닐곱 살 꼬마로서는 알 수 없는 얘기였다.

할머니는 알쏭달쏭한 소리를 하면서도 손녀가 잠을 못 이루는 밤마다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떤 밤은 황금광인 줄 알고 재산을 털어 넣었다가 패가망신한 사내 얘기를, 또 어떤 밤은 미쓰꼬시 백화점 양식당에서 몰래 데이트를 하다가 시아버지 될 사람을 발견하고 줄행랑친 경성의 ‘모단걸’ 얘기를. 전등을 끈 캄캄한 방에 누워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궁금하고 이상한 일이 많아 잠이 더 달아났다. 겨울밤, 마루에 둘러앉은 노인들이 화로에 알밤과 쇠고기를 굽고 담배를 태우며 나누던 이웃 나라 이야기 또한 부엌에서 빈대떡을 부치던 며느리의 밝은 귀를 거쳐 밤잠 없는 아이에게로 왔다.

그래, 그런 경로로 이야기는 내게 소설보다 먼저 왔고, 역사보다 앞서 도착했다. 몇 해 전 전봉관 선생의 『황금광시대』를 읽고 나서야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되었지만, 이는 거짓이든 참이든 상관없는 하나의 이야기가 자립한 뒤였다. 나는 역사 이전에 이야기로 한 사내의 불가해한 삶을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다. 사내는 이야기를 좋아한 만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을 테고, 그러니 모험을 좋아했겠지. 모험을 좋아했다면 분명 황금광을 발견했다는 친구의 말을 흘려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내가 땅을 날리고 월급을 차압당하다 요절하게 된 사연은 옛날이야기가 흘러가듯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내가 태어나기 오래전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할아버지의 삶을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이야기 덕분이다.

호기심이 많아 모험을 택하고, 그래서 모진 운명을 겪는 사내는 이노우에 야스시의 『둔황』에도 있다. 송과 서하와 거란이 땅을 뺏고 뺏기던 옛날 옛적 조행덕이란 사내다. 해독할 수 없는 글자를 읽고 싶다는 욕망은 송나라 선비 조행덕을 머나먼 사막의 땅 둔황까지 이끌어간다.

옛날이야기가 늘 그렇듯 『둔황』에도 사랑에 목숨 거는 여자가 등장하고, 외인부대의 용감무쌍한 무사가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다.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남자와 왕위를 잃어버리는 남자 역시 빠질 수 없다. 너무 익숙한 나머지 태어날 때부터 내 핏줄 속에서 돌고 돈 뜨거운 피 같은 이야기. 누군가는 역사 로맨스나 서사시라 부른다지만, 나는 그저 담담하게 ‘이야기’라고 부르고 싶은 소설이 바로 『둔황』이다.

읽을 수 없는 글자로부터 시작한 긴 행로는 조행덕이 둔황 명사산 천불동에 5만여 점의 경전과 제 손으로 쓴 필사본을 파묻는 것으로 끝이 난다. 한 작가의 상상에 의해 펼쳐진 세계가 둔황 석굴이라는 실재의 공간, 공백으로 남은 역사와 맞닿는 지점이다. 『둔황』은 역사적 뼈대와 유적 위에 지은 소설이지만, 이원호를 제외한 인물들이 가상의 존재라는 사실이 문제되지는 않는다. 이야기 속에서 진실이란 언제나 사실과 거짓을 넘어서는 것 아니던가. 그러니 이야기는 역사에 충실히 복무하지 않아도 좋다.

글자로 인해 시작된 모험, 즉 이야기가 결국 글자로 돌아간 것은 사필귀정이겠다. 그러나 전쟁의 와중에도 목숨이 아닌 경전을 지키고자 하는 인물들의 욕망은 기이하다. 서쪽에선 회교도의 코끼리 떼가, 동쪽에선 서하군의 말발굽이 밀려오는 고립된 성 안에서 경전을 두고 피난갈 수 없다고 고집하는 승려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가 읽은 경전은 극히 미미한 숫자에 불과합니다. 아직 읽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많단 말입니다. 읽기는커녕 펼쳐보지도 못한 경전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예요. 우린 경전을 읽고 싶습니다.”

읽고 싶다는 그들의 욕망은 지나치다. 그런데 그 어리석음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과연 그들만의 욕망이었던가. 고백하자면, 나 역시 이야기에 들려 있은 지 오래인데, 이 병에 약이 있다는 풍문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모래가 우는 산’이라는 뜻의 명사산(鳴沙山)에서 사라져간 인물들의 삶을 나는 단순히 허무로만 이해하고 싶지 않다. 거센 바람에 모래가 날아가듯 그들은 자취 없이 사라져갔지만, 생(生)을 걸고 묻어놓은 글자들과 이야기는 사막 속에서 온전히 살아남았으므로. 이런 식으로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한때 할아버지의 삶을 이해하려 애썼던 것과 같은 목적이다. 나에게 이야기는 과거에도 지금도 슬픔을 받아들이게 하는 유일한 방식인 것이다.

“재물과 목숨, 권력은 한결같이 그것을 소유하는 자의 것이었으나, 경전은 달랐다. 경전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불에 타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아무도 경전을 빼앗아 갈 수 없으며, 그 누구의 소유물도 될 수 없었다.”

나는 소설 속 이 문장에서 ‘경전’을 ‘이야기’로 바꾸어 읽었다. 오독이어도 상관은 없었다. 사막의 밤에 수많은 별이 뜨고 지지만, 별들 사이로 흐르는 이야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테니. 뜨겁게 달궈진 모래알이 바람결에 동쪽으로 동쪽으로 흘러 어느 밤잠 없는 아이의 베개 위에 내려앉으리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오현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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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이 둔황 석굴에 묻히게 된 사연은?

♣'둔황'줄거리

일본 역사소설의 거장 이노우에 야스시의 대표작. 이노우에 야스시는 『선데이 마이니치』에 역사소설 「유전」을 투고한 것이 인연이 되어 마이니치 신문사에 입사, 10여년간 종교, 미술, 출판 등 여러 분야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1950년 「투우」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고, 이후 시와 소설을 넘나들며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쳤다. 특히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역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바탕으로 역사소설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76년 일본 문화훈장을 받았고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이름을 올리는 등 일본의 국보급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둔황은 중국 간쑤성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실크로드의 요충지로, 둔황의 대표적인 유적인 막고굴은 현존하는 가장 완정한 불교 예술의 보고로 평가받으며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둔황』은 20세기 초 둔황 막고굴에서 발견되어 전 세계를 놀라게 한 경전의 비밀에 착안하여, 경전이 둔황 석굴에 묻히게 된 과정을 상상을 통해 재구성한 소설이다. 작가는 허무맹랑한 공상에 의존하거나 사료에 의한 객관적 실증에만 집착하지 않고, 빛나는 상상력과 탁월한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을 역사적 사실에 접목시켜 둔황 경전의 배후에 묻힌 역사적 신비를 소설로 되살려냈다. 이 작품은 출간 당시 폭넓은 독자층의 지지를 얻으며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다. 이듬해인 1960년에는 제1회 마이니치예술대상을 수상했고, 1988년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원제: 敦煌

저자: 井上靖(1907~1991)

발표: 1959년

분야: 일본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둔황

옮긴이: 임용택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49(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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