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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과 惡을 오가며 인간의 경계를 넓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농사일에 바쁜 어른들은 보이지 않았고 닭과 거위,개,돼지처럼 들에 데려가도 별 소용이 없는 가축들만 집에 그득했다.

특히 닭은 마루며 방까지 올라와 먹이를 찾다가 먹이가 없으면 화풀이를 하듯 마루와 방바닥에 똥을 갈겨놓곤 했다.

마루나 방바닥에 굴러다니던 책들은 닭똥을 닦아내기 위해 한두 장씩 뜯겨나가기 일쑤였다.

그런데 늘 바닥을 굴러다니면서도 그런 기박한 운명을 면한 예외적인 책이 있었으니,하드커버 표지에 케이스까지 딸린 「명화와 함께 읽는 이야기 성서」와 「햄릿」이다.

적어도 내가 어렸을 적 우리 집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구약성서의 이름 모를 저자와 같은 대접을 받았다.

「햄릿」은 학생이 많던 집안의 역사로 미루어 누군가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 산 책이 분명했다.

한 면은 한글로,한 면은 영어로 된 이른바 '영한대역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왼쪽 면에 있는 한글로 번역된 「햄릿」만 읽게 되었는데,진도가 쑥쑥 나가는 게 다른 책과 차별되는 성취감을 주었다.

「햄릿」이 형식으로는 생소한 희곡인 데다 번역자가 영어 대역이라는 점을 의식해서 최대한 직역을 했는지 무슨 말인지 모를 게 많았다.

그렇지만 읽고 또 읽어 백 번을 읽으면 뜻은 자연히 알아지는 법이라고 누군가 말한 대로 영한대역본 「햄릿」을 읽고 또 읽어 백 번을 넘어서자 극중 등장인물의 생각과 대사,이야기의 흐름은 훤히 꿰게 되었다.

그 덕분으로 훗날 셰익스피어는 물론이고 유진 오닐,사무엘 베케트,이오네스코 같은 희곡 작가들의 작품이 실린 희곡집이 그리 낯설지 않게 되었다.

셰익스피어가 현대의 희곡작가들과 구별되는 점은 그가 기본적으로 뛰어난 시인이고 극중 대사가 무운시(無韻詩)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약의 어세가 없는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이런 특색을 살리기가 대단히 어렵다.

원어로 읽는다면 처음부터 어세에 맞는 단어를 골라 희곡을 쓰면서도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자유자재로 성취해낸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을 훨씬 더 강하게 체험하게 될 것이나,예나 지금이나 그건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또한 번역본으로는 알 수 없는 원본의 말놀이, 양의어와 다의어 구사, 은유, 인유, 함축만 가지고도 셰익스피어는 수사학의 대가로 불릴 만하다.

하지만 내가 청춘기에서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나 다시 셰익스피어를 읽고 감탄한 것은 그런 기술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다.

그의 작품 속에 들어 있는 인물이 언제나 현재적이고 현대인의 삶이며 철학,가치관과 유비해서 재해석될 수 있도록 생생하게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 샤일록은 피도 눈물도 없는 복수의 화신이고 앤토니오는 친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할 수 있는 의리 있되 불운한 상인일 뿐인가.

바싸니오는 선량하고 운 좋은 구혼자이고 포오셔는 보기 드물게 현명한 신부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읽고 또 읽다 보면 샤일록이 앤토니오가 될 수 있고 앤토니오가 바싸니오가 되며 누구나 어릿광대 란슬럿트가 될 수 있다.

전형적이고 뻔한 인물이 보기에 따라 선악이 갈리며 해석에 따라 운과 불운이 뒤집힌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던 그라쉬아노, 설리어리오가 극중 흐름을 뒤바꿀 수 있다.

포오셔의 시녀 니리서는 역할이 포오셔의 화신이 되기도 하고 아교처럼 관습과 인물 사이의 틈새를 메운다.

기독교도 애인 로렌조와 사랑의 도피행을 감행한 샤일록의 딸 제시커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의심하는 현대인의 표상이다.

마치 우리 문학의 사설시조가 형식면에서 그렇듯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은 독자와 배우,관중의 인식과 상상의 범주 속에서 최대한의 인장력을 시험하는 듯 한껏 놀아난다.

「베니스의 상인」은 기승전결의 틀로 완결되지 않는 위대한 자연과 닮았다. 셰익스피어의 극중 공간은 희극이나 비극으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인생의 불확실성이 가진 자장으로 충만하다.

「베니스의 상인」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샤일록은 종교와 인종의 차별로 핍박받고 그에 저항하는 전사로 변신할 수도 있다.

앤토니오는 은행에서 천문학적인 돈을 대출받고도 운이 나빠 돈을 갚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공룡기업 총수가 될 수 있고,포오셔는 교활한 법 적용으로 기득권층의 이익을 옹호하는 법무법인 변호사로 해석될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한 인간이 악마처럼 잔인하고 비루한 데서 신과 같은 고결함과 지선을 가진 존재로 얼마든지 변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문학에는 범주가 보이지 않는다.

신화와 전설,민화,역사 등을 망라한 수많은 문학적 텍스트,비문학적 텍스트가 인용되면서 경이롭고 자족적이며 생명력 넘치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의 작품 또한 무수히 인용되고 변용되어 다른 텍스트에 생기를 불어넣을 운명을 갖고 있다.

그럼으로써 셰익스피어는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의 경계선을 최대한 길고 먼 곳으로 늘려놓는다.

※이 코너는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cafe.naver.com/mhdn)에도 함께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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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못 갚으면 살 1파운드를 떼어주기로 하는데...

베니스의 상인 줄거리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극작가로 평가받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1564년 영국 중부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1586년 고향을 떠나 런던에서 배우 겸 작가로 극단 활동을 시작했다.

1590년경 첫 작품으로 「헨리 6세」를 집필했고,1592년경에는 극작가로서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며 큰 명성을 얻었다.

「베니스의 상인」은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그가 이 작품을 쓸 당시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 아래 상업이 번성한 반면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갈등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상을 반영해 여러 극작가들이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와 '살 1파운드를 담보로 한 채무 계약'을 소재로 작품을 썼지만,그 어떤 작가도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을 뛰어넘는 인물을 창조하지는 못했다.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이 엿보이는 이 작품은 베니스의 부유한 상인인 앤토니오에게 그의 절친한 벗 바싸니오가 고민을 털어놓는 데서 시작된다.

바싸니오는 귀족인 포오셔에게 청혼에 필요한 돈을 빌리려 하지만 앤토니오의 전 재산이 무역선에 실려 항해 중인 터라 할 수 없이 이들은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을 찾아간다.

 평소 앤토니오에게 멸시를 받아온 샤일록은 돈을 빌려주면서 갚지 못할 경우 앤토니오의 몸에서 살 1파운드를 떼어내기로 조건을 건다.

앤토니오의 도움으로 바싸니오는 악명 높은 상자 뽑기 시험에 도전해 포오셔와 성공적으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하지만 그가 사랑을 쟁취하는 사이 돈을 갚을 기한이 지나 앤토니오는 법정에 서게 되고,샤일록에게 살 1파운드를 떼어줘야 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원제: The merchant of Venice

저자: William Shakespeare(1564~1616)

발표: 1596년 추정

분야: 영국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베니스의 상인

옮긴이: 이경식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66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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