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인간 이해의 첫걸음

어떤 작가들은 한번 만나면 혈육보다도 더 깊고 오래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나의 경우, 보들레르와 플로베르, 발자크 등이 그들이다. 발자크는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듯 소설 쓰기에 매달려 괴물처럼 살다 간 작가인 만큼, 독자로서 그의 전작(全作)을 읽어내기란 한평생으로 모자란다. 근래에 한국어로 초역된 《루이 랑베르》와 《나귀 가죽》은 인류사의 전무후무한 소설 프로젝트인 ‘인간극’의 서막을 차지한 의미심장한 작품들이다.

여기 한 소년이 있다. 루이 랑베르라는 이 소년은 다섯 살 때 우연히 구약성경을 접한 뒤 오직 책만을 끼고 살아온 유별난 존재. 발자크의 대표작 《외제니 그랑데》나 《고리오 영감》처럼 소설의 주인공 이름을 표제(表題)로 삼은 이 소설이 한층 흥미로운 것은 이 예사롭지 않은 소년의 신비로운 예지력과 광기가 발자크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곧 《루이 랑베르》(1832)는 발자크의 자전적 성장소설인 셈. 로댕이 조각으로 재현한 괴팍하고 완고해 보이는 발자크의 모습을 깜박 잊어버릴 정도로 작가 자신이 그린 소년의 초상은 매우 신비롭고 비장하다. 지금까지 한국 독자들에게 발자크와 그의 소설에 대한 인상은 실체보다 훨씬 편협하고 고리타분한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발자크 소설에 대한 신선한 시각을 제공하는 《루이 랑베르》와 《나귀 가죽》의 등장은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발자크는 백 편에 이르는 총체소설 ‘인간극’을 집필하면서, 마치 과학자처럼 획기적인 작법을 창안해 적용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인물재등장 수법’이다. 루이 랑베르가 18세에 방돔기숙학교를 나와 만난 여인 폴린은 《나귀 가죽》의 라파엘 발랑탱이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이기도 하다. 또한 《나귀 가죽》에서 라파엘에게 처음 페도라를 소개해주는 인물인 라스티냐크는 훗날 《고리오 영감》에 재등장한다.

『루이 랑베르』와 『나귀 가죽』은 발자크가 2500여명에 달하는 인간들을 소설에 등장시킨 인간극』의 세 가지 범주, 즉 ‘풍속 연구’ ‘철학 연구’ ‘분석 연구’ 중 ‘철학 연구’ 편에 속한다. 나폴레옹이 검으로 세계 제패를 이룩했듯이 발자크는 펜으로 세상을 평정하려고 했다. 《나귀 가죽》(1831)은 이러한 거대한 야망으로 변호사의 길을 버리고 작가의 길로 뛰어든 발자크가 10년 가까이 무수한 시도와 참패 끝에 대중의 환호를 받은 첫 ‘물건’이다. 여기에서 물건이라 지칭한 것은 이 소설이 당시 인쇄출판업과 독서매체의 활성화에 따른 베스트셀러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고, 나아가 소설이라는 장르가 ‘상품’으로서의 교환가치를 획득하면서 자본주의 산업의 총아로 급부상하는 길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여기 한 청년이 있다. 그의 이름은 라파엘 발랑탱, 그는 지금 파리 센 강가를 걷고 있다. 때는 1830년 7월 혁명이 파리를 휩쓸고 지나간 어느 오후. 파리는 혼란 속에 새로운 체제를 모색 중이다. 센 강을 배회하고 있는 라파엘의 머릿속은 온통 자살 생각뿐이다. 정치 과잉의 시대, 자본 과욕의 시대, 파리 사교계의 꽃 페도라를 향한 과도한 열정이 무위로 끝나고, 그러는 사이 생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버린 결과다. 그의 가슴에는 환멸만이 가득하고, 그의 뇌리에는 오직 죽음의 욕망만이 들끓고 있다. 그런 그 앞에 골동품상 노인이 나타난다. 노인은 그가 원하는 것, 그러니까 그가 그토록 죽고 싶어 하는 이유를 듣고는 그의 손에 한 가지 희귀한 물건을 건네준다.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원하는 것은 모두 이루어지는 신비한 마법의 가죽이다. 일명 나귀 가죽. 단 명심해야 할 것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사용하는 만큼, 생명이 줄어든다는 것. 거래의 법칙은 공정하다. 젊음(생명)을 얻기 위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거래한 파우스트의 그것처럼(괴테, 《파우스트》(1831).

《나귀 가죽》은 근래 내가 읽은 인류의 걸작 소설 중에서도 가장 매혹적인 작품에 속한다. 라파엘 발랑탱을 중심으로 소설이 전개되지만, 사실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은 ‘욕망’이다. 소설의 전언은 간단하다. 욕망하라, 그러나 대가를 치르라. 발자크 이후, 플로베르가 한갓 통속소설인 《마담 보바리》(1857)로 현대 소설의 선구자로 평가받은 이유는 주인공 엠마의 ‘욕망’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의 행로를 구체적으로 재현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후 현대 소설의 주인공들에게 문제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욕망’의 허구화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들 소설의 주인공들, 곧 현대인들의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 심리학, 사회학, 정신분석학의 화두 또한 ‘욕망’임은 이미 잘 아는 사실이다.

나귀 가죽은 그것을 소유했던 라파엘 발랑탱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사실 루이 랑베르와 라파엘 발랑탱은 한 영혼, 한 몸이다. 둘 다 나귀 가죽을 뒤집어 쓴 채 생의 저편으로 사라진 욕망의 화신들이다. 비상한 독서욕에 사로잡힌 신동(神童) 랑베르는 나귀 가죽을 소유한 발랑탱처럼 총량이 정해진 생의 에너지(욕망)를 과도하게 쓴 탓에 스물여덟 살의 젊은 나이에 눈을 감고 만다. 그들은 사라졌지만, 돌아보면 도처에 나귀 가죽이 눈에 띈다. 그것은 쥘리앙 소렐(스탕달, 《적과 흑》, 1830)의 이름으로, 또 엠마 보바리의 이름과 동거하며 소설 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발자크라는 초개인적인 작가의 이름 속에.

함정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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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 이뤄주는 마법의 나귀 가죽을 얻는데…

♣'나귀 가죽' 줄거리


『나귀 가죽』은 프랑스의 대문호 발자크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1831년 ‘철학 소설’이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되어 발자크에게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다. 발자크가 자신의 소설 작품 전체에 이름 붙인 『인간극』은 그가 현실의 세계에 대응할 수 있도록 만든 또 하나의 우주라 할 수 있는데 『나귀 가죽』은 『인간극』의 목록에서 ‘철학 연구’의 맨 앞자리에 배치되어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나귀 가죽』의 주인공 라파엘은 수상한 골동품상 노인에게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주는 마법의 나귀 가죽을 손에 얻게 된다. 가죽은 목숨을 담보로 라파엘을 부자로 만들어 주고 사랑하는 여인인 폴린과 재회하게 하지만 바람이 이루어질 때마다 가죽의 크기는 점점 줄어들고 만다. 이렇게 『나귀 가죽』은 한 편의 ‘철학 소설’ 혹은 ‘테제 소설’로서 생의 에너지의 총량을 의미하는 가죽을 통해 ‘욕망을 위해 존재의 파멸을 부를 것인가, 아니면 존재의 지속을 위해 욕망을 억제할 것인가’라는 선택이 불가능한 모순된 문제를 제기한다.

1833년 출간된 『루이 랑베르』는 『나귀 가죽』 이후 발자크가 두 번째로 발표한 ‘철학 연구’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여덟 살 나이에 부모에게 버림받다시피 기숙학교로 보내졌던 발자크 유년의 모습을 그린 자전적 소설인 『루이 랑베르』는 깊은 명상으로 몸과 정신을 분리해 절대적 사유의 경지에 도달해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한 소년의 욕망과 그에 따른 비극적 결말을 그렸다.



서지 정보

원제: La Peau de chagrin

저자: Honor de Balzac(17993~1850)

발표: 1831년

분야: 프랑스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나귀 가죽

옮긴이: 이철의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13(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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