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지않고,하지만 더 없이 깊은 자비로…

독자 입장에서 문학은 유력한 인생의 동무가 될 수 있다.

한 작가를 집중해서 깊이 읽을 때 때로 가능해 보인다.

독서에도 어떤 경지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일테면 문학에서 인생의 스승을 발견하는 일보다 동무를 찾는 일이 훨씬 어렵다.

소설에서 제 삶을 읽어내는 일도 썩 훌륭하다.

그러나 소설에서 타인의 삶을 온전히 겪어내는 독자라면 더 훌륭하다.

오에 겐자부로는 작가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문학이 없으면 호흡이 불가능한 사람처럼 보인다.

소설 쓰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세상을 읽어낸다.

문학으로 삶의 형식을 이룬 사람이며, 그에게서 삶의 형식과 문학적 형식은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

 작품보다 작가를 얘기해야만 훨씬 명확해지는 문학세계를 지닌 작가다.

이런 세계는 작가들의 로망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는 오에가 등단 50년을 기념해 일흔둘에 내놓은 작품이다.

스스로 만년 3부작이라 일컬은 《체인지링》 《우울한 얼굴의 아이》 《책이여, 안녕!》에 잇대어 태어났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문학 인생 50년에 대한 자기 정리이자, 큰 기획인 만년작의 연장이기도 하다.

오에는 자신이 추구하는 만년의 문학에 대해 독특하고 원대한 견해를 밝힌 바 있다.

독자는 흔히 작가의 만년 작업에서 일정한 패턴을 기대한다. 일테면 원숙함과 조화로움을 지향한다.

노년의 작가들 역시 그 방향으로 작품을 창작하고자 한다. 자연으로 돌아가고 모성, 혹은 고향으로 회귀한다.

자신에게 관대해지고 사회와 화해한다.

그러나 오에는 만년은 한 인간이 개인으로서 끌어안은 모순과 파국을 초월하기도 어렵고 극복하기도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오로지 심화시킬 뿐이다. 따라서 그는 노년의 문학적 에너지를 초월이나 극복에 두지 않고 개인의 모순과 파국의 예감을 그대로 노출하는 일에 쏟는다.

그 집요한 풍경이 사뭇 불편하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에 이르기까지 그의 만년작들은 공포와 절망이 주조음을 이룬다.

하지만 그의 태도가 오히려 삶을 냉정하게 바라보게 하며, 독자로 하여금 제 인생에 쉬 타협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오에는 열 살 때 일본의 패전을 경험하였고, 신체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장남 히카리와 반평생을 함께 지내고 있다.

그는 평생 의문스러웠다.

인간은 파괴하고 파괴당하고 스스로 망가지는 존재인가?

그는 인간 존재 내부는 물론 사회적으로 자행되는 폭력성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인간은 가까스로 회복하는 존재라는 답에 이른다.

 이 자애롭고 희망적인 전언은, 그러나 도저한 회의주의자가 평생 몸으로 겪어내며 도달한 진실로서 경청할 만하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는 오에의 작품들 중에서 비교적 짧고 이야기가 복잡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오에가 품은 만년작의 기대와 그가 평생 좇은 문학적 세계가 짙게 배어난다.

특히 많은 작가들이 테마로 삼은 '문학의 치유성'에 대한 탐색이 돋보이며, 여성에게 가해진 근대적 폭력과 고통을 이해하고자 하는 자세도 여전히 역력하다.

치유로써 문학에 대해 언급했지만 이 소설에서는 유년기에서 중년을 거쳐 노년에 이른 긴 시간이 놓여 있다. 시간이야말로 이 소설의 또 다른 테마가 아닐까 싶게 작가는 기억의 현재화에 매달린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새로운 형식'을 찾는 심경을 밝히고 있는데 시간성이야말로 이 소설의 독특한 형식이 된다.

시간은 치유의 환유이다. 유년의 기억이 노년의 시간으로 현연하고, 노년의 시간이 유년의 기억을 간섭한다.

이는 구성적인 측면에서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기계적인 방식과는 지평이 다르다.

'과연 인생은 어떤 모습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응하고 있다.

포의 '애너벨 리'와 이미지가 겹치는 국제적 영화배우 사쿠라.

그녀에게는 점령국 미국인에게 성적(性的)으로 훼손당한 소녀의 초상이 있다.

제 삶을 이해하려는 순간에 진실의 폭력에 휘둘리는 게 인생의 법칙이듯 사쿠라 역시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녀가 고통과 절망으로부터 가까스로 일어나 제 삶을 마주하게 되는 과정이 냉정하게 그려진다.

배우가 어떤 배역을 온전히 해내는 일은 배우 스스로 감당해온 이력, 개인적으로 치유하고 극복하는 시간을 전제한다는 전언을 오에는 작가 생활 50년에 대한 답으로 제시한다.

노년의 얼굴로 소년을 연기하는 게 가능해지는 세계를 보여준다.

오에가 던져주는 질문은 언제나 묵중하다. 나는 오에를 작가를 위한 작가라고 서슴없이 말해왔다.

적어도 글쓰기에 관한 한 그는 미답지로 멀리 걸어간 작가이다.

만년의 지혜를 들려주는 이 작품을 위시한 일련의 만년작들도 마찬가지다.

인생 선배로나 작가로나 큰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인생 마흔에 여전히 스승을 모시고 살 줄 몰랐다. 마흔쯤 되면 스스로 세상의 스승인 양 알고 살 줄 알았다.

전성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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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작에 참여해 사쿠라의 상처를 알게 되는데...

'아름다운애너벨리..’줄거리


오에 겐자부로는 1935년 일본 에히메현에서 태어났다.

도쿄대에서 불문학을 공부했고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 사르트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장남이 지적 장애를 갖고 태어나면서 지적 장애아와의 공존, 치유와 화해의 메시지가 작품의 주요 테마로 자리잡았다.

전후 일본의 불안한 상황과 정치 · 사회적 문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드러내며 솔제니친과 김지하의 석방 운동에 적극 참여해 실천하는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지금까지도 국왕제와 국가주의,핵무기 문제에 꾸준히 목소리를 내며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는 노인이 된 화자가 산책을 하던 중 친구 고모리를 만나 30년 전 일을 회상하며 시작한다.

대학 동기이자 영화제작자인 고모리와 왕년의 아역스타였던 사쿠라가 찾아와 '나'에게 영화 시나리오를 써달라고 부탁한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을 일본의 농민봉기로 각색해 영화로 만들려는 계획에 참여하게 된 세 사람은 본인조차 알지 못했던 사쿠라의 상처를 알게 되고 영화 시나리오의 공동 작업을 통해 치유의 과정을 겪는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는 소설의 모티프가 된 에드거 앨런 포의 시 《애너벨 리》와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을 비롯해 나보코프의 《롤리타》 등 오에 겐자부로의 문학적 자양분이 된 작품들을 통해 작가 인생 50년을 정리하며 '문학'에 바치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저자:大江健三郞(1903~1950)

발표:2007년

분야:일본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옮긴이:박유하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08(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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