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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주후 2022년 7월 20일)
제목: "결국 답은 사랑입니다"
말씀: 마가복음 6:30-44
찬양인도: 쉐키나, 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조철민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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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30-44,
30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쌔.
33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34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5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36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41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42다 배불리 먹고.
43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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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에 오신 여러분 진심으로 환영한다. 오늘 이 자리가 말씀으로 채워져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 ‘결국 답은 사랑이구나!’ 하는 그런 놀라운 깨달음이 있는 귀한 시간이 되길 소망한다. 저와 여러분이 함께 나눌 말씀을 교독하지.
 
여러분 오늘 이지라에 오시기까지 어떤 대화의 주제로 오늘 하루를 보냈는가? 대화의 주제를 갖는다는 것은 내가 오늘 그와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며 그리고 그 생각이 나의 행동을 어느 정도 지배를 하고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많은 분들은 평소에 편한 대화를 하고 싶어 한다. 여러분 그렇지 않은가? 아니면 무거운 대화를 하기를 좋아하는가? 보통 무얼 먹으러 갈까? 오늘은 어떻게 하루를 보내고 어떤 옷이 잘 어울릴까? 오늘의 저녁반찬은 무얼 준비해야 할까? 어떻게 보면 시시콜콜한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삶에 있어서 분명히 빠질 수 없는 대화의 주제일 것이다. 직장에 다니시는 분들은 오늘 하루 이런 대화를 하셨을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언제까지 마쳐야 하는데, 언제까지 보고서를 써야 하는데, 언제까지 이것을 마련해야 오늘 퇴근 시간을 마칠 수 있을 텐데, 또한 여기 계신 훈련생 분들은 방학이 벌써 2주나 지나갔다고 큰 일’이라고 어떻게 하지? 할지 모른다. 하루하루 나의 대화의 주제 가운데 “집사님은 잘 지내고 계신가요” 하면서 나의 관심사와 나의 삶의 모습들이 분명히 거기 녹아져 있을 것이다. 최근에 바쁘신 분들이 많다 보니까 제가 하는 대화의 주제가 있다. “집사님, 아버님 좀 어떠세요? 요즘 몸은 좀 괜찮아 지셨나요? 언제가 수술일정인가요?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최근 동기 목사님의 아내분이 2017년에 위함 3기 판정을 받고 치료를 계속 받아오면서 차도가 계속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2021년에 작년이다. 다시 결과가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은 손을 쓸 수 없다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함께 동기 목사님들과 나눌 시간이 있었다. 대화의 주제를 끌고 가고 싶은데 잘 안 되는 것이다. 여러분도 아시지 않은가? 정말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를 상황, 우리가 할 수 있는 대화가 무엇일까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좀 도와야 하여야 할 듯하여 말이 나왔다. 그래서 작지만 조금씩 우리가 돕자고 마음을 모았다. 물론 우리의 예상보다는 훨씬 더 나오기는 했지만 물론 그 목사님한테는 여러 가지로 싶지 않은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그 대화 가운데 우리는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앞으로 같이 기도하겠다. 같이 이겨내자. 그와 같은 마음을 나누었기 때문에 분명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믿는다. 여기에 분명히 비슷한 고민을 하실 분들이 또한 계시리라 생각된다. 걱정이 왜 없겠는가? 오늘 옆에 있는 동역 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함께 기도할까요? 우리 한 번 이겨내 볼까요?” 하시다 보면 분명히 주님께서 그 문제까지 해결해 주실 줄 믿는다. 대화의 주제라는 게 우리로 하여금 그 생각을 정리하게 하고 그리고 갈 길을 잡아 준다. 그런데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대화의 주제가 하나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이다. 이다.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 그 예수님의 제자라면 온전함의 고봉에 올라가기 위해서 매일 그 발걸음을 하나씩 하나씩 내 디뎌야 한다. 특히 내 삶의 행실까지도 변화에 이르려면 나의 사고와 나의 의지 그 모든 것들을 다하여 정말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변화시키길 원하시는지 주님의 제자다움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는 어떻게 쫒아가야 하는지, 매일 묵상하고 그 모습을 따라가기 위해서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의 일상을 한 번 보시면 그러실 것이다. 많이 바쁠 것이다. 정신이 없다. 하루하루 삶을 이끌어가기가 쉽지가 않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도 비슷하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30절 31절 말씀을 보자.
 
*마가복음 6:30-31,
30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무슨 이야기냐면 “지금까지 주님이 이런 일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만큼 일을 했습니다. 라고 이야기 한 것이다. 그렇게 말할 만하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시 쉬어”, 왜 이런 이야기를 하셨냐면, 음식 먹을 겨를도 없어서, 밥 먹을 시간조차 없이 주님과 사역을 하면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조금만 제자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제자들이 대단하다. 주님을 따라가면서 음식 먹을 시간도 없이 그들은 사역을 했다. 그런데 그렇게 음식 먹을 겨를 도 없이 사역을 한 이유가 뭐냐면, 무리들이 예수님을 계속 쫓아왔기 때문이다. 제자들 뒤를 따라서 그 무리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따라갔다. 바로 그 장면에서 우리 주님께서 34저에서 이와 같이 이야기 하신다.
 
*마가복음 6:34
34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목자 없는 양, 불쌍히 여기사 우리가 이걸 딱 보면 온전 론에서 목자의 심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셨다는 것이다. 긍휼히 여기셨다는 것이다. 이 단어를 영어단어로 살펴보면 ‘compassion’이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가 파피, 함께 고통을 겪는다는 단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어떤 이 무리들을 보시면서 어떤 감정으로 대하셨는가? 그들을 보셨을 때, 나와 다른 감정이 아니라 그들의 간절함이 주님이 보시기에는 나와 동일하다고 그 모습을 공감하기 위해서 그들을 보시고는 그들을 바라보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장면은 지금 제자들이 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좀 전에 주님께서 뭐라 하셨는가? ‘잠깐 쉬어라.’ 하셨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따라온 무리들을 향하여서 불쌍히 여기고 그들과 감정을 교감하기 시작했다. 제자들ㅇ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면 달갑지 않을 생각이 얼핏 든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한적한 곳인데 우리는 지금 잠깐 쉬라고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그 무리들을 보시고 주님은 불쌍히 여기셨다. 함께 고통을 나누길 원하셨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6:35,
35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지금처럼 날이 저문다고 별빛 달빛이 환하게 비친다고 우리처럼 그렇게 지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여전히 흑암이 몰려오고 깜깜한 그 상황 속에서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빈들에 있다. 아무것도 없다. 그 아무것도 없는 그 가운데에서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냐면, 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다. “아니 주님 좀 전에 쉬라고 하셔놓고 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니요? 그리고 아무것도 없고 먹을 것을 구하려면 2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그런 떡을 구해야 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즉시 무리들을 거기에 앉히시고 제자들을 통하여서 있는 것 가지고 오라고 하신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축사하시고 떼어서 제자들을 통해서 다 먹이신다. 그리고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거기 있는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열두 바구니가 남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자, 여기까지, 오병이어 사건의 전체 이야기이다. 우리는 오병이어 사건하면 기적의 역사의 사건으로 떠올린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완벽한 기적의 역사이다. 그런데 우리가 조금만 무리의 입장에서 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보기 시작하면 이것은 완벽한 주님께서 이루신 공감의 역사이다. 무리들의 간절한 심정을 내팽개치지 않으시고 그 모습을 보고는 같이 공감하시면서 저들의 영혼까지도 가르치면서 영혼까지도 채우시면서 육체까지도 내가 책임지겠다. 라고 주님께서는 ‘내가 저들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먹이는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보여주시는 것이다. 기적의 역사에서 뿐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철저하게 목자의 심정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음을 우리는 여기서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제자로서 주님의 모습을 좀 더 쫓아갈 수 있을까를 한 번 정리해 볼 필요가 있는데 제가 세 가지로 한 번 정리해 보겠다.
 
I. 정성으로 섬기는 것이다.

-여러분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보여주셨는지 보자.
*마가복음 6:34,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 어떻게 가르치셨다고 하는가?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다고 되어 있다. 여러 가지는 '포브스'라는 헬라어의 단어 뜻에는 성경에 다양하게 쓰이는데 여러분이 잘 아시는 many, much, great 라는 단어로 쓰인다. 무슨 일인가? 내가 이들을 먹일 수 있는 많은 방법으로, 풍성한 방법으로, 정말 탁월한 방법으로 위대한 방법으로, 목자 없는 저들을 먹이겠다. 라고 하시면서 지금 이 자리에 계신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삶을 살다보면 우리가 배가 고프거나 피곤하거나 쉴 상황이 못 되는 그런 상황 속에서 누군가를 가르쳐야 될 상황이 왔다고 보자. 그때 여러분 정말로 여러분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르칠 수 있는가? 보통은 우리가 이렇게 표현한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그 최선을 다했다는 그 말 가운데는 어떤 마음이 포함되어 있냐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내가 여기까지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실 제자들과 함께 사역을 하셨기 때문에 지금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배가 안 고프신 상황이 아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다. 는 것이다. 메니, 머치, 그레이트(many, much, great)라는 그 방법으로 그들을 먹이시고 가르치시면서 해결하셨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이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이들을 정성을 다해서 섬기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정성을 다해서 섬긴다는 것,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주님은 완전한 인성과 신성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사실 온전하신 분이시다. 아멘 하는가? 우리 주님은 완전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쫓아가야 되는 입장에서 온전함의 고봉에 올라가야 되는데 우리는 온전치 않다. 그러면 우리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대로 따라가려면 철저하게 사실 뭐가 필요한 줄 아는가? 준비가 필요하다. 영적으로 내가 먹을 것들을 내가 준비하지 않으면 내 마음 속에 목자의 심정을 갖게 위해서 주님 앞에 정성으로 내가 사람을 섬기겠다. 라고 다짐하지 않으면 그곳 가운데 그와 같은 헌신과 섬김은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 최근에 저희 담임 목사님께서 책을 한 권 소개시켜 주셨는데 기억나는가? 손웅정님이 쓴 책이다.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된다.' 의 책을 보니까 이런 구절이 있었다.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훈련법을 계발해야 한다. 기존에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웬만한 빅 매치는 다 찾아보며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내가 생각해도 미쳐 있었다.”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된다. 손웅정-

제가 저 책을 읽으면서 어떤 마음이 와 닿았냐면 모든 훈련인 인도자들은 최선을 다해서, 정성을 다해서 준비를 해야 된다. 모든 연구 방법들을 다 동원해서라도 알아내야 된다. 어떻게 하면 성도를 양육하고 훈련시키는데 최선의 방법인지 그것이 무엇인지가 다가오면서 숨이 콱 막혔다. 그런데 일반 축구 선수를 양육하기 위한 코치도 이와 같이 하는데, 우리 주님을 쫓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섬기고 정성을 다해서 가르치는데 있어서도 같은 마음을 하지 않으면 이 혼란한 세상 가운데서 성도를 온전히 양육해야 하고 그리고 여기 수많은 순장님들이 계시는데 수많이 섬겨 나가는데 늘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지 고민하지 않으면 세상은 금방 잡아먹을 정도로 늘 발전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다. 지금 주님께서는 육신으로는 어떻게 보면 최고로 피곤한 상태에서도 우리에게 목자 잃은 양을 목자 있는 양으로 하시기 위해서 정성을 다해서 섬기는 방법을 보여주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주님의 그 모습을 닮아가는 그런 정성을 다하는 모습, 메니, 머치, 그레이트(many, much, great)하는 그런 모습을 함께 담아서 여러분 탁월한 리더로, 탁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여러분 있는 자리에서 섬겨 가시길 바란다. 여러분, 그와 같은 섬김 가운데 기쁨이 있을 것이며, 그와 같은 섬김을 통해서 자라나는 사람을 보면서 여러분 또한 우리 교회가 표방하는 목회철학을 온전히 이루어 가는데 같이 마음을 모으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은혜가 여러분의 가정에도 있기를 소망한다. 두 번째로 우리 주님이 보여주셨던 방법을 보자.

 
II. 영혼에 대해서 책임감이다.

-여러분, 제자들은 예수님께 많은 무리를 책임질 수 없다고 이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길 원했는가? “두루 촌으로 마을로 보내옵소서.” 그때 하신 말씀이 있다. 우리 같이 읽어보자.
 
*마가복음 6:37,
37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제자들은 “2백 데나리온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라고 이야기 한다. 저는 저 장면을 읽으면서 제자들이 질문이 상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빈들이고 때는 저물었고 우리가 누군지로 모른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지만 이것을 먹이기 위해서는 2백 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한데, “주님 사다먹이리이까?” 그런데 주님은 이 자리에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하신다. 주님은 철저하게 누구 중심으로 생각하시는가? 무리들을 중심으로 생각하신다. 제자들은 철저하게 이상적인 판단에 근거하여서 주께 말한다. 자기들 중심으로 말한다. 지금 한 적한 곳에서 오랜만에 휴가도 주셨는데 내가 이걸 누려야 될 상활 속에 있는데 주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신다. 답답한 것이다. 어떻게 해야 되는가? 사실은 이와 같은 모습은 사랑의 교회 처음 훈련 때도 많이 보았던 모습이다.
 
여러분 코로나 이전에 저희가 제자훈련 할 때 어떻게 하는가? 집을 돌아가면서 그 집에 가면은 그 집 주인 되시는 훈련생께서 자신이 모인 그 훈련생들을 대접했던 문화 있는 것을 기억하는가? 있었다. 그런데 어떤 걸 목격했냐면 섬기기 쉽지 않으신 분이었다. 여러모로. 저도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어떤 장면을 목격했냐면, 섬기기 싶지 않은 분이었다. 여러모로 환경 상, 저도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런데 그 상황을 아시는 그 순장님께서 그날 자기 집에서 먹을 것뿐만이 아니고, 그릇 준비하고 숫가락 준비하고, 젓가락 준비하고 와서는 몰래갖다 놓고 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제가 뒤통수 하나를 맞았다. ‘왜 그 순장님은 순원을 그렇게 섬겼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저도 훈련 초창기라 잘 준비하고 제 나름 대로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핵심이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가, 영혼에 대한 순장님의 모습에서, 저 영혼이 훈련하기도 빡빡한데 저 섬김이 완전히 불가능한 상황인데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오셨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의 모습 가운데는 머리로만 섬기는 모습이 있지 않다. 상황을 보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불가능하다. 어떻게 주는가? 그런데 주님께서는 무엇을 보시고자 했는가? 주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했을 때, "네 주님, 주님 알겠습니다." "제가 먹을 것을 준비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그 순종을 보고자 하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야 섬긴다고 하고 순종한다고 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머리가 먼저 앞서는 경우가 있지만
 
성도 여러분,
영혼에 대한 책임감은 머리로부터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혼에 대한 머리가 빨리 돌아가면 빨리 돌아 갈수록 내 가슴은 뛰고 있는가? 내 손과 발은 움직이고 있는가? 를 질문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거기서 더 나아갈 수 없다. '아 나는 순장이 아니니까 저렇게 안 해도 된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서 부르신 제자이다. 주님 부르신 제자의 모습으로 계속 가려면 왜 주님이 저와 같은 모습을 하셨을까 를 고민해야 되지 않겠는가? 머리로 판단하는 거 "너 네 잘하고 있어. 맞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는 게 더 나아. 그래 두루 촌으로 보내는 것이 훨씬 나아! 그런데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먹이는 거야! 너희가 먹을 것을 주는 거야!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고 누군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따라온 자들이 아니냐! 너희가 먹을 것을 주면 좋겠다.“ 영혼에 대한 책임감으로 나오신 주님 앞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되는가?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그와 같은 영혼에 대한 책임감이 주님으로부터 배운 자들이다. 주님께서 그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십자가를 통하여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우리는 그것을 따라가겠다고 늘 쫓아가는 자들이다. 그러면 한 번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는가? 주여, “내 머리로만 판단하는 이 모든 상황을 주님, 내려놓게 하시고 나의 가슴과 나의 손발이 움직일 수 있도록 주님, 역사하여 주옵소서!" 그랬을 때, 여러분이 그런 섬김을 주님은 외면치 않으시고 분명히 여러분 가운데 더할 나위 없는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 가정에도 흘러갈 수 있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III. 주님과 함께 하면 할 수 있다는 마음이다.

-우리가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면 제자들의 손에는 구해 온 것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다. 이게 현실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런 상황 속에서 누가복음9:13절에서 주시는 메시지를 한 번 보자.
 
*누가복음 9:13,
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이 부분이다. "불가능 합니다" 'I can't' 불가능하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행보를 하시냐면 그냥 그 자리에 무리들을 앉히시고 푸른 잔디에서 식사할 수 있게 준비를 하신다. 그리고는 그들이 갖고 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 사, 그리고 나서 손에 들고 축복기도를 하신 후에 제자들을 통하여서 그들에게 먹이게끔 하신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섬김을 하다보면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목사님, 정성을 다하고 영혼에 대한 책임감을 가진다면 다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어떻게 하셨는가? 직접 그곳 가운데 현실을 깨는 기도를 올리시면서 그곳 가운데 함께 하는 불가능하다고 하는 'I can't, 나는 할 수 없어, 라고 하는 그 제자들을 통해서 세어주어서 나누게끔 하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철저하게 그곳에 불신하고 있는 그 제자들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통하여서 그 역사에 동참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2장을 보면 가나 혼인잔치에서도 주님은 동일한 모습으로 주님은 나아가신다.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 잔치를 할 수가 없다. 그때 하인에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그냥 물로 채워라”라고 하셨더니 하인은 순종만 했더니 어떻게 되었는가? 가장 좋은 포도주로 만드셔서 잔치를 계속 이어갈 수 있게끔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 힘으로만, 내가 뭔가를 하려고만 하지만 실제적으로 중요한 포인트는 마지막 주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그 장면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 ‘RC 스포로울’ 이라는 학자가 보통 성화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말한다.
 
‘성화’란 그리스도인이 실생활에서 점점 더 죄에서 멀어지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일하는 점진적인 과정입니다. -RC 스포로울-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일하는 점진적인 과정, 이라고 한다. 여러분 ‘성화’를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계속 주님을 닮아가면서 주님을 쫓아가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중에 주님 오실 때, 모두가 다 성화로운 존재가 되겠지만, 그러나 이 땅 가운데서 온전함을 추구하기만 하지 온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이 성화의 과정을 주님께서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점진적으로 갈 수 있도록 하신다. 이 성화를 인도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아멘, 이와 같은 일들을 하실 수 있도록 내어드림이 중요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는 것은 결국 주님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주님의 자리를 내어드려야 한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주님이 이 모든 사역의 주체이심을 보이시면서 나의 부족함을 충족시키시고, 충족시키신 후에는 풍족케 하시는 역사를 이 오병이어(五甁二魚)의 현장에서 보여 주셨다는 것이다.
 
여러분,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부족해 보이지만, 그것을 오천 명을 먹이신 후에 열두 바구니를 남기신 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그게 주님의 역사이다. 부족을 넘어 충족을 넘어 풍족케 하시는 그 주님의 역사 가운데 여러분이 동참하기만 하면 그와 같이 주님께서 일하시니 우리가 무엇을 더 걱정이 있겠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삶 가운데 정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힘들 수도 있겠지만 주님 앞에서 그것들을 솔직하게 고백하라. “주님, 내가 아직 부족합니다. 그러나 이게 내 정성입니다. 내가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 밖에 없는 이 현실 속에서 주님, 내 정성입니다. 영혼에 대한 책임감이 부족합니다만 주님, 이렇게 나아가고 싶습니다. 내가 어떻게든 먹이겠습니다. 내가 먹을 것을 주겠습니다. 주님 그때 나의 부족함을 아시고 충족을 넘어 풍족케 하는 역사를 보여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고 간구하고 나가신다면, 우리 삶 가운데 온전함을 통하여서 주님 원하시는 온전함의 고봉에 올라가는 한 걸음 한걸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겠는가? 그와 같은 역사의 현장 가운데 여러분들이 함께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모여서 찬양올리고 예배드리면 주님께서 분명히 그와 같이 일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여러분, 주님이 이와 같이 오병이어의 현장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을까? 그것은 다름아닌, 주님께서 이 땅을 어떻게 생각하셨느냐가 답이 있다.
 
*요한복음 3:16,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하시는가? 독생자를 보내셔서 그 독생자가 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공감하는 역사를 보여주셨다.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기노라, 간절함으로 나를 찾아온 자들, 내가 먹이겠다.” 하시면서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다가가셨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지금까지 이 모든 역사를 보이신 것의 답은 결국 하나이다. 이 땅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여기 모인 자들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영생으로서 구원을 하게 하시기 위하여 오늘 이와 같은 오병이어의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런 사랑을 우리는 어떤 식으로 계속 나아가야 하냐면, 바울은 4:1절에서 이와 같이 이야기 한다.
 
*고린도전서 14:1,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이다. 믿음, 소망, 사랑, 그 가운데 제일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사랑은 추구하는 것이다. 사랑은 쫓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그 온전함의 고봉에 올라가기 위해서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주님께 자리를 내어놓고, 정성으로 영혼에 대한 책임감으로 나도 아직 부족하지만 계속 그 사랑을 쫓아가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그냥 너희만 알아서 하라고 하지 않으신다“너희도 애 쓰냐? 나도 이와 같이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겠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신 결국 답이 어디에 있느냐? 사랑 가운데 있다. 라고 하시는 사실을 여러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여러분, 사랑은 강하다. 이 세상을 주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에 독생자를 보내주셨다. 그 독생자를 통하여서 우리 모두를 주님의 제자로서 지금도 이끌어 가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주님의 사랑을 묵상할 때마다 저도 주님께 다가가기 어려워서 정말 어떻게 해야 되나? 하는 고민이 될 때가 참 많다. 앞서 처음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혼자서 영혼을 섬길 때도 혼자서 아이디어가 생각나지 않는데, 함께 그 자리에서 함께 모인 동역 자들과 우리의 정체성을 고백하고 우리는 부름 받은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다시금 인지 할 때 우리가 고백할 때 무엇인가 사랑이라. 그 사랑을 나누자,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오셔서 다른 것은 다 내려놓고 주님께 그 사랑을 조금이라고 따라가기 원한다고 여전히 부족하지만 온전함의 그 고봉에 올라가기를 원하며 그 자리까지 쉽지 않지만 나의 삶의 행실을 주님의 모습으로 맞추어 가겠다고, 그러니 나와 동행하시고 역사하여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와 같은 은혜가 각 개인마다, 일터마다, 가정마다 여러분이 메신저가 되어서 잘 나누고 섬기며 사랑을 베풀어 주시며 나누는 그런 사랑의 교회 성도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요약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현장에서 보여 주신 기적과 공감의 역사를 묵상하며, 제자로서 고봉을 향하여 정성 다해 준비하고 섬기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온전한 제자로 행실이 닮아가서 머리만이 섬기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함께 움직이며, 사랑이 가득 담기는 섬김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결국 주님의 사랑이 답이라는 것을 실천하여 온전한 제자가 되어야 한다.
-오병이어의 기적 (6:30-44)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남자만 오천 명이 먹었으며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시는 메시야이심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분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지 세상의 왕은 아니시다. 이 기적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천국 복음이 가져다주는 풍성한 복을 상징하며 하나님 나라에서의 풍성한 잔치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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