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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예배(주후 2021년 5월 26일)
제목:)"은혜의 반석 위에서 계십니까?"
말씀: 마태복음 16:16-25
설교자:장광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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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16-25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장광천 부목사님 설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의 은혜를 받으면 참 많은 것이 변한다.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생기니 내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고,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어진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타인을 섬기며 살아가기를 힘쓰게 된다. 이것이 변화이다. 그러나 이와 달이 예수님의 온전함을 위해 몸부림치지만 연약한 자신의 모습, 더 잘하고 싶지만 실패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실망하고 좌절감을 느끼기도 한다. 훈련을 받으면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깨달았는데, 깨달은 만큼, 은혜 받은 만큼 살지 못하는 것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경험한다. 잘하려고 몸부림치는데도 참 어렵고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도 또다시 무너지는 모습 가운데, 나의 이 이중성과 양면성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나는 언제나 완벽하고 온전해질까를 그렇게 자책하게 되고, 소망과 함께 실망감도 커져간다. 또한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본다. 동시에 교회 안에서 상처도 받고 실망하기도 한다. 이처럼 성도의 온전함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잘 알지만 그만큼 온전하지 못하다. 영광스럽게 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갈등하고 고민한다. 오늘은 이런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자. 오늘 본문에 시몬 베드로는,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교회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이다. 또 히브리어로는 메시아라는 뜻이다. 그래서 깊은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기름 부음 받은 자는 세 종류이다. 왕, 선지자, 제사장이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죄인 된 인간들과 거룩한 하나님을 연결하는 그 일을 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완전한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형상과 뜻을 온전히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특별히 메시아 그리스도는 구약의 예언된 종말론적인 약속을 성취할 구원자를 의미한다. 바로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종말론적인 구원을 성취할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참 기뻐하시면서 칭찬을 하신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여기서 이 복이 있다는 표현은 베드로의 외에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지 않으셨던 특별한 칭찬이셨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는 아람어로 ‘게바’이다. 게바는 반석이라는 뜻이며 예수님은 시몬을 만났을 때, 게바, 반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셨다. 예수님은 이 반석위에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이 반석이 무엇을 말하는가? 카톨릭과 개신교는 사실 해석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 먼저,

♤카톨릭: 반석을 = 베드로, -베드로가 ‘반석’이라는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고 반석위에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신다고 카톨릭은 믿고 있다. 그에게 천국 열쇠를 주었고 그래서 카톨릭은 계속해서 베드로의 그 권위가 교황을 통해서 계승되고 이양된다 라고 주장을 한다. 그래서 이 본문은 카톨릭에서는 교황제도를 옹호하는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베드로의 권위가 교황을 통해서 계속해서 이양된다는 근거는 없다.

♤개신교: 반석 = 베드로의 신앙고백, -참 좋은 해석이고 이 해석을 믿는다.


신학자들은 헬라어 단어 ‘베드로’는 남성명사인데 이 뒤에 보면 반석은 페트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여성명사로 되어 있다. 원래는 헬라어에서는 남성명사, 여성명사를 맞추어서 표현한다. 그런데 이 남성명사, 여성명사가 맞지 않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베드로와 뒤에서 말하고 있는 반석 페트라는 사실 다른 것을 지칭한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곧이어 등장하겠지만 “베드로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는 무서운 책망을 듣게 되었다.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은 인간 베드로는 결코 믿을만한 반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종교개혁자들이나 우리 교회는 이 반석은 베드로가 아니라 베드로가 했었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이라는 신앙고백이며 베드로가 했었던 ‘이 반석 같은 신앙고백 위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신다’ 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저명한 성경학자들인 마이클 위킨스나, 헤르벤 이데부스, 디엘 칼슨, 프렌스, 이 이름을 말하는 이유는 이 앞서 해석이 워낙 종교개혁자들의 내용을 믿어야 하기 때문에 언급을 한다. 이 학자들은 이 ‘반석’을 ‘베드로’라고 해석한다. 왜냐하면 베드로라는 단어는 사실 예수님이 게바라고 말씀하신 아람어를 기초로 두고 있다. 그렇기에 ‘페트라도 게바’이고, ‘베드로’라고 표현한 것도 ‘게바’이다. 어법상 이 성에 문제나 여성, 남성, 이런 의미에는 상관이 없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너는 반석이며 베드로이며 게바이며 이 게바 위에 바로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은 바로 언어유희(言語遊戲)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실 때에 베드로가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언어유희를 통해서 하신다. 베드로는 초대교회 반석과 같은 역할을 감당한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임한 다음에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3천명 5천명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진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하게 될 때, 그 때에 성령이 임하게 되고 사마리아 교회가 세워지며, 고넬료와 그의 과정이 복음을 듣게 되고 그 때 성령이 임하게 되므로 말미암아 이방인의 첫 교회가 그 가정에 세워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베드로는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는 반석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사도들 위에 우리 교회가 세워졌다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 문제가 여기서 시작된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시작되는 시점 이후부터 예수님 자신이 어떻게 행하실지에 대해서 말씀하기 시작한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되고 다시 살아나게 되실 것을 이때부터 비로소 분명하게 드러내신다. 베드로가 이것을 듣고 당황하기 시작한다. 마음 가운데 불안하게 된다.


*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여기서 붙든다는 것은 옆으로 데리고 간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옆으로 데리고 가서 항변했다는 것은
꾸짖고 책망했다는 것이다. 예수님, 정신 차리라고 하며 이방인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을 받으시고 3일만에 살아나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묻는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정신을 좀 차리라고 한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정말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한 것을 들린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을 보면 23절에 나온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무서운 책망을 하신다. 베드로는 영광스러운 고백을 했었던 하나님의 복받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가로막고 있는 사단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고 증명받고 있다. 예수님께 책망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넘어지게 하는 말은 헬라어로 스칸달론(걸림돌, 덫)이다. 뭔가에 걸려 넘어지게 하고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13:41-42,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심판이다.

*마태복음 18: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심판 받은 사람으로 주님께서는 경계하고 계신다. 영어로는 스텀블럼 럭(Stumble luck-비틀거림, 넘어짐,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 방해물)이다. 예수님의 교회를 장차 든든하게 세워나갈 사람이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가로 막고 있는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뿐이겠는가? 우리도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반석과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교회와 이웃을 넘어뜨리고 시험에 들 수 있는 사단으로 인해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며 무서운 경고가 주어지고 있다. 그 경고와 핵심에는 은혜와 십자가가 있다.



첫 번째는 은혜이다.

-17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혈육이라는 것은, 사람의 힘과 지혜이다. 인간의 노력과 열심으로 지혜를 얻고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신앙고백을 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이렇게 영광스러운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게 하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그래서 복이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과 진리를 깨닫고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 십자가의 은혜를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그 부활의 능력과 생명을 믿고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성령님의 깨우쳐주심과 도우심을 점점 선명하게 경험하게 된다. 예수님은 요나의 아들, 시몬아, 이것을 알게 하는 이는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라고 표현하신다. 베드로라고 표현하지 않으신다. 어떤 의미냐면, 시몬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표현할 수 없는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이 영광스런 믿음을 갖게 하시고 이 영광스런 신앙고백을 하게 하셨다. 그래서 그 다음에 너는 베드로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다. 무엇이 베드로를 베드로 되게 하시는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반석과 같게끔 만드는가? 우리의 열심이가 아니다. 신앙의 연륜이 아니다. 우리 직분이 아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처럼
우리의 신앙고백인 앞으로의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우리 가운데 말씀을 하신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는 베드로, 그 베드로 위에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인간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이 아닌 그동안 충성 봉사하고 노력하고 많은 것들을 일구어 나간 그 어떤 중직자나 그 어떤 사람을 통해서 세우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은혜에 붙들린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는 결단코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록 베리’라는 목사님이 계신데, 베드로를 부르실 때에 ‘베드로야 너를 믿는다. 나는 너를 충분히 잘 알고 있고 너 안에 있는 가능성을 보았기에 내가 너를 제자로 선택했다. 나는 너를 믿는다.’라고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믿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다 버리고 떠나리라.’ 라고 말씀하신다. 그때에 베드로가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단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믿지 않는다. ‘오늘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26: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예수님을 베드로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내 생명보다도 더 귀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한다. 자신감이 느껴진다. 예수님 사랑이 담겨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믿지 않으신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베드로는 칼을 뺀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서 아주 용맹한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예수님이 잡히자 제자들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다. 베드로 역시 연약하다. 두려워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된다. 자기 확신과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베드로가 호언장담을 했던 자가 몇 시간도 안 되어서 예수님을 저주하고 그대들에게 맹세하고 예수님을 부인했다. 요즘 드라마나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말이 있는데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들 한다. 사람을 고쳐 쓰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를 도저히 고쳐 쓸 수 없다고 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너무 잘 알고 사랑하셨기에 베드로를 믿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반드시 이루게 될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셨다.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될 것을 믿으셨다. 온전한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마태복음 21: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태복음 16장에 이 베드로, 반석, 신앙고백을, 베드로 위에 세우겠다고 말씀하시고,
21장에서는 “내가 반석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구원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코 반석이 될 수 없는 시몬을 반석과 같은 게바로, 베드로로 만드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은혜이다. 걸림돌 같고 때로는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닌 사탄에 속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해도 마침내 우리를 반석과 같으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열심인줄 믿는다.



*베드로전서 2: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마태복음 21장에 본인이 바로 반석이며 산 돌 되었다는 표현을, 사도 베드로가 본인을 표현하고 있다. 구원의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라고 한다. 그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베드로전서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언제 우리가 산 돌 같이 되는가? 우리가 보배로운 산 돌 되시는 구원의 반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움을 받게 될 때에만 우리는 보배로운 산 돌 같이 신령하게 세워진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오직 반석 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만을 믿어야 한다. 그 하나님의 은혜의 경계선에 있고 은혜의 울타리에서 멀어질 때에 믿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받을만하지 않고 믿을만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반석 되게 하셨다면 우리는 반석인줄 믿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되심으로 말미암아 너는 반석이라 내가 너를 통하여 영광스런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를 간절하게 소원한다.



두 번째는 십자가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의 내용이 있다. 23절에 보면,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핵심은 예수님께 베드로는 말한다. 다른 것 다 하셔도 되는데, 십자가를 지시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이 때 예수님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말씀하신다.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받았던 마태복음 4장 10절과 거의 흡사하다.

사탄의 세 가지 유혹과 시험이 있다.

1.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라
2.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내려라 그리하면 많은 사람이 너에게 오리라.
3. 나에게 절하면 세상의 영광과 권세를 주리라.


-하나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모든 영광과 성공과 만족을 얻어도 된다라고 말한다. 놀라운 간증으로 은혜 받을 내용이지만 문제는 십자가가 없다. 십자가가 없는 영광, 십자가가 없는 성공, 그것을 얻으라는 것이 마귀의 유혹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일이며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샤와 빌립보로 가셔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자신의 할 일을 가르치신다. 자신의 할례도 말씀하신다. 가이샤와 빌립보는 헤롯이 세운 도시이다. 그래서 가이샤는 ‘황제의 도시’이다. 다산의 동물의 신이 유명했고, 로마 황제를 위해 웅장한 대리석으로 지은 신전들이 많이 세워져 있었다. 그 배경 속에서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로 나타내신다. 로마 황제, 화려한 신전 가운데서는 예수님의 모습은 초라하고 보잘 것 없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임금과 다른 가치관과 방식으로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우리 가운데 그르쳐 주시고자 하셨다. 로마 황제는 더 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그 위에 군림했다. 그러면서,


*누가복음 22: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이방인 로마의 황제들은 그들 위에 주관한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은인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권력을 행사하고 권리를 주장하고 있으면서 그래도 자기들이 주는 혜택이 있으니 너희들도 나를 은인이라고 부르라고 말한다. 이게 바로 로마황제이고 팍스로마나의 길이다. 로마의 평화와 번영을 의미하며 강한 군사력으로 강한 힘으로 유지되는 평화였다. 만약에 로마에 대항하거나 반역하면 무참히 짓밟는다. 십자가에 못 박아서 그것으로 많은 사람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것이 로마 황제의 일이었다. 그것이 그 사람들을 군림하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은인이고 나 때문에 너희가 산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을 현혹하고 예수님을 미혹하는 사람의 일이며, 황제의 일이다. 영화 곡성을 보면, 거기에 유명한 대사가 있다. “무엇이 중한디”..... 영화가 있다. 코미디 프로그램 패러디가 되어서 영화를 보지도 않았지만 잘 알고 있다. 포스트에 나오는 코미디는 ‘절대 현혹되지 마라’이다. 정말 무엇이 중요한지를 강조한다지만, 현혹되기 쉬운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우리도 신앙생활에서 정말 무엇이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간과한 채 우리가 교회서나 일터에서나 가정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간과한 채 세상의 목소리에 유혹되고 현혹되기 쉽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혹되지 말아야 될 것이 있는데, 엄마들의 모임이다. 가서 이야기 듣고 나면 그때부터 불안해진다. 사랑으로 인내하고 기다리고 있다가도 갑자기 정보들과 잘하는 아이들을 듣고 와서는 불안해진다. 절대 현혹되지 말라고 하는데도 우리는 듣지 않는다.

제자들 역시 메시아라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로마의 압제 식민 통치로부터 유다를 구원하고 독립시켜 주셔야 한다고 정치적 경제적 메시아를 기대했다. 그러면서 제자들은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가? 누가 더 헌신할 것인가? 누가 예수님을 사랑할 것인가? 누가 더 큰 사람인가? 예수님께서 왕위에 앉으셨을 때, 누가 그 우편, 좌편,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 것인가를 제자들은 이것으로 끊임없이 싸우는 일이 제자들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아서고 사람의 길, 황제의 길을 걸어가고자 했던 것들이 바로 제자의 모습이고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힘과 방법을 통해서 더 높은 길로 올라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어느 순간에 나의 성공이 더 중요하게 생각되어진다. 내가 원하는 것은 갖고, 내 권리를 확장하고 누리는 것이 중요해진다. 그것이 사탄의 유혹이다. 네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너의 권리와 능력을 최대한 사용해서 너희 욕구를 채우라. 너는 그것을 가질만한 권리가 있다 라고 한다. 이것이 사람의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일. 바로십가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길이었다. 십자가의 핵심은 권리포기와 순종이다. 

 

*빌립보서 2:6-8절에 보면,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체이시나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 됨의 권리를 포기하신다.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셨기에 바로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온전한 순종으로 구원의 반석이 되어 주셨다. 십자가 없는 성공과 영광은 모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위하여 아무리 많은 일을 할지라고 그 과정에 십작의 권리포기와 사랑의 순종이 없다면, 소용이 없다 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가정. 일터에서 더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내 자존심을 지킬 권리가 있다. 이정도는 받아야 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리고 이만큼 했으니 은인이라고 칭함을 받고 싶고 대접을 받고 싶은 마음이 우리 가운데 불끈불끈 올라오지는 않는가? 그런데 이런 말은 가장 친근하고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서 들린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그렇게 칭찬했던 그 베드로의 입술에서 바로 사람의 이야기, 사탄의 속임수로 그 말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내가 살고 있는 환경과 관계 가운데서 내가 가지고 있는 직위, 위치에서 대접 받는 것이 당연하고 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옳다라고 여기는 것,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참된 사랑은, 참된 제자의 길은 권리포기와 사랑의 순종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여전히 권리를 포기하기 힘든 우리의 모습을 본다. 그때마다 해야 될 것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늘의 영광과 보좌를 버리시고 가장 낮은 가운데 오신 그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 십자가만이 우리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새로운 사랑과 소망, 새 힘이 생겨날 줄 믿는다.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다. 로마의 그 강한 압제로 인해서 본인이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그래서 합당한 존재여서 그렇게 십자가의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과 존귀함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기쁨으로 자원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마찬가지이이다.

우리가 권리포기를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내가 포기해도 마땅한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으니까, 나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인가? 내가 무지 당해도 싸서 그런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만큼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귀한 자녀이기에 그렇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리 포기를 본받아 우리도 권리포기를 하게 될 때에 우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과 부활의 역사가 나타날 줄 믿는다.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한다는 것이다. 나의 공로,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만 사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의 이기적인 욕망과 욕심을 부인한다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혀 죽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무거운 짐이 아니다. 십자가는 옛 사람의 죽음이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주인이 바뀐다. 죽으면,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내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것이다. 우리 가운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었고 네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이다. 네 주인이 바뀌었음을 인정하라고 하신다. 언제 권리를 포기하고 사랑으로 순종할 수 있는가? 내가 주인이 아닌데,,, 바로 나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랑으로 순종으로 구원을 이루셨음을 믿고, 깨닫고,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주님의 자녀 되기를 소원한다. 자기 부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낼 수 있는 성령 충만한 자가 되어 그 자기 부인으로 기도의 능력을 무장되어야 한다.


♣요약
구원의 반석이신 우리 인생길 가운데서 나의 능력과 나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늘의 영광과 권리를 포기하시고 모든 권리를 버리고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가야한다. 성령 충만으로 채워져서 자기를 부인하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왕 되심을 인정하고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과 영광이 나타나야 한다. 걸림돌이 되지 말고 은혜의 반석 위에 세워진 견고하고 온전한 예수님을 본받아서 세상에 유혹이나 현혹으로 불안해하지 말고 오직 주시는 지혜로 날마다 구원의 반석 되신 그리스도만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그 은혜의 반석 위에 세워져가야 한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중보자로서 성부에 의해 구별되었고 임명되었으며,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대예언자이시다(신18:15). 또한 유일한 대제사장이시며(시110:4), 영원한 왕이시다(시2:6). 베드로의 이러한 신앙 고백은 개인의 자격으로가 아닌 열두 제자를 대표한 것이고,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게 되었다. ‘베드로’는 ‘반석’이란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그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울 것을 말씀하셨으며 그리하여 그는 천국 열쇠를 소유하게 되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아야 한다. 우리는 자기 본래의 것에 대한 모든 신뢰를 포기하고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 한 분께만 매달려야 하며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도 기꺼이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를 부정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자기의 것을 챙기려는 이기적인 사람은 정죄를 받지만, 주님을 사랑하며 주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칭찬을 받는다. 우리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다가 예수님께 책망받은 일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저지르기 쉬운 잘못 중에 하나가 그리스도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유익을 위한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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