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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2022년 10월 19일) 제목: "은혜에 반응하는 신앙" 말씀: 마태복음 21:12-17 찬양인도: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권진우 부목사님 ------------------------------------------------- *마태복음 21:12-17, 12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15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16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그들을 떠나 성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 ▶권진우 부목사님 -수요저녁기도회에 주님께서 풍성한 은혜와 기쁨을 허락해 주시길 소망한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21장 12-17절이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성전에서 있었던 사건이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매매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성전 제사의 희생 제물로 드릴 짐승을 판매하는 사람들을 보시자 그들을 내 쫓으신다. 그리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그리고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오늘 본문을 이야기 하고 있다.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올려드릴 희생 제물을 파는 자와 성전 세를 환전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강한 분노를 표출하고 계신다. 우리가 복음서를 보면, 종종 예수님께서 분노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잘못된 신앙과 가르침으로 유대인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할 때, 그들을 질타하시면서 분노를 나타내시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러한 분노한 감정을 행동으로 옮기는 경우는, 성경에서 오늘 성전에서 있었던 사건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사람을 내쫓고 상을 뒤엎으실 정도로 그 예수님을 분노하게 만들었던 것인가? 오늘 그의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신앙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오늘 말씀의 배경을 잠시 살펴보면 유대인 성인 남자들은 율법의 명령에 따라서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에 성전에 와서 희생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 세 번은 유월절, 초막절 그리고 오순절이었다. 유대인들은 이 세 절기 중에 아마 유월절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성전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이 성전 안에서는 이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한 동물들을 돈을 받고 파는 자들이 있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바로 첫째 예루살렘 성전과 성전에 희생 제사들 드리기 위해서 찾아오는 자들의 거주지가 먼 경우에 성전에 자신이 기르던 소와 양과 같은 제물을 끌고 오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전을 향해서 먼 여정을 오는 길에 예물로 드릴 짐승이 병이 들거나 다칠 수가 있었다.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 관련된 율법을 보면, 하나님께 드릴 예물은 흠이 없어야 한다고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 성전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재물을 보고 제사로 드리기에 부적합하다고 판정을 하면 멀리서 자신의 짐승을 가져온 것들이 헛수고가 되지 않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먼 곳에 사는 유대인들은 주로 성전 근처에 와서 재물을 구입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한 가지, 재물을 주로 성전에서 구입하는 중요한 이유가 또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성전에 오는 자들이 직접 자신이 가져온 제물에 대해서 제사장들이 제사에 드리기에 합당한 것인지, 판단할 때, 매우 엄격하게 판단을 하고 그렇게 살펴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이 성전에서 매매하는 이 제물의 돈들은 제사장들의 부를 쌓는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집에서 직접 가져온 짐승에 대해서는 적합성여부, 그러니까 희생제물을 드릴지의 합당한지, 적합성 여부를 더 엄격하게 해서 가능하면 성전에서 돈을 주고 희생 제물을 구입하도록 그러한 방향으로 유도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제물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해서 시중에 같은 종류의 짐승보다 훨씬 더 비싼 값에 그 당시 팔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성전에서 제물을 매매하는 것이 활성화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성전 안에는 어떤 사람이 있었냐면 돈 바꾸는 사람들이 있었다라고 나오고 있다. 이들은 다른 말로 사람들은 환전 상인들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당시 이 제사장들은 성전 건축을 마무리하고, 또 성전에 유지 보수를 위한 명목으로 성전 세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 성전 세는 세겔과 같은 유대인들의 화폐로,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그런 동전과 화폐로만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 로마 화폐는 로마황제 가이사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이 화폐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신성모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 화폐나 이방인의 화폐를 유대인의 화폐로 환전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환율을 임의로 올려서 폭리를 취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을 보면 누가 나오느냐면 비둘기를 파는 자들이 등장한다. 이 비둘기는 가난한 자들이 드리는 제물로 하나님께서 정한 것이다. 성전 안에서는 이 가난한 자들이 이 비둘기를 제물로 드릴 수 있도록 매매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그들을 배려하기 위해서 정하신 희생 제물인 이 비둘기를 이 판매상들은 이 역사적인 자료를 보면 당시 시중가의 무려 80배 이상을 받고 파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특별한 예물이라는 명목으로 그렇게 폭리를 취해서 판매들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전에 뜰에서는 절기에 맞혀서 성전에 찾아오는 자들이 희생제물을 드릴 수 있도록 짐승을 파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성전에 나올 때,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은 또 율법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용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이 제물 판매상들을 내 쫓으시고 장사하는 자의 상과 의자를 뒤엎으실 정도로 이렇게 본문 이 말씀에서 분노를 표출하셨던 것인가? 물론 방금 전에도 살펴본 것처럼 이 제물을 매매하는 자들은 시중보다 훨씬 높은 가격으로 폭리를 취해서 이 성전을 말 그대로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른 것이 분명히 있었다. 자신들이 욕심을 채우고자 성전 제물 매매를 통해서 부당한 이익을 취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진노하신 이유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잘못 된 것만은 아니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쭈욱 살펴보면 당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이 희생 제물에 대한 이해와 생각이 하나님께서 처음 의도하신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음을 우리가 발견하게 된다. 이 부분이 어떻게 잘못되어서 예수님을 분노하게 했는가? 이것을 우리가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성전에서 제물을 파는 자들은 짐승에 대해서 일정한 가격을 정해놓고 판매를 한다. 그리고 그 짐승들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릴 특별한 제물이기 때문에 같은 종류의 짐승, 시주에서 파는 것보다 더 비싼 가격에 매겨서 판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비둘기에 대해서도 만찬가지이다. 시중가보다 수십 배의 가격을 매겨서 비둘기를 판매한다. 이처럼 이 당시 제사장들은 특별한 정성과 헌신이 담긴 희생제물을 드릴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생기게 되고 하나님께서 받아 주신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사장들이 희생 제물이 희생 제사에 대해서 중요하게 여겼던 부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가 얼마 만큼에 대가와 정성을 하나님 앞에 드리느냐에 대해 관심이 더 크다. 거기에 대해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레위기를 비롯한 구약을 말씀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성전에 나아가기 위해서 희생 제물을 딱 정하실 때, 그 의도가 오늘 이 제사장들, 오늘 판매상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레위기 1장 2절을 보자. *레위기 1:2,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먼저 소와 양으로 드릴 때에는 자신이 키우는 가축 중에서 흠 없는 것으로 드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난하여 자신의 소유 중에서 제물을 드릴 수 없는 내용을 법의 내용을 따로 정하셨다. 우리 레위기 5:7절을 보자. *레위기 5:7 7 만일 그의 힘이 어린 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그가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소나 양과 같은 제물을 드리기가 힘든 형편이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중에서 제물을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정하셨다는 것이다. 이 비둘기라는 것은 당시 어떤 특별한 어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주위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그런 짐승이었던 것이다. 그런 동물이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이 제사들 드리기기 위해서 나오는 이 대상에게 그의 사정에 맞혀서 제물을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은 무얼 하고 계시는가? 지금 호의를 베풀고 계신다. “너 가난하냐? 소나 양으로 드릴 수 없느냐? 그럼 비둘기를 제물로 내라.” 그 형편에 맞혀서 지금 호의를 베풀고 계시는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 희생 제물을 통해 인간에게 어떤 하나님의 정성과 대가를 요구하시고 대가를 바라기 원하셨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아셨겠는가? 무게 얼마 이상의 흠 없는 한 마리, 이런 식으로 상당한 제물의 특정한 제물을 정해 놓고 그것만 가져오게 하시지 않았겠는가? 그러면 제물 드리는 자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든지 빚을 내서든지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취해서라도 딱 정해진 제물만을 드려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형편에 맞혀서 제물을 드릴 수 있도록 정하시고, 호의를 베푸시고 배려를 하신다. 소유하고 있는 가축 중에 흠 없는 소와 양이 있으면 그것을 제물로 드리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가난해서 어렵니?” 가난해서 형편이 미치지 못하면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비둘기를 제물로 정해서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호의를 베푸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이게 무얼 의미하는가? 하나님 앞에 나오기 위해서 하나님이 강조점을 두시는 것이 내가 만드는 어떤 대가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희생 제물 자체에 초점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다. 인간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는 존재이다. 이 죄에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기 위해서는 나의 죄로 인한 이 상황의 형벌에 대신할 희생 제물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제물을 드려야 하는지 정하는데 있어서는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뭐라고 하시는가? 드리는 자의 형편에 맞추는 호의를 계속 베풀고 계신다는 것이다. 또 이거 안 되면 더 이거 드려!! 이걸로 제물로 드리면 돼! 기르는 가축이 없어서 소와 양이 안 되면, 가장 흔히 구할 수 있는 비둘기로 제물을 삼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로 말미암아서 결국에는 장차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이 만드는 어떤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완전한 희생 제사,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과 화목 하게 될 것임을 예표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호의로 인한 제물을 통해서 인간과 화해하고 우릴 만나실 것이다. 이 예표라는 것이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이러한 희생 제사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와전시켜서 제물이 담고 있는 의미보다 제물을 드리는 자가 만드는 대가와 수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또 어느 정도 이상의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받으시고 성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너희가 하나님 앞에 나올만한 어떤 자격을 갖추고, 죄에 대한 하나님에 노여움을 풀만한 특별한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나님 만나러 성전에 나올 수 있다고 제사장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이 어떻게 하시는가? 상을 뒤엎어 버릴 정도의 분노를 표출하고 계신다. ※제가 이 내용을 점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한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어떤 아이가 하나 있는데, 이제 친구들과 이 아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 축구를 하다가 그만 볼을 잘못차서 남의 집 일층 베란다 유리창을 와장창 깨뜨렸다. 하필 왜 구를 차다가 유리창 깨는 것이 의아해 하실 수 있는데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실제로 일으켰던 사건이다. 가장 와 닿는 일이기에 예를 들었다. 유리창을 깬 아이는 어떠하겠는가? 놀라서 어찌할 줄 모른다. 그런데 함께 축구를 하던 이 친구들이 한 편으로는 걱정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살짝 놀리기도 한다. “어떡하냐? 너희 엄마가 아시면 엄청 놀라실 텐데? 이 유리창 값 물어주기 전에는 너 집에 못 들어갈 걸?” 그러면서 아이의 애간장을 태운다. 그런데 이 유리창을 깬 아이의 엄마와 잘 알고 지내는 이웃집 아주머니가 그 광경을 보신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의 엄마에게 찾아가서 사고 소식을 전한다. 볼을 잘못차서 유리창을 깼다고 했다. 그러자 이 아이의 엄마가 서둘러서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래서 그곳에 갔더니 겁나서 울고 있는 애를 아이들이 둘러싸고 하는 말이 “너 이거 물어주기 전에는 집에 못 들어간다. 너희 엄마가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할 걸? 너 기물 파손 죄로 경찰서에 갈 수도 있어.” 계속 겁을 준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그 아이 엄마는 이 아이들에게 가스라이팅 하고 있는 이 아이들에게 말한다. “너희들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고 빨리 집에 가!!”라고 호통을 친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다가가서는 이야기 한다. “너 엄마가 항상 조심하라고 했지, 축구를 왜 운동장 가서 안 차고 아파트 단지에서 차고 그래? 또 그럴 거야? 잘못 했어 안 했어, 잘못했어요.” “다음에서 조심하면 돼, 알겠지? 얼른 집에 가서 씻고 저녁 먹어.” 그리고는 엄마가 대신해서 아들이 깬 유리창을 다 치르고 상황은 끝난다. 지금 오늘 본문의 상황을 우리의 정황에 맞추어서 이야기하자면,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성전이 어떤 곳인가? 만왕이 왕 되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집이고, 하나님의 궁전이다. 제사장을 위시한 매매하는 자들, 돈 바꾸는 자들, 이 비둘기파는 자들은 유대인들에게 뭐라고 하는가? “너희 스스로 대가를 지불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정성을 보이지 않으면, 너희 절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 하나님 만날 수 없다.” 라고 유리창을 깬 친구들처럼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짠! 나타나셔서 그 자리에 찾아오셔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 쫓으시고 상과 의자를 뒤엎어 버리시면서, 방금 우리가 나누었던 예화의 어머니처럼 “너희 내 자식에게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말고 집에나 가!” 그리고 나서 본문 13절에서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21:13,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가복음에서는 “네 집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라고 하신다. 여러분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는 하나님 만나는 것이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성도님들 하나님 만나기 위해서 기도하러 나올 때마다 하나님 만날 어떤 자격이나 대가를 준비해놓고 기도하는 분은 계시는가? 앞에 헌금 봉투 놓고 그러고 기도하는 분이 계시는가? 사실은 만드는 게 하나도 없다. 그냥 기도하러 간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기도할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시고 우리와 교제하기 위해서 은혜로 베풀어주신 완전한 희생 제물대신 예수님을 힘입어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내 영혼을 우리 지금 신약시대 영혼을 성전삼아 함께 하시는 주님을 기도를 통해 인격적으로 만난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가 바로 그런 뜻이다. 우리 편에서 만드는 어떤 대가와 정성으로 하나님 만나는 곳이 성전이 아니다. 하나님 만나는 것이 모든 조치와 수고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마련해 놓으셨고 장차 그 아들의 희생 제물 됨을 통해서 다 이루어 놓으실 것이다. 위에 아까 봤던 그 엄마가 아들의 잘못을 대신해서 모든 문제를 처리하듯이 하나님 편에서의 일방적인 은혜에 의지하여 관계가 회복되고 그분과 교제하는 것이 바로 성전이다. “이 사실을 왜곡해서 우리 자녀들을 나와 멀어지게 하지 말고 불행에 빠뜨리지 말아라.” 집에나 가라. 하시는 것이 “내 집은 기도하는 곳이라.”라는 말씀에 담겨있는 참된 의미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이 왜곡되는 것을 가장 큰 분노를 표출하고 계시다는 것임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그의 자녀와의 관계를 이간질 시키고 어긋나게 하는 잘못된 가르침과 행동들, 이것에 분노하고 계신다. 그리고 이 사실을 말로써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분명히 하기 위해서 14절에서 보면 어떤 액션 행동을 취하신다. *마태복음 21:14, 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무얼 하시냐면, 맹인과 저는 자들, 즉 불치의 질병가운데 있는 병자들이 성전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그 즉시 이 병자들을 고쳐주신다. 보시면 지금 맹인이 저는 자들이 고침 받기 위한 하나님께 어떤 대가를 지불했는가? 병원비를 냈는가? 희생 제물을 드렸는가? 그저 예수님께서 일방적인 호의와 은혜로 이 병자들을 고쳐주신다. 주님께서는 맹인과 저는 자들을 그들이 만들어 내는 예수님께서 드리는 어떠한 대가없이 일방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그들을 고쳐주신다. 그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호의로 이루어지는 만남과 사랑의 그 산 증거를 맹인과 저는 자들의 치유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은 다만 육신의 치유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 제물로 내 놓으신 일방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 영혼이 구원함을 받았다. 또한 우리 내면의 아픔과 우리 마음의 상처도 주님의 조건 없는 은혜와 사랑에 의하여 고침을 받을 수가 있다. 오늘 날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대표적인 마음의 병은 어떤 것이 있는가? 우울증을 들 수 있다. 우울증의 발상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어떤 경우는 사람과의 관계의 어려움에서 찾아올 수 있고, 육체가 연약하여지거나 환경이 어려움이 찾아와서 우울증이 생길 수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어떤 사람과의 관계가 해결되고 환경의 좋은 영향으로 변하면 마음에 우울감도 사라질 수 있다. 제가 어떤 탈북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분이 대한민국으로 오시고 처음에는 완전히 별 천지에 온 것 같아서 너무 감사하고 행복했다고 한다. 그러니 북한보다 훨씬 한국이 더 잘 사니까,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나서 3년간 이분이 우울증으로 힘들었다고 한다. 아니 한국에 와서 자유를 누리고 더 나은 삶을 사는데 왜 이분에게 우울증이 찾아온 것일까? 바로 북한에 두고 온 부모님과 형제들 때문이라고 한다. 북한에 두고 온 부모님과 형제들이 마음에 아픔으로 남고 죄책감이 되어서 함께 이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해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좋은 것을 먹어도 맛을 느낄 수가 없고, 좋은 곳을 가도 그냥 가서도 눈물만 나더라는 것이다. 형제들이 지금 고생하고 있을 텐데, 북에 두고 온 가족들로 인해서 대한민국에 좋은 나라에 와서도 좋은 것을 누릴 수가 없고,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분이 탈북한 지 3년 만에 돈을 벌어서 브로커를 통해서 부모님과 형제들을 모두 대한민국으로 모시고 올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자신의 우울증도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상황이 좋은 방향으로 되면 우울증도 고쳐지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상황에 변화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도 있다. 좀 더 깊은 우울증일 것이다. 이 같은 경우는 대부분 그 원인이 과거의 성장 과정과 관련이 되어 진다. 사람은 밥을 잘 먹으면 육신이 건강하게 성장한다. 그리고 교육을 잘 받으면 지적인 성장도 잘 된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보이지 않은 우리의 내면과 정서적인 부분도 함께 자라고 성숙해 가야 하는데, 이것은 주로 바로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의 따뜻한 사랑과 격려, 매일 내가 접하는 가정을 비롯한 주변의 안정된 환경 속에서 성장하게 되게 된다. 이를 통해서 밝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게 되고 높은 자존감을 통해서 사회에서도 좋은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 있어서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비판과 지적을 주로 받고, 자주 남과 비교를 당하게 되면 우울감이 높아지고 자존감이 낮아진다. 그리고 이것이 심해지면 깊은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이 우울증 사람마다 타고난 기질이 다 다른데 내성적인 기질과 작용하게 되면 그 사람들을 회피하고 은둔형의 사람으로 빠져들기 쉽다. 반대로 외향적으로 작용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쉽고 공동체를 힘들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 내면의 어려움이 근본적으로 치유가 되지 않으면 평생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우리가 보게 된다. 이 깊은 우울증은 어떤 의학적인 치료나 약으로도 근본적인 치료가 사실 쉽지가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우리가 과거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부모님이나 가족들로부터 그동안 못 받은 것을 사랑과 격려를 다시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치유가 가능하겠는가? 오늘 조건 없이 일방적인 호의와 은혜를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그분과 교제할 때, 이 우울증과 같은 마음의 병에서도 해방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영혼까지 지으신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어떤 모습이든 우리를 우리 존재자체로 너무나 사랑하셔서 일방적으로 뜻을 정하시고 아들의 생명까지 내어주셔서 우리 인생에 찾아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이 조건 없고 일방적인 호의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 언제나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지속적으로 거할 때, 오늘 예수님의 일방적인 호의로 병자들이 오늘 말씀에서 치유되듯이 우리의 마음에 힘이 생기고, 상처가 아물고, 치유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혹시 마음에 어려운 분이 계시다면, 어떤 대가나 노력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우리 어떤 수준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일방적인 은혜로 찾아오신 주님의 사랑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여서 치유 받고 자유 함을 누리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처럼 일방적인 호의를 베푸시고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이 하나님의 사랑, 일방적인 사랑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우리는 무얼 해야 하는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어떤 대가와 노력을 요구하지 아니하시니까 그러면 우리는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로 사랑하시지 그냥 있으면 되는가? 그런데 그렇지 않다. 무얼 해야 되는가?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을 해야 한다. 오늘 설교 제목에 나오는 이 반응이라는 단어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오늘 말씀에서도 보면 예수님께서 네 집은 무슨 집이라고 하는가?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시기 위해 우리에게 어떤 그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시지만, 우리는 그 사랑에, 하나님의 사랑에 기도라는 제목으로 반응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14절에 맹인과 저는 자들이 치유받기 위해서 어떤 대가를 만들어 내지 않았지만 치유하시는 예수님께서 무얼 했다고 했는가? 나아오는 반응을 한 것이다. 그때 고쳐주시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받고 받아들여지기 위한 노력이나 대가를 만들지는 않지만, 이미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과 교제하는 반응은 해야 된다. 리엑션을 해야 된다. 그래서 ‘브라아언 채플’이란 신학자는 그의 책 ‘성화에 은혜’란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우리를 감싸고 있는 공기 같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한다. 이미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 은혜의 시간을 통해 그와 같은 사랑을 좀 더 풍요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은혜의 수단이란 이미 온전히 베풀어진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그저 경험하는 수단일 뿐이다. - 브라이언 채프의 “성화의 은혜” 중에서 - -은혜의 수단은 하나님의 사랑을 만드는 게 아니고 대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어떤 행위가 아니라, 이미 무한하게 베푸는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한 반응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공기가 주변이 있지만 무얼 해야지 내 것이 되는가? 호흡해야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피조물 중에 유일하게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셔서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라는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영원히 함께 사랑의 교제를 주님께서 우리와 나누시기를 원하신다. 이 반응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반응하며 교제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느낄 때가 있다. 은혜 충만히 받으면 기도가 되고, 뭔가 상황이 안 좋아지면 괴로운 일이 생기면 또 느슨해졌다가 하는 게 우리의 사람이다. 그래서 어떤 분은 ‘기도는 노동이다.’ 라고 하는 자들도 있다.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에 지속적인 반응해 나가기가 한 결 같이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 것인가? 하나님과 한 결 같은 마음으로 그 만남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그 만남이 더 깊어지기 위해서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만남이 즐겁고 행복하면 된다. 어떤 의무감으로 만나는 것은 지속적인 것이 쉽지가 않고 그 관계가 언젠가는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사람은 무엇이든지 행복해야 오래간다.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우면 만남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인격적인 관계에 있어서 그 만남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서로 사랑하면 된다. 사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그리고 이 주님과의 사랑을 위해서 우리는 이 기도와 함께 무엇이 병행되어야 하는가 하면, 말씀이 병행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원천적으로 죄 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죄 성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고, 심지어는 두려운 대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원래부터 처음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렇게 되면 기도하는 자리에 기쁨을 누릴 수 없게 되고 마치 차가운 벽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제가 이제 제자훈련과 사역 훈련을 하는데, 훈련을 하면 첫 시간에 훈련생들에게 꼭 하는 질문이 있다. 무슨 질문이냐면, 집사님께 하나님은 어떤 이미지로 다가오는가? 라고 묻는다. 그랬더니 다양한 대답을 한다. 예전에 어떤 집사님이 뭐라고 하냐면, ‘교장 선생님과 같다.’라고 한 성도님도 있다. 교장선생님이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분이시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교장 선생님을 정말 친밀하게 느끼기는 쉽지가 않았다. 걷다가 교장 선생님이 가까이 오시면 일부러 옆으로 싹 돌아가기도 하고, 그랬던 경험도 있었던 것인데 그만큼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경외 분이긴 한데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표현을 그 성도님은 표현을 그렇게 했다. 그런데 이분이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을 거듭하면서 말씀을 나누고 매일 과제로 인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찐한 사랑을 느끼게 되고 주님과의 시간에 기도로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훈련 말미에는 뭐라고 했나면 결국 하나님은 따뜻하고 자상한 아버지로 느껴진다고 이 고백을 했다. 이처럼 말씀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주님을 알아갈 때, 죄로 인해 어그러졌던 하나님에 관한 내 안에 이미지가 올바로 정립이 된다. 그리고 오늘도 말씀을 하나님의 사랑을 좀 더 깊이 알게 되었는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이 우리 마음에 젖어 들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과 연결 되냐면 연이어서 기도하는 우리의 마음이 달라지고 기도가 노동이 아니라, 즐거움이 되고 가장 행복하고 우선순위의 시간으로 바뀌어 가게 되는 것이다. 마치 연애할 때, 이제 막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들어왔는데 또 상대방이 보고 싶어서 전화기를 붙들고 밤새 통화하는 것처럼 이다 그때가 떠오르는가? 이처럼 말씀으로 주님을 알아가는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의무를 넘어서 사모함과 자원함으로 항상 주님의 만나는 자리에 있게 되고, 그것은 이미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자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에 반응하는 자를 주님께서 기뻐하셔서 그와 깊이 연합하시고, 그 모든 연약함을 치유하시고, 더 나아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복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과 행위로까지 나아가게 하시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며 사랑의 풍요로움을 누리시며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제 우리 교회는 부흥. 헌신 토요비전 새벽예배와 앞으로 다가올 가을 특별 새벽부흥회예배와 같은 주님의 사랑을 마음껏 반응하며 행복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고 가장 기뻐하시는 이 은혜의 자리, 그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할 수 있는 최고의 이 자리를 놓치지 말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참여해서 믿음 보고를 통해 주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삶이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요약 우리에게 일방적인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시듯이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으시고 한 결 같음에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고 가장 기뻐하시는 이 은혜의 자리에서 그 하나님의 자리에서 반응하는 최고의 이 자리를 놓치지 말고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믿음 보고를 통해 함께 동행 하여서 그 사랑에 반응하며 주님의 사랑의 손길에 반응해서 언제나 변함없이 주님께 헌신하기를 실천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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