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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11월 27일) 제목: "함께 가고 함께 머물고" 말씀: 룻기 1:16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하상범 부목사님 ----- *룻기 1:16,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 ▶존귀하신 아버지 하나님, 광야와 같은 인생길에서도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고 앞서 인도하시며 우리의 모든 순간순간에 동행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늘 예비하신 회복의 은혜를 경험케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삶이 온전히 드려지게 합시고, 그 은혜를 더욱 깊이 누리는 복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가정과 교회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가 하늘 보좌에 상달되게 하시고, 이 땅 가운데서 부흥의 불길로 이 교회와 민족 위에 타오르는 놀라운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말씀 가운데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시길 소망하며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눈이 내린 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수요기도회에 나오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저녁기도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큰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말씀을 보겠습니다.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룻기 1장 16절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을 펼치면 이 세상을 주관하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크고 광대한 이야기에 압도가 될 때가 있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믿음의 조상들을 통해 삶의 기초를 놓으시며 고난 속에 있는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순종과 사랑의 삶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그 이야기가 언제나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반면에 동시에 평범한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무관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어떤 조건들을 대비해 보아도 나 스스로를 하나님의 이야기에서 소외된 존재로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다가 창세기에서 시작된 말씀이 한장 한장 넘기다 보면 위대한 신앙의 영웅들의 이름이 아닌 바로 평범한 사람을 통해 펼쳐지는 놀라운 이야기를 만나게 됩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루세 이야기입니다. 루슨 이방 여인입니다. 모태신앙도 아니었습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에도 특별한 배경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따라 구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요란하지도 않고 특별하지도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 속에서 절대 빠지면 안 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룻기 4장 17절 말씀은 이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줍니다. *룻기 4장 17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작고 평범하게 보였던 룻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로 이어지는 구원의 역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었습니다. 룻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하나님은 뛰어난 자들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작고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는 귀히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비록 내가 우리가 나 자신을 바라볼 때에 부족함다 보일지라도 평범하다 보였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인상적인 이야기는 그 속에서도 시작이 된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무명의 이방여인 룻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는지 차근차근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 첫 번째, 나오미와 룻의 관계에 ‘헤세드’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다 보면 관계라는 숙제를 마주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특히 고부관계는 바로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얼마나 힘든지 이런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시’자가 들어가는 거는 다 싫다. 그냥 싫은 것도 아니고 전부 다 싫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반찬을 먹을 때에도 시금치가 들어갔으면 요렇게 뺀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리고 카페에 가서도 시럽은 쳐다도 안 본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통독하다가 10편이 나오면 이렇게 건너 뛴다 라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시어머니께서 집에 온다는 소문을 들으면 찬양을 이렇게 개사해서 부른다고 합니다.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 없네.’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 없네. 라는 이 찬양을 부른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 우스갯소리처럼 자부와 시어머니의 관계, 고부관계는 참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바라보면 바로 누군가의 관계 속에서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바로 시어머니와 며느리 룻의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우리 가운데에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구나 얼마나 도전적인 마음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룻기 1장에서는 나오미가 함께하고자 한다고 계속 말하는 그의 며느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룻기 1장 8절에서 9장 상반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룻기 1:8-9, 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여기에 선대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선대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바라볼 때의 ‘해세드’입니다. 헤세드는 단순한 호위나 친절을 넘어서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학자 히브리어 단어를 연구하는 학자 ‘캐서린 샤켄필드’는 이 헤세드 단어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곤궁에 처한 자를 위해 의무 없이 자발적으로 베푸는 언약적 충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조건 없는 자비와 헌신과 인혜와 사랑과 충성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 룻과 오르바가 그에게 보여준 햇세들을 인정하며 축복해 주었습니다. 이방 땅 낯선 문화 속에서 시부모와 시어머니와 그녀의 남편들에게 그의 며느리들이 얼마나 충성했었는지 얼마나 사랑을 베풀어 주었었는지 얼마나 자비를 행해주었었는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그런 며느리들의 삶을 축복하며 그들에게 더 나은 길을 권했던 것입니다. 시어머니와 함께 낯선 땅에 미망인으로 들어가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고향 땅으로 돌아가서 남편의 집에서 안식을 누리는 평범한 일상을 회복시키는 것이, 회복하도록 그녀들을 떠나보내는 것이 며느리들이 자신에게 베푼 해세드에 보답하는 길이라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룻의 선택은 너무나 놀랍습니다. 나오미가 거듭거듭해서 만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루키 1장 16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룻기 1:16,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룻이 나오미에게 보내준 보여준 헤세드는 단순히 시어머니와 동행하겠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 룻기 1장 20절에서 21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룻기 1:20-21,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아멘 나오미의 이름 가운데에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나는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자신을 즐거움이라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마라’ 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마라는 영어로 비터입니다. 비록 쓴 잔, 쓴 물, 쓴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나오미의 고백은 자신이 고향 땅을 떠나 풍족하게 했지만, 어느덧 지나고 보니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어버려서 이제는 자신의 두 손이 시간이 지날수록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풍족해진 것이 아니라 점점 텅 비게 되었다. 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웃음이 가득했었고 행복해진 인생을 살아간 것이 아니라, 점점 불행이 더해졌고 절망이 더해졌고 하나님께서 내 인생 가운데 쓴 잔을 허락하셨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나오미는 나오미의 이 삶을, 이 인생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에게 어머니의 텅 비워진 인생에 내가 하나님의 언약적 충성으로 그 빈자리를 채우겠습니다. 내가 어머니의 그 슬픔을 함께 동행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은 나오미와 루세의 이 모습은 우리를 하나님의 언양적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시편 23편 4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편 23:4,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아멘,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에 머물 때에 나와 함께 머물고 함께 동행하는 이들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는 하나 둘 나의 곁을 떠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친구도 떠나고, 가족도 떠나고, 심지어 나의 이 두 손으로 나의 힘으로 힘껏 붙잡고 있던 것들까지 하나씩, 하나씩 빠져나가고 떠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편 23편 4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떠난 다닐지라도 나는 너와 함께 하겠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신명기 31장 6절에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신명기 31:6, 6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릴 떠나지 않을 뿐 아닌 아니라, 어떠한 상황 가운데 거한다 할지라도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라고 말합니다. 이 구약에서 선포된 말씀은 다시 신약 말씀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한 성취가 이뤄집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1:23,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아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님들, 하나님의 헤세드는 변하지 않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릴 결코 떠나지 아니하시며,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텅 빈 인생 가운데 머문다 할지라도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 빈자리를 하나님의 헤세드로 채워주신다. 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십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삶과 가정 속에서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이 고백을 넘어서 오늘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룻이 나오미에게 해세드를 베푼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에 베풀어 주신 헤세드를 세상 속에서 실천해야지만 됩니다. 누군가가 고통 가운데 울고 있을 때, 그의 삶에 깊이 뿌리내려 동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할 때 한가지를 기억해 주셔야지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나 자신의 다시 자격을 돌아볼 때가 맞습니다. 내가 권한 가운데에 내가 어려움 속에 있어도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라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계신다라는 그 믿음을 붙들고 다시 나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고통을 바라보고, 다른 이의 고통 가운데 해세드를 채워주는 하나님의 헤세드의 도구가 되어야지 됩니다. 지금이 바로 하나님의 그 이내에 그 해세드의 사랑을 실천할 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혹시 가족 중에 외로움에 지친 누군가가 있습니까? 영 가족 중에 홀로 눈물을 흘리는 영적 동지가 있습니까? 아니면 직장동료 중에 마음이 무너진 동료가 있습니까? 그들에게 내밀어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하나님의 헤세드를 전해 주십시오. 우리가 작은 헤세대를 실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현장 가운데 함께하시고 동행하여 주시고 역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헤세드를 전하는 도구가 되어졌을 때에 그곳이 끝나는 곳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펼쳐주시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로 펼쳐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입니다. II. 두 번째, 룻과 나오미 가운데에는 신앙이 계승되었습니다. -성경 66권 중에 여인의 이름이 성경 책의 제목이 된 것은 단 2권이 있습니다. 에스더와 룻기입니다. 이 2권의 책은 각기 다른 시대와 배경 가운데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의 계승과 결단이라는 공통적 메세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에스더는 이방인의 땅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녀의 결단을 가장 잘 대변하는 말은 아마도 제가 생각했을 때에는 에스더 4장 4절입니다. 그녀가 어떻게 말했는가 하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스더 4:16, 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에스더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목숨을 걸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 고백은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며 는 그리스도인 우리에게 깊은 도전을 줍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거하며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에스더와 같이 이방인의 땅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참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군 생활을 할 때에 경험했던 것은 회식 자리에서 내 앞에 놓여진 술잔이 가득 채워지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거절해야 될까? 그리고 보니까요, 사람이 많은 식당에서 일어나서 대표 기도를 해야 할 때도 그러한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필이면 12월에 지인들의 약속이 폭주하는 이때에 지인들이 저희들에게 주일의 약속 성탄절에 약속 잡자고 하면은 교회 가야 된다. 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야 할 때도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직장에서 아직 내가 그리스도인님을 드러내지 못했는데 믿음을 밝혀야 할 때도 그러하더라구요. 그리고 제가 자녀를 둔 성도님들을 만나니까, 이럴 때도 있습니다. 자녀가 결혼을 하는데 자녀에게 우리 결혼 예식을 예배로 드리자고 말을 해야 할 때, 마지막으로, 부모님의 하나님께서 부르심 앞에 장례를 드려야 하는데, 형제의 신앙이 달라야 할 때도 바로 그러더라구요. 이 모든 상황은 기독교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에스더의 고백과 같이 죽으면 죽으리라다. 하는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는 말들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룻의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룻의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룻은 에스더와 정반대의 상황 가운데에 있습니다.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의 땅으로서 살아가야지 됩니다. 이방인의 땅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가야 되는 그 룻을 가장 잘 대변하는 말씀이 오늘 함께 읽었던 룻기 1장 16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룻기 1:16, 16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아멘, 룻은 과거 모압 족속에는 어떤 신을 섬겼음가 하면, 그모스신을 섬겼습니다. 룻 역시 그들의 민족을 따라 금호수 신을 섬기는 모합족속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어머님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적 결단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하면 신앙의 계승을 이루는 위대한 결단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녀의 고백은 출애굽기 3장 6절에서 하나님과 모세 가운데 언약을 맺었던 그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출애굽기 3:6,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룻이 지금 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됩니다. 라는 이 고백은 단절된 고백이 아니라, 연속성에 있는 믿음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이삭에게 전수되었고, 이삭의 신앙이 야곱에게 계승되었습니다. 어머님의 신앙이 이 민족을 따라 흘렀던 그 믿음의 신앙이 바로 나오미에게 전수가 되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신앙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부모가 자녀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지금 세대가 한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전수하고 계승되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신앙은 계승의 종교입니다. 신앙은 나 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나 홀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도록 전수하고 계승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가정을 심방(尋訪)하다 보면 그 가정 가운데에서 영적 기둥과 같은 분들을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그분들을 바라보면 가정에서 어떤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가 하면 어떠한 상황에도 요동(搖動)하지 않고 견고한 믿음으로 가정을 지탱합니다. 그리고 가정이 영적으로 격길로 빠지지 않도록 영적 나침반의 사명을 가정 가운데서 감당하는 그런 분들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바로 룻기 1장의 가운데에서 나오미가 그의 집안간에서 영적 기둥과 같은 역할을 감당했던 것 같습니다. 비록 그녀는 지금 하나님께서 나에게서 웃음을 뺏어갔다. 라고 말합니다. 나에게 쓰디 쓴 잔을 마시겠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내가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들을 다 떠나가게 했다. 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비참한 인생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그녀가 붙들었던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이 무엇인가 하면, 며느리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라는 겁니다. 민족 가운데에 내려져 있는 그 신앙이 자신에서 끊어지지 않고 며느리들에게 전수되어지고 계승되어질 수 있도록 그 사명을 다했다라는 것입니다. 이 사명은 나오미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수요저녁기도회에 참석하신 성도님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기독교인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는 진리에 반대되는 말씀을 계속해서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만 바라봐도 그렇습니다. 이제는 부모의 신앙을 자녀에게 강요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훈육도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녀가 부모를 신고할 수 있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학기 중에 있는 자녀가 5일 이상 체험 학습을 쓰게 되면 반 담임 선생님은 부모님에게 학교 학생의 안전과 건강을 묻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학생과 통화해야지만 됩니다. 학생과 통화하여서 학생 그의 안전과 건강을 확인해야 되는 이러한 시대 가운데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댁 가운데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다음 세대 나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신앙을 계승해야지 될까요?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지만 될까요? 바로 방법이 있습니다. 토비새의 자리에 자녀들을 초대하십시오. 매주 믿음의 세대가 함께 예배드리는 토비새의 자리에 자녀들과 함께 참석하십시오. 자녀들과 함께 참석해서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말씀을 듣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72구절을 암송하고, 함께 추억을 가지고 돌아가면 자녀들의 인생이 돌아보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건너고 길갈의 12돌을 세웠던 것처럼, 그럼 자녀들의 인생 가운데에 믿음의 12돌이 세워질 것입니다. 또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또 하나인 참여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특새입니다. 특새를 통해서 기도의 유산을 물려주십시오. 하나님께서 1년에 2번 열리는 그 특세는 나의 자녀들에게 신앙을 계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부모의 새벽기도는 자녀의 평생 축복이 되며, 자녀의 새벽기도는 부모의 노후대책이 될 것입니다. 특세의 자리에서 부모님들께서 자녀를 위해 눈물을 뿌리며 기도하면 그 눈물은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인생 가운데에 뿌려주실 것입니다. 내가 흘려야 될 눈물이 잔 내가 자녀들을 대신하여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인생에서 눈물을 덜 흘리게 하실 것이고, 내가 눈물을 흘리며 뿌렸던 그 기도가 자녀들의 인생 가운데에 반드시 기쁨의 단으로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성도님들, 믿음의 계승을 위해서는 토비새의 자리와 특새의 자리에 믿음의 자녀들을 꼭 데리고 함께 참석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룻은 나오미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순간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자녀 세대가 부모의 세대를 바라보며, 부모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다. 라고 하나님이 되십니다. 라고 고백할 때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다음 세대를 우리 세대보다 더 크고 귀하게 사용하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밤, 수요 기도회에 참석하셔서 이 거룩한 여정을 하시고 믿음의 힘든 싸움을 하셔야 되는 귀한 성도님들에게 아버지와 위로를 주시고, 격려를 주시며 입술의 권세를 더해주셔서 자녀들에게 말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선포되는 말씀이 자녀들의 마음에 심겨지게 되길 하나님께 축복하여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세 번째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가고 함께 머물렀습니다. III. 세 번째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가고 함께 머물렀습니다. -룻기 1장 16절 하반절에서, 룻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룻기 1:16b,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아멘, 이 고백은 단순한 결단 정도가 아닙니다. 이방 여인 룻이 자신의 전 존재를 지금 아버지 하나님 앞에 드리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의탁하겠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늦은 루슨 모합 여인입니다. 성경에 보면 모압족속은 매우 어두운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19장 31절에서 38절 말씀해 보면, 룻이 아니라 롯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가운데에 그의 두 딸을 데리고 탈출하게 됩니다. 그때의 큰딸이 그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가운데에서 자신의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때에 그 딸이 어떤 행동을 하는가? 하면 그의 아버지 롯을 술을 먹이고 술을 취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과의 비정상적인 관객 가운데서 시작된 민족이 바로 모압족속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23장 3절에 보면, 모압족속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지 못한다. 라고 선언되었던 민족이 모압족속을 바라보면 어떻습니까? 모압족속은 제로 시작된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진 족속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신이 바꿀 수 없는 그 한계 앞에서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룻의 이 고백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룻의 고백을 통하여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 고백을 통해서 그녀의 과거를 끊고,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로 들어가게 된 문을 그의 삶 가운데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무슨 하나님의 고백했는데 어떤 하나님을 고백했습니까? 바로 그녀의 시어머니가 믿던 그 나오미의 하나님을 고백했습니다. 나오미는 룻기에 바라보면 이런 하나님을 고백했습니다. 룻기 1장 20절에서 21절을 바라보면, 어떤 하나님을 바라보는가 하면, 나오미는 하나님에 대해서 전능자, 라고 고백합니다. 히브리어로 ‘엘 샤다’이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고 불가능한 속에서도 가능케 하시는 그 아버지 하나님을 바라봤던 것입니다. *룻기 1:20-21,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그러니까 자신의 며느리가 이방 여인이고, 죄로 태어난 족속이고 하나님의 청호에 영원히 들어오지 못하지만 그녀가 하나님을 받아들이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녀의 삶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꿔주실 수 있는 전능자의 하나님을 고백하셨던 것입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오미의 삶 전체를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바라보면 성경을 찬찬히 묵상하다 보면, 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성경 전체에서 반복되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바라보기보다 잠깐 창세기 두 군데에서 잠깐 바라보려고 하는데요. 첫 번째는 창세기 17장 1절 말씀입니다. 함께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창세기 17장 1절,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어떠한 상황인가 하면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 때입니다. 그리고 이미 너무 늙어서 아이를 생산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에 처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아내 사래 역시 하나님께서 그의 경수를 끊었기 때문에 자녀를 잉태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 있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 가운데의 아들 이삭을 바라봐 주셨습니다. 이삭의 이름의 뜻은 웃음입니다. 웃음이 없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인생 가운데에 다가가 주셔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웃음을 회복시켜주셨던 것이었습니다. 룻과 나오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룻기 4장 13절에서 14절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룻기 4:13,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기업 물을 자가 없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룻에게 기업 물을 자를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라고 고백한 그 룻의 인생에 다가가 주셔서, 남편이 없는 인생 가운데에 남편을 주셨고 자녀가 없는 인생 인생 가운데의 자녀가 허락하셨으며 더 이상 베풀 자비가 받을 자비가 없는 인생 가운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풍성한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인생으로 바꾸어 주셨던 것입니다. 또 한 구절이 있습니다. 창세기 43장 14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창세기 43:14, 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야곱과 같은 상황에 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야곱은 요셉을 잃었습니다. 또 그에게 기근이 닥쳤습니다. 이제는 베냐민을 보내야 하는 상황 가운데에 처해져 있습니다. 왜 이 상황이 힘든가 하면 야곱이 그 상황을 통제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그 상황 가운데에 개입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의 무능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 상황에서 야곱이 무엇이라고 고백하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가 통제하고 내가 개입할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황을 통제하여 주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한 가운데 개입하여 주실 것이다. 라고 야곱이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 고백의 역사가 룻기 3장 18절 말씀은 똑같이 등장합니다. 어떤 상황입니까? 함께 말씀을 읽겠습니다. *룻기 3:18, 18 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아멘, 베들레엠에 들어가서 보아스와 룻이 타작 마당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를 나오미가 들었습니다. 나오미가 속으로 생각했을 때에 그가 준비했던 일들이 완성되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그 어려움이 무엇인가 하면 보아스만 기업물을 자가 될 줄 알았는데 보아스 외에 또 다른 기업물을 자가 그 민족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더이상 나오미의 손에서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나오미가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 상황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 상황 가운데에서 나오미는 룻과 함께 고백했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쉬지 않으시고 이 상한권에 개입하여 주실 것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에서 당신의 이름을 밝히실 때에는 그의 백성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는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밝히실 때에도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현재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6장 14절에서 6장 48절에서 ‘내가 생명의 떡이니라.’ 라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버지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 함께하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과거에 왕성하게 활동하시다가 지금은 쉬고 계시는 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성경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예레미아 33장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레미아 33:2, 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나오미는 남편이 죽고 두 아들마저 잃었을 때에 그의 모든 삶이 끝났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이름을 나오미, 즐거움, 웃는 인생 기쁜 인생이 아니라, 쓴 인생, 쓴 잔을 들이키는 인생이라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그의 며느리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해 주지 않았습니까? 그의 고향 사람들에게 가서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두손이 풍족해지는 인생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두 손은 텅 비어져 있는 인생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행복해지는 인생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불행해지는 인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텅 빈 인생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선 룻의 헤세드의 결단 주권적 하나님을 붙드는 그 결단을 통하여서 두 여인의 이야기는 사사시대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다윗 왕가의 이야기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까지 이뤄지는 구원의 역사가 되는 이야기를 우리는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이야기는 결코 끝나지가 않습니다. 상실과 고난의 자리에서도 아무리 우리의 인생이 텅 비어져 보이는 순간에서도 그리고 심지어 끝난 것처럼 느껴지는 바로 그 자리에서도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가고 함께 머물고 있으시며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가운데에 서러운 역사를 펼쳐 보내주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6장 7절을 보면 고통과 신음 가운데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출애굽기 6:7, 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그리고 그 백성을 구출해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신적 부르심 앞에 루시 응했습니다. 룻의 응답 앞에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내가 너의 그 응답에 응하겠다라고 말씀하시며 룻과 함께 가고 함께 머무는 인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인생 가운데에 하나님께선 개입하여 오셨으며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평범한 이방 여인의 삶 가운데에 베풀어 주셨습니다. ♣요약 죄로 어긋나 한참을 비껴가던 나 같은 사람을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찾아내사 오늘 여기까지 사랑으로 인도해 주셨으니, 말로 다 표현 못할 그 은혜를 세상에 전하고, 나누는 삶으로 사용해 주시길 간구해야 한다. ‘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 이방 여인에게도 세대를 거슬러 계승되는 신앙을 주셨으니, 믿는 가정의 다음 세대들과 교회로 불러 주신 젊은이들로, 온 나라에 불어닥친 절망을 끊어내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 저력을 보여주기를 소원하고, 믿어도 고난이 있고 기도해도 상실이 여전한 인생이지만, 이 좁고 험한 세상의 길로 함께 가자 부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사명에 순종하여 주님 나라 이를 때까지, 순례의 걸음을 멈추지 않기를 소원하자. 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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