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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7월 3일)
제목: “본능적으로 vs 성령으로”
말씀: 갈라디아서 5:16-24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오규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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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16-24,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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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성령의 새 바람이 불어와 생명의 능력 역사하는 수요저녁기도회에 함께 하신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본능적으로 대 성령으로라고 이렇게 잡았는데 어 이것이 현재 우리 신앙인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 먼저 17절 말씀을 한번 보시면요.
 
*갈라디아서 5:17,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7절에는 지금 거스르니 서로 대적하므로, 라는 단어를 써서 우리 안에 있는 내적 갈등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와 성령은 서로에 대해 반대하기를 갈망하고 서로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육체는 우리의 몸 신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罪)와 부패(腐敗) 가운데 있는 옛 사람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아담의 타락(墮落)으로 그의 후손(後孫)인 우리들은 모두 본질상 진노(震怒)의 자녀였습니다. 육체 욕심으로만 가득 차 있었고, 죄악 된 본능을 따라서 살아갈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 안에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존재가 들어오게 되었으니 바로 하나님의 영이자,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면서 원래부터 있었던 이 육체와 새로운 존재인 성령 사이에 내적 전쟁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이 존재가 있기 때문에 성령과 육체 사이에서 어느 쪽도 온전히 쫓아가지 못하고 늘 엎치락뒤치락 좌절하고 갈등하는 그러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마지막 24절에 말씀을 가만히 보시면요. 24절 말씀인데요.
 
*갈라디아서 5:24,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육체가 그 정욕(情慾)과 탐심(貪心)과 함께 이미 어떻게 됐다고요. 이미 죽었다고 했습니다.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왜 육체가 우리들을 아직도 유혹하고 성령과 내적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미 죄와 육체의 세력이 지배(支配)하는 옛 세상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와 부활(復活) 사건(事件) 속에서 다 처리되었습니다.
 
그런데 옛 세상은 여전히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야 할 영역으로 아직도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옛 시대와 새 시대가 겹치는 시기, 신약 적으로 말하면 종말론적인 그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은 불가피하게 이 악한 세대 속에서 육체와의 전쟁에 계속 직면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까요? 늘 이러한 상황에 맞닥뜨리면서 좌절(挫折)하고 절망(絶望)하면서 괴로워 하면서만 그렇게 살아야 할까요? 이런 내적 갈등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할지, 어떻게 해야 할 지 가장 확실한 방법을 바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16절 말씀을 보시면,
 
*갈라디아서 5:16-16,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8절 말씀을 보면요.
 
*갈라디아서 5:18,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만일 성령에 인도 하시는 바가 되면, 이라고 했구요. 그리고 25절, 우리가 읽진 않았지만 25절 말씀 보면,
 
*갈라디아서 5:25,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지금 보면 성령을 따라, 성령의, 성령으로, 우리말에서는 조사가 이렇게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원문을 보면 이 단어는 똑같은 단어입니다. ‘프뉴마티’라고 하는 똑같은 단어입니다. 성령으로 성령에 의해서 라고 하는 이 동일한 단어가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조상으로 볼 때 어떻습니까? 지금 17절이라고 하는 우리의 이런 현주소에 우리의 상황 신앙의 현 상황이 있다면, 16절과 18절 바로 ‘프뉴마티’라고 하는 이 샌드위치 빵 속에 17절에 우리의 내적 상황이 끼어있는 바로 그러한 구조입니다. 저는 바로 여기에 이 해답의 열쇠가 있다. 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늘 이 샌드위치 빵 역할을 하고 있는 프뉴마티에 대해서 저와 잠시 2가지 각도에서 한번 생각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러한 상황들을 극복하고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을지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 편에서 이루어지는 강력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I. 첫 번째로, 하나님 편에서 이루어지는 강력한 성령님의 인도하심.

-샌드위치 빵 중에서 지금 위쪽에 있는 빵은 하나님 편에서 이루어지는 그러한 것으로 18절에 나오는 것처럼 뭐라고 나와 있죠.
 
*갈라디아서 5:18,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여기 지금 너희가 만일 이라고 했죠. 지금 가정법에 쓰이고 있는데, 이 가정은 무슨 가정이냐면요. 미래의 어떤 불확실한 일에 대한 가정이나 아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거기에 대한 바람 정도가 아닙니다. 여기 나오는 등장하고 있는 이 과정은 확실하고 반드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그리고 진리처럼 일어나는 현상을 말할 때에 사용되는 가정입니다. 이것은 본래 우리 육체를 지배하고 있었던 죄의 세력보다 더 강력하신 성령님께서 우리들을 인도하신다. 라고 하는 바로 그러한 강력한 논증(論證)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진 주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4절에 있는 말씀인데요. 함께 우리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8:14,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아멘 특별히 지금 이 로마서 8장 14절과 아까 읽었던 본문의 18절에서 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 라고 하는 이 단어는 현재 수동태 동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여기 주목을 해야 됩니다. 이것은 신자의 어떤 이런 책임 있는 삶이 스스로의 그 부단한 노력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주도적인 그 행위에 대한 끊임없는 순종의 반응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바가 된다. 라고 하는 이것을 우리는 무엇으로 식별할 수가 있을까요? 종교 교육자였던 마르틴 루터가 이 부분들을 아주 잘 설명을 해 주고 있는데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에 인도하시는 바가 된다는 것은 사람이 감심(感心-깊이 마음에 느낌) 즉 마음속 깊이 느끼고 그렇게 감동되어 마음이 움직임으로 육체 즉 옛사람을 죽인다는 것이다. 곧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을 버리며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버림을 말한다. 그것은 죽음과 죽음의 친구들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며 허탄한 이 세상 쾌락과 그것으로 말미암은 부패하고 더러운 열매를 내어버림이며 이 세상의 모든 좋다는 것들을 버리고 그 대신 고난의 자리로 나아간다. 이것은 우리 본성의 특징이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의 역사이다.” -마르틴 루터-
-루터의 이 말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이 어떠한 모습인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어제 아침에 L국, 제가 보안상 나라 이름을 밝힐 수가 없는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L국 단선을 마치고 귀국을 했습니다. 단선 기간 중에 주신 그 은혜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렇게 수요 저녁 기도회에서 말씀을 나눌 수 있다는 이 사실이 큰 특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단선에서 이렇게 저희가 그 단선 방문했던 현지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에 대한 설립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오래전에 한국 선교사님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됐던 그 마을의 한 유지였던 분이 그곳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는데, 정부에서 알고 그 교회를 부수고 그분을 감옥에 가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감옥에서 마치 이 사도바울이 정말 감옥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렇게 간수에게 나아갔던 것처럼 오히려 그곳의 간수(看守)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래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간수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마을에 교회를 세우는 것을 허락해 주게 되고 그분을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다시 교회가 세워지고, 십자가가 달리게 되어서 맘껏 예배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그 가운데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교회를 저희가 방문을 했을 때, 아주 소수 민족들이 사는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과연 이곳에 교회가 있을까? 라고 생각이 될 정도로 아주 깊은 산속으로 이렇게 들어갔는데 예배당을 탁 열고 정말 건물도 허름하고 한 듯 저는 열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면, 그 안에 드럼과 그리고 일렉트로닉과 베이스 기타가 앰프에 연결되어 있어서 이렇게 하나님을 막 놀랍게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 찬양하는 소리가 온 하늘에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제가 너무나 제 가슴속에 이렇게 스며들어오는 정말 놀라운 찬양이 그들의 부르고 있었는데, 그 찬양이 뭐였냐 면요. 이렇습니다.
 
‘할렐루야! 주를 찬양 하여라! 할렐루야 내게 자유 주셨네. 죄의 저주 끊으신 구원의 주 그 이름 주 예수 나의 산 소망’, 이 찬양을 연주하고 있더라구요. 아 그 시골 마을에서 최신 찬양을 그렇게 부르고 있는 걸 보면서 전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곳에 들어가서 함께 1시간 정도를 뜨겁게 찬양하고, 말씀을 듣고 통성 기도하고, 또 성찬식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와서 한 건 아닌 것 같고요. 근데 성찬식이 어떻게 준비가 되어 있더라고요. 그리고 예배가 2시간 넘게 진행이 됐습니다. 정말 열악(劣惡)한 환경(環境)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만 거기에 이렇게 드럼 일렉 베이스 기타가 있지만 정말 그것이 막 우리가 하는 것처럼 정말 그것이 새것이고. 이것이 아니라 정말 헌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곳에서 열악한 환경 속에서 비록 우리와 언어와 형식은 다르지만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양하고 예배하는 그 모습에서 저는 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럽게 다가왔습니다. 나는 이렇게 오늘도 이 자리에 와서 찬양을 하는데, 아 그때 바로 며칠 전에 그곳에서 찬양하고 예배했던 생각이 나면서 너무나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저는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데, 과연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만큼 나는 전심으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감격하며 찬양하고 있는가? 그 모습을 돌아볼 때의 회개(悔改)가 절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오게 되는 이 모든 손해(損害)와 모든 고난(苦難)들 그 땅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속해있었던 마을에서 쫓겨나고 그리고 가지고 있는 직업도 잃어버리게 되고 그리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어떤 그러한 고난과 그런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는 그 소수 민족들의 모습 그것이 성령에 인도하시는 바가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깊은 회개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우리들의 모습 또한 성령님의 역사하심이다. 라고 그렇게 생각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聖靈)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참된 신자는 자기 내면에 있는 이 악의 소굴을 끊임없이 경계하는 자들입니다. 제가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신자의 삶은 악한 이 세상의 역량(力量) 아래에 유혹을 받을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 놓고 그렇게 있을 때에 죄악된 본성이 우리가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마치 게릴라처럼 갑자기 공격해 들어올 수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그렇게 찾아올까요? 오늘 말씀의 19절에서 21절 말씀 보면, 바로 이러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갈라디아서 5:19-21,
19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것은 당시 이방 세계에서 만연했던 죄의 목록들인데요. 이 편지를 받는 갈라디아 교인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거 이 죄악의 모습들은 우리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먼저는 성적인 죄악들입니다. 결혼 관계 이해관계에서 이뤄지는 불법적인 성관계를 말하는 음행(淫行)과 다양한 형태의 도덕적인 악을 말하는 더러운 것, 이걸 오늘날로 치면 성추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호색(好色) 즉 성적인 것에 대한 노골적(露骨的)이고 과도한 탐닉(耽溺)과 방종(放縱) 생활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등장하는 죄악은 이방문화에 나타난 종교적인 죄입니다.
 
우상숭배(偶像崇拜)와 주술(呪術), 미신(迷信)이구요. 그리고 여기서부터 비롯된 술 취함과 방탕함 이 방탕하다는 것은 술을 진탕 마시고 떠드는 행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타난 죄악은 대인관계에서 나타난 죄악입니다. 바로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분나가 폭발(爆發)하는 것입니다. 당 짓는 것, 분열(分裂)함, 투기(妬忌) 바로 질투심(嫉妬心),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19절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면 어떻게 됐죠? 육체의 일들이 이게 육체의 일이 맞을까? 아닐까 헷갈리거나 분간이 안 된다고 그러나요? 뭐라고 얘기하죠? 분명하다.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분명하다 그랬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다. 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방금 언급된 육체의 분명한 일들을 생각하거나 혹시 미혹당에서 행하고 있는 것이 있으셨다면 오늘 이 시간 성령님의 인도화심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제가 오늘 제목을 ‘본능적으로 대 성령으로’ 라고 이렇게 잡았다고 해서 오해하지 말아야 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성령님과 제약된 본성이 힘의 균형을 잃어서 이게 누가 이기냐, 서로 정면으로 대립하는 지루한 어떤 그러한 전시 상황인 것처럼 그렇게 보여 질 수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고 승패(勝敗)는 결정되어 있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육체의 세력을 결정적으로 처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이미 승리한 싸움을 하는 것뿐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降服)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終熄)되어서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벗어나게 됐죠. 그런데 독립국으로써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날은 언제일까요? 1948년 8월 15일입니다. 그 3년 동안의 기간이 있습니다. 이때까지 여전히 우리나라 일제 잔당(殘黨)이 남아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일제 잔당과 싸우는 것, 이것은 어떤 싸움일까요? 승리를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이미 결정적으로 게임이 끝난 싸움을 하는 것뿐이라는 것이죠. 지금 바울이 말하는 신자들의 상황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신자들은 지금 육신의 세력보다 훨씬 더 강력한 성령님의 지배 아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아무리 강한 우방(友邦)을 가졌다고 해도 도움이 되지가 않을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공동체를 통해서, 그리고 상황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심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동시에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우리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을 혼돈(混沌)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요,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합니까? 우리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라고, 자기를 수련(修練)하고 명상(瞑想)하고 그렇게 나아갑니다. 자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부추깁니다. 그리고 수많은 시끄럽고 복잡한 소리들이 가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방해하고 있다. 라는 것이죠.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듣겠다는 그 소원과 그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준비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의 말씀을 들을 때 휴대폰 스마트폰을 두면 하나의 말씀에 집중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쉽지 않습니다. 네, 잠깐 그것을 두고 하나님 말씀에 내가 듣겠다는 소원을 가지고 거기에만 집중을 하고 순종(順從)하겠다는 준비된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면 바로 두 번째로, 우리 편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바로 그 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샌드위치 빵 중에 아래쪽 빵 즉 우리들 편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 16절 말씀을 한번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같이 있습니다.
 
II. 우리 편에서 이뤄지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함.
 
*갈라디아서 5:16,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아멘 여기 행하다. 라고 이렇게 번역된 단어는 걸어가다. 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 서신이나 요한 서신에서는 살아가다 처신하다. 라고 하는 이런 뜻의 신자의 삶으로 자주 묘사되는 단어입니다. 게다가 이 단어가 지금 현재 명령형으로 쓰여 있어서 이 행위를 지속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 결국 우리의 역할은 뭘까요? 우리의 역할은 자명합니다.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은 우리가 그의 권위에 복종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환영하고 그 말씀에 순종한다는 바로 그것입니다.
 
저희 팀은 L국으로 단선을 가기 어려운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저희 팀원 중에 비행기를 오래 탈 수 없는 분이 있기도 했고요. 그리고 면역(免疫)반응(反應)으로 인해서 습하고 더운 환경에 적응할 수 없는 분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가기 전부터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 저희를 인솔(引率)하기로 하신 선교사님께서 한국에 잠시 귀국하셨을 때 갑작스럽게 발견된 질병(疾病)으로 인해서 수술(手術)을 하게 되셨습니다. 그러면서 저희 팀을 직접 현지에서 인솔할 수 없는 그러한 상황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가기 전에 갑작스러운 일정이 생겨서 못 갈 것 같다고 그렇게 연락 오신 분도 계셨구요. 그리고 제 아들은 왜 하필이면 그렇게 저의 아이들도 둘째부터 열이 나기 시작해서 첫째까지 고열(高熱)이 나가지고 출국(出國) 전날 밤 11시에 저는 겨우 오픈하고 있었던 병원을 찾아서 진료(診療)를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만약에요. 이 모든 일에 대해서 제가 본능적으로 반응을 했다. 그러면 이 L국 단선을 결코 시행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단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비(豫備)해 두신 놀라운 은혜들도 누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본능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 반응하였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성령님의 강력한 인도하심도 있었지만, 우리 편에서는 단선을 위해서 모일 때마다 기도하고, 그리고 개인의 자리에서는 릴레이로 돌아가면서 금식(禁食)기도를 하면서 몸부림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기 때문이다. 라고 그렇게 생각되어집니다. 여러분 오늘 16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갈라디아서 5:16,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지금 너희들을 성령을 따라 행하라. 라고 하는 권면과 그리하며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고 하는 이 약속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면 명령과 강한 부정 안에서의 가정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이 명령을 따르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라고 하는 이 미래에 대한 강한 부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문법적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너희들은 성령을 따라 살아가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할 것이 확실하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령님을 따라서 살아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사소한 선택에서부터 중요한 선택에 이르기까지 실수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일들을 기쁨으로 200프로 감당(堪當)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100프로, 하나님 100프로, 그리고 불평 없이 늘 사랑과 기쁨이 넘치고 사람들과의 관계나 어떠한 일을 행함에 있어서 그것을 잘 감당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치 육체의 욕심은 더 이상 나와는 상관없는 그러한 것처럼 보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 열매가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 22절과 23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아멘 사랑, 희락, 기쁨이죠?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친절함을 말합니다. 충성, 온유, 절제, 자기통제 여러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들입니까? 정말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맺길 원하고 맺어야 하는 아름다운 열매들이 아닙니까? 이러한 것들은 모두 본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적 행위를 통해서 산출(算出)되는 육체 일들과는 전혀 반대되는 성령님께서 늘 승리할 때마다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열매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복수가 아닌 단수로 쓰여 지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이미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勝利)를 우리 삶에 적용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靈)이십니다. 원 보혜사(保惠師) 되신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하고 계셨던 모든 사역을 이 땅에 오셔서 그대로 바톤 처치를 하여서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는 또 다른 보혜사이십니다. 요한 칼빈은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성령을 따라가는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마음이 간절하다. 그는 자기의 사욕을 따르지 않는다. 양이 목자를 따르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좋아한다. 이런 사람은 벌써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정죄를 면한 자이니, 율법 아래 있지 않다. 하나님 앞에서 그의 행실에 허물과 결점이 있을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허물없는 것과 같이 도와주신다.” -요한 칼빈-
 
-날마다 성령님의 인도(引導)하심과 통제(統制)하심을 받으며 사시길 바랍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면요. 뜬구름 잡는 예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지금도 조명(照明)하고 역사(役事)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편에서는 무엇을 합니까? 성령님이 그렇게 우리를 강하게 붙들면 우리 편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게 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가 감당하는 모든 행동에 동기로 작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이기적인 욕망과 그리고 우리의 본능들을 통제하고 마침내 통제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지금까지 행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행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가 여태껏 내 힘으로 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들을 하게 될 것이고. 또한 우리가 소망하는 모든 일들이 이루어져 나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를 통해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 자신의 삶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가정(家庭)과 그리고 감당하는 사역(使役)과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와 그리고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 가운데 놀라운 변화의 역사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간증을 하면서 설교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저희 팀이 본능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성령님의 인도화심에 순종함으로 나아간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살아서 물론 여기 돌아왔습니다. 네,,, 비행기를 탈 수 없었던 분이 비행기를 타는 동안 오래 탈 수 없었던 분이 비행기 타는 동안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덥고 습한 환경에 있을 수 없는 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단선 기간 내내,,,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고 비가 오지 않는 시원한 날씨를 주셨습니다. 옷과 신발이 하나도 젖지 않고 우기(雨氣)라 그랬거든요.
 
그 동네가 근데 우산도 챙겨갔습니다. 쓸 일이 없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 뭔지 아십니까? 한국에 내리자마자 옷과 신발이 다 젖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비록 선교사님은 현지에서 저희 팀을 인솔(引率)하지 못했지만, 함께 협력하고 계셨던 현지 선교사님들과 그곳에서 또한 사업하고 계신 집사님을 통해서, 다양한 사역 현장을 보고 또 다양한 간증을 들으면서 앞으로 하나님께서 그 땅에 마치 우리나라의 그 일을 일으키셨던 것처럼, 그 땅에 일어나게 된 놀라운 선교 역사들을 눈으로 목도(目睹)하고, 기도의 지경이 넓혀지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근데 제가 더 가서 더 깜짝 놀랐던 건 뭐냐 하면, 현지 선교사님과 집사님이 우리 팀의 이런 어려운 사정들을 아시고 함께 기도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작은 순종의 발걸음으로 그 땅이 앞으로 임하게 될 위대한 하나님의 선교 사역에 한 점을 찍는 놀라운 특권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돌아오기 전 만났던 선교사님 중에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대한 영적 항공모함(航空母艦)인 사랑의 교회에서 1년에 1번 오는 특공대(特攻隊) 투입(投入)으로 저희는 다시 이 땅에서 선교할 동력(動力)을 얻게 됩니다. 이제 이미 갔다 온 팀도 있겠지만, 계속되는 국내외 아웃리치에 참여하는 제자 훈련생들 그리고 영 가족들이 부름 받은 곳에서 그렇게 순종으로 나아갈 때에 성령의 새 바람이 불어와 놀라운 은혜 역사를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영 가족들이 이 하절기를 맞아서 주일 예배와 토비새를 통해서 충만한 은혜를 누리고 또한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말씀에 순종하는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로 살아가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요약
본능적으로 행하던 육체의 일들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하고 성령 하나님이 인도하시려는 순종의 생애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국내외 아웃리치에 참여하는 제자, 사역 훈련생과 영 가족들이 부름받은 곳에서 성령의 새 바람이 일으키는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쓰임 받아야 한다. 하절기에도 더욱 열기를 더할 주일예배와 토비새에 은혜 충천함을 받고 매일의 삶 속으로 뛰어 들어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온전한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저희들을 성령 하나님의 거듭나게 하심과 새롭게 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자녀 삼아 주심과 우리 인생의 여정을 여기까지 강권적으로 인도해주심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자. 여전히 연약하여 본능적으로 행해왔던 육체의 일들을 이 시간 말씀에 순종하여, 정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하며, 성령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려는 순종의 삶을 살아가며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소원하자. 또한 계속 진행되고 있는 국내 아웃리치와 단기 선교에 참여하는 제자사역 훈련생들과 영 가족들이 부르심을 받은 자리에서 순종할 때에, 성령의 새 바람이 불어오는 놀라운 은혜 역사를 경험하고, 모든 영 가족들이 하절기를 맞아 예배의 자리를 더욱 사모함으로 나아가고,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말씀에 순종하여 은혜로운 응답을 받는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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