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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1월 04일)
제목: "심령이 가난한 자는"
말씀: 마태복음 5:3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찬양대

설교자: 임상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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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3,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ㅡㅡㅡㅡㅡ

▷기도
우리의 인생의 주관자 되시며 믿음의 새날을 여시는 하나님 아버지 2024년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사는 날 동안 능력 있게 하시고 날마다 주님과 교통하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니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이 수요 저녁 기도에 모인 모든 영 가족들을 기억하사 삶의 모든 눈물과 고통을 하나님께 아뢰며 나아갈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을 경험하는 복된 주님의 백성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기를 원하오니 주의 성령으로 강건하사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신비를 깨닫는 거룩한 시간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생명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의 새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는 수요 저녁 기도회에 오신 우리 모든 성도님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 저녁 기도회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회복을 넘어 부흥의 실체를 경험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5장 3절 말씀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신약 성경 5페이지입니다. 마태복음 5장 3절 1절의 말씀을 저와 함께 합독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아멘 새해가 시작되면 우리는 이렇게 인사를 나눕니다.

어떻게 인사하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우리 한번 양옆으로 이렇게 인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우리 모든 성도님들 가운데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인사를 들으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복 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복을 받아야 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로운 2024년의 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 어떤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믿음의 복이요? 네 우리가 많은 복들을 아마 원할 것인데요. 오늘 우리가 한 번 더 생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복을 받길 원하는 것 그 이상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 계시다. 라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려 하신다.”-성 어거스틴-
-하나님께서는요.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려 하신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두 손은 언제나 가득 차 있어서 그 좋은 것들을 받지 못한다. 라고 어거스티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기를 원하시는데 그것도 언제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이 놀라운 축복 언제나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복을 주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과연 이 복을 얼마만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 일컬어지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전하셨던 그 첫 번째 메시지, 그 가르침 속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즉 성도의 특성과 성도의 복이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2024년을 시작하는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복으로 우리 모두 충만해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팔복의 구조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복을 받는다. 이런 이러한 복을 받는다. 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심령을 가난하게 해야 해.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애통해야 해.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의외의 줄이고 목이 말라야 해. 라고 말하는 것이죠. 마치 도덕적인 메시지처럼 이 팔복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팔복은 이렇게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장 놀라운 축복이 무엇입니까? 바로 구원의 은혜입니다. 구원의 은혜는 우리의 조건을 따라서 우리의 위치를 따라서 우리의 어떠함에 따라서 우리 가운데 주신 것입니까? 아니죠. 하나님께서 주신 이 복은 우리의 공로와 우리의 상태와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우리에게 부어주신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요. 은혜로 아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입었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서 살아가는 자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이 복을 누리는 자는요. 삶속에 새로운 질서가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저주와 심판이 왕 노릇하였는데 이제는 내 삶에 아무런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은혜가 새로운 질서로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팔복은요 너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살아야 복을 받는다. 라는 그런 메시지가 아닙니다. 도리어 팔복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아는 자들이 이미 이러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상태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요. 이제 이 복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성도의 삶 삶속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그 놀라운 은혜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우리 가운데 보여주는 것이죠. 성도가 어떠한 자인지를 보여주는 그 첫 번째 속성으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다시 한 번 마태복음 5장 3절의 말씀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3,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첫 번째 속성으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함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성도이다. 심령이 가난함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어떤 자들입니까? 바로 심령의 내 마음속의 가난함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을 잘못 해석하여 이 세상에 가난하게 살아야 영적으로 부요하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이 된다.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돈이 없는 가난, 집이 없는 가난, 명예가 없는 가난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도대체 심령의 가난함이란 무엇일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심령의 가난함이란 무엇일까요?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하나님 제가 아무리 저의 모습을 살펴보아도 이 모든 것은 저의 실력과 저의 소유입니다. 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단 한 가지도 없는 상태, 그 상태를 심령이 가난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의 시선이 우리에게 너무 깊숙히 뿌리 박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세상에서 말하는 것처럼 부자가 되고,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하고, 좋은 대학 가고, 시집 장가 잘 가고, 무병장수하는 것이 복인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함이라는 것은요.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마음, 바로 이 마음이 예수님께서는 복되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십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의 모습, 나의 마음을 살펴보고 계십니까? 혹 신앙생활을 하면서 위축될 때가 있잖아요. 또 때때로는 자긍할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위축될 때, 반대로 작용할 때 그렇게 나오는 결과가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본 결과입니까?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의 기준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아 이 정도면 나도 괜찮네. 이 정도면 나도 좀 낫지. 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으로 내 마음이 요동치고 계십니까? 사람들이 칭찬한다고 해서 우쭐해지고, 사람들이 비난한다고 해서 위축되는 것,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심령의 가난함은요. 오직 하나님의 눈으로, 나의 깊은 곳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밖에 의지할 것이 없는 마음, 하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마음을 갖는 것. 그 마음이 심령이 가난한 마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정말로 성도이십니까? 성도는요. 다른 그 무엇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정말로 심령의 가난함이 있는가,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하나님 저는 하나님 보시기에 자랑할 것이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 외에 다른 그 무엇으로 내 삶 가운데 만족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요. 참 의지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입술로는 이렇게 말할지 몰라요. 하나님 제가 주님을 의지해요. 저는 주님만 의지해요. 저는 주님의 평가가 제일 중요해요. 라고 우리가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곰곰히 되돌아보면 예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 참 많습니다. 내가 이루어 놓은 성과, 나의 남편, 나의 아내, 나의 자녀들 의지할 것이 참 많습니다. 나는 이 정도면 되겠지. 라는 마음이 우리 안에 가득한 거예요. 우리 안에 나의 의와 나의 요구와 나의 피로가 가득하니까 그곳에 하나님이 거할 곳이 없게 된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조금 고생을 했습니다. 믿어주세요. 서울의 머물 곳이 없었기 때문에 금 토 주일을 교회 지하에 칙칙한 유치부 예배 실에서 3년을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겨울날이 됐습니다. 가장 추운 날이었는데 마침 보일러가 고장이 나버린 겁니다. 유치부실에 있던 이불 대여섯 개를 다 꺼내어서 몸을 둘둘 싸고 잠을 자려는데 잠이 안 오는 것입니다. 너무 추워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왜 저를 이렇게 고생시킵니까?” 편안하게 대전에 있었으면 좋았을걸. 그때 주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시더라고요. 상규야 나는 ‘이 땅에 있을 때 머리 둘 곳도 없었다.’ 그 이후로는 하나님 앞에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3년의 시간이 흘러서 다른 교회로 옮기게 됐죠. 그리고 2년이 흘러 목사 한수가 목사 안수를 받은 이후에, 다시 전도사 시절에 섬겼던 그 교회에서 전임 목사로 불러주셨습니다. 전임 목사가 되니까 사택을 제공해 주십니다. 너무나도 편안하고 혼자 지내기에는 너무 넓은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저의 마음에 전도사 시절에 가졌던 가난한 마음이 사라지는 거예요. 이 집이 내 집도 아닌데, 이제 누워 올 곳이 편하고 씻을 것이 편하고, 내가 편안하게 머물 곳이 생기니까, 제 마음 가운데 가난한 마음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이 마음이 든 이후에 하나님 앞에 이렇게 결정을 했습니다. 주님 저 에어컨 달지 않겠습니다. 선풍기도 없이 살도록 하겠습니다. 네 웃기시죠. 왜 그랬냐면요. 제 마음이 부해질까 봐 가난한 마음을 놓치게 될까 봐 그렇게 살았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요. 자기 자신이 의존할 만한 것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자입니다. 자기 안에 신뢰할 만한 것이 없어서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무능력을 경험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나의 나 될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자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릴 때,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하나의 장면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처음 예수님 만났을 때, 정말로 그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이 깨어졌을 때, 그때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가난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라는 그 마음, 그것이 바로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의 고백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안에 이 은혜와 이 감격이 사라진 거예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반응이 사라져 버린 거예요. 우리가 사는 사회는요. 사람들을 참 다양한 것으로 평가를 내립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학벌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어느 대학 나왔네. 무엇을 공부했네. 로 평가합니다. 신분을 가지고도 평가를 하죠. 어느 집안이고 어느 회사를 다니네. 라는 것으로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사람이 성취한 것으로 평가를 내리기도 합니다. 이런 업적을 냈고 이런 성공을 거두었네. 훌륭하네. 저 사람은 복을 받았네. 학벌로 신분으로 성공으로 복을 받았는지를 규정하는 것이죠. 그런데 참 무서운 것이 이 세상의 방식이 우리 성도들의 삶속에도 깊숙이 스며들었다. 라는 것이죠.

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요. 이 세상의 평가로 결정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회의 경향과 사회의 평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줄 아는 그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고 심령이 가난한 자인 것이죠. 다시 한 번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마음 가운데 이 가난한 마음을 놓쳐버렸는가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 가난함을 잃어버린 것일까? 우리는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고민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이 마태복음 5장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이 표현 속에 이 가난함이라는 이 단어를 헬라어 ‘푸토코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푸토코스라는 단어에는 중요한 두 가지의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 ‘푸토코스’는 가난함인데요. 어떤 가난함이냐면 바로 다른 누군가가 지원해 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함입니다. 누군가가 이 사람을 도와주지 않으면 이 사람은 결단코 살아갈 수 없는 것이에요. 절대적 의존을 말하는 가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하는 이 심령의 가난함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요. 우리의 심령이요. 하나님을 향하여 ‘주님, 저는 주님이 없이는 도대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자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이 가난함이 그 자리 가운데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죠. 이푸부트코스라는 단어의

두 번째 함이 된 의미는요. 바로 갈망함입니다.
-그냥 없는 상태 이제 끝났구나라고 자기의 삶을 단정짓고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 강렬한 갈망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바로 이 푸토쿠스라는 단어 안에 담겨져 있는 의미인데요. 회당 장 야이로가 하나님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며 이렇게 말하죠. 예수님, 예수님, 주님께서 오셔야만 저의 딸을 살릴 수 있습니다. 주님이 오셔야만 주님이 오셔야만 저의 딸을 살릴 수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그 간절함, 바로 이 간절함이 이 심령의 가난함이라는 단어 속에 담겨 있는 의미인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하나님 앞에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우리의 심령이 진실로, 우리의 심령이 진실로 하나님이 없으면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이 가난함이 우리에게 있느냐라는 말이죠. 아니면 그것은 옛날 추억이야, 은혜 받았던 것, 가난했던 것, 그때 펑펑 울었던 것, 그것은 옛날 추억이야, 지금은 적용되지 않아! 라고 우리가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요. 이 심령의 가난함이라는 것은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그때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우리의 신앙생활에 매일매일 그 이루어지는 순간, 순간마다 우리의 심령의 가난함이 필요하다. 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특별히 신약 성경에 발견되어지는 한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은 바울입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신약 성경을 13편이나 직접 성경을 기록한 탁월한 학자요 목회자요 선교자요 설교자요. 주님의 강력한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기록한 성경의 내용을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면요. 그는 자신의 탁월함, 능력으로 우쭐해 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의 사역 초창기에 그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쓰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9절의 말씀인데요.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9,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나는 사도들 가운데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고,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할 수 없는 저는 가장 작은 자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예전에 이 본문을 보면서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울 참 겸손하다. 겸손한 사람이네. 나도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자기의 겸손을 드러내기 위해 이 말을 했던 것이 아닙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릅니다. 그가 다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편지를 써내려갑니다. 에베소서 3장 8절의 말씀을 우리 함께 읽어볼까요?

*에베소서 3:8,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아멘 사도가 아닙니다. 사도들 중에 작은 자가 아니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내가 더 작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성도들은 누굽니까? 바로 바울이 가르쳐 키워낸 하나님의 사람들이죠. 그런데 그 모든 성도들보다 내가 더 작은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도바울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전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의 인생의 노년에 이르렀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의 말씀 보니,

*디모데전서 1:15,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무엇이라 고백합니까? 괴수니라,
-바울이 무엇이라 말합니까?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겸손을 가장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머물고, 하나님 앞에 또 머물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머물다 보니 자기의 실체를 보게 된 것이에요. ‘오호라 나는 권고한 자로구나. 내 안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구나.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죄인이구나.’ 이 마음을 이 모습을 바울은 지속적으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 앞에 계속적으로 가난한 심령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세상은 겸손을 미덕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겸손은 이런 것 아닙니까?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은 나를 높여주는 것, 것이 이 사람 참 겸손하다. 고 말하죠.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외식이요 거짓말이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손을 가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아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본 나의 실체를 알기 때문에 그 실체 앞에서 철저하게 참말을 하고 참 진리를 선포하는 것, 이것이 바로 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덧 2024년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새해에 어떤 복을 구하고 계십니까? 진실로 내 마음 깊은 곳에 정말로 내가 갈망하는 그 복이 무엇입니까? 내 신앙의 중심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복을 정말로 구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기를 원하시는 것,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이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저는 하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라는 이 고백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다.’ 천국은요 하나님의 구원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역사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심령이 가난함으로 그에게 주어진 삶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사람들에게 매 맞고 버림받고, 잘 곳 없고 도망쳐 다니고 몇 번의 죽임의 고비를 넘기는 삶이었죠. 그런데 성경은 그 삶을 가리켜 복되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주가 되시며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의 삶은 어떠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살아간 그 어떤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가난한 심령으로 전 생애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헤아리며 살아가는 그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심령이 가난한 예수님의 삶 가운데 어떠한 일이 벌어졌습니까? 우리 이사야 53장 3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볼까요?

*이사야 53:3,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아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요. 이 땅에서 멸시와 버림과 간고와 질고를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더욱이 우리도,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고통 중에서 천국을 사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의 능력이고, 복음의 역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 심령의 가난함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주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라는 이 고백,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네. 라는 이 찬양의 가사가 지금도 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우리 가운데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랑의 교회 성도들이여,. 헛된 복을 구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것이지, 너희들이 꿈꾸고 바라고 소원하는 부와 명예와 성공과 안락함과 잘됨이 너희의 복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는 그러한 것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성도는요 하나님의 사람은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족한 자들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마음이 부요한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부요한 곳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주님 저 정말 별 볼 일 없지만, 주님 저 정말 가진 것 없지만, 주님 제가 그 첫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길 원하오니, 다시 한 번 심령의 가난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놀라운 천국의 복이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2023년도 한 해 동안, 우리 교회 위에 회복을 넘어 부흥의 실체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가난한 심령 위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한 번 2024년이라는 새로운 믿음의 항해를 떠납니다.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실력이 아닌,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나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의 삶 가운데 친히 역사하여 주시고, 친히 말씀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가운데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심령이 가난한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천국의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 복을 받을 때, 우리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리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복으로, 담대하게 당당하게 걸어가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능력 있게 살아가는 날마다 하나님 부어주시는 능력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우리의 생명 되시며 우리의 모든 것 되신 하나님 아버지 이 땅을 살아가며 우리의 삶을 유혹하는 수많은 하나님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 시간 다시 한 번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오니 우리의 심령에 가난한 심령을 허락하여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친히 역사하여 주옵소서.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한 분 한 분 주님을 향하여 이 가난한 마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경험하는 2024년 한 해가 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친히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함께하실 줄 믿사오며 우리의 소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요약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새로운 은혜와 역사로 시작한 2024년을 우리는 가난한 심령을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그 놀라운 능력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깨달아서 나의 의와 나의 공로가 아닌 겸손함으로 인생의 모든 여정을 주님 앞에 맡기고 전적의탁 하여 신실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시는 천국의 복을 허락하실 것을 믿고 가정과 직장과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의 평강을 간구하며 모든 환경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려가야 한다. 우리가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소망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난한 마음을 채우시고 은혜의 복으로, 하늘의 복으로 올 한 해 우리를 가득 채우시며 이끌어 가실 것임을 확신하자.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겸손하고 비천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하는 일을 비천하게 생각하며 자신을 어린아이와 같이 여기는 것이다. 바울은 은사와 은혜 면에서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 영적인 일들에 부요하였지만 심령이 가난하기 때문에 자신을 사도들 중의 가장 작은 자요, 모든 성도들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보다도 더 작고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선을 행하기에, 즉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되기에 자신이 부끄럽고 비천하며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은 위대하시나 우리는 비천하고 그는 거룩하시나 우리는 죄스럽고 그는 모든 것이 되시나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의와 능력을 결코 신뢰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세리가 불쌍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부르짖을 때 가졌던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바로 이 심령의 가난이다. 우리는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부족해서 언제나 하나님의 문에서 구걸하며 그의 집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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