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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8월 17일)
제목: "내 안에 거하라"
말씀: 요한복음 15:4-9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전도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남수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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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4-9,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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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수현 부목사님
-오늘 요한복음 15장을 자세히 보시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잡혀 달리시기 바로 전날 밤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곧 자기가 세상을 떠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셨고, 제자들은 갑작스럽게 예수님의 떠남에 대하여서 두려움과 충격에 휩싸이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제자들이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과 질문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어떻게 예수님 없이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도대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왕 없이 그의 나라는 어떻게 이루게 될 것인가? 그와 같은 두려움과 함께 끊임없는 질문들, 장래와 미래의 대한 불안감들이 제자들의 마음과 그 모이는 가운데 암흑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제자들은 분명히 예수님을 믿고 또 함께 살고 함께 있었지만 아직 성숙되지는 못했다. 3년간 동안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말하고 가르치셨지만 제자들은 그 진리의 말씀이 자신들의 삶 가운데 도전 받아 본적도 시험을 받아 본적도 없었을 것이다. 제자들이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 뿐 아니라 진리로 믿고 확신하는 것이지만 그 확신과 진리의 말씀으로 여기기 전에 예수님이 떠나가신다는 것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라는 15장 1절부터 시작되는 우리가 잘 아는 이 비유의 말씀은 사실 예수님의 고별 설교라고 하여서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까지 이어지는 연속된 설교이다. 간략한 주제들을 보면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서로 사랑하라.’이다. 14장에서는 진리의 말씀, 15장에서는 오늘 본문 이 포도나무의 비유이다. 16장에서는 성령, 17장에서는 하나 됨에 대하여서 말씀하고 계신다. 그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이 이 15장인데 오늘 15장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관계에 대하여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마음이 복잡한 것 같지만 15장을 간략하게 화면으로 표로 보시겠다.


-앞에는 간략하게 여기서 가장 핵심 키워드는 거하라,- 연합,
가운데는 제자와 제자, 성도와 성도에서 서로 사랑하라. 이다. 사랑-교제,
뒤에는 제자들이 세상 가운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세상이 미워할 것이며 박해할 것이나 너희들은 이길 수 있다. 그래서 도전과 힘과 용기를 주시는 말씀이다.
-오늘 요한복음 15장은 그 시대, 그 때로 돌아가서 예수님께서 아직 채 진리가 내게 도전도 해보기도 전에 제대로 시험도 한 번 받아보기 전에 두려움과 내일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는 제자들에서 위로와 평안과 용기와 희망을 주었던 것처럼, 오늘 이 자리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일에 대한 불안함과 내일에 대한 염려와 근심 걱정이 있는 우리에게 동일한 말씀으로 능력과 힘과 소망과 용기와 치유와 회복이 되는 말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첫 번째는 앞서 표로 말씀 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떠나가시기 직전에 “거하라”, 라고 명령하신다. 거하라, 15장 4절에 있다.

*요한복음 15:4,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포도나무의 농부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구약에서 종종 백성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혹은 이 포도나무가 이스라엘 백성을 비유하고 상징할 때, 종종 쓰였던 표현이다. 시편 80장 8절을 보자.
 
*시편 80:8,
8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시편 80편을 보면 포도나무를 어떻게 한다고 하시는가? 어디서 가지고 온다는 것인가? 애굽에서 뽑아 가나안 땅에, 가나안에 사는 민족들을 쫓아내고 그것을 심으셨다는 것을 보아서 포도나무가 이스라엘 백성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몰래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을 심으셨다는 것은 바로 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로 인하여서 은혜의 결실과 은혜의 통로가 됨을 알리고자 하는 그 사명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었으며, 순종하는 하나님의 의의 열매를 맺고 의의 나무를 자라나게 하고 성숙되게 하는 그 표본으로 삼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실패했다. 그것이 여러 장에 있지만 이사야 5장 2절에 이렇게 나와 있다.

*이사야 5:5,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나이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었도다.
-하나님께서 의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시는데 안타까움과 들 포도가 되어 버린 것에 실망스러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15장 1절에 “나는 참 포도나무요”라고 하신 의미는 무엇인가? 그냥 포도나무도 아니고 참 포도나무다. 그것은 실패하고 실수하고 넘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여 자신이 참 포도나무라고 표현하시는 것이다. 나는 무엇 무엇이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정의를 말씀으로 하신 것과 같이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라고 자신의 존재를 참 포도나무라고 하신 만큼 이 포도나무를 강력하게 제시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참’이라고 하는 말이 붙은 것은 거짓의 반대되는 참 의미는 온전하고, 완전하게, 완벽하게, 이제는 그 뜻을 이루실 것이다. 승리할 것이다. 의 의미가 담겨있다. 그런데 복잡하고도 우리의 많은 물음표를 주는 말씀이 있다.
 
*요한복음 15:2-3,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예수님께서는 2절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나뭇가지를 제자들에게 제거해 버리겠다. 그리고 또 깨끗하게 하신다. 그리고 깨끗해졌다. 이미 깨끗해졌다. 알 듯 모를 듯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은 말씀을 주신다. 사실 제거하다와 깨끗하다 의 뜻은 단어가 똑 같다고 한다. 자세히 보면 열매를 맺지 않으면 제거해 버린다는 것이고,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많이 열매 맺게 하기 위해서 더 깨끗하게 한다. 라는 것이다. 이 말은 2절에 자세히 보면 궁금증이 생긴다. 정말 이 말이 맞는가 하는 의심의 물음표가 생긴다. 분명히 알고 있기로 구원을 얻게 되고 경험하게 되면 절대로 실수 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변경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열매 맺지 못한다고 해서 ‘제거한다. 버린다.’ 라고 하시는가? 그러면 내가 얻은 구원도 취소할 수 있고 제거될 수 있다. 라고 하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5:6,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그 가지를 모아 불살라 버린다. 심판에 관한 말씀이 더욱 햇갈리게 한다. 그런데 오늘 아니다. 분명히 우리에게 얻은 구원은 절대로 취소 될 수 없다. 2절에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가롯 유다와 같이 외형적으로는 제자인척, 제자였던 척 하는 가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교제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 없이 예수님은 알지만 예수님 믿지 아니하는 종교지도자들 이 당시에 유대인들과 같은 자들이 바로 제거해 버리는 불에 태워버리는 가지다. 하는 말씀이다. 그리고 3절에 이미 깨끗해졌다는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피로 오를 우리의 죄 된 심령이 바뀌어져서 깨끗하게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읽은 요한복음 15장 이 포도나무의 이 비유의 말씀은 아직 믿지 않는 대상, 사람들을 향한 그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깨끗하여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인 된 신분의 존재가 변화 된 우리에게 우리를 향하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고, 인격적으로 교제하고 있다는 우리에게 “너희가 정말 참 열매가 맺고 있느냐? 깨끗하여졌느냐?” 오늘 본문을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죄로 오염된 죄인이 깨끗하게 되는 유일한 비결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믿는 것임을 믿으시는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듣는 것보다 믿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믿을 때 우리의 신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함으로 구원받는 신분이 바뀌고 우리의 심령이 깨끗하게 되어 지는 줄 믿는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다. 거함에 상태’는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는가? 라고 하는 그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한 단어로 말씀하면 ‘순종’이다. 본문에는 없다. 본문에 있는 것은 두 가지 표현으로 되어 있다. 계명을 지키고 사랑하는 것이다. “내 안에 거하라” 는 것이 실제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순종하는 것이다. 계명을 지켜 사랑하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5:10,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는 방법과 상태를 설명하시기 위하여서 어떻게 말씀하시냐면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께서 최선을 다하여서 온전히 순종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제자들에게 모형으로, 표현으로 보여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이 땅에 계실 때에나 하늘에 계실 때에나 언제든지 온전히, 완전히 순종하셨다. 상황이 불리하고 불완전하다고 할 때에도 온전히 최선을 다해서 순종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순종의 모습이었다. 순종의 방법이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에게 충만한 기쁨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5:11,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이 충만한 기쁨은 우리가 경험하게 될 이 충만한 기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경험한 그 순종으로 얻은 질과 동일한 것임을 믿어야 한다. 동일한 순종한 기쁨이, 그 유익이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순종하게 될 때, 기쁨이 충만하게 될 줄 믿는다. 아멘,
 
또 하나 더 있다.
*요한복음 6:56,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내 살을 먹고 마시는 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십자가 사건이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믿어지게 되고 그럴 때에 그리스께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내 삶을 주장하게 되시는 것이 거하게 되는 상태라는 것이다. 바로 요한복음 14장 2절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다.

*요한복음 14:2,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사실 거하다는 것은 장소와 공간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장소는 물리적인 장소적인 공간적인 개념을 뛰어 넘는다. 생명이 내 안에 꿈틀대는 것이다. 부활하심을 믿고 고백하고 인격적으로 경험할 때에 그 생명이 내 안에 꿈틀대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삶이 비록 넘어지더라도 실수하고 실패하고 연약하더라도 할지라도 날마다 주님과 교제하기를 바란다. 그 풍성한 연합과 교제를 통하여서 주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머무는 것이고, 주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넘치게 되는 것이고 기도의 응답을 받고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충만한 기쁨이 넘친다고 하는 이 사실을 믿으시길 바란다. 예수님은 순종으로 예수님은 그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으로 그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두 번째는 앞서 표로 보여드린 것 기억하는가? 예수님은 제자들과 제자들 사이에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을 주셨다. 제자와 제자, 성도와 성도,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될까?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되는 가를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12절에 이렇게 나와 있다.
 
*요한복음 15:12,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여기서 언급하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 이다. 세상 적으로 이 사랑을 이해한다면, 불가능해보인다. 알지 못하는 사람하고 감정이 끌리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이렇게 질문 할 수 있다. 세상에서의 사랑은 자기 지향적으로 한다. 행위를 바탕으로 한다. 언제 변할지 모를 변덕스러움이 있다. 그러나 오늘 여기에 말하는 사랑은 변덕스런 에로스도 아니다. 친구 간에 필리아도 아니다. 오늘 여기에 쓰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희생하시고 죽으신 아가페의 사랑이다. 자격을 따지거나 감정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과의 그 관계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현재 시제를 사용했다. 계속 사용하라는 것이다. 감정과 자격과 환경과 불합리와 상관없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느냐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13절을 보면,
 
*요한복음 15:13,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서로 사랑을 말씀하시다가 친구 말씀을 하실 때, 자세히 이야기를 보면 그 친구가 누구를 말하느냐 하면,. 예수님 자신을 말한다. 우리에게 당신 스스로 친구가 되어서 우리와 동격으로 맺어주신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호칭은 주로 주님, 선생님, 랍비여, 나의 하나님, 이렇게 보통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데 어떻게 그 분이, 하나님이신 분이, 내게 친구가 될 수 있는가? 내가 어떻게 친구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그 거룩하신 예수님을 내가 감히 어떻게 친구로 여길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 성도와 성도, 제자들 간에 서로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친구라고 하시며, 친구를 위하여 죽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도와 성도 간에 사랑할 때에, 서로 사랑 가운데 친구가 되어 서로 사랑이라고 하는 의미는 어떤 의미인가? 묵상을 하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서로 사랑하라’ 이 예수님이 하신 그 ‘서로 사랑하라’의 의미는 매우 어려운 이야기이다. 그런데 친구라고 하는 이 표현은 오늘 우리 생활 가운데 매우 익숙한 단어이고 용어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스스로 친구가 되셔서 오늘 우리 세상 가운데에 아가페의 사랑, 희생적인 사랑을 살라고 말씀하신다. 신앙은 열심인데 살의 경건에 떠밀려 가지는 않는가?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치유와 회복, 말씀과 기도, 은혜의 자리가 회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 우리 일상의 삶 가운데서 제자들 간에 성도 간에 서로 간에 아니면 이웃 간에 사랑하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할 줄 믿는다. 신앙은 열심인데 경건은 떠밀어 버렸다. 교회는 열심인데 동네에서는 나쁜 소문으로 제일 유명한 사람이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는가? 이런 교회에 다니는 분은 없는가? 오늘 이 본문 앞에 내가 납작 엎드려야 한다. 그것이 오늘 이 모습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그 열매인가? 예수님이 친구가 되셔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시는 것일까? 서로 생명력 있는 제자와 제자 간에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면 13절, 14절, 친구를 위해 희생하는 관계도 될 수가 있다.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헌신하는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15절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을 경험하며 하나님과의 비밀스럽고 특별한 관계, 지난 8월 14일 저녁, 주일, 청계산 산상기도회에서 세상 어떤 이도 모르는 나만이 하나님과의 비밀스런 그 관계, 그것도 경험한다는 것이다. 온전한 인격적인 관계, 이러한 것들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친구가 되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처럼, 오늘 우리도 일상의 삶 가운데서도 사랑의 열매가 맺어져 온전한 치유와 회복의 삶이되기를 바란다. 아멘.
남아 있는 열 한 제자들이 자신이 떠난 후에 사역을 잘 감당하고 세상 가운데서 사는 이후의 삶에 대
세 번째는 예수님은 성도가 세상에서 분명히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제자들은 평안하고 안전할 때, 말씀을 많이 받았다. 이 상황은 불안하고 불편하고 불합리한 것 같은 이 상황 가운데에 예수님이 갑자기 떠나가신다는 이 상황 가운데 말씀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하여서 그들을 지키고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승리하도록 하기 위하여서 당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시험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러나 세상 가운데서 반드시 일어날 일을 말씀하셨다. 세상이 미워하게 된다. 세상이 너희를 박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분명한 것은 승리가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제자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에 있는 바로 그 악한 사단의 세계, 그 한 가운데에, 끼어있는, 같이 살고 있는 군사들이다. 세상에서 믿는 자들을 향한 미움은 감당해야 하는 요소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성도와의 관계 때문이다. 사탄의 가치관대로 돌아가려고 하고 저주아래 놓여 진 그 세상, 그 세상에 살지만 절대로 속하려고 하지 않아야 하고 사탄이 유혹하지만 절대로 속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미워하고 박해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5:19,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사랑의 열매는 기쁨과 은혜이지만 미움의 열매는 박해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에서 받을 믿음에 대한 보상은 은혜가 아니라 박해라고 말씀하셨다. ‘박해’라는 것은 추적한다. 들짐승처럼 쫓아간다. 어쩌다가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시기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미워한다는 것이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고의적으로 우리를 미워하게 되어 있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과 관계된 것은 무엇이든 미워하도록 되어 있다. 진리에 맞서도록 되어 있고, 성도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므로 원래 그렇게 되어 가는 것으로 운명 지어져 있다. 세상이 성도를 미워함에도 불구하고 그 세상 가운데에 승리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라고 고민을, 묵상을, 생각을, 한참 했다. 그러다가 창세기 39장 요셉이 떠올랐다. 하면으로 보자.
 
*창세기 39:2-3,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우리가 잘 알다시피 형들의 의해서 형들에게 꿈을 이야기 했다가 형들에게 팔린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 노예로 팔린 그 나이 때가 청소년 15-16세 그 시기다. 그런데 노예로 팔리자마자 나온 이 내용이 39장 2절이다. 고난의 세월이 다 지나고 객관적으로 증거들이 정말 형통한자가 되었을 때에 2-3절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노예로 팔려갔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 있었고, 형들은 동생 요셉을 애굽 보디발 장군의 집에 팔았을 뿐만 아니라, 요셉의 꿈을 철저히 파괴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그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2-3절에서도 보디발의 아내가 그와 같은 고백을 했던 것이다.
우리 집에 있는 요셉을 보니 하나님의 함께 하시며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겠더라, 보이더라고 한다.
 
*창세기 39:23,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 감옥에 있는데 무슨 형통인가? 감옥에 있는데 형통할 수 있는가? 감옥에 갇히면 어둠이고 암흑인데 그것을 형통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무엇인가? 미움이 있고 시기가 넘쳐나고 핍박이 있는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사실은 절대로 믿어지지 않을 것 같지만 내 심령 깊은 곳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함께 하신다. 나는 주님 안에 거하고 있다. 믿는 그것이 형통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증거하고 있다.
 
여러분, 세상 가운데 제자의 삶의 길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증인된 삶을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결론을 맺겠다. 예수님께서 고별 설교를 통해 13장부터 시작하여서 새 계명을 주시고, 15장에서 연합하라고 하는 이 말씀을 주심은 장차 다가올 세상과 세상에서의 그 승리를 위하여 주신 도전의 말씀이라고 했다. 오늘 우리에게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세상에서의 그 어려움을 이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오늘 앞에서 나눈 말씀 가운데 몇 가지를 한 번 정리해보겠다.
 
첫 번째는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을 믿고 주님께 의지하면 반드시 이기게 하실 줄 믿는다. 이 ‘열매 맺다’ 라고 하는 이 표현은 이 성경의 말씀에 우리는 오해가 있다. 열매의 그 원인은 생산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해야 열매를 맺는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여러분이 한 번 읽어보면 원인이 생산에 있지 않다. 열심히 하고 열심히 또 했는데도 불구하고 실수하고 넘어지고 잘못된 것이 우리는 내 탓으로 돌린다. 열매를 풍성하게 많이 맺지 못하는 것이 내가 열심히 하지 않은 탓으로 나에게로 향하고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라고 했다. 우리는 가지이다. 우리는 무엇을 생산해 내거나 열매를 맺게 하는 능력이 없다. 열매에 붙어 있는 가지일 뿐이다. 그 나무가 잘 자라고 얼마나 성숙 되느냐에 따라서 나무에 의하여서 포도가 맺히는 것이지 가지, 포도나무 가지는 쓸데가 없다. 지팡이도 만들 수 없을 만큼 건드리면 뚝뚝 부러진다. 그 가지가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있을 때에 승리하게 할 것인 줄 믿는다. 오늘 우리 모두 능력의 근원이 예수님께 있음을 바란다.
 
*요한복음 15:5,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맺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열심히 더 좋은 열매를 않는다. 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붙잡아야 우리가 세상 가운데에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는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삶을 포기하지 않아야 이길 수 있다. 말이 좀 어렵다. 이 말씀을 꼭 나누고 싶어서 앞에서 8절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른다.
 
*요한복음 15:8,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열매를 맺는데 그것이 아버지께 영광이 되실까? 열매를 맺는 것이 왜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시는가?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영광은 고사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나간 족속이었다. 거룩하시고 영광스런 하나님과는 절대로 한 자리에 같이 있을 수도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였다는 그 사실이다. 하나님을 거부한 족속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을 거부하고 떠나간 그 자리에서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깨끗하여져서 하나남의 자리에 나와 기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이 되어 기도의 응답을 바라고 내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으로 응답받게 하여 주옵소서. 내 삶에 하나님의 열매가 맺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어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이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배반한 우리가 우리의 존재 자체가 바뀐 것으로 그 맺어지는 열매를 통하여서 그것으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존재가 되는 사실이다.
 
오늘 이 말씀 앞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릴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원하시는 열매를 맺고 있는가? 내 존재 자체가 바뀌어 진 것이 맞는가? 예수님이 이미 깨끗하여졌느니라, 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지금 영과 육이 깨끗하여져 있는가? 예수님의 피로 나는 깨끗한 존재로 맡기어진 것이 맞는가? 수많은 질문 앞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할 줄 믿는다.
 
세 번째는 하나가 될 때 온전한 승리를 주실 줄 믿는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요한복음 15장은 관계이다. 그리스도와 제자와 관계, 제자와 제자의 관계, 제자와 세상과 관계, 세상 속에서 제자가 해야 될 사명, 그 관계에 대하여서 말씀드렸다. 그 관계를 잘 세워야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다. 15장에서는 그 말씀이 맞다. 13-17장 전체를 새 계명, 진리의 말씀, 포도나무와의 비유,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 성령이 함께 하심, 17장에 하나 되심, 이 모든 고별 설교, 예수님의 마지막 강의 설교는 결론은 하나 됨에 있다. 라고 하는 것이다. 17:23절을 보자.
 
*요한복음 17:23,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지루하고 나태하고 도무지 금방금방 응답이 나타날 것 않을 것 같은 일상의 생활 가운데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아가페의 사랑을 이루고 승리하고 삶을 살아 내야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으로부터 이길 수 있다. 그리고 종국에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 됨의 은혜를 위함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특징은 분리와 교만과 우리의 타락을 증명할 뿐이다.
 
*갈라디아서 5:19-20,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우리 타락을 증명할 뿐이다. 분리와 화냄과 분열이다. 우리는 가만 두면 분리하는 데 일등이다. 시기, 질투하는 데에 선수이다 그러나 연합함에 그 특징은 교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성도와 성도 간에 연합함에 이루는 그 결실은 하나 됨에 있다.
 
*갈라디아서 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열매는 우리를 하나로 붙잡아 맬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말씀을 사모함으로 오늘 우리의 일상의 삶 가운데 살아내며 근본적인 그 하나 됨을 이루어 갈때에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불안함과 불합리한 상황과 환경 가운데서도 우리를 승리하게 하실 줄 믿는다. 세상의 수많은 어려움과 연약함 가운데서도 하나 됨을 통해 치유와 회복으로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요약
오늘 예수님께서 떠나가시면서 ‘내 안에 거하라, 서로 사랑하라, 세상이 너희는 미워하나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라고 말씀을 주신 것처럼, 오늘 이 계명을 우리가 순종하여서 일상의 삶 가운데 살아내는 삶이 되고 열매 맺어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되길 소망해야 한다.
 
-먼저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참포도나무이시다. 그분만이 죄가 없으시기에 대속의 제물이 되셨으며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이와 반대로 세상 모든 종교는 들포도나무로서 들포도나무에 연결된 가지는 실과를 맺을 수가 없다. 그리고 가지치기를 잘해야 한다. 세속적인 가지를 잘 전지(剪枝)할 때에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절제된 생활로 영육간의 경건을 유지함으로 아버지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말아야 한다. 말씀 읽기와 기도 생활은 신령한 거름을 받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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