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7월 13일)
제목: “남겨진 칠천 명”
말씀: 열왕기상 19:15~18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소문수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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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9:15~18,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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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장마 비가 오랜만에 굉장히 많이 내리고 있다. 운전을 하는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오늘 이 예배에 어떤 분들이 오실까를 기대했는데 여러분들이 오셨다. 오늘도 내리는 장맛비처럼 하나님의 큰 은혜가 우리의 삶 가운데도 넘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떤 일에 대해서 간절히 소망하고 오랫동안 기도하였던 제목이 있는가? 아마 한두 가지 정도는 있으리라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오랫동안 하나님께 간절하게 나갔는데, 우리가 원하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지 않거나 혹은 반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우리의 기도가 낙망되고 지칠 때도 여러분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 원망과 섭섭함으로 기도하기도 한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어떻게 하나님께 원망과 섭섭함에 감정을 표현할 수 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어머니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답답함과 좌절과 원망이 올 때에 오히려 그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관계함에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성경에서 오늘 그러한 한 사람이 등장을 한다. 바로 엘리야이다. 이 엘리야의 답답한 모습을 보면서 저는 우리가 오랫동안 기도하였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던 기도의 제목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갔던 그 답답함이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를 생각해 보니까 그 답답함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함과 여전히 대답하지 않는 그 하나님 때문에 또 한 번의 상처를 받고 순장님이나 믿음의 동역 자나 목회자를 향해서 나아간다. 저에게도 그런 분들이 오셨었다. 그런 분들을 향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이들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이분들의 마음을 돌이키며 다시 신앙으로 정진할 수 있도록 어떤 말씀을 주면 좋을까를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다. 여기 계신 모든 순장님들이 저와 같은 고민을 하였을 줄로 생각이 든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이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의 마음을 돌이키며, 다시 그의 삶의 궤도로 돌이켰던 하나님의 응답이다. 하나님의 반응이다. 어찌 우리가 집중하여 보지 않을 수 있는가? 이 말씀을 묵상하며 묵상하여 보다가 제 눈가에 한 가지 단어가 들어왔는데 그 단어는 오늘 설교의 제목이었던 ‘칠천 명’이었다. 도대체 왜 칠천 명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길 래 위대한 선지자, 구약을 통 털어서 위대한 선지자를 꼽으라면 몇 명 뽑을 수 있는데 그 몇 명 안에 들어가는 위대한 선지자 마음에 위로와 돌이킴을 주기 위해 예시 사용되었을까? 이 칠천 명의 인생이 너무나 궁금했다. 이 칠천 명의 사람이 어떠한 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런데 성경을 찾아보니까 이 칠천 명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가 않았다. 그런데 칠천 명이 나오지 않다고 하여서 그냥 성경을 덮기에는 너무 이 칠천 명이라는 단어에 미련이 남는 것이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엘리야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사용한 칠천 명이니까, 엘리야의 인생을 한 번 살펴보면 엘리야의 어떠한 모습들을 되돌리게 원하실까? 를 유추하여 보면서 신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7천 명의 인생과 그들의 삶과 신앙이 어떠한지를 한 번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먼저 칠천 명의 이야기를 마음 한켠에 마음을 두시고, 그 목적을 향해서 그 엘리야라고 하는 한 삶의 인생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다.
 
여러분, 엘리야는 역사에 너무나 갑작스럽게 등장한 사람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열왕기상 몇 장만 앞으로 가보자. 열왕기상 17장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엘리야란 이름에 엘 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엘리야의 등장은 그저 역사의 한켠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완전한 적진이라고 여길 수 있는 아합왕 바로 앞에서부터 엘리야의 이야기가 시작이 된다.
 
*열왕기상 17:1-2,
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2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오늘 말씀을 보니까 엘리야의 등장과 함께 하나님은 엘리야와 함께 하나의 기적을 준비하신다. 이것이 뭐냐면 엘리야의 마음이 없으면 앞으로 수년 간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1절과 2절을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가 영적인 도식 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였다. 그런데 엘리야가 시대를 향하여서 침묵(沈默)한다.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이 시대 가운데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를 등장시켜 놓고 침묵이라는 방법을 선택하셨는가?
 
여러분,
교실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칠 때를 한 번 상상해 보라. 그날따라 아이들이 너무 소란스럽게 떠드는 것이다. 그러면 선생님이 초심자 선생님 같은 경우는 이렇게 반응을 할 것이다. 교탁을 막 두드리면서 “애들아, 조용히 해, 시끄러워! 조용히 안 할래, 너 뒤로 나가!” 이런 말을 할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베테랑 선생님은 아이들이 막 시끄럽게 떠들면 어떻게 하는지 아는가? 말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침묵한다. 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스스로가 들을 때, 얼마나 시끄러운지를 너희가 들으라는 것이다. 여러분, 설교를 할 때, 우리 청소년 아이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하면 이 아이들이 간혹 52주 가운데 몇 주간 미치고 반응을 할 때가 있다. 그때 여러분, 설교자가 핏대를 높여가며 더 큰 소리로 설교하기 보다는 아주 나지막한 소리로 그 아이들의 시끄러운 소리를 듣게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 장년들은 설교 시간에 이렇게 떠들거나 다른 말씀을 하시는 분들은 안 계시는 것 같다. 그런데 제가 알았다. 오히려 청소년들은 막 그렇게 시끄럽게 하고 있지만 목회자의 설교를 다 듣고 있다. 그런데 우리 장년들은 다 듣고 있는 것 같지만, 오늘 에어컨을 끄고 왔는지, 마치고 돌아가면 어떤 국을 끓여야 될지, 반찬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수만 가지의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을 제가 알았다. 여러분 그렇게 여러분이 복잡할 때, 마냥 설교를 하면서 아주 조용하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화들짝 놀라게 될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이 왜 이 엘리야라는 위대한 선지자를 역사의 전문 앞에 내어놓으시며, 침묵이란 방법을 택하였냐면 우상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그 소리들이 난무한 가운데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가 알게 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갈(飢渴)이다. 이 말씀은 아모스 선지자는 8장 1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모스 8:11,

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여러분, 이 기갈이야 말로 우리가 영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기갈일 줄로 믿는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 인생 가운데 이렇게 침묵하시며, 하나님의 목소리 외에 아닌 다른 소리가 우리의 귓가에 들리게 하심을 통하여서 우리도 또한 침묵해야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이렇게 침묵의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에게 말씀하시지만, 또 다른 방법, 정 반대 방법으로 하나님의 입술 가운데 나팔을 달고 “내가 여기 있다. 나의 임재가 여기 있다.”라고 큰 소리로 외치는 경우도 있는데, 오늘 이 엘리야의 짧은 인생 가운데서 여러분이 잘 아는 것처럼 갈멜산 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백 오십 명과 함께 엘리야는 당당히 맞서는 대결을 펼친다. 이때 당시 종교는 열광주의에 미쳐 있었기 때문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자신의 제단에 쌓아놓고 자기의 몸을 그어가며 자해하면서 피를 흘리고 그런 과정들을 통하여서 자기 자신이 믿는 신을 자극하고 이 자극을 통하여서 쉽게 응답하여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죽은 신은 대답하지 않는다. 엘리야가 그 뒤에 이스라엘의 열두 돌, 열 두 지파와 상관없이 열두 돌을 잘 모아서 제단을 수축한다. 그런 다음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보란 듯이 불로 임해야 하는 그 제단에 물을 붓기 시작한다. 마치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조롱하고 비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 모습을 함께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서 갈팡질팡하며 머뭇머뭇 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 제단이 완전히 타 없어질 듯한 크고 강한 불을 내려주셔서 그 제단을 살라버렸다. 그리고 엘리야는 넘겨져 있는 그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목숨을 끊으며 그 흐르는 시내를 피로 물들게 했다. 여러분, 이 정도의 기적이고 이 정도의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라면,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마음껏 누리며 선명하게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다음에 온다. 여러분, 아합은 이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조차도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엘리야 한 사람만 없애버리고 나면 이 일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 열왕기상 19장 1절에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열왕기상 19:1,
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아합은 이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고서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엘리야 한 사람만 죽이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이세벨은 최후통첩(最後通牒)을 한다. “저기 널 부러져 있는 저 선지자들 중에 한 사람의 목숨처럼 엘리야 너의 목숨을 내가 취할 것이다.”라고 한다. 이 위대한 기적 앞에서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아합과 이세벨의 모습도 놀라운 일이지만, 우리를 더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그런 이세벨 경고 앞에 한 방에 무너져 버리고 마는 엘리야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엘리야는 그 상황을 외면해 버린 채 호렙산까지 도망을 오게 된다. 호렙산에 도착했을 때 거기에 있는 것을 만족하지 못해서 엘리야는 깊은 굴속으로 숨어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묻는다. “엘리야야, 너 왜 여기 있니?” 하니까 엘리야가 이렇게 대답한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열심히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저의 목숨도 아끼지 않고 바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상황이 변화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결과를 제가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정말 계시기는 한 것입니까?” 라고 하니 엘리야가 이렇게 실의해 있을 때, “엘리야야, 너 굴 밖으로 나와라.”하신다. 그때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엘리야야, 너 왜 여기 있어?”라고 하신다. 이것은 엘리야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거기 있으면 안 되는 엘리야의 모습이지만 “왜 이렇게 실의에 빠져있니? 왜 이렇게 절망 가운데 있니? 왜 이렇게 나의ㅏ생각과 뜻을 알지 못하니?” 라고 말하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광풍을 보내신다. 지면이 완전히 흔들릴 듯한 지진을 보내신다. 불을 보내신다. 하지만 그 어떤 것에도 하나님의 임재는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뒤에 세미한 음성이 하나 들린다. 그 세미한 음성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청아한 음성이었다. 그러면서 엘리야 앞에 제가 제 사명을 다시 허락하게 주게 된다. 여러분, 이 엘리야를 통하여서 칠천 명의 삶을 유추해 내기 위해 엘리야가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가운데 잘못한 것이 무엇일까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엘리야가 그의 모든 삶을 통하여서 나타나는 결과, 그 결과가 나오지 않자 한 방에 무너졌다. 결과 중심의, 결과를 바라보는 것에 하나님의 역사의 유무를 판단하는 자가 되어버렸다.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다는 것으로 알았고,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그 원하는 결과 이전에 모든 과정들까지도 다 부정해버리고 마는 우를 범하게 된다. 그러니까 여러분 그 처참한 결과 앞에 엘리야가 뭐라고 말하는가? 내가 더 이상 살 이유가 없고 살 소망이 없다. 라고 이야기 한다. 그가 걸어온 모든 과정들까지도 다 부정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 모습은 지금 당면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결과를 우리 식대로 보기를 원하는지, 유튜브에 만들어지는 영상이 십분 이상을 넘어가면 안 된다. 왜 인줄 아는가? 사람들이 결과를 빨리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십 분짜리 동영상조차도 사람들도 그 십분 을 다 보지 않고 빨리 그 결과를 보고 싶어 한다. 이런 시대를 반영하듯 설교 한 편이 만들어지기까지는 그 한 편이 아무리 짧은 설교라 하더라도 30분 내외를 넘어가는데, 여러분 그 설교를 3분으로 압축해야 된다. 그래서 이 3분으로 압축하는 것이 정말 기적적이어서 ‘3분 미라클’ 이라고 한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그 3분이라는 시간 동안이라도 온전하게 그 설교를 듣고 있다면 정말 너무 감사하다. 여러분 이게 우리의 모습이다.
 
저는 오랫동안 청소년 사역을 하면서 또 고 3, 아이들을 지도하면서 이 아이들의 고3 생활이 얼마나 처절한지를 제가 옆에서 잘 살펴보았다. 짧게는 3년, 길게는 중학교까지 6년, 더 길게는 초등학교까지는 12년, 대입을 위해서 이 아이들이 뛴다. 그런데 여러분, 대입의 결과가 나오면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하면 모든 인생을 걸어왔던 시간 시간들이 다 한 방에 부정되어 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여러분 이 결과로 모든 과정들의 결과로 평가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여러분 이 결과에 걸어왔던 모든 순간의 시간들이 한 방에 부정되어지는 것이 옳은가? 우리 옳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저에게 이 마음을 바꾸어주셨던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작은 간증거리가 하나 있다.
 
제가 가장 힘들었던 그때에 20대에 정말 10년을 하루처럼 여기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했던 제목이 있다. 가족의 복음화와 우리 가정 안에서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제가 기도했다. 여러분, 어떤 기도제목을 가지고 온전히 오랫동안 정말 간절하게 기도하면 여러분 그 삶 자체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 여러분은 아시는가? 왜냐하면 우리가 살다가 우리가 뭔가 잘못한 일을 하면 그 잘못한 것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 아닌가? 그냥 마음 편하게 기도하시는 것인가? 여러분 저는 그렇다. 정말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마음으로 이 기도를 정말 들어달라고 하나님께 10년을 하루처럼 그렇게 기도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때에 상황이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되어지는 관계들을 바라보며 마음이 너무 무너지는 것이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원망과 섭섭함의 마음으로., 하나님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나요? 하나님, 제가 어떻게 10년이란 세월을 보냈는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렇게 조금도 변함이 없이 이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한 번도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이렇게 반응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나님께 막 원망할 때, 하나님이 제 속에 어떤 섬광과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게 무슨 마음이었느냐면, “문수야, 너는 결과만 바라보고 지금 10년을 달려왔지? 그런데 나는 네가 이 기도제목 때문에 지나왔던 그 10년을 하루처럼 매일 나에게 찾아와 웃고 울었던 모든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어, 너는 이루어지지 않는 그 일 때문에 그 십년 이라는 과정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지만 네가 나에게 울었던 그때를, 네가 나에게 절름발이로 와서 엎드렸던 그때를 나는 기억해, 네가 웃으며 기쁜 마음으로 왔던 나는 그 날을 기억해, 네가 이 기도제목 때문에 내 앞에 나와서 하루하루 기도했던 그 모든 순간이 나에게는 기쁨이었다.”
 
여러분, 하나님은 굉장히 짧은 순간에 저에게 역사하셨는데 이렇게 풀이해서 해석하다보니 길어지는 것을 여러분 알죠? 저는 오로지 기도의 제목의 결론에만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 기도의 결론뿐만 아니라, 가는 모든 여정과 과정 속에서 저와 함께 동행 하셨음을 알려 주셨다. 그때 저의 기도의 시간 시간의 매일 매일의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 은혜가 저에게 있었다.
 
두 번째로 엘리야가 한 실수를 살펴보면, 외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찾았다. 외적인 상황 속에서 드러나지는 그 평가들과 판단들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일들을 가늠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어쩌면 하나님은 엘리야 안에 있는 외적인 환경과 상황들보다 엘리야의 그 마음속의 내면에 있는 그의 성장과 엘리야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성 가운데 더 집중하고 계셨는지 모른다. 신앙은 두 가지 차원을 이해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으로 영접할 때, 외적이 차원의 신분이 변화된다. non 크리스천이었다가 크리스천으로 변화된 것, 예수를 믿지 않고 세속에 물들어가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다가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우리의 외적인 부분들이 조금씩 변화되는 외적 변화가 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러한 외적인 신분의 변화뿐만 아니라 우리 속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기를 원하시는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인생의 시간들을 통하여 긴 시간을 가지고 훈련하시며 빚어 가시고 만들어 가시며 이를 통하여서 하나님이 원하는 어떤 순으로까지 우리를 인도하여 가신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모르게 되면 우리는 여전히 외적인 상황 가운데 우리의 신앙을 맡기게 되고 우리의 외적 변화만을 위해서 우리의 기도의 제목들이 가득 차 넘칠 수밖에 없다. “하나님, 재정이 부족합니다. 하나님, 지위가 부족합니다. 하나님, 학식이 부족합니다. 하나님, 건강이 부족합니다. 하나님, 관계가 부족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길 원합니다.”라고 한다. 물론 여러분 이런 것들을 위해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간구들을 들으신다. 그렇지만 우리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끊을 수 없는 그 실존적인 정체성이 그것보다 어떠한 것도 앞설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내면이 뛰어나게 성숙되어지는 사람들은 자유 함을 누리게 된다. 어떤 자유 함인가? 하나님이 나를 지으신 그 목적대로 살아가는 나다움의 자유 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지에 크게 연연하지 않으면서 내가 걸어가야 하는 그 길을 묵묵하게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매일의 삶에 하나님과의 동행을 통하여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우리는 자유 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택이 뭔지를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내가 교회를 있든지, 밖에 있든지, 가정에 있든지, 안에 있든지, 일터에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모든 상황 속에서 나의 자유로움을 가지고무엇을 선택 하냐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왜? 우리 내면 가운데 하나님과의 동행하심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내가 외적인 어떤 것에서 나의 나다움의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어느 누구도 끼어들을 수 없는 그 관계 속에서 나의 나다움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이런 두 가지의 말씀을 하나님 말씀 속에서 깨달아야 했다. 그래서 엘리야에게 우리가 읽은 세 가지의 말씀을 부탁한다.
 
1. 첫 번째는 다메섹으로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라고 명령하신다.
-하사엘은 아람왕 벤 하닷의 군대 장관이었다. 그런데 벤 하닷을 죽이고 난 이후에 왕위에 오른다. 재미있는 것은 이 아람이라는 나라는 이스라엘을 줄곧 괴롭히는 하나님의 회초리로 사용된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이 이방나라의 왕까지도 기름 부으라는 명령을 허락하신다.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주권은 이스라엘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주권은 ‘이스라엘을 뛰어넘는 온 열방 가운데 다 있다.’라는 것을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것 같다.
 
2. 두 번째는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하신다. 사실 님시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 아들이라고 표현된 벤은 자손이라는 말과 동일하게 쓰이기 때문에 님시의 아들, 예후가 아니라 족보대로 표현하면 님시의 손 예후라고 표현해야 되는 것이 맞지만, 아들이라고 표현하는 표기법이 자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예후의 이름의 뜻은 그는 여호와이시다의 뜻이다. 아람의 왕, 요람의 군대장관 중에 한 명이었다. 이후에 유혈 쿠테타를 통하여서 당시에 우상 숭배로 점철되어진 아합의 왕조를 멸하고 이스라엘의 왕조를 5대 왕조인 예후왕조에 이스라엘의 10대 왕조로 즉위하게 된다. 그런데 그 즉위했던 시점은 여러분 엘리야에게 말씀하시고 난 다음에 14년의 시간의 공백이 있다.
 
3. 세 번째는 아벨볼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하신다. 잘 아는 것처럼 엘리사는 엘리야의 후계자이다. 아합 왕의 말기에서부터 아하시아 왕 때까지 오랜 시간동안 활동하며 정치적 인물이고 종교적인 영역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러분 오늘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도 엘리야의 손을 통하여서 이루어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내용을 접할 때, 문자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의미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이 된다. 첫 번째 하사엘은 엘리사에게 왕으로 즉위될 거라는 예언을 받게 된다. 열왕기하 8장 13절 하반 절에 보면,
 
열왕기하 8:13,
13 하사엘이 이르되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기에 이런 큰일을 행하오리이까 하더라 엘리사가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네가 아람 왕이 될 것을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하더라.
-첫 번째, 엘리사를 통하여서 아람이 왕이 된 예언을 듣게 하신다.
두 번째, 예후는 엘리사의 선지 생도 중에 한 명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는다. 열왕기하 9장 1절과 6절에 말씀을 보자.
 
열왕기하 9:1,6,
1 선지자 엘리사가 선지자의 제자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너는 허리를 동이고 이 기름병을 손에 가지고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
6 예후가 일어나 집으로 들어가니 청년이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며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여호와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노니.
 
세 번째,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자신의 선지 적 계승을 이어갈 때, 어디에도 ‘기름 부었다.’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무슨 뜻인가?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 세 가지를 말씀하셨던 것인가? 바로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져 가야한다는 것이다. 엘리야는 원했다. 이 위대한 심판과 이 위대한 대결을 통하여서 이스라엘의 완전히 종교적으로 모든 것을 다 뿌리 뽑기를 원했다. 여기서 끝내기를 원했던 것 같다. 엘리야는 자신이 경험한 그 충만한 하나님의 역사함을 통하여서 이제 하나님이 여기서 완전히 모든 것을 다 결판내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아니야, 나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갈 것이야”. 이 이야기를 이어나가는데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바로 칠천 명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다시 한 번 칠천 명을 끄집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여러분 왜 엘리야는 이토록 외로웠을까? 엘리야의 눈에 칠천 명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 칠천 명의 삶이 당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

 
많은 학자들이 이 ‘칠천’이라는 숫자에 대해서 정말 한 사람이 한 사람 한사람을 세며 꼭 맞는 칠천이다. 라고 보지 않는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의 수였을 것이라고 보지만 만약 그런 의미로 성경에 쓰여 졌다면 그렇게 쓰지 않았을 것이다. “엘리야야, 네가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 남아있느니라, 혹은 엘리야야 네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너를 대신하여 기다리고 있느니라.”라고 이렇게 표현 했을 것이다. 정확하게 칠천 명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위대하고 뛰어난 선지자, 엘리야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그 한명 한명이 인생이 셈하여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카운팅 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대를 바라보며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카운팅 하시겠는가? 이 시대를 바라보며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마음을 주고 그들과 함께 이 역사의 이야기를 써나나가고 계시는가?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매일의 순간 가운데 좌절도 있고, 넘어짐도 있고, 무릎도 까지고, 피도 나지만, 오늘 이것이 나의 결론일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는 결론이 아니라, 과정이 되어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계속 써 나가고 계실 것이라고 마음으로 결단하고 있는 그 한 사람의 이야기가 바로 오늘 이 시대의 칠천 명의 이야기 인줄 믿는다. 하나님은 이 시간 이 시대 가운데 저와 여러분의 매일의 동행하심으로 하나님과 매일이 함께 하는 그 시간들을 통하여서 오늘 우리에게도 끝나지 않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써나가게 될 줄 믿는다. 오늘 저는 성경 두 구절을 더 살펴보고 말씀을 마치려고 한다. 예수님이 이 땅 가운데 임하시고 오셔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들과 정말 하고 싶으셨던 한 가지가 있었다.
 
*마가복음 3:14-15,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제자들은 나가서 전도했다. 제자들은 나가서 권능을 행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궁극적인 첫 번째 목적은 무엇이냐면, 그들을 기능인으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길 원하셨다. 그들과 함께 마시며, 그들과 함께 동행 하며 매일의 크고 작은 순간 가운데 같이 있기를 원하셨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치 스폰지에 물이 스며들 듯이 예수님의 삶을 그들의 인생 가운데 받아들였으며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누가 오라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마태복음 28:20,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사명을 부탁하셨다. 오늘 우리의 삶이 주와 동행할 때, 항상 함께 하시는 예수님과 동행 하는 하루하루가 되어야 한다. 때론 우리가 원하는 결과가 아닌 것들도 보일 것이다.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방향성으로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때론 어떤 것들이 너무나 후퇴하여 내 적인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을까 생각되어 지고 염려 되는 인생의 순간도 만날 것이다. 그럴 때마다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있는 그 하루하루가 너무나 소중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이 이야기, 끝나지 않는,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서 이 시대 가운데 계속 이어져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한다.

♣요약

우리의 일상의 삶을 통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의 이야기가 변함없이 이어가게 됨을 믿고 사람들이 눈에 보여 지는 삶이 아닌 하나님 눈에 셈하여지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결과만을 지향하며 살지 말고 내면이 자라고 성숙해져서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순종하고 우리의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이 기억하심을 믿고 우리를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여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남겨진 칠천 명이 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평범한 이야기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진항 향기가 배어있어서 주님과 함께 하는 과정을 통하여서 바른 선택들 할 수 있는 용기를 하나님께 구하고 비록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선명하게 붙들려서 사람들의 장단에 춤을 추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신 그 길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하늘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때로는 사람들 앞에 세상 앞에 감추어 두실 때가 있다고 여기고 칠천 명을 남기셨듯이 그들이 무명용사처럼 그들이 멋지게 쓰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아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손에 감 추인 바 되어서 우리의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이 기억하심을 믿고 우리를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엘리야는 이세벨을 피해 도망을 다녀 굴속에 들어갔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여기에 있냐고 말씀하셨고 이스라엘 자손이 주를 버리고 주의 선지자들을 죽여 나 혼자 남았다고 두 차례 더 고백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마지막 사명을 주셨다. 이방 땅인 다메섹에 가서 아람 왕을 세우는 것과 이스라엘 왕 예후를 세우는 것과 엘리사를 선지자로 세우는 것 이 세 가지 사명을 주셨는데 엘리야는 의인이 자기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러한 교만을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통해 마음을 내려놓게 하셨다. 이방 땅에서 아람 왕을 세우는 것과 이스라엘 땅에서 왕을 세우는 것 이 두 가지는 목숨이 달려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어려움을 통해 더욱 주님을 의지하게 만들었다. 18절 말씀에서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범죄 하지만 그 안에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의인 7000명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 주셨다. 새로운 사명과 함께 일할 수 있는 동역 자가 있다는 사실이 엘리야에게 위로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절망에 빠진 성도들에게 먼저 확신을 주시고,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여 용기를 더하시고, 위로하여 열정을 불어넣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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