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3월 30일)
제목: "갈등을 위한 준비"
말씀: 요한복음 4:39-42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전도사님)

설교자: 홍진기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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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4:39-42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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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사모하며 지혜와 응답을 체험하는 수요저녁기도회에 오신 모든 성도님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오늘도 이 기도회를 통해 풍성한 기쁨과 만족의 맞춤의 은혜를 우리 모두에게 허락해 주시길 간절히 소망한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신약성경의 요한복음 4장 39-42절의 말씀이다.

 
오늘은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한 여인이 거울 앞에 서 있다. 보통 여인들이 거울을 볼 때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거울을 본다. 이 여인은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 거울을 본다.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눈만 겨우 보일 정도로 자기 몸을 치장하고 그렇게 한 숨을 크게 쉬고 한 손에는 물동이를 들고 나갈 준비를 한다. 문을 열자 뜨거운 바람과 뜨거운 햇볕이 지금은 열두시 정오라는 시간이 그녀에게 알려준다. 문을 열고도 당당하게 그 문을 나가지 못하고 좌우를 살피면서 골목에 누가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본 후에 겨우 한 발을 내 딛는다. 그리고 작은 골목에서 조금에서 조금 더 큰 골목으로 나가기 전에 귀퉁이에 서서 다시 한 번 더 그 다음 골목에 또 사람이 있지 않는지를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 다음 골목으로 빠른 걸음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이 여인이 빠른 걸음으로 가던 중에 이제는 그 마을에서 가장 큰 길을 지나서 이 여인이 가고자 했던 우물가에 도착한다. 그 길이 가장 위험하다. 사람이 많이 다니고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여인은 작은 골목에서 큰 골목으로 나가기 전에 골목 귀퉁이에 서서 다시 한 번 더 그곳을 더 두리번거리고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물동이를 꼭 안고 우물을 향해서 빠른 걸음으로 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여인이 우물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가던 중에 우물가에 거의 다다랐을 때, 우물가에 어떤 한 사람이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도 남자가 그 우물가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그 여인이 놀라서 발걸음을 잠시 멈춘다. 이 여인이 이렇게 놀란 이유는 그 시간에 우물가에 사람이 있을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물가는 남자들이 오지 않는 그런 장소이다. 그리고 그 우물가에 있는 남자는 누가 봐도 자기 동네 사람이 아닌 유대 사람 남자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우물가를 가던 그 여인이 멈춘 그 시간에 아주 많은 생각들이 여인의 머리를 오고간다. “어떡하지? 여기서 돌아갈 수 없는데? 전 남자는 우리 동네 남자가 아니니까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야,” 라고 생각하면서 그 남자를 보고도 웃는 척 못 본척하고 우물가를 종종 걸음을 하고 가서 그 우물가에 물동이를 내려놓고 물길을 준비를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던 중이었다. 한 낮에 뜨거운 바람과 햇빛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몰랐지만 예수님은 만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러 피곤하셔서 우물가에 앉으셨다. 라고 4:6절에 보면 주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셔서 그곳에 앉으셨다는 그 시간이 바로 이곳을 말하고 있다. 사실 그곳에 한 사람을 만나시는 것을 주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 제자들은 동네에 먹을 것을 사러 갔고, 예수님만 그곳에 우물가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마을의 큰 어귀에서 물동이를 가슴에 안고 서성이며 두리번거리던 여인을 이미 보고 계셨다. “그래, 왔구나! 어서 와, 주저하지 말고 어서와” 우물을 향해서 종종 걸음을 하며 다가오던 그 여인이 자기를 발견하고 섬 짓 놀라며 서는 그 모습까지도 예수님은 다 보고 계셨다. 그래 놀랐을 것이야, 그래 이 시간에 사람이 있을 시간이 아니지 그것도 남자가? 그것도 유대 남자가?‘ 우물은 당시 그 여인들에게 핫 플레이스(Hot place), 그런 지역이다. 낮에는 바람과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주로 해가 지는 시간에 동네 여인들이 그 우물에 모여서 자기 집에서 마시고 요리하고 빨래 할 때 쓰는 물을 길을 뿐만 아니라, 다른 동네 여인들과 함께 동네 이런 저런 소식들, 그러니까 가십거리 라고 하는 이런 것들을 나누는 곳이다. 마치 지금으로 말하면 커뮤니티센터와 같은 그런 곳이었다. 그런 곳에 남자가, 그것도 사마리아 사람이 아닌 유대 남자가 있었던 것은 굉장히 낯선 것이다. 예수님이 그 여인이 자기를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면서도 마치 자기를 투명인간 취급을 하며 아무 일이 없듯이 물동이를 우물가에 내려놓고 물길을 준비를 하는 그 여인에게 말을 건넨다.
 
“저에게 물 좀 주시겠어요?” 그러자 여인은 깜짝 놀라는 척을 하면서 봤으면서도 “어머 거기 누가 계셨어요? 저는 못 봤는데, 혹시 당신은 유대남자가 아닌가요? 그런데 왜? 저한테, 이런 여인에게 말을 건네나요?” 한다.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잘 알듯이 남편이 다섯 명이나 있었다. 과거에 그랬다. 지금도 한 남자와 살고 있었으니까 지금을 포함하여 남자가 여섯 명이었다. 유대 사마리아 지역에는 그 당시 이혼할 권리가 주로 남자에게 있었다. 그래서 남자들이 나쁜 생각으로 결혼한 여인을 버리는 일이 많았다. 남자도 나빴다. 그런데 이 여인도 사실 만만치 않다. 다섯 번이나 이혼을 당하고도 지금 또 다른 남자와 살고 있으니 이 여인도 만만치 않다. 이 여인이 아무도 보지 않는 이 뜨거운 시간에 우물을 찾아온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이전에 살았던 다섯 명의 남자,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남자는 어디 먼 나라에서 온 남자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이 시대의 결혼 풍습을 보면 보통 그 지역 사회에서 결혼을 하는 것이 대게 일반적이다. 이 여인도 그 지역의 다섯 명의 사람과 결혼을 했을 것이고 이혼을 했고 또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그 여인은 그 동네에서 가십거리를 넘어서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모르겠지만 그 동네 몇몇 여인과도 머리채를 붙잡고 싸운 일도 있었을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동네 사람들과 깊은 갈등관계 속에 있었을 것이다.
 
갈등은 한 사건으로 시작되지만 단순히 그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여인에게 있었던 다섯 명의 남자와 관계는 이혼으로 정리가 되었다. 문제가 정리가 되었다. 그 갈등은 문제를 넘어서서 관계의 단절로 이어지게 된다. 갈등을 일으킨 사건이 마무리 되었다고 하더라도 깨어진 관계는 회복되기가 굉장히 힘이 든다. 우리도 살면서 많은 갈등을 경험한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친구관계에서 모든 관계에서 갈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갈등을 일으킨 사건이 아무리 되었다고 할지라도 깨어진 관계가 다시 회복되기는 어렵다. 그래서 갈등의 문제가 해결되어도 그 갈등으로 통해서 사람들이 공동체를 떠나기도 한다. 떠나갈 수 없는 가족의 관계라면 몇 년 동안이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보듯 투명인간 취급이 하며 한 가족, 한 공간 속에 사는 경우도 많이 있다.
 
이 여인은 한 사람도 아닌 온 동네 사람들과 갈등 속에 있었으니까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다섯 남편과 현재 남편이 아닌 다섯 남편의 이야기를 하고 어느 정도 마무리를 한 다음에, 이 여인이 갑자기 예배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과거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이 여인이 깨닫고 난 이후에 이 여인은 예수님을 구약의 이사야나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와 같은 예언자쯤으로 알았다. 만약에 이런 선지자나 무슨 질문이든 대답할 수 있고 하나님의 앞뒤를 볼 수 있는 선지자나 예언자가 앞에 있다면 여러분들은 그분에게 무엇을 질문하겠는가? 아마도 가장 중요하고 오랜 시간동안 풀리지 않았고 시급한 질문을 할 것이다. 어떤 성경학자는 이 당시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예배 장소에 대한 첨예한 갈등이 요소였기 때문에 이 여인이 이 예수님이 선지자라고 하는 예수님께 질문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저와 여러분 앞에 선지자가 나타났다면 여러분과 저는 오랜 시간동안 갈등하고 있던 남북한의 문제에 대해서 그런 질문을 하겠는가? 저는 가장 개인적인 가장 해결되지 않은 오래된 질문을 그분에게 했을 것이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질문하는 부분을 보면,
 
*요한복음 4:20,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저는 이 본문 가운데서 단순히 사람들과의 갈등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깊은 갈등과 갈증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여인은 동네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아무리 예배들 드려도, 아무리 기도를 드려도, 하나님은 이전에 남편 다섯과 헤어지는 가운데서, 지금도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이 상황을 해결해 주시지 않는 하나님께 질문을 드려도 답해 주시지 않는, 그래서 어쩌면 하나님께 삐져있는, 하나님은 내 예배와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하나님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심각한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 여인에 예수님께 예배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은 정말 이곳에서 저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할지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예수님을, 하나님을 정말 만나고 어떻게 하면 나의 이 기가 막힌 상황을 어떻게 하면 주님이 해결해 주실 것인지의 질문처럼 들린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질문을 듣고 당시 조상들이 이 년 전부터 예배를 드리던 이 신상도 아니고, 유대인들이 드리던 예루살렘도 아니고, 예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예배의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예배자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방향을 바꾸어 주셨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온전히 그 갈증이 해결되지 않았다. 예수님의 대답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여인은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가 이 땅에 오면 그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은 “제가 바로 그 그리스도입니다. 제가 바로 메시야입니다. 라고 이야기 하신다.”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 내용과 그리고 이 문맥과 이 여인의 뉘앙스들을 살펴보면 그 예수님과 여인이 마주쳐 있는 상황을 어느 정도 상상을 해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내가 바로 메시야 이다. 내가 바로 네가 찾던 네가 예배를 통해서 만나고 너의 갈증을 해결하고 싶어 하는 바로 그 메시야 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이 여인은 말을 잃었다. 그저 예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는 이 뒤에 사건을 유추해 보고 앞에 사건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 여인의 눈을 열어주신 것이다. 처음에는 그 여인이 그 남자를 유대 남자로만 보았다. 그 다음에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았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눈을 열어주셔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았다. 이곳은 눈으로 본다고 그리고 우리의 머리로 연구한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주님으로 알았고 주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기 위해서는 주님이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야 한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마주 서서 예수님께서 “내가 바로 그로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여인의 눈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마침 그 시간에 동네에 갔던 제자들이 우물가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예수님과 그 연이 마주보는 장면을 제자들이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못했다. 이전 상황을 몰랐던 제자들이 당연히 “예수님, 저 사마리아 여인이 아닌가요? 저 사람은 부정합니다. 예수님 저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 안 됩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27절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수님과 그 여인 사이에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을 제자들도 보았던 것이다. 여인은 사람들이 없는 시간에 무더운 시간에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 여인은 눈에는 아마 눈물이 흘렀을 것이고 온 몸에는 힘이 빠지고 말로 다할 수 없는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생수와 같은 기쁨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그 여인은 한 걸음 두 걸음 뒤 걸음을 치다가 갑자기 돌아서서 마을로 뛰어간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외친다. “제가 메시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예수님이 바로 우리 동네 우물가에 있습니다.” 그 여인이 우물가에 만난 시간이 무더운 시간이었다. 건물 밖이 아니라 사람들이 건물 안에 있는 시간이다. 이 여인이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며 “그 예수님이 바로 저 우물가에 있어요.”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 건물로 들어가서 문을 열고 집안으로 일부러 들어가서 사람들을 붙잡고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그 예수님이 바로 우리 동네 우물가에 계시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 했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두 가지로 놀랐다.
 
첫째는 정말로 마을 사람들에게 찾아온 것,
둘째는 그 여인이 말하는 메시아가 이 동네에 오셨다는 것.
-이것에 놀랐다. 사람들이 우물가에 계신 예수님께 찾아갔다. 예수님을 만난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눈을 열어주시고 하나님과 그 예배에 그 갈증들이 해결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이 기가 막힌 내 삶이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지 않는다. 라고 마음에 큰 섭섭함을 가지고 있던 이 여인에게 하나님은 “내가 이렇게 해줄게” 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이 그 여인 앞에 찾아오신 것이다. 그 일을 통해서 그 여인과 하나님과의 갈등이 해결되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두 번째로 사람들과의 관계가 해결되었다. 아마 다섯 남자와 살았고 지금도 다른 남자와 살고 있으니 적어도 여러 해 동안 마을 사람들과 교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 발로 찾아가서 문안으로 들어가서 건물로 들어가서 사람들을 붙잡고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라고 먼저 이야기 한다. 그 말만 했겠는가? 과거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야기 하면서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던 것을 예수님을 내가 만났다고 이야기 하지 않았겠는가?
 
*요한복음 4:41,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 이 말이 긴가 민가 한 사람들이 예수님께 직접 찾아와서 예수님을 믿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동네 사람들이 우물가에 찾아왔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하셨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아마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이 여인이 경험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그 사람들에게도 주셨을 것이다.
 
*요한복음 4:42,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 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 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사마리아 사람들이 고백하고 있다. 이 여인은 하나님과 사람들과 깊은 갈등관계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해결되었다. 우리 모두가 가진 갈등도 마찬가지이다. 가족 간에, 이웃 간에, 공동체간에 ,고부간에, 자녀 간에, 직장 동료들 간에, 다락방에서, 교회에서, 모든 갈등의 해결은 예수님을 만나야 해결이 되는 것인 줄 믿는다.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배우고 두 손 붙잡고 “그랬구나, 네가 힘들어 했구나, 그랬구나, 이것으로 갈등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갈등의 원인은 커뮤케이션의 기술 부족이 아니라 죄이기 때문이다. 갈등의 진짜 원인은 갈등을 일으킨 사건이나 갈등을 일으킨 사람이 아닌 궁극적으로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에덴동산의 이후의 성경은 갈등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갈등이 생겼고 관계가 깨졌다. 가인과 아벨이 갈들이 생겼고 관계가 깨졌다. 죄로 인해 모든 인류가 하나님과 갈등이 생겼고 관계가 깨졌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막힌 담이 무너지고 관계가 회복된 것이다. 흔히들 우리 사이에 갈등이 사라지지 않느냐고 질문들을 많이 한다. 서점에 가면 갈등해결에 대한 책들이 수없이 많이 나와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갈등을 어떻게 시작되는지, 왜 일어나는지를 물어보면 마태복음 15장 18-19절을 보면 말씀하시는 것 같이
 
*마태복음 15:18-19,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 갈등은 관계의 깨어짐은 우리 입에서 나오는 깊숙한 곳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죄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는 죄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야고보서 4:1,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내 마음에 욕심으로부터 갈등이 시작되는 것이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갈등은 이 사람 저사람 이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 마음에 있는 죄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갈등이 생겼을 때,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죄를 들여다 볼 생각을 결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갈등이 생기면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이다. 여러분들도 갈등이 생기면 그렇다. 누군가와 갈등이 생겼다. 여러분들 머릿속에는 그 사람이 했던 말만 생각나고 다시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이렇게 해주어서 그 사람의 수많은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티끌만 보이지 않는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3절에 보면,
 
*마태복음 7:3,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내 죄로 인해서 내 눈 속의 갈등의 상황에서 내 죄가 큰 들보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 들보 때문에 시야가 좁아져서 상대방의 전부가 아니고 상대방의 일부 티끌만한 것만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이곳에 계신 분들도 아마 모르지만 크고 작은 갈등 속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갈등이 없을 수 없다. 왜냐하면 죄가 가득하고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지만 아직까지 성화 되어가야 할 죄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살면서 죄로 인한 갈등을 피할 수 없는 삶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까?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보겠다.
 
I. 갈등의 상황이 되었을 때, 그 시선을 갈등의 당사자나 사람이나 아니면 문제의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

이 사마리아 여인도 이 갈등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시도를 했을 것이다. 자기 앞에 놓여 진 사건, 자기를 힘들게 했던 그 대상들, 자기가 이 상황까지 오게 한 많은 사건들, 사람, 사건의 초점을 맞추어서 있을 때에 이 여인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여인이 시선을 예수님과 마주쳤을 때, 그 여인이 예수님과 하나님과 마주쳤을 때, 갈들이 해결된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 갈등의 상황 가운데서 문제나 상대방의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바라보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보면 자연스럽게 나의 죄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갈등의 해결이 첫 걸음이 시작된다. 갈등을 일으키는 수많은 문제들이 있다. 그런데 갈등을 일으킨 그 문제가 해결이 되고 나면 관계가 회복되지 못하는 경우들을 본다. 예를 들어 돈에 문제에 대한 갈등이 있는 사람이 있다. 어떻게 하든지 한쪽이든 쌍방이든 서로 잘못을 인정하고 아니면 문제가 해결 되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헤어지면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이제 당신을 보고 싶지 않다. 갈등은 해결되었지만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라고 이렇게 헤어지고 말 것이다. 이것은 갈등의 해결이 아니다. 문제가 해결되었던 것이다. 갈등이 해결되면 문제의 해결뿐만이 아니라 반드시 관계의 해결까지 이어져 가야되는 것이다. 교회 안에 갈등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에서 갈등을 일으켜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있다. 그 문제가 해결되어서 유감스럽지만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우리는 다시는 만나지 말고 각자 신앙생활을 하자고 말하며 혹시 천국에서 만날지 모르겠는데 별로 반갑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헤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문제의 해결이지 갈등의 해결이 아니다. 진정한 갈등의 해결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내 안에 있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관계가, 갈등이 해결되는 것이다. 문제가 해결되고 서로 끝나는 것은 서로 보지 맙시다. 하고 바이바이 하고 서로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은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는데 부활하지 않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지 않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가 갈등이 있을 때, 집중해야 할 것은 그 갈등을 일으킨 문제와 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내 속에 있는 죄, 그것에 집중할 때, 그 갈등의 진정한 문제와 관계까지 회복되는 그러한 은혜를 얻는 것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내 속에 발견한 나의 죄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실제로 있던 문제가 예를 들어서 그 돈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내 눈 속에 들보를 먼저보고, 내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갈등에 대한 자세가 달라진다. 그리고 구체적인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은혜로운 방법도 찾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갈등을 만났을 때 첫 번째로 우리의 시선을 갈등의 문제나 갈등의 당사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속에서 내 안에 있는 죄를 먼저 보는 갈등의 해결의 첫 발걸음이다.
 
II. 이 갈등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된다.

-보통 갈등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많다. 그러데 갈등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은 앞서 살펴 본 것처럼 이 갈등이 죄가 아니라 저 사람 때문에, 이 사람 때문에, 이 상황 때문에 라고 시선을 잘못 두었기 때문이다. 이 갈등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사실 이 갈등은 하나님이 만드셨다. 이 갈등도 하나님이 위대한 갈등과 목적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창세기 3:15,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 원수가 되게 하고,,, 하나님께서 전쟁을 선포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사이에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역사를 통해서 이 갈등의 문제를 회복하시고 해결하심으로 진정한 갈등의 해결을 이루셨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 가운데 드러나게 되었다. 우리가 겪는 갈등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겪는 갈등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시선을 그 사람이 아니라 그 문제에 두지 않고 하나님께 둘 때, 그리고 갈등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영광의 소망을 우리가 그곳에 둘 때 우리가 해결을 해야 할 과정을 통하여서 믿지 않는 자들이 복음을 듣고 주님께로 돌아올 수 있다. 갈등을 해결 가운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감동을 받고 우리 마음속에 소망의 이유를 물어올 수 있다. 갈등 속에 있던 교회가 원만히 갈등이 해결되고, 주변 이웃 사람들에게 더 큰 겸손과 더 큰 섬김으로 선한 영향력으로 끼치게 된다면 갈등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3,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사도 바울은 환난이 소망을 더욱 더 크게 한다고 말한다. 욥은 2:10절에서
 
*욥기 23:10,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갈등할 때 우리는 생각해야 된다. 이 갈등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할 수 있을까? 갈등 상황 앞에서 어떻게 하면 코를 납작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손해 보지 않을 수 있을까가 아니라 이 갈들의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까에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 갈등의 해결, 화복하게 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 가운데 크게 드러낸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은 완벽한 평강 가운데 예수님은 계신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삼위의 하나님에게는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의 관계 속에는 조금의 갈등도 없다. 그래서 완벽한 평안 가운데 계시며 그 완벽한 평안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하는 구절이다. 요한복음 17:21-22절이다. 이 기도를 보면,
 
*요한복음 17:21-22,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삼위의 하나 됨의 그 영광에 저와 여러분을 초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완벽한 화목이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이다. 사도 바울은 이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장 잘 드러났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심지어 자기가 하는 사역이 화목케 하는 사역이라고 이해했다.
 
*고린도후서 5:18-20,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 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 하라.
-우리를 화목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도 주시고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신이 된다. 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이 땅에 갈등 속에 있던 인간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했던 그 화목의 역할을 우리에게 주셨다. 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케 하는 직분을 받은 사람들이다. 화목의 직분은 갈등 속에서 이해한다. 평안 속에서는 화목의 직분을 감당할 수 없다. 갈등이 화목의 직분을 받은 사명자의 사역 터이고 일터인 것이다. 그러므로 갈등은 피해가거나 모른 척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니 않는 그런 뒤로 미뤄놓아야 할 것이 아니라 그 갈등이 화목케 하는 직분이 우리의 사역 터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갈등은 갈등의 상황을 만났을 때, 이 갈등의 상황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통로로 사용이 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말씀을 마무리 하게 하겠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갈등이 해결되었고 이어서 마을 사람들과의 갈등도 해결 되었다.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후에 사마리아 이 교회에서 이 여인이 어떤 역할을 감당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제 생각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의 직분을 감당하는 갈등 중재자의 사역을 했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본다. 갈등이 생겼을 때, 기억해야 할 두 가지는

첫째,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며,
둘째는 이 갈등이 하나님의 영광의 통로가 된다는 것.
 
이 두 가지를 기억하고 우리가 준비하며 갈등을 만났을 때 이 갈등이 나를 무너지고 힘들고 절망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나게 하는 일이 될 줄 믿는다. 그래서 오늘 말씀이 “갈등을 위한 준비‘라고 정했다. 저의 집사람이 제목이 잘 못되시지 않았냐고 물었다. 왜 갈등을 준비하시냐?고 했다. 해결을 위한 준비가 아니시냐고 그렇게 물었다. 아니다. 갈등을 준비해야 한다. 대비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갈등이 다가온다. 이미 우리에게는 갈등이 많이 있다. 그렇지만 그 갈등을 늘 준비하면서 갈등이 왔을 때, 우리의 시선을 갈등을 당한 사람이나, 그 상황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선을 두고 이 갈등의 상황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로 그렇게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이 갈등이 우리가 화목의 직분을 감당하게 사역의 터가 될 줄 믿는다. 우리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갈등은 피하고 그리고 모른 척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복음을 선포하고 갈등의 시선을 맞춘 사람이 하나님께 시선을 올려드리는 직분으로 사용되어서 우리도 온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아가게 되는 사람으로 사용되실 줄 믿는다. 같이 기도하겠다.

♣요약
지금까지 우리의 갈등의 시선이 그 문제의 사람에게 맞추어져 있어서 이 갈등이 힘들게 했음을 고백하고 많은 방법과 많은 갈등을 해결하려고 했으나 이 사마리아 여인도 그렇게 해결하려고 했지만 해결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으로 해결되었듯이 우리 삶 가운데 수없이 많은 갈등 가운데서 우리의 시선이 주님께 두어야 한다. 공동체 안에 갈등의 원인이 사람이나 문제에 있지 않고 나와 우리 속에 있는 죄라는 것을 알아서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 모든 갈등의 해결을 경험한 사마리아 여인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밀접하게 만나서 해결 받는 자들이 되고, 우리가 이 갈등의 사회에서 온전하신 하나님이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그러한 통로로 우리를 사용하시길 간구해야 한다. 우리가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평안과 화목이 이루어지는 곳이 되게 하시고 그 화목의 직분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평화요 진리이신 우리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여야 한다. 갈등을 미리 준비하고 대비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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