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3월 23일)

제목: "환경을 넘어오신 은혜의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7:8-16
찬양인도: 쉐키나 찬양대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양은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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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7:8-16,
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10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11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12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
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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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로 초대하시고 하나님의 그 부유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길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늘 예배에 나온 권속들을 축복하시길 원한다. 놀라운 응답이 있는 수요찬양기도회가 되며 온라인과 주님의 자녀들에게 주의 능력의 말씀으로 충만하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한다. 오늘 치유와 응답이 있는 수요찬양기도회에 참여한 모든 성도님들을 주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한다. 오늘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함께 누리고 돌아가길 바란다. 오늘 주신 말씀을 보자.
 
-사람들은 풍요를 좋아한다. 그래서 사람이든 조직이든 제도든 나를 부유하게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사람들이 추앙하고 추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돈이 된다는 정보가 있으면 그 정보가 마치 유행처럼 이 사회에 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풍요는 본능이다. 그리고 풍요는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이다. 풍요를 추구하는 것이 죄는 아리라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식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히 얻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나 일반 사람들이 풍요를 바라거나 풍요를 좋아하는 것이 무작정 죄는 아니다. 문제는 이 풍요를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오염된 방식으로 추구하고 그 욕망이 도를 넘으면 죄악이 되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북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의 이야기이다. 바로 아합 왕이다. 일반 역사가들은 당시 국제사회에 유일하게 알려진 이스라엘 왕조가 있다면 오므리 왕조, 아합 왕이라고 이야기 한다. 상당히 잘 살았다. 그리고 군대도 아주 강력했다. 어느 정도 강했냐면 남유다를 마치 속국처럼 지배했다. 자신의 딸 아달이라를 시집보내서 결혼으로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이웃나라 시돈 왕 겟발의 딸 이세벨을 자신의 아내로 맞아서 국제적 동맹도 맺었다. 뿐만 아니라 수도를 옮긴다.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기면서 수도를 건축한다. 여러분 수도를 세운다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국고를 완전히 바닥낼 만한 대단위의 토목 공사이고 건축이고 엄청난 사업이다. 그런데 이것을 아합이 이것을 다 일구어낸 사람이다. 쉽게 말해서 부국강병의 국제적 영향에까지 갖춘 자였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하나님은 이 아합왕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오늘 열왕기상 16장에 보면 마지막 30부터 몇 절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이렇게 평가하신다. 그는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 하나님의 진노를 사겠다. 라고 말한다. 그는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 그가 선택한 것은 바알이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요한을 버리고 바알을 가지고 왔다. 오일 머니를 끌어오듯이 국가의 운영에 바알 시스템, 바알 종교를 가지고 온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를 바알의 제사장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들인다. 아예 바알 시스템을 수입한 것이다. 그리고 안으로는 나보스의 포도원을 빼앗는 것처럼 백성들의 것을 탐하고 압제하고 빼앗았다. 그래서 바알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서 방해가 되어지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이나 하나님의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을 도모하기도 했다. 왜곡된 풍요이다. 이 왜곡된 풍요의 시대에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시다.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라는 이름을 가진 선지자가 혜성같이 등장한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엘리야이다.
 
따라해 보라. “여호와의 말씀이 풍요입니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풍요가 없다는 말이다. 엘리야가 이 아합에게 나아가서 이렇게 말한다. “나를 섬기는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를 그리고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선언하고 도망가 숨어버린다. 그래서 그가 숨은 곳이 그릿 시냇가이다. 학자들은 정확하게 그릿 시냇가를 규정하지 않는다. 거기가 어디쯤일까 추정하면서 와디 야비스라는 곳으로 추정한다.
 
제가 몇 년 전에 와디 야비스라는 곳에 가게 되었는데 첫인상은 “에게???”였다. 아 그냥 시냇가라고 말할 수 없었다. 여러분 와디라는 것은 평소에는 시내로 보이지 않고 조그만 계곡처럼 보인다. 가보니까 옆에 관목이 있고 풀이 무성하게 있었는데 물이 바짝 말라서 아무것도 없는 그런데 비가 오면 고기가 냇가처럼 흐르는 곳이 바로 와디이다. 그가 그곳에 숨었다. 아마 제가 갔을 때 건기였기 때문에 아주 그냥 습기하나 없는 그런 곳이었다. 만약에 당시에 그곳에 숨었다면 그곳에서 그리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말라가는 시냇물로 겨우 목을 축이고 까마귀가 아침저녁으로 갖다 주는 조그만 빵조각이나 고기 조각 같은 것을 겨우 받아먹는 수준이었다. 이제 시간이 지나서 그곳이 말라서 더 이상 숨어 있을 수 없는 환경을 맞이했다.
 
오늘 9절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열왕기상 17:9,
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과부, 여러분 이 과부에게 말 속에 이 과부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약자이다. 그 시대에 가난한 사람들을 칭할 때 고아와 과부라고 했다. 그러니까 굉장한 사회적 약자이다. 유력한 여인이 아닌 사회적 약자이다. 여러분 이 말을 들었을 때 엘리야의 마음이 기뻤겠는가? 신났을까요? 어쨌든 까마귀를 통해서 자신의 먹을 것을 주셨기 때문에 140킬로 되는 거리를 단숨에 순종하여서 달려간다. 그리고 실재로 그 성문에 이를 때에 바로 한 과부가 나뭇가지를 줍는 것을 보고 이 과부를 만난다.
 
여러분, 엘리야가 도착하자 만났다. ‘성’이라는 것은 작은 곳을 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시골을 가보면 사람들이 많이 살고 마을이 있어도 거기는 성이 아니다. ‘성’ 그러면 수원성도 있고, 우리가 생각하는 북한산성이 있고, 하듯, 도시이고 많은 곳들이 구비된 곳을 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엘리야가 그 먼 길을 달려가자마자 문 앞에서 바로 만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도착하자 만난 것이다. 뭘 의미하는가? 급하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이 여인의 상황이 그랬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여인에게 명하여서 내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말했지만 실재로 이런 것은 그 여인이 연락을 받은 적이 없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겨우 뗄 감 몇 개를 주워서 마지막 양식을 먹으려고 하는 여인이다. 엘리야는 먼 길을 달려왔고 그래서 너무 배가 고팠을 것이다. 그래서 여인에게 물 한 모금을 요청한다. 그리고 떡 한 조각을 요청한다. 이 떡 한 조각의 단어는 원래의 의미로 해석하면 부스러기 정도의 작은 조각이다. 엘리야가 너무 시장했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요청하는데 이 여인의 대답이 가관이다. 뭐라고 대답하냐면, 당신의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맹세하는데 나는 떡이 없다. 통에 한 웅 쿰의 가루와 기름조금 있는데, 내가 나뭇가지 두 개들 주워서 이것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서 나와 내 아들이 먹고 죽으리라. 라고 한다. 오늘 이 말씀 안에 여인의 형편도 기록되어 있지만 이 여인이 정중하게 이 엘리야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가 자신의 양식을 내놓겠는가? 여호와의 사심을 맹세하노니, 우리는 죽을 것이다. 정말 충격적이지 않는가? 이에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명사로 바꾸면 ‘여호와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존재를 두고 내가 맹세하노니 우리는 죽는다.’ 여러분, 이 여인의 생각나 마음이 얼마나 절망적인가? 하나님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죽는다. 이것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고 내가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결론이다. 여러분 이 여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 여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한 줌의 한 웅 쿰의 가루보다 능력이 없고 몇 방울의 기름보다도 능력이 없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이렇게까지 상황이 이 여인에게 도달한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살다보면 IMF와 같은 그리고 코로나 상황과 같은 어려운 환경을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경제적 공황이 올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의 건강이 바닥이 드러내고 우리의 경제적인 수준들이 정말 바닥을 드러내는 일들이 있다. 우리의 일터가 마치 몇 방을 남지 않은 기름 병 같을 수도 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능력이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찾아온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 우리가 맹세하지 않지만, 우리의 결과에 대해서 이 여인과 같은 우리는 부정적인 말을 쏟아낼 수 있다.
 
“목사님 방법이 없습니다. 길이 없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답이 없습니다. 끝내야 될 것 같습니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이런 언어가 지배하는 세상은 여호와의 말씀이 없는 세상의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부정적인 언어, 부정적인 생각이 우리를 많이 찾아온다. 그렇다. 그렇지만 우리가 죽었나? 부정적인 상황이, 어려운 고난이, 우리에게 찾아와도 우리가 죽었는가? 아니다. 오늘 분명한 상황은 하나님의 심판(審判)의 상황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다. 오늘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생명을 의지하는 것보다 한 웅 쿰의 가루와 몇 방울의 기름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 시대의 표본이다. 이럴 때에 성도들이 똑 같은 고난을 겪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사라진 시대에 그 기근(饑饉)과 기갈(飢渴)과 그 목마름을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도 동일한 어려움을 맞이하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적용...
 
▷말씀이 있으면 살아납니다.
-환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여러분, 여호와의 말씀이 없어 기갈로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갈 때에 우리가 체념하거나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생명과 영광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렇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영적 전쟁을 많이 겪는다. 그러면 우리가 영적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의 전쟁이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들려졌고 또 이것에 대한 우리의 은근한 믿음이 있다. 그런데 하나은 우리의 좋지 못한 문제, 그리고 어려운 환경, 우리가 만난 이 고난이 우리에게 찾아온다. 이 둘 사이에 간극이 있다는 것이다. 이 사이에 개입이 있다. 이 개입을 우리가 어떻게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가? 그것이 영적 전쟁이다. 우리가 오늘 엘리야를 잠깐 생각해보자. 엘리야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그 약속, 그 예언을 선포했다. 내가 말하기 전에 더 이상 우로가 없고 이슬도 없을 것이라고 비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 자신이 선포한 그 말에 동일하게 본인도 고통을 겪었다. 더 이상 어떠한 양식도 얻지 못하는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주어졌다. 그 말씀이 사르밧으로 가라, 그것에서 과부를 만날 것이네 내가 그 여인에게 너에게 그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했다. 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 말씀을 듣고 그 120-140킬로 되는 거리를 달려갔는데 현실은 어떠한가? 그 명령을 들은 적도 없는 여인이 공궤할 것은 고사하고 자기 먹고 살 것도 없는 여인이다. 마지막 한 줌의 것을 가지고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음을 결정한 여인, 하나님이 약속과 그리고 이 현실 사이에 이 큰 갭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 갭이 존재할 때에 엘리야는 어떻게 간격을 좁혔는가?
 
성도님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신뢰함과 하나님의 의뢰함이 있는가 하면 이 의뢰함과 약속과 전혀 상관없이 우리의 기도와 전혀 상관없이 우리에게 도둑처럼 찾아오고 강도처럼 찾아오는 삶의 어려움들이 있지 않은가? 이 두 간격 사이에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엘리야는 과부에게 명령한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고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맹세하노니 우리가 죽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이 여인의 현실, 이 사이에서 이 갭을 좁혀냈다. 여러분, 어떻게 좁혀냈는가? 저는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그 약속의 말씀을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이 여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준다.
 
“두려워하지 말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가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했다.
 
여러분, 엘리야는 깨달았다. 자기가 120킬로도 더 넘는 거리를 한 조각을 얻어먹고자 달려온 것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마지막 한 끼도 안 되는 것을 이 여인에게 요청해야 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너의 그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그 기름병에 기름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통해서 이 여인을 살리려고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구나.’ 그 먼 길을 오게 하셨구나! 라고 깨닫게 된 것이다.
 
여러분, 본문 속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본문 속에 하나님을 잠시 묵상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시냇물도 마르고 까마귀 음식도 떨어진 환경, 양식이 없어 죽음을 당연한 길로 여기는 이 여인의 최악의 환경, 하나님이 이 먼 거리에 있는 최악의 환경을 만나게 하셨다. 이 최악이 만나면 답이 있는가? 답이 없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직면한 이 환경을 하나님은 환경이 문제가 아니다. 라고 말씀하신다.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을 경험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엘리야는 이것을 깨달았다. 엘리야는 이것을 깨닫고 여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나도 최악의 환경에 있고 너도 최악의 환경에 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약속과 이 현실사이에 우리가 담아 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비가 내리기까지 그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그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준 것이다. 오늘 이 성경은 급속하게 이 여인이 순종했고 그리고 실재로 엘리야의 말씀대로 그렇게 되었다라고 매듭을 짓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매일 같이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현실의 도전 앞에 마주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바알 같은 물결이 흘러와서 마치 우리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려움 같이 느껴지는 현실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환경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듣고, 또 확인하면서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살아가고 결정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다. 환경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반대로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 여러분 믿음은 환경이 아니다. 믿음은 조건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환경 속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믿음은 어찌할 수 있는 한 웅 큼의 가루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작은 가루라도 내 일생에 삶을 능히 살아도 남는다. 라는 것, 그 사실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하나님은 이 여인을 살리시고자 먼 환경을 뛰어 넘어 찾아오셨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서 먼 환경을 뛰어 넘어 달려오셨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서 몇 가지 정리하자.
 
I. 하나님은 환경과 문제를 넘어 말씀으로 찾아오신다.

-하나님은 환경과 문제를 넘어서 말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담임 목사님께서 온 전론을 이야기 하실 때, 그 온전 론 가운데 ‘생각의 온전함’, 영역이 있다. 생각의 온전함은 환경에 따라서 우리의 생각이 움직이는 것을 생각의 움직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생각의 온전함’이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의 생각을 움직이는 것을 ‘생각의 온전함’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생각을, 영의 생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환경을 따라 사는 생각은 육신의 생각이며 어려운 환경, 고통의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생각, 그것을 선택하고 순종하는 것이 생강의 온전함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온전케 하고 우리를 하나님을 맛보고 경험하기 위해서 성령님을 보내주신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그리스도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이다.
 
▷따라해 보자. 내가 환경보다 소중하다. 내가 문제보다 소중하다.
-여러분, 우리가 코로나나 여러 가지 일이나 경제적, 건강, 문제들이 생길 수 있다. 우리가 그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 문제보다 소중하다고 말씀하신다. 그 어려운 그 환경보다 네가 훨씬 소중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주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를 찾아오신다.
 
II.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셔서 말씀하신다.

-때로는 우리의 환경이 녹녹하지 않고 또 우리의 환경이 어려움이 되는 것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 때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서 과부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맛보아 확신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맛보았다면 우리는 이 시대의 환경 가운데에 반응하고 환경 가운데 낙심하고 환경 가운데 절망적인 언어를 쓰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찾아가서 오늘의 엘리야로 우리는 일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시대의 엘리야처럼 하나님을 맛보고 알게 하는 사람으로 쓰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기를 축복한다.
 
III. 믿음의 사람은 믿음으로 말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으로 말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신다. 이번주 토비새에 특별 글로벌 새벽 부흥회 날로 선포했다. 이 날에 미국 48대 부통령인 마이크 펜스가 특별 간증을 한다. 우연한 것 같지만 결코 우연이가 아니다. 그는 캐톨릭 신자였다. 그런데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고 그는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 그가 미국 정치에서 신앙의 양심을 가지고 복음주의 가치를 현실 정치에 적용하고 실현하기 위해서 평생을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그분이 이번 주 토요새벽부흥회로 간증을 하게 되었다. 제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평생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 현실적으로 노력했던 사람의 그 믿음의 고백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그 자리에 그분을 보내셨다면 아마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말씀하지 않을까를 생각한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으로 말한다. 이 자리에 나오신 성도 여러분, 영상을 듣고 있는 모든 성도여러분, 이번 토비새를 사모하여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말씀하시는 그 음성이 무엇인지를 들어보고 함께 도전을 할 수 있는 복된 시간이 되시길 바란다.
 
♣요약
-세상이 풍요와 풍조가 아닌 말씀으로 생명과 풍성함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여 이 어려운 시대를 넘어 믿음의 사람들이 깨어지지 않고 살리시고 풍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히 누리고, 우리가 기다리고 사모하여서 하나님이 자리에 오셔서 우리를 말씀으로 살려주시길 간구해야 한다. 사르밧 과부처럼 믿고 순종하여서 생명을 맛보는 삶이 되고 엘리야처럼 곤고함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고 가족과 이웃과 형제의 깨어진 사람들을 말씀으로 살려야 한다. 오늘의 엘리야로 살아서 환경을 넘어오신 은혜의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바라며 이번 특새는 소중한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 되길 바라며 미국 부통령이 믿음으로 나라를 이끈 경험을 보고 우리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방인의 믿음 있는 자세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교훈하시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믿는 사람들도 때로는 세상 사람들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 지역에 선교하시면서 그들의 믿음을 보고 제자들의 믿음이 부족함을 충고하셨다. 따라서 우리들의 믿음의 행위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는 행위와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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