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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2월 9일) 제목: ''하나님의 보배:경외함'' 말씀: 말라기 3:16~18 설교자: 김지혁 부목사님 ㅡㅡㅡㅡㅡㅡㅡ *말라기 3:16~18, 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1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18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 ▶하나님의 보배, 경외함으로 정했다. 이것은 저의 표현이 아니라 이사야 33장 6절에 보면 그대로 나온다. 읽어보겠다. *이사야 33:6, 6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 -우리말 성경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 보배가 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잇는데 이사야 33장 원문을 보면 좀 다르게 되어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의 보배이다.” 이렇게 나온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참 가치 있고 귀한 일이지만 하나님에게 참 귀한 보배 같은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무나 좋으신 것이다. 저는 이 짧은 구절을 묵상하는데 제 마음에 얼마나 큰 울림이 있었는지 모른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 피조물이 창조주를 경외하고 경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면서 정말 보배처럼 보배 있게 가치 있게 존귀하게 여겨주신다는 말이다. 마치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것을 보시면서 “와!!! 좋다!” ~~ 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을 보시면서 “나의 보배다.” 라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표정과 마음을 보게 된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표정인 줄 믿는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짧은 구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보자. *말라기 3:16, 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 책에 기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듣고 있는 자들의 귀를 기울이시고 들으신다. 라고 약속을 하셨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땅에 있는 백성들의 말과 생각을 자세히 들으시기 위해서 하늘에서 허리를 숙이시고 몸을 낮추시고 마치 할아버지가 손녀를 바라볼 때 마치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기념 책에 기록해서 우리의 모든 선한 말과 선한 행위를 다 기억하신다고 하신다. 우리가 어떤 사역이나 섬김을 할 때, 과연 하나님께서 알아주실까? 를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은 몰라줘도, 교역자는 몰라줘도 우리의 모든 섬김과 헌신과 우리의 열심을 하나님께서 다 보시고, 아시고, 기억해 주신다고 약속을 해주신다. 또 17절을 보면, *말라기 3:17, 1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로 시작을 하는데 ‘만군’의 여호와의 명칭은 전쟁개념이 들어가 있는 용어이다. 싸우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말라기서에서 무려 24번이나 등장을 한다. 하나님이 싸우시는데 누구랑 싸우시는가? 희한하게도 다른 대적들과 싸우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싸우시는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와 싸우신다. 이것은 사춘기 자녀를 기르시는 분들이라면 금방 아실 것이다. 무서운 중학생들을 키워보면 부모의 말을 고지 고 때로 듣는 아이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 애들은 천사들이다. 대체로 부모의 말을 순종하지 않는다.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한다. 밤새 게임과 걸핏하면 집을 나간다고 하고 체크카드 만들어 달라고 하고 그러면 부모 입장에서 볼 때 이게 남의 자식이 그러면 그렇게 신경 쓸 일도 아니다. 밤새 게임을 하던지 집을 나가든지 배고프면 돌아오겠지 편하게 생각하겠지만 그놈이 내 자식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놈이 내 자식이면 전쟁을 불사한다. 그 아이와 어떻게 싸움을 해서라도 정신을 차리게 하는 만드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만군의 여호와 싸우시는 싸움이 그런 싸움과 같다. 그러니까 만군의 여호와는 너는 그런 자식이 아니라 내 자식이라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다. 내 자식이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의 뜻대로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방만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싸우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전제된 것이 바로 ‘만군의 여호와’의 개념이다. 그 만군의 여호와 되시는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해서 전쟁하시는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 있는 것이다. 그 만군의 여호와께서 17절 말씀하고 있다. 1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새롭게 다가온다. 만군의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특별한 소유로 삼아주시고 진심으로 아껴주신다고 약속을 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과 언약을 맺으셔서 “너는 내 것이라, 내 자식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과 언약을 맺으셔서 ‘너는 내 것이라고 너는 내 자식’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된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는 내 것이다’라고 하시는 말씀이 왜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지를 아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면 하나님의 모든 풍성한 것이 우리의 것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 자녀가 갖는 특권이다. 여러분 믿는가?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의 소유가 되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고, 하나님의 거룩함이 우리의 것이 되어서 우리를 정결하게 해주시고 우리를 성결하게 해 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의 것이 되어서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공급해 주신다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의 보배라고 했는데 여러분 진짜 값비싼 보물, 진짜 값나가는 보석을 보았는가? 10캐럿쯤 되는 진짜 다이아몬드를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진짜 보석은 찾기가 어렵다. 반면에 인조 다이아몬드라든지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진짜 보석은 주변에서 보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짜 보배, 하나님의 진짜 보석과 같은 성도들은 오늘 날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어쩌면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우리의 믿음과 신앙과 삶에 우리의 가정, 자녀들의 삶에 온전하게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 때까지 끊임없이 무언가를 경외하면서 살아가면서 살아가는지 모른다. 그것이 인간이다. 두 가지 중에 하나이다. 첫 번째는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든지, 아니면 피조물을 경외하든지 둘 중 하나이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으면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고 피조물을 경외하는 잘못된 경외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마땅히 경외해야할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고 경외하지 말아야 할 다른 것들을 경외하는 잘못된 경외심이 우리 마음에 가득 찼다는 것이다. 이것은 로마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의 진단이기도 한다. *로마서 1:25,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고 피조물을 경외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인간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뒤바뀐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피조물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대치된 사건이다. 그 후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아닌 물질을 경외하고 돈을 경외하고 쾌락을 경외하고 우상을 경외하는 잘못된 경외심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죄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을 위해 살지 못하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고 있다. 하나님의 수직적인 경외심이 나에 대한 잘못된 경외심이 잘못되면서 우리의 삶에 모든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말라기서도 마찬가지이다. 4장 밖에 되지 않은 말라기서를 쭈욱 읽어 보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사라져버리니까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얼마나 타락하고 부패했는지 모른다. 제사장들이 제물을 드리는데 원래는 구약의 제사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구별해서 가장 최상의 것을 드려야 그것이 온전한 제사가 되는데 백성들이 훔친 물건을 가져다가 제단에 바치는 것이다. 희생 제물을 가져오는데 병든 것, 저는 것, 흠이 있는 것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제사장들은 그것을 제지하고 좋은 최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제사장의 임무인데 전혀 개의치 않고 그대로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자신들이 취하고 남은 것, 필요 없는 것들을 하나님께 가져다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제단을 경멸하고 하나님을 멸시했다. 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셨겠는가? 짐작을 한 번 해보라. 하나님의 표정이 보이신가? 오죽했으면 그런 제물을 받는 것이 너무 속상하셔서 마음이 아프셔서 1장 10절에 이러한 말씀을 하신다. *말라기 1:10,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성전 문, 차라리 문을 닫아버리라고 하신다. 차라리 그렇게 예배들 드릴 바에는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말라가 2:3, 3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여러분, 제물에 똥을 발라버리고 싶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심정이 느껴집니까?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는다고 얼마나 불평을 쏟아내는지 모른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사람 중에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늘 불평하는 것 같다. 어떤 상황에서도 불평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 백성들의 입에서는 감사는 조금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백성들은 1:2절에 어떻게 반박하는가? *말라기 1:2,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사춘기 자녀들이 부모에게 대드는 것처럼 따지듯이 묻는 것이다. 말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모른다. ‘정의의 하나님, 그런 하나님은 안 계셔... 하나님 믿어 봐야 소용없어. 하나님을 믿어봐야 다 헛된 일이야.’ 성경에 그대로 나오는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금지하셨던 이방민족과 혼인을 하고 십일조를 전혀 하지 않았다. 뭐라고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했다.라고 한다. 말라기 시대에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불평을 쏟아내고 말로써 하나님을 대적하고 형식적인 제사만 드리고 헌금 생활이 무너져 버린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원인이 그것이다. 그래서 말라기에서 이 모든 삶의 문제의 해결로 해답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다. 저는 이번에 말라기 본문을 묵상하면서 말라기 시대의 백성들처럼 오늘날 우리들도 우리의 가정도 어쩌면 우리의 자녀들도 특별히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상당히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가 염려가 된다. 신앙의 중심에는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다. 최근 많은 교회 현장에 성령의 역동적 역사하심과 강력한 은혜와 믿음의 경험을 찾기가 쉽지가 않고 오히려 말라기 시대의 형식주의 적인 제자 세속주의가 팽배해지고 있지는 않는지 염려가 된다. 여러분 우리가 냉철하게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 볼 때 여러분의 예배는 어떠한가? 가정과 다락방, 자녀들의 예배의 현실은 어떠한가? 제가 지난주에 오페라 극장에 공연을 보러 갔다. 15분 전에 큰 자리가 대부분 차 있었다. 영화를 보러 가더라도 5분만 늦어도 큰일 나지 않는가? 우리는 왜 하나님과 만나는 이 예배는 그렇게 습관적으로 늦고 지각을 하는 것인가? 생각을 해본다. 그것은 차가 막혀서도 아니고, 아이들이 늑장을 부려서도 아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오페라 극장에 사람들이 참 많았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손주들까지 연인들 가족들 다 모여서 얼마나 경건하게 집중해서 그 공연에 관람을 했는지 모른다. 그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니라 어쩌면 속히 마쳐야 하는 시간만 바라는 마치 견뎌야 하는 시간으로 초라하게 변해버린 것은 아닌지... 예배를 귀찮은 숙제처럼 생각하고 무미건조하게 시간을 그냥 때우고 돌아갈 때도 많이 있고 예배시간에 카톡을 하거나 심지어 전화통화를 하는 분들도 많이 보았다. 왜 그러는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갈수록 우리의 헌금 생활이 인색해지고 예배의 감격이 사라지고 예배를 형식적으로 의미적으로 드리면서 첫 사랑을 회복하지 못하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라기 시대의 백성들과 너무나 비슷한 것이다. 정말 바라기는 이 시간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조명해 주셔서 우리의 마음에 있는 잘못된 경외심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심을 회복되는 경험이 되길 소망한다. 오늘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회복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 성경적인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맨 처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표현으로 나오는 곳이 창세기 22장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그런 본문이다. 여러분 다 아시는 내용이지만 아브라함이 75세 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그리고 100세가 되어서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25년이 흐른 후에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난다. 그러니까 정말 오랜 시간에 얻은 이 이삭이 얼마나 이쁘고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들일지 짐작이 되지 않는가? 앉으나 서나 이삭 생각이다. 오직 이삭이다. 아브라함의 이삭은 자기 목숨과 자기 생명보다 더 소중한 아들이다. 아무리 재산이 많았어도 아들이삭이 주는 기쁨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러분, 창세기 22장 1-2절을 보면, *창세기 22:1-2,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여러분, 번제가 무엇인지 알지 않는가? 번제는 불로 태우는 제사이다.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여서 불에 태우라는 이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듣고, 아브라함은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는가? 노년에 아브라함의 가장 두려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아들이삭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부모로서 가장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여러분은 이미 스토리를 알고 있어서 이것은 하나님의 테스트이고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다 준비해 놓으신 것이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 때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다. 저도 한 번 진지하게 상상을 해보았다. 만약 저에게 아들이 너는 둘이니까, 하나를 나에게 바치라고 하시면 그럼 나는 어떻게 반응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여러분도 남의 이야기처럼 생각지 말고 여러분에게 생명보다 더 소중한 그것, 다 하나씩을 있을 것이다. 여러분이 보배처럼 생각하고 있는 그것을 하나님이 요구하실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할지를 한 번 마음속으로 생각해보면 좋겠다. 저는 당장 아들이 둘이니까 첫째를 바칠까? 둘째를 바칠까? 그게 가장 고민이었다. 눈물이 났다. 어떻게 결정하겠는가? 한참을 고민한 후에 그래도 첫째가 3년을 더 살았으니까 첫째를 바치자고 생각하고 이제 번제를 드리려고 생각을 하니 더욱 눈물이 주르르 났다. 여러분, 아무리 생각해도 내 힘으로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생명보다 소중한 것, 내 기쁨의 근원이 되는 것, 내 인생의 목표가 되는 그것을 내려놓고 포기하는 것은 그것은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사흘 동안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리아 산을 향해서 걸어가는데 이 때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아들의 죽음을 묵상하면서 사흘 길을 가는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괴로운 심정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스스로 아들을 죽이려 한다는 그 두려움보다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로 결정한다. *창세기 22:12, 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 음성을 들어보라. 이 본문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표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굉장히 중요한 본문이다. 내 독자까지도 아끼지 않는 것을 보니까,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겠다고 하신다.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그 두려움보다 내가 생명처럼 여기고 보배처럼 여기는 그것을 잃어버리는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의 말씀에 삶의 최 우선순위(優先順位)를 두고 때로는 납득이 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피눈물을 흘리면서 묵묵히 순종하며 모리아 산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올라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성경적 의미이다.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쉬운 일인가?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아브라함처럼 자기 생명보다 소중한 아들을 번제로 바칠 수 있는 분이 우리 중에 얼마나 계실까?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가? 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렇게 못할 것 같다. 내 손으로 죽여서 그 아들을 불로 태워야 한다니... 아들을 바치느니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차라리 나를 번제로 바치겠으니 나를 데려가십시오. 라고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 묵상을 하다가 문득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졌다. 하나님은 제 안에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아셨을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 있는 믿음이 저와 여러분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셨다. 우리는 절대로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들을 내 힘으로는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시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힘으로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고 잘못된 경외심에 사로잡혀있으니까 하나님을 스스로 제물이 되어주시기로 작정하신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성전이 되셔서 임마누엘로 이 땅에 오셨고 스스로 가장 정결한 제물이 되시므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경외하심을 직접 보여주셨다.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해결책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경외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그렇다. 자아를 향하는 잘못된 경외심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은,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뿐임을 믿는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되지만 예수님께서 이루어주신 일이다. 우리가 자주 믿음의 4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미국의 경우이다. 믿음은 할아버지 시대에는 경험이고, 기적이고, 감동이었다가 아버지 때에는 전통이 되고, 아들 때에는 그저 그런 것이 되고, 손자 때에 믿음은 귀찮은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영국과 미국에 기독교적인 유산이 얼마나 빠르게 그 힘을 잃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들은 어떠한가? 제가 예전에 고등부 사역을 할 때, 굉장히 가슴 아픈 일들 중에 하나가 아이들이 고등부 때까지는 교회를 잘 출석을 하는데 꼭 대학을 가게 되면 아이들이 교회 출석을 하지 않고 믿음을 잃어버리는 아이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이 아이들이 왜 믿음을 잃어버렸을까를 고민을 해보았는데, 정확히 말하면 그 아이들은 믿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애초에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 억지로 교회 나오게 하는 부모들의 통제를 받으면서 교회 출석을 잘 했는데 대학교에 가면서 부모의 울타리를 벗어나니까 이제 영적인 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난다. 교회 출석을 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라도 자녀 양육의 원칙을 아이들이 자신의 자아와 성공과 풍요를 경외하는 잘못된 경외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우리 아이들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가정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회복될 때, 비로소 온전한 신앙계승이 가정에서 이루어질 줄 믿는다. 저도 아이들을 키워보니 나한테 없는 것을 아이들에게 줄 수 없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수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가정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영광을 부모인 우리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날마다 아이들 학원 라이드와 밥 챙겨주느라 아이들 숙제, 세탁, 밀린 집안일을 하느라 너무 바쁘고 분주한 나머지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부모들이 보여주지 못하는 책임이 크다는 것이다. 이 시간 간절히 바라기는 부모인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회복하면 좋겠다. 말씀을 맺겠다. 창세기 26장에 보면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판 우물을 자기가 다시 파서 물을 긷는 그런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처음에 이 우물을 파는데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우물을 파면서 어떤 생각을 했겠는가? 이 우물을 나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내 아들 이삭도 마시고, 또 나의 손자들도 마시라고 대대로 이 우물을 마시라는 마음으로 그 우물을 팠을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 26장 18절에 보면, *창세기 26:18, 18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이 부분이 중요하다. 블레셋 사람은 아브라함이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죽으니까 흙먼지로 덮어버렸다. 그래서 더 이상 물을 긷지 못하도록 막아버린 것이다. 흙먼지가 우물을 덮어버리니까 이삭과 그 자식들이 우물에서 물을 긷지 못한 것이다. 물을 마실 수 없게 되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오늘 날 우리도 이삭과 같은 형편에 처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생수가 필요하다. 코로나 시대를 보내면서 활력과 토대가 되는 근본적인 생수가 우리는 필요하다. 우리도 생명이 필요하고 능력이 필요하고 성령을 충만케 하시는 은혜가 필요하다. 그런데 왠지 무언가에 꽉 막혀있는 답답함을 느낀다. 코로나로 예배의 우물이 막혔고 염려와 근심의 불순물이 가득 쌓여서 사회의 우물을 막아버린 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가정에 이미 우물이 막혀버려서 더 이상 가정 예배가 이루어지지 않고, 은혜의 통로가 막힌 가정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삭이 그 우물을 다시 판다. 우물을 다시 판다는 것은 우리 자녀들의 믿음의 계승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부모들이 우물을 파는 수고를 해야 되는 것이다. 경외의 우물을 파야 되는 것이다. 오늘 말씀의 결론이다. 코로나 시대를 보내면서 우리가 다시 우물을 파야 할 때인 줄 믿는다. 우리 부모세대가 파 놓은 우물, 우리를 위하여 파 놓은 것을 우리가 다시 파서 우리도 살고 우리의 자녀들도 성령의 생수를 맛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는 개인적으로 저희 부모나 우물을 파놓으신 생수를 먹고 자랐다. 저희 외할아버지, 저희 증조할아버지도 우물을 팠다. 그렇게 4대가 그렇게 우물을 먹고 자랐다. 여러분 이제 누구 차례인가? 제 차례이다. 저의 아들과 저의 손주들을 위해서 우리 부모 세대가 경외의 우물을 파야 한다. 코로나로 막혀 있는 흙먼지를 파내야 한다. 가정의 불화와 다툼의 불순물을 파내야 한다. 염려와 근심의 혼합물을 파내야 한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우리 가정에 당장 흙먼지로 막혀 있다. 라고 하더라도 그 밑에는 여전히 생수가 있다는 것이다. 부흥의 물줄기가 우리의 가정을 여전히 지나고 있다 그러니 우리 부모들이 다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외의 우물을 파면, 그곳에서 생수가 다시 터져 나오고 생수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터져 나오게 될 줄 믿는다. 치유가 그 우물에 있다. 응답이 회복이 부흥이 그 우물에 있다. 바로 경외의 우물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녀들, 그들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나의 보배다.’ 라고 귀하게 여겨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올 한 해, 우리는 다시 그 경외의 우물을 팔 때이다. 무엇보다 영원한 생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영원한 기쁨과 생명의 기쁨을 얻기 위하여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참 만족의 근원이 십자가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 오늘 이 말씀을 붙들고 우리가 가정,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믿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요약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먼저 회복되고, 말라기 시대의 형식적인 세속주의를 이겨내고 자아를 향한 잘못된 경외심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경외심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복음의 능력으로 사로잡히는 삶이 되고, 신앙생활의 활력과 토대가 되는 근본적인 생수를 얻기 위해 우리는 가정에서 우물을 파서 온전한 신앙 계승이 우리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은혜가 있도록 실천하고 기도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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