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10월 5일) 제목: "광야와 약속의 땅의 경계에 선 사람들" 말씀: 신명기 34:1-12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전도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윤현수 부목사님 ------------- *신명기 34:1-12, 1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2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3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 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6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8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11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12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 -------------- ▶광야와 약속의 땅의 경계에 선 사람들(윤현수 부목사님) -작년 여름 저희 교규의 한 성도님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성도님 본인의 동의를 받고 그 문자 메시지의 일부를 읽어드리겠다. ※안녕하세요? 목사님, 기도 부탁드립니다. 지난 주 어떤 성도님의 간증을 듣고 마음이 무겁습니다. 부모님의 보호에 평안히 자라 신앙 좋은 남편과 시어머니 인도로 교회에 오자마자 모든 게 믿어지고 모든 게 하나님 덕분이라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저의 상황은 몇 달 채 몸은 아프고, 직원은 그만둔다고 하고, 회사 대표님과의 대화 부족으로 일은 힘들고, 아이들을 제대로 못 챙기니 소소한 어려운 일들이 지속되고 물질적인 부분은 해결의 길이 안 보이는데, 제 지금 상황과 그 성도님은 너무 대조적이었습니다. 예배 또한 아픈 몸을 이끌고 간신히 가고 있는데 다른 이들에게는 저리 쉬이 주시기만 하시는데, 나는 왜 이리 곤고하고 힘들게 주시려고 하지 않으시는 건지, 사람에게 치이고, 경제 상황에 치이고, 건강마저 저를 치는 이 상황이 하나님이 ‘벌주심’이 아님은 무얼까? 자꾸 이런 생각이 지칩니다. 하나님 은혜를 잊은 백성이라 하실 수도 있지만, 참 마음이 외롭고 힘들고, 이럴 거면 ‘내가 사는 것 자체가 지옥인데 날 좀 빨리 데려가 주시지 않는구나!’, 싶음 마음이 이후 내내 떠나지 않습니다. 이 문자를 받고 마음이 참으로 먹먹했다. 성도님의 어려운 상황에 안타까움도 문제였지만 그에 더하여 진실로 제 자신에게도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이러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성도님의 문자는 우리가 말은 안 해서 그렇지, 우리 대부분이 마음 속 깊숙이 가지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있어서 분명한 문제 상황은 교회와 성도님들에게 있어서 성경에 약속된 축복이 아직 온전히 경험되지 않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겨왔는데도 질병, 사업의 파산, 인간관계의 갈등, 가정의 깨어짐, 갑작스런 사고와 같은 재난을 경험할 때가 많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축복이 차별적으로 경험된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병 고침과 기도 응답, 그리고 기적과 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 사람 못지않게 신실하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거룩하게 살아가는데도 그러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가 이 땅에서 받는 하늘의 복이 어떤 점에 있어서는 매우 확실하고 공통적이지만, 또 어떤 면에 있어서는 상당히 불확실하고 애매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겠다. 이 상황에 대한 답을 얻고 싶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보기에 차별적으로 주어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풍만하게 경험되지 않는 우리의 이 현재 상황에 대한 답을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성경을 읽어나가던 중에 오늘 읽은 신명기 34장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때로는 확실한 것 같으나 때로는 애매해 보이는 우리 신앙의 확고한 토대를 구축하고 우리에게 주시는 성경의 권면을 굳게 붙드는 시간되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은 매우 특별하다. 왜 특별할까? 모세 5경의 맨 마지막 장면이기 때문이다. 성경책 맨 앞에 다섯 권의 책,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모세 5경, 또는 5경이라고 한다. 유대인 이 다섯 권의 책을 ‘토라’라고 하여 그들의 기본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보통 이 5경과 같은 긴 분량의 이야기는 결말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5경의 결말이 조금 이상하다. 5경의 시작부분은 천지창조라고 하는 거대한 사건으로 5경이 시작됨에도 불구하고 5경의 마지막 장면은 사실상 출애굽기부터 신명기까지 5경의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는 모세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허망하게 들어가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어버리는 장면으로 5경이 끝난다. 그리고 5경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 주셨던 땅의 약속이라고 하는 주제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출애굽기에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그 가나안 땅을 향한 여정이 가나안 땅 목전에 와서 신명기 마지막 장면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5경이 끝나버리고 만다. 매우 허망하고 마치 미완성의 이야기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겠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단 한 글자도 의미 없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미완성인 것 같고 허망하게 끝나는 이야기 상황 자체도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교훈이 있다고 분명히 믿는다. 그렇다면 오늘 신명기 34장에서 그 약속의 땅, 경계 앞까지 왔으나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모세와 들어가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주시는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도록 하겠다. 본문 7절에 보면 모세가 죽는다. 죽는데 모세가 죽을 때. 그 나이가 120세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신명기 34:7, 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모세가 죽었던 이 나이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창세기 6장 3절에 여호와께서 *창세기 6:3,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5경에 맨 앞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창세기 6장에서 아담이후에 계속되는 인류의 범죄의 결과 하나님께서 인간의 수명을 백이십 년으로 단축시키는 저주를 내리셨는데, 모세 5경에서 모세를 빼고 그 누구도 백이십 세에 죽지를 않는다. 모세 5경의 맨 앞부분에서 인간에게 내린 백이십 세의 달수의 연한을 설정한 그 저주가 모세 5경 맨 마지막 장면에서 모세가 백이십 살에 죽는 것으로 성취되는 것은 모세가 바로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저주 받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와 같은 역할로 신명기 34장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온 인류의 백이십년의 연한으로 설정된 그 저주로 이 모세가 상징하는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은 날 수가 백이십년으로 한정된 저주를 받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여정을 나아가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지금 그 모세가 어디에 서 있는지 오늘 34장에서 말씀하고 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광야와 약속의 땅 경계에 서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은 백이십 세의 저주 가운데 그저 허무하게 죽는 인생으로 끝이 나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비록 그러한 범죄로 인한 저주를 그 굴레 안에 있는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로 모세 5경은 그리고 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약속의 땅은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과 거룩이 충만한 에덴동산과 같은, 성소와 같은 땅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바로 이러한 땅을 선물로 받은 존재라는 점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 그런데 여러분, 광야와 약속의 땅 경계이다. 경계는 어떤 장소인가? 혹시 경계에 살아보았는가? 제 고향은 광양시 진월리 라고 하는 곳이다. 제가 태어나서 살았던 고향 동네가 경계였다. 전라남도와 경상남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이 흐르고 있는 강가에 살았다. 섬진강은 우리 한강보다도 그 폭이 좁았기 때문에 제 고향은 비록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라남도에 속해 있었지만 경상남도와 매우 가까웠다. 그래서 제 고향은 전라도 사투리와 경상도 사투리가 서로 섞이는 지점이었다. 그래서 저는 어릴 적부터 광주 사투리와 부산 사투리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두 개가 섞인 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에 소풍도 저는 전라남도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상남도에 있는 지역들에 주로 소풍을 가곤했다. 이처럼 경계라고 하는 지역은 그 경계를 사이에 둔 양쪽 지점이 서로 섞이고 교차하고 융합되기 쉬운 장소이다. 그래서 사실 애매한 장소이다. 제가 행정구역상으로 분명히 전라남도 주민인데, 우리 동네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보았을 때는 우리가 전라도 사람인지 경상도 사람인지를 알 수 없었던 것처럼 경계에 사는 사람들은 어느 한쪽 지역의 영향력에 강력해지면 비록 반대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 영향을 받기가 쉽다. 그렇기 때문에 경계는 사실 굉장히 위기의 장소이다. 예를 들자면, 군사분계선 그 지역에 분명히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우리 남한 군인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그 지역은 우리 남한의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은 언지든지 북한의 진입이 가장 먼저 이루어질 수 있는 위기의 장소이다. 바로 이점이다. 광야와 약속의 땅이 맞닿아 있는 지점, 그 경계에 오늘 신명기 34장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와 있다고 하는 점은 지금 하나님이 백성이 서 있는 그 장소가 굉장한 위기의 장소라고 하는 곳이다. 거기서는 광야의 양항을 받을 수도 있고 또 하나님의 생명과 임재와 복이 충만한 약속의 땅에 영향도 받을 수 있는 두 땅의 힘이 교차하고, 융합되는 그래서 때로는 광야의 시험 앞에서 넘어질 수도 있는 위기의 장소에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 있다. 광야는 어떤 곳인가? 광아는 물이 없다. 식량이 없다. 물이 없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양식 주시는 하나님께서 그 광야에 있는 백성들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시지 않으시면 생존할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광야에는 불 뱀의 유혹이 있고 아말렉과 같은 대적들이 도전이 있다. 거짓 선지자, 발람과 같은 거짓 선지자의 유혹도 있는 장소이다. 바로 오늘 요단 강가에 서 있는 그 약속의 땅과 광야의 경계선에서 서 있는 하나님의 백성은 그러한 부정과 유혹과 시험에 그 혼돈으로 가득 찬 끝자락에 서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경계는 그 광야를 뒤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 앞쪽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생명과 하나님의 복과 임재가 충만한 약속의 땅이 앞에 놓여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장소는 비록 광야에 발을 딛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그 생명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성소와 같은 그 땅에 아름다운 향기를 불어오는 바람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바로 경계라고 하는 곳이다. 백이십년 한정된 날수의 저주의 굴레를 가지고 광야의 모래 바람과 때론 저 요단강 건너에서 불어오는 약속의 땅, 저 아름다운 향기가 뒤섞여 있는 경계선은 위기의 장소요, 시험의 장소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위기의 장소, 시험의 장소는 희망의 장소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이 경계선에 모세와 이스라엘만 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 한 분이 더 계신다. 바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자기 백성과 모세와 함께 그 경계선에 와 계신다. 하나님께서 드디어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하나님께서 그 경계선에 있는 모세를 느보 산으로 불러올리신다. 그리고 모세가 느보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셨던 그 땅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신다. 신명기 34정에 1-4장까지를 제가 한 번 더 읽어 보여드리겠다. *신명기 34:1-12, 1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2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3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우리 성도님들은 이 장면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나님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드는가? 저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시면서 도대체 왜 보여주시는가? 그리고 왜 출애굽기부터 모세를 부르셨다고 하나님께서는 그 광야에서 그렇게 고생시켜놓고 왜 보여만 주시고 너는 들어가지는 못한다고 선언을 하시는가? 우리 하나님은 너무 얄밉고 잔인하신 분이 아니신가 하는 생각이 들 수가 있다. 그러나 땅을 보여주시는 의미는 땅을 구경만 하라는 것이 아니다. 모세의 마지막 소원성취도 아니다. 구약성경이 기록될 시절, 고대 근동의 법과 관습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그 중에 대표적으로 신약학자 다우드는 스터디스 인 비브리컬 로우(Sthuddy's in Biblical Row) 라고 하는 책에서 로마법과 또 성경시대의 법에서 토지소유권이 이전되는 방식에 관하여 연구를 하였다. 그것은 땅을 넘겨주는 양도인이 그 땅을 받는 양수인에게 그 땅을 넘겨주기로 약속하고 그 땅을 보여주면 그 땅을 보여줄 때 소유권이 양수인에게 이전된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오늘날 우리의 상황으로 한 번 비교를 해보자면 물론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여기 토지매매 계약을 했다. 양도인과 양수인이, 이 땅을 사고팔기로 계약을 한 후에 그 땅을 사는 사람에게 그 땅에 대한 소유권 이전 등기를 해주면 드디어 땅을 산 사람의 땅이 된다. 그러면 그 땅을 사람은 소유권 등기를 마치면 그 땅에 들어가지 않고, 살지 않더라도 자기 땅이 된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땅을 보여주시는 이 행위가 오늘날 등기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 후손들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리라.”라고 약속하신 다음에 오늘 그 아브라함의 후손인 모세, 이스라엘 대표자인 모세를 느보산에 올라오라고 하신 다음에 모세에게 그 땅을 보여주시는 것은 모세가 지금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않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 고대 근동세계의 법률의 관습에 따를 때에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그 땅의 소유권을 법적으로 받은 것이다. 이것이 굉장히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님들께서도 무엇인가 바로 느낌이 올 것 같다. 하나님께서 땅을 먼저 주신다고 약속을 먼저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 땅을 바라보게 하셨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바라보게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그 땅을 바라볼 때, 그 땅을 법적으로 소유하게 되었다. 이것은 너무나 신약 적이다.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은 구원과 영생 천국을 약속하셨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하나님께서는 구원과 영생 천국으로 인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 예수님의 생애와, 성령님께서 오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이루어 가시는 모든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성도들에게는 그것을 바라보라고 하신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성령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꿈과 영생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라고 하나님이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가 그것을 믿고 바라보는 순간 구원과 천국이 우리의 것으로 확정되는 것이다. 바로 기독교 구원의 이 메커니즘, 이순서가 모세가 땅 보는 이 장면의 메키니즘과 너무 유사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러나 우리는 중요한 것을 알 수가 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인 모세가 보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보았다는 의미가 되겠다. 모세와 하나님의 백성은 그 땅을 보지만 애굽인들과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였던 그 이방인들, 그 대적들은 그 땅을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들은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선물하시는 그 땅을 하나님이 보여주셔서 그 땅을 보여주는 사람과 하나님께서 보여주지 아니하시기 때문에 그 땅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땅은 우리 인간이 노력하여 보려고 해도 볼 수 있는 떵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34장 1-4절까지 모세가 보았던 그 모든 지리적인 영역을 다 조사해서 보면 느보산에서 물리적인 우리 육신의 눈,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영역이라고 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가 힘쓰고 애쓴다고 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그 약속의 땅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여주셔야 약속의 땅을 볼 수 있다. 바로 신약시대에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님의 역사와 우리 주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님이 이룩하셨던 그 구원의 역사를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자들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를 수요저녁기도회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시는 성도님들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기 생명을 대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예배하시고 기도하러 나오셨을 텐에 바로 우리 성도님들께서 붙들고 계시고 보고 계시는 우리 예수님의 그 구원의 사역은 우리가 보고 싶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오늘도 감사와 기쁨으로 예배하고 기도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 그런데 또한 그 땅을 보는 사람과 그 땅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모든 삶의 의미와 정체성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애굽 사람들은 그 애굽에서 국고 성을 지었다. 국고성은 거대한 애굽의 건축물로써 국고성의 용도가 무엇인지 역사학자들이 관찰해 보았더니 애굽의 조세 행정과 군사 행정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국고 성이다. 한마디로 세상 제국의 영광과 세상 나라의 통치를 위하여 그것을 만들었는데 그 사람들은 왜 거기서 그것을 만들었는가? 애굽이 유월절 날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애굽의 모든 첫 째 난 남자아이들이 다 죽음으로써 애굽의 심판이 내려졌다는 것은 그 애굽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곳이고 장차 망할 도성이라는 곳에도 불구하고 몰랐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임재하실 약속의 땅, 젖고 꿀이 흐르는 땅, 생명의 땅이 있다는 것을 애굽 인들에게는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의 땅 애굽에서 평생 자기들은 살아가기 위한 처소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애굽에 머물러서 국고 성을 지을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광야에 나왔어도 그 광야에서 고정적 그 건축물을 건축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땅, 약속의 땅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그 땅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애굽에서도, 광야에서도 고정식 건축물을 지을 그러한 목적도, 목표도 그러한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르므로 하나님의 백성이란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여주시는 그 땅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확인할 수 있겠다. 오늘 드디어 그 땅을 모세에게 그 땅에 경계선 앞에서 보여주시고 소유권을 이전해 주시고, “모세야, 네가 비록 들어가지는 못할지라도 네가 그 땅을 소유했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계신다. 과연 이것이 의미가 있는가? 그 의미는 마지막에 확인해 보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그 땅을 바라보았고 소유했던 모세가 이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세 가지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첫 번째로 모세는 자신이 무덤 묻힐 땅 한 평 갖지 않았다. -신명기 34장 6절에 보면, *신명기 34:6, 6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죽었는데 모세가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가 없다. 라고 하는 기록이 성경에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모세의 무덤이 거기에 가서 사람들이 숭배할까봐 하나님께서 모세의 시체를 하나님께서 감추었다. 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 있는 모든 인물들이 다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 구태여 모세만 이렇게 어디 묻혔는지 알 수 없다. 라는 기록이 나와 있는 것은 저는 그런 의미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바로 모세가 묻힌 땅의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것은 만약 광야에 행정기관이 지적부나 등기부를 만든다고 했을 때, 모세가 소유한 땅은 한 평도 없다는 뜻이 된다. 모세는 광야에서 자신의 시신이 묻힐 땅 한 평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말이 되겠다. 모세는 땅을 소유하지 않았다는 말은 모세는 광야에 조금도 집착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되겠다. 왜? 모세가 광야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었는가? 그것은 모세가 약속의 땅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광야의 부정함과 광야의 혼돈을 영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정한 날수가 있어서, 행인과 나그네와 같이 이 광야를 지나가고, 우리가 장차가 거할 도성은 하나님 품안이라는 것을 모세는 알았기 때문에 광야에 땅을 소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 사실 약속의 땅과 광야의 경계에 선, 두 땅이 교차하는 장소요, 두 땅의 힘이 맞닿아서 성도를 시험하는 그 위기의 장소에서는 사실 고난과 환난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난과 환난 때문에 사람들이 실족하지는 않는다. 바로 그 약속의 땅이 눈앞에 보이는 자들은 실족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왜 실족하는가? 자기 눈앞에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구원과 영생 천국을 이미 믿음으로 소유하신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에서는 이 땅에서 결핍과 양식 없음과 유혹과 고난 앞에 좌절하지 말기를 부탁드린다. 지금 우리는 매우 열악하고 빗물이 새고 저녁이 되면 모기와 해충들이 들어오는 그러한 열악한 집에서 전세 월세로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의 지금 현실은 너무너무 좋은 집에 임대차 계약을 한 것도 아니고, 전세 계약을 한 것도 아니고 소유권 이전 등기를 하여 그날 입주 일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잠시 비가 새고 해충이 들어오는 월세 집에 좀 좋지 않는 곳에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입주 일을 기다리는 즐거움 때문에 여러 어려움과 힘듦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모세는 죽을 때까지 눈이 흐리지 아니하었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다. *신명기 34:7, 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다라고 한다. 왜 흐리지 아니한가? 오늘 34장에서 모세의 눈이 어디에 사용되고 있는가? 모세의 눈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 약속의 땅을 보는 데에 사용된 신체기관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죽을 때까지 그 시력이 흐려지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그 약속의 땅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때, 그 땅을 바라보는 그 시야가 죽을 때까지 흐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시력이 좋으면 작은 움직임에도 예민할 것이다. 광야의 흙먼지와 광야에 돌아다니는 불 뱀과 광야의 모든 시험의 요소들을 우리가 시력이 좋은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 멀리 약속의 땅에 우리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축복과 영광과 즐거움과 생명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시력이 좋으면 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약속의 땅의 아름다움을 계속해서 보면 그 땅에 들어가고 싶은 소망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땅에 들어가기 위하야 준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시력이 흐려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광야의 시험, 광야의 위험한 함정들, 광야의 그 흙먼지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어진다. 그래서 내가 지금 광야에 있는지, 아름다운 땅에 있는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약속의 땅을 볼 수 있는 시야가 흐려지면 이제 드디어 그 땅에 대한 소망도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우리의 영적인 시야를 유지하는 일에 먼전을 기하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 우리가 시야가 뚜렷해질 때, 우리 예수님께서 과거에 이루신 구원의 역사, 현재 나와 함께 하시는 구원의 역사, 장차 미래에 백성들에게 베푸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우리는 항상 뚜렷하게 바라보고 주님 앞에서 감사하고, 찬양하고, 주님께서 이룩하실 그 구원을 항상 소망하며 기대하게 될 것인데 우리가 그 영적인 시야가 흐려지면, 우리는 세상의 죄악도 구별하지 못하고, 하늘의 영광도 분간하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 상태가 되어서 이제 하나님 앞에서의 깨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로서의 삶과 소명을 우리는 점차 잃어갈 위험에 빠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영적 시야를 유지하는 일에 전심을 다하기를 부탁드린다. 이 시력은 본문에 따르면, 죽을 때까지 유지를 해야 한다.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그 시야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에베소서 6장 24절에서 사도바울이 말씀하기를 세 번째 모세가 느보 산에 올라갔다. *에베소서 6:24, 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만남이 주로 이루어졌던 장소가 있다. 그것이 출애굽기에서는 시내 산이었고, 오늘 마지막 모세 5경에서는 느보 산이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산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 자주 드러난다. 그리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산에서는 하나님이 말씀이 반포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산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올라가면 거기서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진다. 오늘 우리에게 느보 산이 어디인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곳,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 그리고 그 느보 산에 올랐을 때,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보며주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완성된 구원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장소가 어디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보지 못하는 눈을 열어서 영생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장소이며,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날마다 매주 선포되는 장소이며, 교회는 구원 받은 백성이 우리 주님과 뜨거운 연합의 교제를 이루는 장소가 바로 교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 나아옴으로써 하늘나라를 볼 수 있다. 교회에 힘써 오르고 오름으로써 약속의 땅을 볼 수가 있다. 느보 산에 오르지 않으면 약속의 땅을 볼 수가 없다.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원역사의 필수적은 기관이요, 나의 구원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기관이다. 위기의 장소요, 시험의 장소인 경계선에서 안전한 장소요,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요, 천국을 보여주시는 장소는 바로 교회이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께서도 우리의 삶을 시시각각으로 유혹해 오고 광야의 그 무서운 폭풍이 휘몰아치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피난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 날마다 힘써 오르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린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리하겠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들어가지 못했는가? 좀 넣어주시면 안 되었는가? 모세 5경이 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언약을 성취시키시는 장면으로 모세 5경을 종결시키면 안 되시는 것인가? 출애굽기에서 부르심을 받아 무려 4권에 걸쳐서 하나님 앞에 쓰임 받았던 그 모세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여호수아처럼 죽게 하시면 안 되시는 일인가? 하나님께서 모세 5경을 이렇게 미완성으로 마무리 지으신 데는 또한 깊은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바로 신약시대의 바로 우리가 모세가 서 있는 이 경계선과 같은 곳에 서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느보 산에 올라가 약속의 땅을 바라본다. 우리 성도님들도 바라본다.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 마태복음에서는 하늘나라라고 표현하고 이사야서와 베드로후서와 요한계시록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 이라고 표현을 한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 그 시점은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늘 예수님과 함께 하고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와 계시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다가 승천하셔서 예수님의 인성은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에 계신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인성을 입으시고 이 땅을 와 계신다고 했을 때, 예수님의 신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 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만 사실 예수님께서 떠나셔서 재림의 날까지 우리 성도가 그것을 기다리는 것은 예수님의 인성을 바라보지 못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그만큼 축소된 상태라고 볼 수가 있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장차 온전한 하나님의 임재와 교회와 온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그 약속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신약 성도들도 오늘 신명기 34장과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처럼 하나님의 그 약속의 땅을 기다리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모세가 죽는다. 신약의 사도들도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다 죽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재림하는 그날까지 죽음에 관문을 통과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장차 재림하실 그날에 상한 권세를 완전히 멸망시키실 것이다. 그러나 그날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우리도 모세처럼 죽는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광야와 약속의 땅 경계에서 있었는데, 바로 신약시대의 성도들 역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 나라, 그 경계에 서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 5경의 마지막 장면은 교회를 위하여 주시기 위하여 그렇게 마지막 장면이 디자인되었음을 우리가 볼 수가 있겠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약속의 땅을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기다리고 또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것을 바라봄으로써 법적으로 소유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느보 산에 올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영광스런 땅을 바라보라고 하신다. 신약 시대의 느보 산은 교회이다. 광야와 세상에서 발생하는 고난과 시험 앞에 상처입고 때로는 피투성이가 되는 우리의 마음과 몸을 이끄시고 여러 기도제목을 품고 느보 산인 교회에 올라가 하나님의 손에 그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기도로써 다 올려드리기를 부탁을 드린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힘을 다하여 듣고 그 말씀을 생명처럼 붙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기를 부탁드린다. 이를 통해 장차 일어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이 경계선에서 그 주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그 시력을 온전히 유지하여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사명을 넉넉히 감당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 ♣요약 신명기의 마지막 장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깨우쳐서 우리의 정체성을 깨달아야 한다. 모세와 같이 이 땅에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영적인 시력이 흐려지지 말고 끝까지 주의 약속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더욱 사랑하고 힘써 느보 산에 올라가서 약속의 땅을 모세가 바라본 것처럼, 우리도 힘써 교회에 나아와 예비하신 구원의 완성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그 땅을 소유하는 은혜를 받아 세상 유혹을 물리치며 이 땅의 생명을 다할 때까지 믿음을 지키며 주님을 대면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