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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1년 11월 3일)
제목: “들으면 살아나리라”
말씀: 마가복음 5:25-43
찬양인도: 이원준 부목사님

설교자: 주성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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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25-43,
25 열두 해를 혈루 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 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 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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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님 오늘 여러분들께서는 어떤 소리를 듣고 왔는가? 세상에는 눈으로 보는 것으로 가득 차 있지만 듣는 것들로도 온갖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살아있다 라고 한다면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번 듣고 금방 잊어버리는 소리도 있다. 기계음, 자동차 소음, 그리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들었던 구두 발소리 등을 이런 것들을 간직하면서 살아가진 않는다. 또 내가 정말 원해서 듣고자 하는 것들을 찾아서 듣는 것들도 있다. 숲 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귓가에 스치는 바람소리,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 또 가슴까지 쓸어내리는 이런 파도소리 같은 것들은 우리가 의도를 가지고 듣기 위해서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는 소리들이다. 또 이런 소리도 있다. 듣고 싶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러나 들어야 할 때도 있다. 엄마의 잔소리, 상사의 꾸중, 누군가의 진심어린 충고는 우리가 들어야만 한다. 이런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들으려 하지 않아도 이 고통으로 인한 끙끙 앓은 소리를 쉬지 않고 들어야만 한다면 어떤 심정이겠는가? 그리고 갑작스럽게 죽음의 공포가 엄습(掩襲)해 오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하는 이 두려움의 소리가 마치 시계 초침처럼 계속 들여온다고 한다면 어떤 심정이겠는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지금 이 자리에 이런 소리를 듣고 있는 분들도 이 자리에 있을 것이다.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다 보면 고통의 소리, 또 죽음 앞에서 공포의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믿음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체성인 거룩한 정체성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죄 많은 세상에 살아가다보면 내가 들으려 하지 않아도 듣게 되고 또 들을 수밖에 없는 고통과 죽음의 소리가 들려온다. 지금이라도 당장이라도 죽음의 소리가 멈춰버렸으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도 한다. 또 때로는 작정하면서 금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소리는 멈춰버릴 기세는 보이지 않고 점점 커질 뿐이고 멈추질 않는다. 여러분 만약에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살아가면서 들을 수밖에 없는 이 고통의 소리, 죽음의 공포 앞에서 듣는 이 두려움의 소리 앞에 여러분은 어떤 결정을 하겠는가? 실제로 많은 주의 백성들이 살아가면서 세상에서 찢기고, 상처받고, 또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두려워 떨며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가? 정답은 있다. 말씀 안에 있다. 정답이 있다는 알지만 들을 수 없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또 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듣고 싶지 않아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이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고통으로 절규하고 죽음 앞에서 두려움으로 떨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지금도 생명의 소리, 구원의 기쁨의 소리를 들려주시는 줄 믿는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생명의 말씀, 이 구원의 기쁨의 소식을 고통과 사망에서 이겨낼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린다.
 
오늘 본문은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야기가 굉장히 유명한 이야기이다. 설교로도 많이 들었을 것이다. 오늘 간단하게 설교하겠다.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장면이 나온다. 하나는 멈추고 싶지만 멈출 수 없는 이 고통의 소리를 들으면 오로지 온 몸으로 아픔을 견뎌야만 했던 열 두 해 동안 혈루 증을 앓아온 여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사랑스런 딸을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상황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한 아버지도 등장한다. 여인을 살아있다. 그녀의 삶은 죽은 삶과 다름이 없었다. 아버지는 딸의 죽음을 직감하며 그야말로 사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거라사 지방 반대편으로 가시고 그 바닷가에 도착하셨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 주변에 둘려 싸여 있었다. 그때 회당 장중에 하나인 야이로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발 앞에 와서 간곡히 청한다. 야이로는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다는 소문을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여러분 예수님이 공생애를 살펴보면 예수님의 주변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온갖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도 예수님께 몰려와서 그의 옷에 손만 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몰려들었다.
 
 
*마가복음 3:10,
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왔지만 예수님께 손만 대어도 나을 줄로 믿고 예수님 앞에 수많은 각색 병자들이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야이로도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예수님을 청하여서 자신의 집에 가서 딸아이의 가슴에 손을 얹고 낫게 해 주기를 간청했다. 어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집에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죽을병에서 살려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야이로에게 진짜 참된 바른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면 어떤 고백을 했을 것인가? 예수님께서 만유의 창조주시요, 구원자이심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믿었다라고 한다면 집으로 가서 딸아이에게 손을 얹고 죽을병을 고쳐달라고 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 야이로에게 주님을 아는 진정한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겠는가? “주님, 지금 말씀하시면 여기서 말씀하셔도 집에 있는 딸이 당장 고침 받을 줄로 믿습니다. 말씀만 해주세요.” 이렇게 청했어도 그의 딸은 나았을 것이다. 그런데 야이로는 그러지 않았다. 예수님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 있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제한 된 지식으로만 예수님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해하고 있는 정도의 소문으로만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의외로 야이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지금 내 말을 믿기만 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의 딸에게 명하노니 죽을병에서 살아날지어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는가? 야이로의 간청을 듣고 그와 함께 그의 집을 향하여 발걸음을 내 디디신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치유하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은 야이로의 간청대로 그의 집에 가서 그에게 손을 얹고 고쳐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가신 것이다. 왜 이래야만 했는가? 야이로 입장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고쳐주는 것이 그에게는 안심이 되지 않겠는가? 만약에 야이로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딸이 죽게 되는 이 절박하고 급박한 상황을 주님이 모르실리 없었을 텐데 왜 이러하시는가? 여기에는 주님의 의도적인 지체하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주님의 의도적인 지체하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야이로의 딸이 죽음에 이를 때까지 지체하신다. 그래서 또다른 구원의 역사를 펼쳐주시기 위한 주님의 뜻이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위해 출발한다. 함께 있던 수많은 무리들도 궁금했는지 예수님을 둘러싸면서 큰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면서 나서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에 12년 동안 혈루 증을 앓던 많은 의사에게 치료비를 허비하였지만 나아지기는커녕 더 위중한 상태로 악화되었던 한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온몸은 통증이 위중해가던 여인이 조심스럽게 그 무리들을 따라가면서 예수님께 가까이 간다. 이 무리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면서 예수님께 가까이 가서 뒤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살며시 만진다. 그녀에게도 예수님의 소문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떤 소문인가? 그의 옷자락만 만져도 자신의 병이 나을 줄 그가 생각했다고 오늘 말씀이 기록하고 있다. 나을 줄로 믿는 그 믿음이 그 조그만 한 믿음이 열 두해를 혈루 증을 앓는 그 여인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그 순간 자신의 혈루의 근원이 마르고 병이 나았다는 것을 직감한다. 또 그 순간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능력이 빠져나갔다는 것을 아시게 된다. 그리고 무리를 향하여 말씀하신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한다. “무리가 너무 많은데 누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고 말씀하십니까?” 이렇게 되묻는다. 여러분, 예수님이 몰라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냐고 물으셨을 것 같은가? 아니다. 예수님의 의도하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 여인이 누구인지도 아셨을 것이다. 몇 년 동안 고통을 당한지도 아셨을 것이다. 그녀가 어떤 병을 앓고 있었다는 것도 알고 계셨을 것이다. 당당하게 자신 앞에 나와서 내 병을 고쳐주십시오 라고 머리를 내밀지 못했던 것도 그 모습을 알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물으시는 것이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라고 몰라서 물었던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 열 두해 혈루 증을 앓고 있던 그녀가 이 주님의 대한 부족한 지식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녀에게 또 다른 구원의 역사를 펼쳐주시기 위한 주님의 뜻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여러분, 그녀가 예수님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었던 지식에 대해서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녀를 오랫동안 얽어매었던, 그리고 오랫동안 삶의 중심이 되었던 율법의 영향아래 있었던 것이다. 12년을 혈루 증으로 고통당하는 이 여인은 모든 것을 다 잃었다. 가족조차 그녀를 버렸고 유대 사회에서는 철저하게 배척을 당했다. 정말 불쌍하기 짝이 없는 인생을 무려 12년 동안 홀로 감내하기 위해서 살아야만 했다. 어쩌면 아무런 소망 없이 죽지 못해 살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던 이 여인에게 어떤 소문을 듣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수많은 각색 병자들이 그의 옷에 손만 대어도 병이 낫는다고 들었다. 정말 어두운 긴 터널의 끝에 보이는 한줄기 소망 같은 소식이 그녀에게 들린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가? 예수님 앞으로 갈 수 없었다. 율법에 의하면 이 혈루 증은 그녀는 자신뿐만 아니라 지기의 가족들, 그리고 자기가 손을 대었던 물건이나 사물들도 똑같이 부정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야말로 홀로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었고 그 무리를 비집고 들어가서 예수님에게 갈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용히 예수님의 뒤에 가서 살며시 그의 옷만 만지고 그냥 가려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녀를 찾으신다. 그녀가 어떠한 상황인지 또 그녀에게 어떤 은혜를 펼쳐주실 것인지를 주님은 알고 계셨기 때문에 아셨지만 그녀를 찾으신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주인이시고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율법을 온전케 하시는 것은 주님이심을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의 주변에 있던 수많은 유대인들에게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돌려보낼 수 있었지만 그녀가 자기에서 있었던 일들을 고백하게 만든다. 왜 그런가? 유대인들에게 어쩌면 그들의 법이 될 수 있었지만 어쩌면 그들에게 거짓된 잘못된 의로움을 갖게 만드는 그 율법의 구원론의 있어서의 또 그것이 불완전성이며 예수님께서 모든 생명의 주관자 되시고 참된 구원자이심을 병 나음 받았던 그녀의 입술을 통해 고백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는 이 열두 해를 혈루 증으로 고생하였던 여인의 태도로 믿음 생활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동일하게 말씀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내가 주님에 대해서 지극히 제한적으로 아는 것, 그것 하나 가지고 믿음 생활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잘못된 지식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지 말라 라고 오늘 이 여인을 통해서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신다. 또한 우리 자신의 처지와 상황 때문에 또 우리의 과거 때문에 주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오늘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혹시라도 그동안의 믿음생활이, 신앙의 지표가 되어서 그 경험 때문에 나 스스로가 주님의 역사를 제한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 주님에 대한 지식은 측량할 수 없이 크고 광대한 것이다. 아주 크고 놀랍다. 그렇다고 주님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는 것만 알겠다는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도 자녀라고 한다면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주님에 대해서 더 알고 싶고 더 알기를 원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 아닌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를 알되 힘써 아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줄 믿는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계획도 다른 어떤 세상의 목표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아는 일에 우선순위를 둘 수 있기를 우리는 소망한다. 그러기에도 모자란 시간이 지금도 흘러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자각하면서 주님을 온전히 바르게 알아가는 일을 가장 우선순위에 둘 수 있는 우리 주님의 백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린다. 혈루 증을 앓고 있는 여인의 간증을 듣고 있는 와중에 마음의 한 구석에 타들어가는 한 남자가 있었다. 야이로이다.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것만으로도 이 고침 받은 사실을 목격한 이 야이로는 어쩌면 예수님이 나의 딸도 고쳐주실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을 더욱 더 강하게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 지체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지금 빨리 가야하는데, 그 여인 고쳐주고 축복해주고 보내면 되었을 텐데 왜 그 여인을 도로 그 많은 무리 중에 찾으셨으며 또 그 무리 중에서 나타난 그 여인에게 자신이 있었던 사실을 왜 듣게 만드시는가? 죽어가는 딸을 갖고 있는 아버지 입장에서는 절박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여인에 대한 원망도 좀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만 하시면 좋겠고 그 정도면 되었으니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이제 주님 모시고 우리 집으로 가겠다.’ 이런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에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듣고 싶지 않은 절망의 소식이 야이로에게 들린다.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온다. 당신의 딸이 죽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선생님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소식을 전한다. 왜 야이로의 집에 가게 하는 것이 선생님을 괴롭게 하는 것인가? 어쩌면 그 바닷가에서 야이로의 집과는 굉장히 먼 거리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선생님을 모셔다가 자기 집으로 야이로의 집으로 모시고 가는 것이 예수님께서는 괴로운 일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설마 죽었던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을까? 그 죽어있는 딸 앞에 예수님을 모시고 갔는데 병 고침이 아니라 죽었던 자를 살리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혹시 그런 능력이 없어서 당황하면 어쩌실까? 그러면 예수님을 괴롭게 하면 어쩔까? 이런 생각, 이렇게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을 가지고 야이로 집사람들은 절망의 소식을 들어가면서 전해가면서 선생님을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말라고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늘 말씀 본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성경말씀 원문에는 예수님께서는 딸의 말을 전하는 야이로의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신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기 들어도 그 야이로의 사람들의 죽음의 소식을 무시하셨다는 것이다. 이 파라고 하는 이 번역의 단어는 불순종, 거부하다, 라는 의미이다. NIV성경에도 무시하다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딸이 죽었다라고 하는 야이로의 집 사람들을 대놓고 무시하셨다는 것이다.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자신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절망 가운데 있는 가운데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고 그와 함께 다시 발걸음으로 야이로의 집으로 향한다. 많은 무리가 야이로의 집에 모여서 떠들고 곡소리를 낸다. 애도하는 소리로 왁자기껄하다. 초상집의 전형적인 모습이 그대로 전해졌다. 죽음에 드리운 그림자가 야이로의 온 집안 가운데 가득하다. 여러분 그 때 야이로가 믿음이 약해졌다고 한다면 어쩌면 이렇게 이야기 할 수도 있겠다. “선생님 제 딸아이가 죽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먼길 오시는 수고를 마시고 그냥 저와 저의 가족들을 위해서 위로의 기도를 해주십시오.”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야이로는 그러지 않았다. 야이로는 믿음이 생겼다. 예수님이 병 고침을 하실 수 있는 능력 있는 소문을 들어서 자신의 딸의 죽을병을 고쳐 주십사 부탁하고자 찾아왔지만 이제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신의 딸까지도 다시 도로 살릴 수 있는 전능하신 창조주 구원자이심을 그가 믿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야이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에 곡하는 소리를 듣고 떠들지 말, 조용히 해, 이 아이는 죽은 게 아니야, 잔다라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예수님의 그 말에 비웃는다. 믿음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사람을 철저하게 분리하신다.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또 야이로의 딸 엄마 야이로 이 다섯 사람만 데리고 들어가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고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쿰”하고 말한다. 번역하면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마치 잠자고 있던 아이가 잠자고 일어나는 것처럼 깨어난다. 놀라운 기적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 야이로의 딸을 원래부터 창조하시고 만드셨던 하나님께서 죽은 줄로 알았던 소녀에게 달리다쿰 하고 말씀하시니 죽었던 그 소녀가 일어난 줄 믿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놀랐다. 도대체 이게 어떤 일인가? 여기 말씀에도 놀라고 놀라더라 라고 말하고 있다.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 그 야이로의 집에 나타났다. 여러분, 죽었다가 살아난 야이로의 딸만이 아니라 야이로와 또 그 사실을 현장에서 멀리서나마 목격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그야말로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지 않았겠는가?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고, 과학적으로도 말할 수 없는 이 놀라운 일이 그 가정 가운데 있었다. 그런데 여러분, 두 눈으로 보고 믿는 것과 보기 전에 듣고 믿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존귀한 믿음인가?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한다. 보고 믿는 거보다, 듣고 믿는 것이 더 귀한 믿음이다.
 
*로마서 10:17,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서 선물 받은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생기는 주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믿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더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듣기를 소원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것을 구한다. 하나님은 많은 것을 베풀어 주셨다.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구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바른 믿음을 가지고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응답하실 줄 믿는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날마다 생명의 소리, 구원의 기쁨의 소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복음을 들어야 될줄로 믿는다. 성경은 어떤 책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신 책이다. 그 말씀에는 하나님 말씀을 듣는 자가 나타나고 듣지 않는 자가 나타난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항상 말씀하신다. 말씀을 멈춰보신 일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 할 때 빼고는 하나님은 항상 말씀하셨고 지금도 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줄로 믿는다. 여러분, 세상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그럴싸하다. 그 말을 듣고 살지 않으면 뒤처지고 손해 보는 것 같다. 바보처럼 사는 것 같다. 말씀대로 지켜 살아가면 세상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조롱할 것만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참된 믿음이 생길 뿐아니라 그 믿음을 바라고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베풀어 주신 줄 믿어야 한다. 우리의 그 제한된 이해, 우리의 부족한 지식을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해서는 안 될 줄로 믿는다. 주님의 무한한 역사를 자신의 범위 안에 가두어 드리면 안 된다. 구하는 믿음에서 듣는 믿음의 소리를 듣기를 소망한다.
 
♣요약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부족한 지식으로 주님의 역사를 제한하지 말고 주님을 힘써 알고 더 잘 알아서 모든 일에 주님의 통치하심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야 한다. 세상이 들려주는 유혹에 귀를 닫고 말씀의 귀를 열어서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고 영원하신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날마다 체험하여야 한다. 그래서 들으면 생명이 살아나 어디서든 주님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 여인의 믿음은 주님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 자 이심을 믿는 믿음이었고, 많은 무리를 뚫고 주님께 나아온 적극적인 믿음이었으며, 옷자락이라도 붙드는 간절한 믿음이었다. 또한 주님의 능력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었고, 모든 것을 고백하는 담대한 믿음이었다.
 
‘달리다굼’의 의미 이 말은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는 뜻이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이적 중에서 죽은 자를 살리신 최초의 기적이다. 성도들은 믿음을 통하여 핍박과 환란 중에 도우시는 주님을 경험함으로써 위로를 받고, 부활의 소망으로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나가야 한다. 예수님께서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은, 육체의 죽음 후에는 부활이 있고,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리는 신적 권능의 소유자이시며, 예수님 안에 있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부활을 암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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