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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1년 10월 27일)
제목: 무엇이 그들을 참 제자로 만들었는가?
말씀: 요한복음 21:1-14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최성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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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1-14),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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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그들을 참 제자로 만들었는가? 라는 제목으로 요한복음 21장을 설교를 하려고 한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하는 실수 중에 하나는 사실 실수 없이 성경을 보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서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등장하면 우리는 그들을 무조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배트맨이 아니면 악당이고 수퍼맨이 아니면 악당으로 이해하는 것과 비슷하다.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저 역시도 선입견의 피해자이자 수혜자이기 때문이다. 어떤 분들은 저를 보시면 백옥같이 흰 피부와 귀공자처럼 생긴 외모와 왕족의 일원으로 보이는 모습에 엄청 훌륭한 사람이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어떤 분들은 저를 보시면 멕시칸 사람, 말레이시아, 인도, 미국 원주민 인디언, 심지어 부자 태국인으로 선입견을 갖고 보는 사람들도 있으며 선교를 갈 때마다 현지에서 현지인으로 횃갈려 하는 사람도 있으니, 선입견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겠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613개의 조항들을 율법들을 하나 같이 다 지켰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해서 또 율법들 지키는 것을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착각을 해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오버해서 그랬지, 그들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경건했고 우리의 선입견처럼 나쁜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이 더 많다. 주일 성수 하나만으로도 늘 갈등하는 우리의 모습을 볼 때, 613개의 모든 조항들을 지켜냈던 바리새인들을 생각하면 그들이 무조건 나쁘다고 선입견을 갖는 것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얼마나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다. 또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제자들이 등장하면 제자들은 무조건 좋은 사람으로만 생각한다. 제자들은 언제나 예수님 편이고 제자들은 언제나 바른 길을 가고 있고, 제자들은 늘 좋은 사람들이라고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본다. 제자들 중에 배신자가 있었고, 예수님께 늘 혼났던 것은 제자들이었고 오히려 예수님의 칭찬을 들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 창녀들, 환자들, 귀신들린 사람들, 젊은 관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제지들만 등장하면 이들이 다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성경의 결말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또 제자로 선택된 사람이니까 당연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긍정의 선입견을 갖는지 모르겠다. 아주 쉽게 이런 질문을 드려보겠다.
 
지금부터 500년 전, 1000년 전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왕들의 시대에 살고 있다라고 생각을 해보자. 오늘부터 이상한 소문이 들려온다. 서초동에 있는 사랑의 서당에서 훈장을 하고 있는 한 까만 훈장이 왕에 대해서 이상한 소리를 한다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더니 심지어는 사람들을 모으고 자기가 스스로 하늘의 왕이라고 이야기 하며 반역을 준비한다고 하는 소문이 왕에게까지 전달된다. 왕의 주변의 있는 신하들이 이야기 한다. “이것은 절대로 두고 볼 수 없는 일입니다. 목양 4팀 그 훈장은 지금 반역을 꽤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왕이라고 하면서 왕권을 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저는 바로 반역죄로 잡혀간다. 잡혀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능지처참을 당할 것이다. 저만이 아니고 제 가족은 물론이고 온 집안이 몰사를 당할 것이다. 그것만이겠는가? 여기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여러분들도 저와 같이 몰살이다. 또 어쩌다 저를 만난 목양 4팀 식구들은 괴수의 무리가 되어서 전부다 한강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우리가 아무런 의심도 않고 바라보는 장면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장면이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반역죄로 돌아가시는데, 그 제자들은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을까? 또 예수님과 같이 죽은 제자가 단 한 명도 없을 수 있었는가? 그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면 예수님만 죽게 할 수 없다고 함께 십자가에 달린 사람도 있었어야 할 텐데 왜 아무도 없는 것인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에 열 두 제자는 어디가고 아리마데 사람 요셉이 등장하는 것인가? 죽을지라도 배신하지 않겠다라고 큰소리를 쳤던 베드로는 어디로 갔는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 입장에서는 이번 기회에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무리들을 싹 쓸어버릴 수 있는 기회인데, 어떻게 예수님의 패거리는 단 한 명도 같이 죽지 않고 예수님만 죽을 수 있었는가? 다 같이 요한복음 18:15절을 보자.
 
*요한복음 18:15,
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요한복음 21장으로 마치니까 18장은 지금 한창 고난을 받기 시작하는 장면이다. 체포를 당하시되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신문을 받았다. 모두가 도망가서 예수님 곁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할 때, 베드로와 또 다른 한 사람은 멀찍이에서, 성경은 멀찍이에서 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예수님과 베드로는 눈이 마주쳤다 라는 것이 기록된 것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멀지 않은 거리일 수 있다. 어째든 멀찍이에서 예수님께서 일어나는 모든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보고 있다. 다 보고 다 듣고 그 현장에 있었던 것이다. 대제사장과 아는 제자가 있어서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람들이 세 번씩이나 베드로가 제자라고 알아보아도 베드로는 잡혀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보호가 있었겠지만 이에 더해 제자들 중에 일부가 대제사장의 일부가 한패였기 때문에 우리 식으로 말하면 양다리를 걸쳤기 때문에 이들은 무사히 그 고비를 넘길 수 있던 것이다. 단지 잘 숨어서, 단지 잘 도망가서 하나님이 지켜주셔서 만이 아니라 우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선입견을 갖고 있던 그 제자들은 그들 스스로 살길을 준비해 두었다. 그러하기에 지금보다 더 무서운 시대에 반역죄를 지은 예수님과 한 패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죽지 않고 그 시기를 지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살짝 큰일인 것은 제자들을 너무 나쁜 사람들로 설명해서 나중에 천국에 가서 베드로 할아버지께 혼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제자들이 죽음 이야기를 해보겠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다 도망가고 배신자의 길을 택했고, 자기 살길을 찾아갔던 그 나쁜 제자들은 어떤 모습으로 생을 마감했는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사실 성경에는 제자들의 죽음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왜 하나님께서 제자들의 죽음을 기록하지 않았는지 그것도 한 번은 생각해 볼만한 그런 주제이지만 어떻든 제자들의 죽음은 성경이 아닌 역사적인 기록 그리고 이스라엘의 전해 내려오는 전승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몇 사람만 말씀드리자만 이러하다.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는 박해를 받을 때에 돌에 맞아 죽었다. 안드레는 십자가 모양이 아니라 엑스자 모양의 십자가에서 순교한다. 마태는 에티오피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목이 잘려 죽게 된다. 마가는 몸이 찢겨져서 순교한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죽게 되는데,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거꾸로 매달려서 순교한다. 도마는 인도에서 창에 찔려서, 누가는 감람나무에 목이매여서 죽음을 당한다. 밤모 섬에서 죽은 요한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복음을 전하다가 내가 언제 죽는지도 모른 체 순교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이 죽음 앞에서 도망가기에 바빴고 자기들이 살길만을 찾아갔던 제자들이 어떻게 해서 이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는가? 복음서가 끝날 때까지만 해도 철딱서니 없고 배신자들이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들이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고 목숨을 바치게 된 것인가?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무엇이 이들을 참 제자로 만들었던 것인가? 이 답으로 오늘 본문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요한복음 21장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면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시는 장면이, 하늘로 가시기전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면이고, 지난 3년간의 시간이 모두 정리되는 장면이고, 앞으로의 향방이 결정 나는 그런 장면이다. 그래서인지 21장에는 참 많은 감정과 많은 이야기들이 많은 마음의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 21장을 다 설명하려면 오늘 이 시간이 다가도 할 수 없어서 설교 주제에 맞추어서 우리가 읽은 본문의 세 가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21장에 들어가는

1. 첫 번째 마음은 제자들이 절망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가장 힘들 때는 자신에게 실망했을 때이다. 학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경우는 누군가에게 분노하거나 실망했을 때가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는 자신에게 실망했을 때라고 한다. ‘나는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 라고 생각이 들 때이다. 내가 무가치하다고 생각이 들 때, 자신에게 실망했을 때 자살을 택하게 된다. 제자들은 3년간 예수님을 따랐다. ‘나를 따르라’ 라는 그 한 마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 한 때는 이 분과 함께라면 이 세상을 뒤집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속에 있기도 했다. 한때는 병든 자가 나음을 입고, 귀신이 나가고,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수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보면서 새로운 나라가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예수님을 따라갔던 변화 산에서는 엘리야와 모세를 보기도 했고 이 분과 함께라면 여기서 죽어도 좋다라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을 늘 힘들게 했던 것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힘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힘이 달랐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꿈꿔왔던 나라와 예수님이 꿈꿔왔던 나가 달랐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뭔가 될 듯 될듯한데 딴소리를 하는 것 같고 이 고비만 넘기면, 여기서 한 발만 나아가면 될 것 같은데, 다시 멈추시고 도대체 스승님의 뜻인 예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상황이 계속해서 생겨난다. 확 따르자니 모든 것을 잃을까 두려웠고, 배신하자니 지금까지 따랐던 것이 아깝고, 또 배신하기에는 너무나 괜찮은 스승이다. 그러던 중에 스승이 먼저 십자가에서 죽었다. 도대체 ‘나는 지난 3년간 무엇을 한 것일까?’ 라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절망이 제자들을 찾아온다. 물론 주님의 잘못도 있다. 제자들의 마음은 몰라준 체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계속하시는 자신이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만 이야기 하시는 예수님의 잘못도 있지, 더 근본적으로는 제자들이 문제였다. 이것을 주님을 따른 것도 아니고, 배신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켜낸 것도 아니고, 이용한 것도 아닌 도대체 나라는 인간은 지난 3년간 무엇을 한 것일까라는 그 질문이 제자들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늘 말뿐이고 결국은 내 살길을 찾아가는 그것도 머저리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 선택 가운데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갈릴리로 돌아갔고 다시 고기 잡는 일을 하고 있으며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 때처럼 텅 비어있는 그물을 거두고 있고 심지어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나타나셔도 알아보지 못한다. 절망과 갈등과 실망과 무가치함에 빠져있는 모습이 오늘 본문에 드러난다. 둘째로는 오늘 본문에서

 
2. 두 번째의 마음은 미안함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직접적으로 사과하는 말은 사과하는 장면은 나타나지 않는다.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 모토인 저 같으면 일단 무릎부터 꿇고 잘못했다고 이야기 하고 살려달라고 이야기 하고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고 했을 텐데, 자신의 잘못이 얼마나 큰지를 알았는지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서 별 말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본문을 천천히 묵상해보면 그 미안한 마음은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찾아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보지 못했다. 제자들 스스로도 예수님이 우리가 배신자를 다시 찾아오시지를 않겠지를 생각하셨는지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지 못했는지, 그물을 던져도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며 그곳에 있다. 그때 저 멀리에서 이야기하는 어떤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물을 던지라는 말에 따라 그 아저씨의 말을 따라 그물을 던졌고, 물고기가 그물에 가득하게 된다. 그때가 돼서야 눈치가 빠른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본다.
 
*요한복음 21:7,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반사적으로 베드로는 물에 뛰어든다. 제 생각으로는 배가 더 빨랐을 것 같은데 왜 물에 뛰어든 것인지 모르겠다. 보고 싶은 마음에 뛰어들 수 있고, 숨고 싶은 마음에 뛰어들 수 있고, 미안한 마음에 물로 들어갈 수 있다. 심지어 물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는데 검은 옷을 입고 바다에 들어간다. 엉망진창 좌퉁우돌, 앞뒤가 맞지 않는 이 상황들이 베드로의 마음을 더 잘 드러내 준다. 물속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향해 가면서 헤엄을 치는 베드로는 어떤 생각을 했는가? 처음에는 서둘러서 헤엄을 치다가 예수님께 천천히 가기를 바라지는 않았을까? 빨리 가고 싶은 마음보다는 차라리 물속으로 들어가면 좋겠다는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같지는 않았을까? 바닷물과 섞여서 알아볼 수 없었겠지만 눈물과 바닷물이 얼굴에 범벅이었을 것이다. 또 고기가 가득한 배를 끌고 갔던 나머지 제자들은 예수님 앞으로 가면서 어떠한 마음으로 갔을까? 육지로 나온 제자들은, 예수님 앞으로 간 제자들은 이미 준비되어 있는 숯불과 떡과 고기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차마 예수님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미안하다라는 말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진짜 미안한 마음을 드러내는 장면이 이 본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몇 마디 앞에서 언제부터 예수님의 말을 잘 들었다고 알아서 착착 말을 잘 듣는다. 잘못한 것이 있는 사람이 알아서 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제자들의 미안함이 허둥지둥하는 모습과 침묵으로 이 본문 속에 숨겨져 있다. 마지막으로 이 본문의 백미(白眉)인 용서의 마음이다.

 
3. 세 번째의 마음은 용서의 마음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약속에 따라 갈릴리로 가셨다. 제자들이 보고 싶기도 했고 지난 며칠 간 일어난 엄청난 사건들 앞에서 벌벌 떨고 있을 제자들이 걱정되기도 했고, 배신할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한 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이 배신자들을 혼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갈릴리에 가니 예수님을 기다리는 모습이 아니라, 제자들은 3년 전 모습처럼 고기를 잡고 있다. 고기를 잡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안쓰럽고 짠한지 모른다. 게다가 그물은 텅 비어있다. 예수님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의 오른편에 던지라는 말씀을 하자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제자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물을 던진다. 그래도 한 놈쯤은 이래도 나를 알아볼 텐데, 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기우였다. 더 멀리 배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고, 누군가가 물에 뛰어 들고, 뭔지 모를 작은 소동들이 벌어진다. 그리고 잠시 후 그토록 보고 싶던 제자들이, 그토록 얄미운 제자들이 눈앞에 나타난다. 일반적이라면 어떤 말이 오고 가겠는가? 만약에 여러분들이 예수님이라면 어떤 말을 했겠는가? 오늘 아침, 어제 저녁에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야단쳤던 여러분의 자녀들을 생각해보면 된다. ‘니들이 사람이냐, 니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니? 그래도 한 놈은 나를 따라올 수 있었지 않냐?’고 막 쏟아 부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지난 며칠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정말로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사실 이 부분이 더 고수이시다. 아무 말도 안하면 더 불안하다. 잡은 고기를 가져오라 하니 가져온다. 안절부절 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미소가 지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깨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다들 자식을 키우시니 잘 아시게지만 여러분이 다 자라면서 그런 일을 다 겪으면서 자랐겠지만. 잘못한 자식에게 아침이나 먹자라고 밥을 차려주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야 꼴 보기 싫은 놈아, 왜 그랬느냐?’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 새끼인데 ‘내가 어찌하는가? 내가 이번 한 번은 용서해 줄 테니 와서 밥 먹어라.’고 하는 것은 수십 수만의 의미가 담겨 있는 용서의 표현일 것이다. 예수님 앞에서 밥을 먹으면서 모닥불을 보면서 물고기를 보면서 또 떡을 보면서 제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밥은 잘 먹었을까? 지난 3년이 지나갔을 것이고 지난 며칠이 지나갔을 것이다. 늘 양다리를 걸치고 살았던 자신의 모습이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품어주시고 용서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눈물과 고기와 떡이 섞여있는 식사를 했을 것이다. 이제 다시 설교의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요한복음 21장을 보면서 제자들을 변화시킨 것이 무엇이이라고 생각하는가?

-무엇이 이들을 참 제자로 만든 것인가?
어떤 사람은 사랑이라 답할 것이다. 맞다. 또 어떤 사람은 용서라고 말한다. 맞다 용서 때문에 또 어던 사람은 은혜라고 말한다. 그 은혜로 변화되었다. 그래서 저는 사랑, 은혜, 용서 이 모든 것을 합쳐서 하나님의 찾아가심이라는 답을 말씀드리고 싶다. 제자들이 변화된 것은 ‘하나님이 찾아가심’이다. 절망 가운데에 찾아가신 예수님 때문에 제자들은 변화되었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제자들을 찾아가신 예수님 때문에 제자들을 용서하기 위해서 찾아가신 그 예수님 때문에 제자들이 변화되었다. 사랑하기 위해 용서하기 위해 은혜를 베풀기 위해 끝까지 찾아가신 하나님이 제자들을 변화시킨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져 가기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우리를 찾아오신다. 하나님이 언제부터 찾아오시는가 하면 창조 때부터 제자들인 우리를 찾아오셨다. 어떻게 찾아 오셨냐면, 말씀을 통해, 율법을 통해, 기적을 통해, 선지자들을 통해 찾아오셨다. 그래도 안 되니 또 어떻게 찾아 오셨냐면, 직접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찾아오셨다. 그래도 바보 같이 또 어떻게 찾아 오셨냐면, 죽음으로 우리를 찾아오셨다. 죽음 앞에서도 우리는 못 알아보니 또 어떻게 찾아 오셨냐면, 우리가 같은 바보 같은 인생들을 위해서 다시 살아나셔서 또 찾아오셨다. 그래도 힘들어하시니, 어떻게 찾아 오시냐면,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셨다. 그러니 제자들이 배신자들이 갈팡질팡하는 좌충우돌하던 우리가 힘겨워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찾아가시고 또 찾아가시는 그 은혜를 입어서 자격 없는 자들이 변화되는 것이 이 성경이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이 세상의 모든 신들은 우리보고 자신을 감동시키라고 한다. 우리가 뭔가를 해서 우리의 자격을 증명하라고 한다. 돈이던 굿이든, 재물이든 돈이든 수천 번 절을 하든 뭐든지 해서 나를 감동시키면 내가 아주 조금 자비를 베풀어서 그것도 내가 기분이 좋으면 너희가 원하는 뭔가를 해결해 주겠다고 이야기 한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잘해야 보상을 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약속하시고 그 약속이 뭔지도 몰라 배신하고 멍청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또 찾아오시고 배신당해도 또 찾아오시고, 심지어 죽기까지 찾아오시고 더 심지어는 다시 살아나셔서 찾아오시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 그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고 이 성경이 말하는 약속이고, 배신자였던 제자들이 참 제자들로 변화하게 된 이유이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힘든 순간이 참 많다. 무엇보다도 나는 언제쯤 성숙해질까로 질문이 다가올 때, 나는 언제쯤 참 제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다가올 때, 나는 언제쯤 목사님 같은 목사가 될까하는 질문이 될 때, 마음이 진짜 어렵다. 제법 교회에 익숙해져서 예배도 하고 다락방도 하고 헌금 생활도 하고 훈련도 받고 순장도 하고 직분도 받고 뭔가 외적으로는 변화되는 것 같은데, 나만 알고 있는 나의 모습은 늘 죄 가운데 있음을 알고 있기에 제자가 아니라 원수처럼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를 볼 때마다 마음이 참 어렵다. 제자들은 주님이 아니면 로마였지만 우리들은 그들보다 더한다. 교회, 세상, 자식, 음란함, 은행, 부동산, 성경욕심, 죄 온갖 마음이 갈기갈기 나누어져 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회복되어져야 할 문제인지도 모를 만큼 엉망진창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격이 있는 것 같지만 시커먼 속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어렵다. 나를 볼 때마다 갈릴리의 제자들의 절망이 보인다. 예수님을 떠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예수님 앞에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모습, 그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자 도망가 버리고 마는 제자들과 다르지 않는 모습, 예수님이 찾아오셔도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이 딱 우리의 모습이다. 다락방을 하다보면 도대체 언제 사람이 될 것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겨우 다락방 한 번 참여하는 것 가지고 그것도 맨날 지각하고 간식한 번 준비하지 않으면서 마치가 자기가 큰 선심을 베푸는 것처럼 인정받은 사람처럼 순원 들을 볼 때 마다 주먹이 우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언제 제자로 살아갈 것인가의 질문이 생긴다. 새벽마다 기도하고 다 베풀었는데 달라질 기미가 없는 모습을 볼 때 마다 절망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우리를 그리고 자녀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변화되는 힘이 나에게 있어야 한다면 또 절망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결단과 열심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찾아오심이 우리를 변화시키시기에, 하나님의 찾아오심이 성숙하게 하는 우리의 은혜이기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내가 나의 한계를 직접 뛰어 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한계를 뛰어 넘도록 도우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짓고 숨어버렸던 아담과 하와를 찾아가셔서 가죽 옷을 입혀주셨던 그 하나님, 아버지를 속이고 형제를 속이고 괴롭게 살아갔던 욕심쟁이 야곱을 일부러 찾아가셔서 네가 이겼다라고 은혜를 베푸셨던 그 하나님, 간음으로 죄에 갇혀있는 다윗을 찾아가셨던 그 하나님, 로뎀 나무 아래에서 더 이상 못해먹겠다던 엘리야를 찾아가셨던 그 하나님, 배신자들을 찾아가셔서 아침을 먹이셨던 그 하나님,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뒤로 한 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가셨던 그 하나님이 그리고 우리를 이 자리로 인도하시고 우리를 찾아오셨던 그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의 순원과 우리의 자녀들을 우리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 가시기에 우리는 기다릴 수 있고 버틸 수 있고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가울 겨울이 다가온다. 열매가 없어서 마음이 참 그렇다. 참 열심히 살아왔는데 믿었는데, 늘 제자리에 있는 우리를 본다. 하지만 절망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낙심 말고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그리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시는 예배로 말씀으로 특새로 대각성으로 또 우리가 예상치 못한 사람으로 장소로 찾아오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여야 한다. 같이 아파하시고 같이 울어주시고 마침내 아침을 차려주시는 그 찾아오심의 은혜가 우리를 살게 하시는 은혜가 되기를 예수님의 은혜로 기도한다. 우리를 참 제자로 만들어 주시는 것은 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찾아오심이다.
 
♣요약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말씀을 통해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찾아오심임을 깨닫고 그래서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고 은혜로 살아가게 됨을 감사하며 하나님이 찾아오심으로 내가 세워져 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 더욱 믿음으로 성숙해져서 절망과 미안함이 용서가 되었음을 감사해야 한다.

-한편 예수님은 옛 직업으로 되돌아간 제자들의 삶의 현장에도 함께하셨다. 이와 같이 죄 많은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육신을 입고 오신 임마누엘의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고난과 실패의 삶 속에 함께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대화를 통해 제자들에게 자신이 부활하신 주님임을 알게 하셨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실패 가운데 있을지라도 기도함으로 함께하시는 주님을 보는 눈을 뜨게 될 것이다. 또한 주님은 말씀을 주심으로 많은 고기를 잡게 하셨다. 지금도 주님은 말씀을 통해 성도의 삶이 풍성케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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