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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3년4월 19일)
제목: "의의 상속자가 됩시다"
말씀: 히브리서 11:7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양은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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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7,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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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사모하고 부흥보고 수요저녁기도회에 오신 모든 분들을 환영하고 축복한다. 오늘 본문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읽고 나누겠다. 히브리서 11:7절 말씀을 세 가지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않은 일에 경고하심을 받았다.
-두 번째, 믿음으로 노아는 경외함으로 방주를 만들어 방주를 준비해서 그 집을 구원하였다.
-세 번째, 믿음으로 노아는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으로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설교를 끝냈으면 좋겠다. ㅋㅋㅎㅎ믿음의 결과의 의미가 각각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함께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I. 의의 상속자는 보이지 않는 일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입니다.

-7절에 보면,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았다. 라고 말씀한다.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았다.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한 말씀,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았다. 그 메시지는 바로 창세기 6장 13절에 나온다.

*창세기 6:13,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하나님께서 죄가 관영(貫盈)한 이 세상과 사람들을 땅과 함께 멸(滅)하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17절에 가면 어떻게 멸할지 그 방법을 말씀한다.

*창세기 6:17,
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그러면서 노아에게 한 가지 더 말씀하신다. “너는 방주를 만들라.” 왜 이것이 보이지 않는 일이라고 했는가? 왜 이것이 보이지 않는 일인가? 그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번도 본적도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미래에 있는 일이다. 장래에 있는 일이다. 불확실한 것이다. 여러분, 노아 시대에 물로 온 세상이 심판되어지는 것을 본적이 없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일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종말에 불로써 이 세상을 심판하시리라고 말씀하신다. 여러분, 이 세상이 불로 심판하는 것을 믿는가? 불로써 이 세상이 사라지는 것을 믿는가? 모르겠다. 이것이 보이지 않은 일이다. 미래의 일이다. 볼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이렇게 말한다. 노아는 믿음으로 아직 보이지 않은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들였다. 라며 accept!. 노아시대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었다. 노아시대에 보이지 않는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잠시 생각해보자. 노아시대 보이지 않는 것은 첫 번째는 사람들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의 딸들을 보았는데 그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의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자기의 아내를 삼았다. 라고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다. 번성이 시작했고, 아름다운 것들이 보였고, 그것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취하는 세상이다. 그것이 바로 노아가 살았던 세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자신의 존재와 신분을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래서 사람의 딸들이 아름다움을 보며, 자기가 원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그 결과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 사이에 ‘네피림’이라는 존재가 태어난다. 그들을 고대의 용사였고, 명성 있고 유명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제가 짧은 시간에 이 네피림의 이종교배 이런 거 설명을 안 하겠다. 나중에 기회 되면 하겠다. 문제가 뭐냐면 이 보이는 세상 자체가 상당히 확장되는 느낌이 든다. 사람들이 늘어나는데 그 늘어나는 것과 함께 용사가 되고, 유명하고, 대단하고 뭔가 사람들이 보기에 멋있는 존재들이 거기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단한 발전을 이룬 것 같이 보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네피림을 갈망했는지 모르겠다.

여러분, 실력 있고 힘 있고 유명하고 명성 있고 그리고 키도 크고, 여러분들이 갈망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다시 이야기 하자면, 실력 있고 힘 있고 명성 있고 유명하고 그리고 키도 크고, 아마 여기 결혼하지 않은 자매들은 그런 남성이 있으면 내가 차지하고 싶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갈망하면서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7장 27절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가복음 17:27,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예수님이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시대는 외형적으로 확장되기도 했고, 거기에 영웅 같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갈망하면서 자기들의 좋은 여자들을 아내로 삼고, 그리고 거기에 네피림이 멋있는 존재들이 등장하고 아마 이것이 반복되었던 것 같다. 여러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이거 왠지 여러분들이 다 이룬 것이 아닌가를 생각하지 않는가? 여러분 밥 먹었는가? 여러분 장가 안 가고, 시집 안 갔는가? 어쩌면 우리는 지금 이 노아시대에 추구했던 것들을 이미 웬만한 것들은 다 이루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잘 먹고, 잘 살고, 장가 잘 가고, 시집 잘 가고 이것은 제가 매일 받는 여러분들의 기도 제목이다. 우리가 품는 기도 제목과 너무나 비슷하다. 겉으로 보면 마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진 것 같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 하라. 그것을 다스리고 그것을 정복하라.”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노아시대에 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것처럼 그렇게 보여 진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는 것이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것, 아직 보이지 않는 그 일을 생각하고 드러내고 있다. 창세기 3장 6절에 보면,

*창세기 3:6,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여러분, 사람이 자기 눈에 보기에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이 죄(罪)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의 그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의 마음대로 취하는 것이 죄(罪)의 관영(貫盈)이다. 그들은 굉장히 네피림과 같은 사람들이 나오면서 대단한 사회를 구성하는 것 같고 굉장히 확장되고 외형적으로 풍성한 사회 같지만,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그리고 더 좋은 것들을 취하며 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바로 죄가 관영했다는 것이다. “내가 이 포악한 땅이 가득했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이다. 노아시대나 오늘, 우리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비슷하지 않은가? 마치 보이는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 마음대로 맞는 대로 취하는 것, 이것이 죄의 패턴이다.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마음의 계획이 항상 강퍅하고 죄가 가득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보이지 않는 분을 보았다. 노아는 보이지 않는 분의 경고를 들었다. 노아는 보이지 않는 분의 그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현재 일이 아니라 먼 훗날에 언젠가 있을지도 모르는 그날의 이야기, 그 경고를 노아는 믿고 그 일에 깨어있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오늘 살기도 팍팍하지 않는가? 우리는 좋은 것들이 눈에 많이 보이지만 그 좋은 것들을 취하는 방법은 너무 멀지 않은가? 여러분들은 앞으로 장래에 먼 훗날에 여러분들이 살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무엇을 좋다고 보고 무엇을 준비하고 싶은가? 괜찮은 집이 한두 채 있고 그 다음에 그 다음에 내가 일하지 않아도 재산적인 자본이 좀 돌고 그런 것을 다 준비한 자들을 보면서 나는 언제 저것을 준비할 수 있을까? 하면서 마치 이 세상에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네피림들을 부러워했던 그들과 같이 우리는 그 삶을 동경하고 있지 않은가? 라는 것이다. 노아는 당시 사람들이 자기 눈에 아름다운 것들을 보는 것처럼 그 아름다운 것들을 보지 않았다. 노아는 당시 사람들처럼 자기가 원하는 대로 결정하며 취하지 않았다. 노아는 당시 사람들처럼 자기가 쌓고자 하는 대로 그렇게 다 쌓고 살지 않았다. 노아는 보이지 않는 것, 하나님이 아직 보여주시지 않은 그것을 심판의 메시지를 받고 그 말씀에 깨어있었다. 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II. 의의 상속자는 순종으로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사람입니다.
-11장 7절에 이렇게 말씀한다.

*히브리서 11:7,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노아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그 일에 경고를 받고 그리고 방주를 만들게 되었는데 그 일의 마음의 태도가 뭐냐면 경외함이다. 여러분 경외함이란 무엇인가? 무서워한다는 것이다. 그 말씀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외함이란 것을 단순히 개념으로만 생각하면 참 어려운데 우리는 노아를 통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러분, 노아가 방주가 만들었던 시간이 짧았는가? 아님 길었는가? 모른다. 정확하게 노아가 방주를 만든 시간을 말하고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은 120년간 만들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100년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실재로 노아 방주의 크기를 이렇게 설계도가 나오기 때문에 그 설계도로 만든다면 이게 하루아침에 될 일이 절대 아니다. 이 방주는 아주 우습게 생겼다. 방주는 배가 아니다. 배라고 이해하면 안 된다. 배가 아니고 방주는 관장이다. 축구장만한 관장이다. 그래서 높이는 15미터, 길이는 120미처, 폭은 50-60미터이다. 굉장히 넓은 3층으로 이루어진 관장이다. 좀 더 쉽게 이야기 하면, 어린이 영어 성경을 보니까, 이 방주를 캔이라고 적혀있다. 따 먹는 캔인 듯하다. 캔은 위에서 구멍 한 곳 떼면 없는 것이다. 방주도 하나님께서 뚜껑 하나 딱 닫아버리면 아무것도 없는 키도, 돛도, 닻도 없는 것이다. 그 안에 들어간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아무도 없고 그 방주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만 의지해야 되는 것이 방주이다. 주님께서는 상자, 방주,, 상자를 좋아하신다. 모세도 갈대 상자에다 담아서 놓은 것이다. 모세는 자기가 어디로 가야지? 의지해서 그렇게 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 가운데 구원받은 것이다.

여러분,
이 노아가 이 방주를 만들 때, 이 관짱 같은 엄청나게 큰, 노아가 하루아침에 만든 것이 아니겠지만 얼마나 고생했을까를 여러분은 생각해 보았는가? 여러분이 제 손을 잡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목사님은 고생을 하나도 안 한 손이에요. 손이 너무 부드러우신가요?” 한다. 그 다음부터는 제가 조심한다. 나는 고생도 안 하고 일도 안 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잠깐 하게 된다. 여러분, 노아와 악수했을 때 노아의 손이 어떠했겠는가? 저는 이 방주의 크기를 짓는데 드는 그 코페아 나무를 베어오고, 옮겨오고, 가지치기를 하고, 그 다음에 배열하고 엮고, 그다음에 만들어 가는 과정 가운데 중간에 역청을 바르고 또 바르고, 또 발라서 그게 한 번 발라가지고 그 배가 물에 뜨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분 손톱에는 노아의 손톱을 생각하면 안 봐도 알겠다. 시커먼 아스팔트가 가득 끼어있고 손은 아마 웬만한 천하장사보다 더 두껍고 키는 어떠했겠는가? 키는 씨름 선수처럼 되어 있고 얼굴과 몸과 이 모든 것에 수많은 상처 투성이였을 거라고 상상해 보았다. 저는 노아 할아버지가 수염 하얗게 해가지고 선지자처럼 회“개하십시오 회개하십시오.” 이렇게 하는 목사님 같은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노아의 모습은 아주 오랜 막노동으로 고생한 누가 봐도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그런 노아의 모습에 대해서 뭐라고 표현 하냐면 ‘경외함’이었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아마 사람들은 그랬을 것이다. “노아, 당신 왜 그렇게 살아?” 했을 것이다. “비는 와? 언제까지 그렇게 할 거야? 당신 몰골이나 봐, 당신이나 챙겨!”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철저하게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이신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의 전 시간과 몸과 마음을 거기에 쏟았다. 그게 경외함이다. 창세기 6장 22절과 7장 5절에 보면 동일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6:22,
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세기 7:5,
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는 것을 다 준행하였다고 이야기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그 대가를 여러분 단순한 시간으로 계산해서 계산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데 여러분은 준행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얼마만의 시간을 드리면 준행된다고 생각하는가? 제자훈련 받는 분들, 1년의 시간을 바쳤는가? 하나님이 사역하신 분들, 여러분 시간을 2년의 시간을 바치셨는가? 전폭하는 하는 분들 이제 2년 반 바치라고 이야기 하는가? 그러면 이제 2년, 2년 반, 4년, 아니면 끝나는가? 아니면 순장 되어서 한 5년 6년 하고 권사 되면 끝나는 것인가? 여러분, 경외라는 것은 어떠한 시간을 정해놓고 것이 아니다. 경외는 어떠한 장소에 가서 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 예배시간에 와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 시간에 와서 찬양하면서 집중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 일상 가운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신 그 일, 하나님께서 아직까지 완성되지 않는 그 일에 대해서 우리에게 당부하시고 말씀하시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그것을 지속적인 과정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지속적인 과정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영원한 과정일수도 있다. 어느 한 순간 하나님 앞에 눈물 뚝뚝 흘리며 회개하는 것도 하나님을 경외함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자신의 일정한 시간들을 하나님께 헌신하고 드리고 자신을 훈련하는 것도 하나님을 경외함이겠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을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서 이루어 드리는 전 삶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게 쉽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쉽지가 않다.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경외함이 필요하다. 여러분 경외함이란 것은 어쩌면 우리의 믿음을 지키는 능력이다. 우리가 경외함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의 믿음을 끝까지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저와 여러분에게 채워주시길 축복한다.

III. 의의 상속자는 은혜를 받고 은혜를 보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1:7,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 여러분, ‘의의 상속자’는 이게 무슨 말인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지는 상속을 받는 사람.’, 이것이 이신칭의이다. 이신칭의 –‘내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진 삶의 결과’를 얻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대부분 ‘이신칭의’를 어디서 배우는가? 처음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의롭게 되었다라고 배운다. 맞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이 구원의 사건을 알고, 그분을 우리의 주로 고백하고 영접하면 그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그러나 의의 상속자라는 것은 이 믿음을 가지고, 경외함을 일생을 살아냈을 때, 그것이 바로 의의 상속자라고 표현할 수 있다. 저는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공부했던 것이 뭐냐면 왜 하나님은 노아를 선택하셨을까? 이다. 왜 하나님을 그를 선택하셨을까? 왜 하필이면 노아에게 말씀해 주셨을까? 왜 노아일까? 창세기 6장 8절에 이렇게 말씀한다.

*창세기 6:8,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세기 6:9,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왜 하필이면 은혜를 입었을까? 6장 9절에 보면 노아의 사람됨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성경에 영어 성경에 이렇게 되어 있다.
But Noa, found grace in the eyes of the Lord. -제 발음이 너무 좋지 않은가? 영국식 발음이다. ‘노아는 주님의 눈 안에 있는 은혜를 발견했다.’ 는 것이다. 우리 성경은 수동태로 되어 있다. 은혜를 입었다고 표현되어 있다. 영어 성경은 오히려 은혜를 능동태로 은혜를 봤다. 로 표현하고 있다. 노아는 주의 눈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노아가 하나님이 눈을 보았다는 것이다. 눈을 보는 사이는 어떤 사이인가? 친한 사이이다. 여러분, 눈 보고 이야기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눈을 보고 이야기 하는 것은 내 속에 있는 진실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오늘 제 아들이 안 왔을 것이라 여기고 이번 주에 아들과 좀 언짢은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제 아들과 함께 대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아들이 벌써 나와 가지고 의자에 탁 앉아서 머리를 푹 숙인다. 나는 이 아들에게 잔소리를 하게 될 것이고 이 아이는 유튜브 음 소거를 하고 듣고 있다고 들어가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들, 아버지 눈 좀 볼래?’하려고 했다. 그 자리에서는 제가 아들을 책망하거나 타이르거나 또 아들에게 교훈하거나 가르치고 했던 자리가 분명하다. 왜? 여러분은 그렇게 안하시나요? 그런데 제 본심은 이 아이가 나의 책망과 나의 티칭과 나의 교훈과 나의 잔소리로 상처받거나 아파하니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저는 정말 이 아이가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자꾸 고개를 떨구는 것이다. 제가 느꼈다. 아들이 지금 나와 친하고 싶지 않구나, ‘내 눈 안에 있는 그 아들을 향한 이 마음을 이아이가 볼려고 하지 않구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아들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네가 정말 좋다.“ 라고 했더니 이때까지 가만히 있던 아들이 닭똥같은 눈문을 흘리면서 ”아빠 저 아빠가 생각하는 만큼 저 괜찮은 아들이 아니에요!“ 라고 말을 하는데 ”아니야 너 괜찮아!“ 라고 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팩트인지는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눈을 보고 이야기 하는 것은 중요하다. 노아는 하나님의 눈 안에 있는 하나님의 그 은혜를 본 것이다. 세상을 멸하겠다는 그 순간에도 세상은 어떻게 보존되어야 되고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이 지켜져야 되는지 그 자비, 그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 눈 안에 있는 것을 노아가 발견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는 일에 자신의 몸과 시간을 헌신했다고 생각한다.

베드로후서 2:5,
5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 여러분 노아가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는 그 세상에서도 그는 의를 전파했다고 말한다. 의를 전파했다. 하나님의 눈 안에 있는 그 의를 전파했다. 여러분들은 회개하가. 삶을 돌이키라. 여러분들의 삶을 발견하라. 방주 안에 들어와야 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실 거라고 말씀하셨다 여러분 들어와야 한다. 아마도 노아는 배를 만들며 이 의를 하나님의 이 구원을 선포하는 삶을 살았다고 믿고 싶다. 그것은 노아를 통해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신정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말세에 산다. 라고 말한다. 지금은 말세라고 생각하는가? 정말 말세인가? 믿는가? 정말 말세인가? 여러분 하나님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차며 하나님은 반드시 이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심판의 그 경고를 알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눈 안에 있는 은혜를 먼저 발견하고 먼저 경험한 사람들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녹록치 않을 수 있다. 여러분들의 자녀가 애를 먹일 수가 있다. 여러분의 장래의 재산이 풍전등화 같을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 내가 아등바등 하지 않으면 보장되지 않을 것 같은 우리의 삶이 찾아올 수 있다. 여러분 그것은 노아 시대 때 시집가고 장가가고 네피림의 시대 때 그들의 삶과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러한 시대에 구원의 주, 구원의 방주, 구원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하라고 하신다. 그리스도의 안에 있어라.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도록 초대해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 약속의 말씀을 잊지 말라. 너희 자녀와 가족들을 향해서도 잊지 말라. 그리고 우리가 먼저 그분 안에 있는 은혜를 발견하고 그분을 경외함으로 우리의 일생을 주님께 드려서 주님이 주시는 그 구원의 날에 이 방주 안에서 발견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노아가 참 크다고 느껴졌다. 나는 언제 노아처럼 산 적이 있는가? 나는 언제 노아 같은 인생을 살 것인가? 주님은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이 시대 노아 같기를 바라시고 계신지 모른다. 이 믿음과 구원과 이 의를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고 외치는 것을 부끄럽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노아 닮았네” 라고 듣는 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요약
우리는 늘 보이는 것에 쫓아 사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눈 안에 있는 은혜를 바라보기를 소원해야 한다. 멸망으로 달려가는 이웃과 가족과 주위의 사람들에게 우리 주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그 은혜를 누리는 자 되어 이 시대의 노아로 부름 받고, 노아의 믿음을 가지고 부끄럽지 않는 의의 상속자로 삶을 살아야 한다.
-아벨은 정결한 마음으로 믿음의 예물을 드림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칭찬을 받았다. 이렇게 참된 예배는 먼저 몸과 마음이 헌신되어야 한다. 또한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는 은혜를 입었는데 그의 영적 성장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가족을 구원하고 불신앙을 정죄하였으며, 의인이란 칭호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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