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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1년 6월 9일)
제목: ''나의 백성아, 보아라 들어라''
말씀: 이사야 6:1~8
설교자: 박유관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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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6:1~8,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이 본문 이사야 6장은 위대한 왕의 부고(訃告)로 시작한다. 웃시야 왕은 남유다를 52년간이나 통치했다. 웃시야 왕이 통치할 때, 남 유다는 다윗과 솔모몬 이후에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다. 역대하 26장에 기록에 의하면 웃시야 왕은 도시마다 성벽을 건축하였고, 지방 국토를 요새화 했고, 또한 이 왕은 농사를 굉장히 좋아했기에 농업이 발달했다. 비록 작은 나라였지만 앗수르 제국의 팽창 정책에 맞장을 뜰만큼 강한 나라였다. 주변국 모두가 앗수르에 조공을 바칠 때에 웃시야 왕이 통치하는 남 유다만이 유일하게 조공을 바치지 않을 만큼 부국강병을 이루었던 그런 왕이었다. 경제, 국방, 문화, 모든 면에서 아주 탁월한 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이 문제였을까? 그는 결국 자만심에 빠진다. 제단의 분향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려고 했다. 왕이 막 제단에 불을 붙이는 순간 제사장 아사랴를 비롯한 용맹한 80명의 제사장들이 왕의 앞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웃시야는 모든 만류를 무시하고 제단에 손을 댔다. 그때 그의 이마에 갑자기 나병(癩病)이 생겼다. 그리고 왕위를 아들인 요람에게 물려주고 별궁에 머무르다 생을 마감한다. 다윗 왕과 솔로몬왕의 버금가는 권력을 가졌던 왕이 죽었다는 소식은 백성들에게 충격과 혼란 그 자체였다.
 
*역대하 26장 22절에 보면,
22 웃시야의 남은 시종 행적은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하였더라.
-이사야의 직업은 왕실 서기관이었다. 왕실 서기관이 하는 일은 왕의 치적과 업적과 말씀을 낱낱이 기록하는 것이다. 이사야는 왕의 치적(治績)을 기록하면서 그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대한 왕인지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대단하고 위대하다고 생각했던 왕이 죽은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의 마음처럼, 이사야의 마음에도 큰 좌절과 실망이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성전에서 예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높이 들린 하나님의 보좌를 이사야에게 보여주신다. 그 순간 이사야는 세상 왕의 보좌보다 더 높은 보좌에 앉아계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이 세상의 보좌가 텅 비어있어서 좌절했던 이사야는 있다가 하나님의 보좌를 보며 이 세상을 진정으로 통치하시고 다스리시고 심판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모든 영광의 주인이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다윗과 솔로몬의 필적할만한 대단한 왕 곁에 있는 사람은 자기의 세계관으로 살지 않고, 바로 그 위대한 산 사람의 세계관으로 살 가능성이 높다. 이사야도 마찬가지였다. 웃시야라는 대단한 왕의 치세와 위엄에 눌려 그는 웃시야 적 세계관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보고 그리고 인간왕의 더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의 그분의 영광을 볼 때, 이사야의 웃시야 적 세계관이 완전히 깨져버렸다. 하나님은 그러한 그의 세계관을 깨뜨리면서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셨다. 그 세계를 보여주시는 순간 스랍들이 서로 창화하며 최고의 수준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듣는다. 이 스랍들은 두 개 날개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고, 두 개의 날개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 날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찬양한다. 이 사람들의 찬송을 듣기 전까지 이사야는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스랍들의 찬양을 들으며 성전을 넘어 온 땅에, 온 세상에 가득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까지 보게 된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과 그 임재는 어느 한 장소나 한 인물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지금도 교회를 넘고, 이 나라를 넘고, 이 지구를 넘어, 온 우주에 가득하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은 미지의 세계에서 거시의 세계로 거시의 세계에서 초월의 세계까지 뻗어나간다. 이런 엄청난 하나님의 영광을 이사야가 본 것이다. 이사야 66장 전체에서 이보다하는 단어는 48번이나 사용된 만큼, 이사야 전체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주제이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깨닫는가이다. 오래 전 신문에 실린 기사가 생각이 났다. 도둑들이 어느 집 별장을 털었다. 귀금속을 다 훔치고 나서 허름해 보이는 가방에 골프채가 들어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도 돈이 되겠다 싶어서 들고 나왔다. 그리고 그 골프채를 125만원 받고 팔았다. 어떤가? 괜찮게 팔았는지 판단해 보라. 그런데 그 골프채는 타이거우즈가 매이저 대회에서 연속으로 우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든 기념 골프채였다. 당장에 내다 팔아도 수억 원을 호가(呼價)하는 것이었다. 여러분, 이 기사의 제목이 뭔지 아는가? “안목(眼目) 없는 도둑”이다. 그 골프채 하나가 그들이 훔친 보석 전부보다 골프채의 값이 더 나가는 것이었는데 몰라본 것이다. 이사야서에 무엇을 보고 무엇을 깨닫는가의 이 질문은, 과연 볼 수 있는 영적 안목을 갖추고 있느냐하는 질문과 같은 맥락(脈絡)이다. 명품과 진품이 있어도 그 가치를 알 수 있는 안목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성경을 보는 안목이 없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겠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가 잘 아는 CS 루이스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두 가지 독서법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첫 번째 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책을 이용하는 독서,
두 번째 는 저자의 목적을 받아들이는 독서이다. 라고 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이 두 번째 방법을 택해야 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말씀의 인격성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씀의 인격성이 요구하는 것은 저자의 목적을 받아들이기 위해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성경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말과 말하는 사람은 따로 뗄 수 없다. 그래서 말은 말하는 사람 자신이다. 따라서 말의 본질은 인격성에 있다. 아무리 화려한 말을 하고 설득력 있는 말을 하다라도 사기꾼이 말하면 아무도 듣지 않는다. 그러나 좀 말을 더듬고 어눌하게 해도 진실하게 하는 사람이 말한다면 사람들은 그 말을 귀담아 듣는다. 바로 이게 말의 인격성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관한 논문이나 보고서나 교과서가 아니다. 성경은 인격적으로 전달된 계시(啓示)이다. 성경이 말은 인격 대 인격으로 하는 말이다.
 
※유진 피터스는 ‘이 책을 먹으라.’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경에 명사는 어원분석의 대상으로,
동사는 문법 분석의 대상으로,
형용사는 감탄의 대상으로,
부사는 토론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해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한다.
 
※어느 편집인의 말처럼 성경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다. 성경을 책일 뿐 아니라 말이자, 인격이기에 연구대상에 그치지 않고,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대상이며, 쳐다보는 대상으로만 그쳐서는 안 되고, 주목하여 바라보고 더 나아가 꿰뚫어보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안소니 불룸이라는 ‘살아있는 기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겨우 몇 분 내어 드리면서, 그 시간에 그분이 임재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우리의 문을 노크하는 하나님께 죄송하지만 바쁩니다. 나머지 23시간 30분은 어떤가? 심지어 전혀 반응이 없을 때도 있다. 우리의 마음과 양심과 삶의 문을 두드리시는 하나님의 노크소리를 아예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부재 대해 불평할 권리가 없다. 그분보다 우리가 더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루 23시간 30분, 우리 영혼의 문을 쿵쿵 두드리고 계신다. 을지로와 세종로와 강남을 걷고 있는 그 시간, 직장에서 갑 질을 당하고 있는 그 시간, 암 말기라고 선고받은 그 시간, 나의 모든 시간에 하나님은 내 영혼의 문을 쿵쿵 두드리고 계신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께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것인가? 여러분은 지난 한달, 하나님께서 그 두드리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는가? 다시 한 번 유진 피터스의 말을 들어보자.

 
※유진 피터스
“이 책을 너의 내자 안으로 집어넣어라. 이 책에 나오는 말이 너의 혈관을 타고 움직이게 하라. 이 말을 씹고 삼켜서 근육과 연골과 뼈가 되게 하라.”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이 우리의 몸에 들어가고 사람의 인생으로 들어가길 원하신다. 이상하지 않는가? 처음에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씀이 영혼으로 말씀이 들어가야 하는데 유진 피터스는 왜 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는가?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결혼하시고 평생을 새벽 두시에 일어나셨다. 왜냐하면 용산시장과 가락동 시장에서 장사를 하셨기 때문이다. 가락동 시장이 있기 전에 용산의 그 시장이 있었다. 어릴 적, 제가 외갓집에 가면 외할머니와 외삼촌들이 이른 아침부터 일하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그런데 장사를 그만두시고도 늘 새벽 두시에 일어나셨다. 왜 그러셨을까? 몸이 기억하는 것이다. ‘근육이 기억하는 딱 그만큼이 내 신앙이다.’라는 말이 있다. 무슨 뜻인가? 몸의 기억은 반념의 기억보다 앞서고 또 오래 간다. 그래서 몸의 훈련이 없는 훈련은 항상 부족한 채로 남을 수 있다. 그리고 훈련 자체를 허위로도 만들 수 있다. 여러분, 결심을 믿지 말라.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여러분의 눈물도 믿지 말라. 하루에도 수시로 변하는 내 감정을 신뢰할 수 없다. 대신 여러분의 몸을 믿어라. 결론은 내 몸이 말을 안 들어도 내 몸을 믿어라. 몸은 정직하다. 우리 몸은 많이 먹으면 살찐다. 힘들면 힘들다고 하고 아프면 아프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몸은 정직하다. 그리고 특별한 지시가 없으면 늘 기억하는 대로 움직인다.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이 몸이 기억하도록 훈련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생각만큼 몸의 훈련을 하지 않는다. 몸의 훈련이 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성경에 몰두하지 못한다. 왜 그런가? 이 질문에 답을 알기 위해서 생각해 보았다.

 
▷다섯 가지 없음(5無)에 대해서 정리를 해 보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지 않을까를 생각했다.
첫째, 무관심(無關心) -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이다. 영적인 일 자체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더 나은 영적인 삶에 대해 호소한 일만큼 곤혹스러운 일이 없다. 영적 무관심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오직 현재만 있고 눈에 보이는 것만 있다.

둘째, 무지(無知) – 관심 없으면 보고 있지만 볼 수 없고, 듣고 있지만 들을 수 없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이러한 태도가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낳는다. 지나온 시간에 대한 감사도 없고, 다가올 시간에 대한 소망도 없고, 현재를 보는 눈마저 어둡게 만든다.

셋째, 무책임(無責任) – 영적인 일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가 무책임한 태도를 낳는다. 이 무책임한 태도는 자기 선택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대신에 다른 사람과 상황에 그 책임을 돌린다. 이 시대에 이기적 개인주의는 책임을 지지 않는 인간형을 낳았다. 자신의 영혼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해서도 그는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

넷째, 무감각(無感覺) - 영적인 책임이 영적인 무감각을 낳는다. 영적 무감각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으면서 주의 길을 간다고 말한다. 영적으로 무감각하기 때문이다.

다섯 째, 무분별(無分別) - 무감감이 무분별을 낳는다. 맹목적인 신앙과 과도한 열심히 말씀이 그러한가 하는 진지한 영성을 잃어버렸다. 확증편향성으로 판단을 중지하고, 특정 이론에 빠져 분별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이런 분들과 대화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사람들은 정보의 바다에서 유영할 뿐, 진리의 항구에 이르지 못한다. 정보는 있지만 그 가치를 분별할 수 있는 말씀의 지혜가 없는 것이다. 무관심, 무지, 무책임, 무감각, 무분별, 말씀에 대한 이러한 태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고 꿰뚫어보고 체험하지 못하게 하는 우리 안에 있는 커다란 장애물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몸이 기억하는 말씀 훈련이 되기 위해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장애물들을 치워야 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 없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의 부재가 일어나지 않기를 하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하나님의 일을 경험한 사람들은 반드시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된다.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 방송국이 하나 있다. 지금은 코로나로 그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늘 방송국 앞에 학생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학생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한 여학생이 물었다. “너 어디서 왔니? 저요? 부산에서 왔는데요?” 옆에 옆에서도 물었다. 대답에 제주도에서 왔다고 했다. 엄마 모르게 왔다고 했다. 그 연예인이 스치듯 지나가도 그들은 마치 예수님을 본 듯이 환해지고 이 세상에 들을 수 없는 그 함성과 그 외침과 그 간절한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나도 이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데,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난다면, 그이상의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여러분은 태어나서 언제 연예인을 처음 보았는가? 그리고 처음 본 연예인은 누구인가? 생각해 보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처음 본 것은 고3때 학원에서 황신혜를 처음 보았다. 그녀가 지나가는 것을 처음 보았는데 소리를 지르니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면서 가던 길을 다시 갔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알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르켜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다. 이런 점에 공통점은 무엇인가? 바로 분명한 자기 인식이다. 하나님을 만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사야는 하나님을 보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사야 6장 5절을 보면,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난 후, 그 자신에게 일어난 자기 반응은 아주 격렬한 자기인식이다. 이 말은 나는 이제 파멸할 것이다. 이제 나는 끝장났다는 말이다. 스랍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케 하는데 자신은 부정한 입술을 가진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는 그런 존재라는 자기인식이 일어났다. 아마도 이사야는 자신을 볼 때, 꽤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던 것 같다. 원래 이사야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화를 선포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사야 5장 8, 11, 18, 20, 21절을 보면,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라고 심판을 전했다. 자신을 제외한 그 백성들이 화를 받을 것이라고 마치 경고하는 것 같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자신이 서보니 자신의 존재가 부패하고 더럽고 큰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선포했던 그 화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화를 당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만나는 참된 경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엄청난 질량과 높이와 깊이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하나님과 나 자신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볼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배할 수밖에 없고, 예배할 수밖에 없고, 전율할 수밖에 없고, 자복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위대한 영광 앞에 내가 형편없고, 존립할 수 없는 초라한 자로 무한 서로 자신을 낮추고, 한없이 부풀려진 옛 자아, 거짓으로 만들어진 옛 자아가 해체되고 무너지는 경험이 절대자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의 자기인식이다. 구약 판 자기부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자기부인, 자기인식을 할 수 있는가? 바로 성경을 통해서 가능하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하나님의 의해 내가 읽혀지는 것이다. 내가 성경을 읽기도 하지만, 성경이 나를 읽기도 한다는 것이다.
 
※성 어거스틴의 ‘고백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두 가지 밖에 없다. 자아를 잊을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잊고 부인할 정도로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성경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 자아의 현주소와 본적이 낱낱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의해 내가 읽혀지는 순간 나의 숨겨진 삶이 폭로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의 죄가 융단폭격(緞爆擊)을 당하게 된다. 그때 우리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도다! 이런 자기 부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사야가 그 경외감에 압도되어 있을 때, 이사야가 그 경외감 앞에서 자기 자신의 본적을 발견했을 때,

본문 6 저~7절에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 네 악이 제하여졌다는 것은 이사야가 거듭난 순간이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는 것은 이사야가 하나님과 화해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까지 이사야가 하는 일은 오직 자기의 부족함에 대한 절망감뿐이었다. 이외에 그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의 죄를 사하시고 그와 화해하시는 데까지 이사야가 한 일은 하나님 앞에 나는 죄인이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라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 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스랍을 통하여 그를 깨끗하게 정화시켜 주셨다.
*시편 51: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은 상처가 있으면 안 된다. 어떤 제물이든 안전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 바칠 수 있다. 조금의 흠이라도 있으면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 그러나 유일하게 상차가 있는 제물을 받으시는데, 그 제물은 상한 심령, 찢겨진 심령, 자신의 죄악을 고발하는 심령, 바로 그러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주신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에 나올 때에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들어갈 때에, 어떤 심령으로 나아가는가? 우리가 예배 가운데 나올 때에, 어떤 심령으로 나오는가? 오늘도 내일도,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모든 이들을 우리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시고 그 영혼들을 새롭게, 새롭게 만들어 주실 줄 믿는다. 이렇게 이사야의 존재가 정화된 후,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정화된 이사야는 즉각 응답을 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을 본 자는 듣게 되고, 들은 자는 반드시 말하게 된다. 이사야도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고, 사도들도 그 사명을 받았다.

 
*사도행전 4:19-20절을 보면,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그리스도인이란, 보고 들은 것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보고 들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듣고 말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사야 50:4-5,
4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여기서 학자라고 하는 단어는 제자라는 단어이며, 여기서 학자라고 번역된 단어는 학자와 제자는 동일한 단어이다. 그 제자들에게 아침마다 말씀으로 깨우치신다. 아침은 창조의 시간이고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며, 이른 아침에 정적 속에서 찬송으로 새벽을 깨우고 성경 읽기와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 귀를 열어두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생활은 다를 수밖에 없다. 듣는 사람만이 제대로 이야기 할 수 있다. 하늘의 음성을 듣고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두려워하겠는가?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이 말씀이 참 따뜻하게 들린다. 그 아침에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주변이 온갖 소음으로 들끓어도, 자기 아기의 울음소리를 가려듣는 엄마처럼, 세상의 소음 속에서도 살면서도, 하늘의 소리를 가려들을 줄 아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시 하나님의 질문에 귀를 기울여 본다. 너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느냐? 매 아침마다 매 순간마다 우리의 들을 귀가 이미 되어서 주님의 음성을 놓치지 않는 자 되길 소원하며 축복한다.
 
♣요약
이 세상에는 볼 것도 들을 것도 많은 세상이며,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는 세상이기도 한데, 성경을 통해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 하나님을 집중하여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주님의 기쁨을 누려야 한다. 그래서 주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무관심, 무지, 무책임, 무감각, 무분별, 말씀에 대한 이러한 태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고 꿰뚫어보고 체험하지 못하게 하는 우리 안에 있는 커다란 장애물이니, 이러한 다섯 가지 없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의 부재가 일어나지 않게 무장되어서 이사야처럼 즉각적으로 응답하여 훈련이 몸이 기억하도록 하는 것처럼, 올바른 태도로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고 말하고 있다. 이사야는 주전 736년이나 혹은 735년경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 이사야가 자신의 소명 시기를 밝힌 것은 그것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한편 스랍이라는 말은 ‘불타는 자들이란 뜻이다. 또한 스랍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영물들이다. 이러한 행동은 이사야의 죄를 사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하나님 편에서 인간의 죄를 덮지 않는다면 죄를 소멸하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 소용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죄를 깨닫고 그 죄로부터 벗어난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은 부르심을 받은 자의 모범적인 대답으로 간주되고 있다. 부르심을 사양했었던 모세나 예레미야와는 달리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신속성과 결단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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