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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예배(주후 2021년 4월 28일)

제목: "빈 그물도 기적입니다"
말씀: 누가복음 5:1-11
설교자: 이한길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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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5:1-11
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고 병든 자들과 약한 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셨다. 예수님의 고향에서는 예수님을 배척하였지만,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에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날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개네 사네 호숫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본문에 나오는 개네 사네는 필요한 명칭은 갈릴리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다. 이름은 구약 시대의 호수가 마치 피파처럼 생겼다고 히브리어로 비파라는 단어 김 네레 라고 했다. 이것이 바벨론 포로 시대의 당시의 음력을 따서 개네 사례라고 불렀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외서 갈릴리라고 부른다. 마태 마가는 이 호수를 갈릴리 바다라고 했고, 요한은 디베랴 바다라고 했으며, 누가는 개네 사례 호수라고 불렀다. 오늘은 혼용해서 부르겠다. 예수님은 호숫가에 두 배 중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면서 배를 해안에서 조금 띄우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지형적으로 배가 조금 떨어져 호수를 등지고 있으면 주님께서 말씀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었기 때문디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를 강단삼아 앉으셔서 무리들을 가르쳤다. 예수님께서 이른 아침 갈릴리 바다에 오셔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시는데 베드로는 일부러 예수님을 피하고 있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데, 베드로는 그물만 찢고 있다. 베드로는 4장을 보면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의 집에 찾아 오셔서 심한 열병을 앓고 있는 베드로의 장모님을 고쳐주셨다. 은혜를 베풀어 주신 예수님이 갈릴리에 오셨으니 가장 앞서 예수님의 자리를 마련하고 또 맨 앞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배를 타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함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빈 그물만 씻고 있다. 왜 그랬을까? 베드로의 지금 형편은 몸도 마음도 지쳐서 피곤하다. 낙심이다. 아무것도 없다. Nothing이다. 베드로의 상태는 빈 그물이다. 베드로는 어젯밤 어부들과 함께 게네 사례 호숫가에서 밤새 수고를 하여 고기를 잡았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리고 이른 아침 씻어야 하는 빈 그물만 가득 채우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어부들은 상업이기에 고기를 많이 잡아야 한다. 베드로는 만선(滿船)으로 돌아와 가족들 친구들과 함께 기쁨을 만끽해야 하는데 빈 그물뿐이다. 강원도에 가보면, 주문진항 거진항 등 항구들이 많이 있다. 그 항구들을 보면 밤새 잡은 고기를 잡은 배들이 부두로 들어와 경매장에 고l를 내놓는 것을 볼 수 있다. 팔짝팔짝 뛰는 고기들을 보노라면 생동감이 있다. 많은 고기들을 내려놓는 어부들도 신이 나고 고기들을 사고파는 사람들도 흥에 겹다. 어부들은 고기를 많이 잡아야 신이 나고 좋다. 그런데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질을 했는데 고기는 잡히지 않고 해초류와 쓰레기만 가득하다. 얼마나 힘이 빠지고 낙심이 되겠는가? 지금 베드로의 상황이 이렇다. 밤새 수고한 베드로의 배는 고기로 채워져야 하는데 고기는 없고 피곤과 한숨과 실망과 짜증만 가득히 싣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허탈한 심정으로 어부들과 빈 그물을 싣고 있다. 밤새 수고하여 노력했는데 빈 그물이다. 아무것도 없다. 그들이 너무 힘들어 보인다. 이런 베드로를 예수님이 주목하여 보고 계셨다. 그날 예수님의 관심은 많은 사람들이 아니고 바로 베드로였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배를 무대로 삼아 무리를 가르치셨다. 그리고 말씀을 마치시자마자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해 허탈하게 빈 그물을 싣고 있던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명령하신다. 여러분이 베드로라면 어떠하겠는가? 예수님은 목수 베드로는 어부이다. 베드로와 그의 친구들은 갈릴리 바다 게네 사례 호수에서 어부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전문가이다. 어떤 시간 어느 지점에 고기가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고기를 어떻게 해야 잘 잡을 수 있는지 노하우와 기술이 있는 대단한 어부였다. 적어도 고기 잡는 일이라면 베드로는 예수님보다 전문 지식과 숙달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베드로 입장에서는 반영하기가 쉽지 않다. 예수님의 명령은 고기 잡는 기본 상식에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물을 내리라고 하시려면 그물을 씻기 전에 내리라고 하시지 빈 그물을 다 씻어놓고 이제 좀 쉬려고 하는데 그물을 다시 내리라고 하신다. 그것도 말도 안 되는 명령을 하신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명령에 썩 내키지 않는 변명을 먼저 하기 시작한다.


5절을 메시지 성경으로 보면,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시몬이 말했다. 주님, 우리가 밤새도록 열심히 고기를 잡았지만 피라미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상황종료이며 게임 끝이라고 베드로는 이 말을 하면서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곰곰이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베드로의 답변이 참 멋있다. 베드로는 순종의 결단을 한다. 하지만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니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다고 한다. 훗날 베드로가 인생을 돌아볼 때 이 고백을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어떻게 이렇게 멋진 고백을 할 수 있었는지를 아마 머리를 쓰다듬었을 것이다. 베드로가 이 고백을 한 후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띄웠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렸더니 고기들이 너무 많이 잡혀 그물이 찢어지게 되었다. 베드로는 동료들에게 도와달라고 손짓한다. 고기를 잡아 두 개의 배에 가득 채웠고 너무 많아 두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었다. 두 배가 도착했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아래 엎드려 “저는 죄인입니다. 제발 나를 떠나주십시오”라고 그렇게 간청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을 주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수님의 그 부르심에 베드로는 그토록 바라던 고기도, 만선이 된 배도, 모든 경험도, 물질도, 가장 귀한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랐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며 사명을 맡기시기 위해 기가 막힌 계획을 하셨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해 어떻게 하시는가? 베드로에게 빈 그물을 주셨다. 갈릴리 바다는 많은 사람들이 생업을 두고 물고기를 잡아 살아가는 수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1986년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기잡이배가 발견되었다. 길이는 8.1미터, 폭 2.3미터, 돛을 포함한 4.1미터에 크기로 어부들이 다섯 명이 승선하고 많은 사람들이 탈 때는 열다섯 명까지 탈 수 있는 그런 배였다. 베드로와 친구들은 이런 배를 타고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는데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고기가 많은 갈릴리 바다, 최고의 배, 최고의 기술, 최고의 사람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피라미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기를 잡는 것이 기적인가? 고기를 잡지 않는 것이 기적인가? 고기 잡히는 것인가? 그렇다. 고기가 잡히지 않는 것이 더 기적이다. 갈릴리 바다에서 평생 어부로 살아온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은 기적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고 세우시기 위하여 자연 만물을 움직이셔서 피라미 한 마리도 잡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먼저 일하셨다. 아마 정신 못 차린 물고기가 베드로의 그물 속에 들어가려고 하면 하나님이 호통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베드로를 부르시고 맡기시기 위하여 빈 그물을 베드로에게 만들어 주셔야 했기 때문이다. 빈 그물을 베드로를 향한 하나님의 기적이었다.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을 기억하고 있는가? 요셉은 라엘이 넣은 야곱이 낳은 열한 번째 아들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그래서인지 형들은 요셉을 미워했고,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던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았다. 요셉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왕자처럼 살았는데 약 17세 정도의 나이, 가장 민감할 때, 노예로 그의 삶이 바뀐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십년 정도의 노예로 살면서 가정총리로까지 오른다. 그런데 미스에스 보디발의 유혹과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된다. 감옥에서 바로왕의 술 맡은 자들과 떡 맡은 자들을 만나게 되고 그 일로 말미암아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게 되어 하루 아침에 애굽의 총리가 된다. 열일곱 살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와 십년의 종살이 3년의 감옥살이였다. 노예생활, 감옥 생활, 요셉에게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아무 소망이 없는 빈 그물 그 자체였다. 그러나 성경은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간 이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자가 되고, 라고 말씀하신다. 노예인데 무슨 형통인가! 감옥 생활인데 무슨 형통인가! 요셉은 지금 빈 그물이다. 아니 더 이상 무엇을 잡을 수 없는 찢어진 빈 그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부르시고 세우셔서 그의 가정과 민족을 살리시기 위하여 일하셨다. 종으로 있을 때는 몰랐다. 감옥에 있을 때도 몰랐다. 그러나 요셉의 빈 그물을 하나님께서 채우시고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그를 불러 내셨다. 요셉의 빈 그물은 요셉을 부르시고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기적이었다.


성도여러분, 때로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빈 그물이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세우시기 위한 기적이다. 아멘,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가득차고 언제나 잘되고 언제나 만사형통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세우심의 역사 뒤편에는 빈 그물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한다고 죽도록 노력하는데 그렇게 안 될 때가 있다. 안 되도 그렇게 안 된다.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노력하는데 기적같이 빈 그물만 남는다. 왜 그럴까? 빈 그물 뒤에 가득하게 채워주실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주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풍성한 은혜가 있다. 그러므로 빈 그물 뒤에 역사하시는 예수님이 어떤 기적을 베풀어 주실 지를 기대하기 바란다. 고기를 많이 잡은 것도 기적이지만, 밤새도록 그물질하여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더 큰 기적임을 믿어야 한다. 나를 향한 빈 그물이 있었기에 찢어질 정도로 가득 찬 그물이 더 큰 은혜로 다가온다.

 

둘째로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시고 세우시기 위하여 어떻게 하셨는가?
고기를 배에 가득 채우는 기적을 주셨다. 그런데 전제가 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 것이다. 베드로는 이른 새벽 피곤한 상실감, 낙심함으로 빈 그물을 싣고 있다. 베드로는 이미 장모님의 열병을 고쳐주신 예수님의 능력을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피하는 듯 하였지만 빈 그물을 씻고 있으면서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나를 들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빈 그물이 오히려 그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게 됐을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마음이 더 열렸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다. 아마 베드로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부로서 경험과 자존심이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자존심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베드로의 생각과 경험에 말도 안 되는 예수님의 명령이지만 “주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고 한다.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니 두 배에 가득차는 기적을 허락하여 주셨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은 실제가 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을 믿음으로 승전할 때, 현실로 드러나게 된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다.

 

6절에 보면,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할 때에 말씀이 현실이 되었다. 하나님이 갈릴리의 고기를 모아서 그 그물 안에 다 모아주셨다. 아마 갈릴리에 고기들이 정신없었을 것이다. 밤새도록 베드로의 그물을 피해 다녔는데 이른 아침에는 베드로의 그물에 모두 다 들어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들의 한계에 갇혀있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의 가진 모든 경험은 무용지물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시면 내 생각과 내 마음과 내 방법에 맞지 않아도 순종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순종에 기적을 준비하신다. 우리의 순종에 이미 기적을 예비하고 계신다. 우리가 순종할 때 주님은 일하고 계신다.

 

열왕기하 4장에 보면 엘리사의 제자 중에 아내와 두 아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 그의 아내가 엘리사에게 찾아와서 안타까운 이야기를 한다. “선생님, 나의 남편이 죽었는데 채주가 와서 빚을 갚지 않으면 두 아들을 종으로 삼겠다”고 말한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은 엘리사 선지자는 마음이 안타까워 여인에게 묻는다. “집에 무엇이 있느냐”고 묻는다. 여인의 한 병의 기름만 있다고 한다. 모든 이웃들에게 가서 빈 그릇을 빌려오라고 한다. 여인은 할 수 있는 대로 빈 그릇을 빌려온다. 엘리사는 여인과 두 아들에게 방에 들어가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고 한다. 여인과 두 아들은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름병에 기름을 붓기 시작한다. 끊임없이 기름이 흘러나왔다. 빈 그릇이 하나 둘 셋 넷 ... 계속해서 빈 그릇이 찼다. 모든 그릇에 기름이 차자 기름이 흘러나오는 것이 그쳤다. 엘리사 제자의 아내의 형편은 빈 그물이다. 종으로 팔려가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 가운데 엘리사의 제안은 말도 안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여인과 아들은 말씀에 순종하여 기름을 붓기 시작한다. 말씀에 순종하여 기름을 부으니 하나님이 가득가득 채워주시는 기적을 허락하여 주셨다.


성도 여러분,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뛰어넘어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리면 된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빈 그릇을 빌려오면 된다. 그 다음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하나님이 채워주신다. 빈 그릇에 기름이 넘치도록 하나님이 부어주실 것이다. 기적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시다. 자신의 한계에 매여 있으면 빈 그물이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기적을 허락하여 주신다. 빈 그릇에 채워질까 의심하면 계속 빈 그릇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빈 그릇을 채워 넘치게 하실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내 생각, 내 지식, 내 경험, 내 자존심,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생명이기 때문이다. 말씀은 우리의 지식으로 다 이해하지 못한다. 성경은 이해하는 책이 아니다. 성경은 믿음의 책이다. 그래서 말씀이라면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다. 그때에 하나님의 기적을 베드로는 현실 속에서 경험하게 되었다. 우리도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말씀을 현실에서 경험하는 은혜가 우리의 삶 속에서 가득 채워지기를 원한다. 예수님을 베드로를 부르시고 세우시기 위하여 빈 그물의 기적을 주셨고, 말씀에 순종하는 채움의 기적을 허락하여 주셨다. 이에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어떻게 되었는가? 옛 모습으로 돌아갔다.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다. 그런데 빈 그물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부르시고 사명을 맡기셨다. 그런데 자기 생각, 자기 욕심,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력으로 옛 모습으로 돌아갈 때가 많다. 예수님을 잊은 채 살아간다. 그래서 깨지고 낮아지고 부서진다. 예수님 없으면 우리의 인생은 빈 그물이다. 그런데 빈 그물을 인생을 우리 주님이 다시 찾아오신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어느 날 갈릴리에 있는 베드로를 찾아오신다.
그날도 베드로와 제자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빈 그물이다. 허탄하게 해안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신다. 이번에는 그물을 씻기 전에 그물을 베드로는 내린다. 그때 어떻게 되었는가?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셔서 따뜻하게 불을 피워주셨고 숯불고기를 해주셨다. 예수님을 다 만난 베드로가 어땠을까? 베드로는 예수님과 식사를 하면서 아마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것 같이 되었을 것이다. 절대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해 놓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저주하기도 했다. 이런 베드로를 앞에 두고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저 같으면, “베드로야, 네가 인간이냐? 너 같은 것을 믿고 3년이나 훈련시켜 놓은 것이 후회스럽다. 이제 끝이다.”라고 아마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따뜻하게 식사를 준비해 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신다.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이 어떤 질문을 하실까를 예상했을 것이다. 베드로가 생각한 전혀 다른 예상 질문을 하신다. 그런 질문을 생각도 못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또 질문하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의 트라우마가 있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계속 질문하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그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 이상 더 귀한 거시 있다. 상처 나고 깨어진 베드로, 빈 그물이었던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뜨거은 사랑고백이시다. 베드로가 빵점이라는 것을 주님은 잘 알고 계신다. 예수님의 면전에서 예수님을 저주(咀呪)하고 부인한 것도 너무 잘 알고 계신다. 그러나 베드로의 연약함, 베드로와 실수와 허물, 베드로의 빈 그물을 모두 덮어버리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었다. 상처투성이로 빈 그물이었던 베드로에게 치유(治癒)와 회복(回復)을 허락하여 주셨다. 그리고 다시 사명(使命)을 맡기셨다. 성도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의 모습이 어찌하다할지라도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신다.

 

요한 일서 4장 19절을 보자.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우리가 주님을 먼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다. 우리가 빵점이고 마이너스 백점이라는 것을 주님이 너무나 잘 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사랑하고 용납하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부르시고 용납하시고 세우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기셨다. 예수님의 사랑이면 회복이다. 예수님의 사랑이면 빈 그물도 감당할 수 있다. 예수님의 사랑이면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 예수님은 사랑이시기에 에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모든 어려움과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르시고 세우시기 위하여 친히 찾아오셔서 기적을 베풀어주셨다. 베드로를 위해 이미 기적을 이루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지 않고 옛 모습으로 돌아간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셔서 따뜻하게 손 내밀어 주셨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베드로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고 사랑으로 품어주셨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시기 위하여 여전히 기적을 이루고 계신다. 우리도 낙심과 상처로 절망의 빈 그물을 싣고 있을 때가 있다.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으로 옛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주님께서 절망과 실패의 빈 그물을 싣고 있는 우리에게도 친히 다시 찾아오셔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시며 우리를 회복시켜 주신다. 그리고 우리를 품으셔서 주의 일들을 맡기신다. 그러므로 낙심과 절망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주님께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말씀으로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면 된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형편이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주신다. 예수님은 기적이 일상이시다. 말씀에 의지하는 믿음의 순종으로 하나님의 기적이 우리의 실제가 되어 지는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요약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사랑으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감을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연약하여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나의 기쁨,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내가 주인이 되어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밤새 수고 하지만 하나님의 참 사랑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빈 그물로 살아간다. 그럼에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다시 부르시고 따스하게 안아주시는 주님을 이제 의지하여 어리석게 살아가지 말고, 창조주 하나님,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순종하여 말씀을 순종하여 말씀이 현실이 되고, 날마다 은혜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들의 한계에 갇혀있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의 가진 모든 경험은 무용지물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시면 내 생각과 내 마음과 내 방법에 맞지 않아도 순종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순종에 기적을 준비하심을 믿고, 우리의 순종에 이미 기적을 예비하고 계시니, 우리가 순종할 때, 주님은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기적을 허락하여 주심을 믿어야 한다. 빈 그릇에 채워질까 의심하면 계속 빈 그릇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빈 그릇을 채워 넘치게 하실 것이다. 언제나 주님의 일에 헌신하는 삶이어야 한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신 내용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밤새도록 수고하였으나 허탕만 치고 피곤에 지친 상태로 그물을 씻고 있을 때였다. 인생은 이처럼 자신 있는 분야에서조차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곤 한다. 주님은 이럴 때 우리를 찾아오셔서 가장 귀하고 값진 일에 우리를 불러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얄팍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를 삶의 심오한 차원으로 초대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삶의 깊은 곳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것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 자체가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반응은 물고기가 배에 가득히 차자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을 만난 죄인은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주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자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았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고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베드로의 반응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성경의 주인공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사건들은 초점을 예수의 구속에 맞추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 어디서나 복음을 전파하셨고, 절망의 인생에게 큰 용기를 주셨으며 믿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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