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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으면 또 훗날



이봐, 얼른 이쪽으로 들어오게.

자네가 그런 데서 어정거리면 놈들이 도망쳐버리거든. 도깨비들 말이야.

여기 산벚나무 뿌리 구멍 안에 숨어 있으면 그들이 오는 게 보인다네.

 아, 그건 총알자국이 아니야. 전쟁도 여긴 비켜갔거든.

가까이서 보니 자넨 좀 멍청하게 생겼구먼. 아니, 그냥 이야기를 좋아하게 생겼단 말이네.

자네처럼 얼굴이 홀쭉하고 귀가 큰 사람은 옛날이야기를 좋아하거든. 맞지? 자, 내게 마침 책 한 권이 있네.

 달도 무겁고 바람도 쓸쓸하니 책 읽기 딱 좋은 때가 아닌가 말이야.

자네 혹시 다자이라고 알고 있나? 다자이 오사무, 그래 그런 이름이네.

 다자이는 분명 연인과 자살이니 약물중독이니 허무주의에 자기혐오로 유명하네.

그러나 어떤가, 그의 생이 오로지 비극과 고통으로만 점철되었을 것 같은가? 다자이라고 왜 호쾌하고 천진하던 시절이 없었겠는가.

바로 맞혔네, 내가 가진 책이 바로 그렇다네. 놀라지 말게, 여기서 다자이는 무려 “독자여 안녕! 살아 있으면 또 훗날. 힘차게 살아가자. 절망하지 마라”고 외친단 말일세.

≪쓰가루≫란 말이지. 그래, 좋은 곳을 펴는군.

 여기서 다자이는 쓰가루 반도의 온갖 곳을 쑤시고 다니며 그곳에 대해 떠들어댄다네.

왜냐고? “괴로우니까.”

자네, 뿌리를 부정한다는 게 어떤 건 줄 아나?

혈육과 절연한 채 그들을 삿대질하다 그조차 괴로워 비난을 자신에게 돌려버리는 고통의 순환에 대해 알고 있나?

 그건 말일세, 모래폭풍이 이는 사막 한가운데를 걷는 것과 같다네. 희망이나 신기루 같은 낭만적인 것은 없네. 죽음. 그래, 바닥 없는 절망과 죽음만이 가까이 있지.

그런 삶을 살던 다자이가 자신의 고향이 있는 쓰가루 반도로 향하는 건 단순한 여행이 아니야. 자신의 기원에 눈을 돌렸다는 뜻이지. 발밑을 똑바로 보고 걸음을 옮기겠다는 기특한 마음가짐일세.

아아, ≪석별≫이라. 그것도 좋지. 자네는 이야기를 아주 잘 고르는구먼.

다자이의 상기된 뺨이 보이는 것만 같네. ≪석별≫에서 다자이는 다소 흥분해 있지.

 “일본에는 서양 과학 이상의 것이 있다”고, 일본은 “동양에서 가장 총명한 독립국”이며 “세상에서 으뜸가는 이상국가가 될 것”이라고 거침없이 떠들어대네.

어떤가, 천진할 정도의 신념 아닌가. 이것이 2차세계대전에서 일본 패망이 확실시되던 시기 쓰인 작품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네.

 중국 대문호 루쉰을 내세워 다자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인 게야.

암울한 현실 따윈 과감히 떨쳐버리고 새롭게 일어서자고. 그러니 다자이도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믿는 곳에 현실이 있는 것이고 현실은 결코 사람을 믿게 할 수 없다”고.

거기 마지막 부분도 펴보게.

 ≪옛날이야기≫ 이게 또 걸작이거든. 공습을 피해 아내, 딸과 함께 방공호에 들어간 다자이가 옛날이야기를 패러디해 들려주는 건데 입담이 보통이 아니야.

그 유명한 미시마 유키오도 이것만은, 이라며 꼬리를 내렸다니 말 다했지 뭔가.

우리가 잘 아는 혹부리영감 이야기도 나온다네.

 거북을 살려준 대가로 용궁에 놀러갔다 와보니 삼백년이 지났더라는 이야기, 토끼에게 반해 온갖 험한 꼴을 당한 뒤 결국 익사하고 마는 늙은 너구리 이야기, 나약하고 무기력한 남편이 귀애하던 참새의 혀를 뽑아버린 아내 이야기.

어떤가, 흥미가 당기지 않나?

재미나고 익살스러운, 다자이로서는 전무후무한 유머로 가득 찬 이야기일세.

그러나 재미나기만 해서야 되겠는가, 다자이는 웃음 사이사이 그럴듯한 독설을 날리지. 예를 들자면 이런 걸세.

우라시마는 아이들이 죽이려고 하는 거북을 5푼을 줘서 살려 보내네. 은혜를 갚으러 온 거북은 서슴없이 이렇게 말하지. “당신이 나를 구해준 것은 내가 거북이고 또 괴롭히는 상대가 아이들이었기 때문이겠죠.

 (중략) 그러나 그때의 상대가 거북과 어린이가 아니고, 예를 들어 난폭한 어부가 병든 거지를 괴롭히고 있었다면 당신은 5푼은커녕, 한 푼도 내지 않고, 아니 단지 얼굴을 찡그리고 틀림없이 서둘러 지나쳤을 거예요. 당신들은 인생의 절실한 모습을 보는 것을 아주 싫어하니까.

 (중략) 실생활의 비릿한 바람을 맞는 것을 아주, 아주 싫어하죠. 손을 더럽히는 것을 싫어하죠.”

재미있지 않은가?

난 다자이가 조금 더 오래, 전쟁 때가 아닌 평화로운 시절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네.

여자와 함께 자살하는 나약한 다자이가 아닌, 포탄 떨어지는 방공호 속에서도 유쾌한 이야기들을 지어낼 수 있는 강인한 다자이를 떠올리네.

 이러니 어찌 그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있겠는가 말이야.

드디어 왔구먼. 자아, 나는 이제 춤을 추러 가야 하네.

무슨 소리냐고? 저기 “호랑이 가죽 옷을 입고 볼품없는 쇠방망이 같은 것을 든 빨간 얼굴”들이 보이지 않는가?

나는 저들이 감탄할 춤을 추고 내 혹을 떼어 가게끔 해야 한단 말이지. 우아하고 화려한 춤이 아닐세.

 “이제부터의 삶은 어쩌면 전혀 화려하지 않은 수수한 것이 될 것”이라고 다자이도 말했거든. 흥이 나는 대로 팔다리를 흔들면 충분하네.

구성진 노래를 한 가락 더한다면 금상첨화지.

무슨 소리냐고? 궁금하면 그 책을 열어보게. 그 안에 전부 다 쓰여 있으니 말일세.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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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쓰가루 반도에서 3주간의 여행

▶ '쓰가루-석별...' 줄거리

다자이 오사무는 일본 현대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작가로, 2차세계대전 당시 허무주의와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방황하던 일본인들의 정서를 대변하며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다자이 문학이 자기혐오와 자의식 과잉으로 점철된 ‘패자의 문학’으로 잘 알려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쓰가루≫ ≪석별≫ ≪옛날이야기≫는 밝고 따뜻하며 유머러스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중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다자이가 약 3주간 고향 쓰가루 반도를 여행하고 쓴 ≪쓰가루≫는 기행문 형식의 소설이다.

‘나’는 고향에서 옛 친구들과 재회하여 밤새 술잔을 기울이고, 어릴 적 자신을 키워준 보모를 만나기 위해 부푼 마음을 안고 길을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친다.

≪석별≫은 센다이 의학전문학교 학생이었던 주인공 ‘나’가 학창 시절 추억을 떠올리며 쓴 수기 형식의 소설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중국 민중의 무지를 깨닫고 의학을 배우러 일본에 왔지만, 조국에 필요한 것은 정신의 개혁임을 깨닫고 문예운동을 위해 귀국하는 중국 대문호 루쉰의 이야기를 그렸다.

≪옛날이야기≫에서는 공습을 피해 들어간 방공호에서 아버지가 딸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준다. 일본의 유명한 민담을 패러디한 다자이식 유머가 한층 빛을 발한다.





서지 정보



원제: 惜別 · お伽草紙

저자: 太宰治(1909~1948)

발표: 1944년,1945년,1945년

분야: 일본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쓰가루·석별·옛날이야기

옮긴이: 서재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75(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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