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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몸 갈아서 세상 맛에 섞었으니.. 

    송기반(松皮飯) / 함허(涵虛)대사

    拏雲踞石老靑山  (나운거석로청산)
    物盡飄零獨耐寒  (물진표령독내한)
    知爾碎形和世味  (지이쇄형화세미)
    使人緣味學淸寒  (사인연미학청한)

    구름 잡고 돌에 앉아 청산에 늙어
    온갖 잎 다 져도 혼자 견디는 겨울
    네 몸 갈아서 세상 맛에 섞었으니
    그 맛 따라 이 맑은 추위 알게 하는 소나무

    함허(涵虛)대사가 지은 송기반(松皮飯)
    소나무의 속껍질을 말려 갈아 쌀에 섞은 밥이다.
    흉년의 끼니를 때우는 먹거리이지만
    이시는 오히려 이러한 먹이를 미화시키고 있다.
    그것은 먹거리의 소재가
    소나무이기에 이 소나무의 청청함이 먹는 이에게도
    청정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기구나 승구에 있어서의 늙은 소나무의 기상에서 배우는
    겨울철의 고고함은 일반적 시인에게 있어서도
    읊을 수 있는 상상이지만,
    전 결구에서의 문학적 재치는
    역시 선사로서의 사물관이라 할 수도 있겠다.

    서리 모르는 고고한 맛을 세속의 곡식 맛에다 섞었다 하였으니
    이쯤되면 선사의 자리에서 분연히 속인의 자리로 내려앉은
    큰 자비의 몸가짐이기도 하다.
    속인들에게 이 맑고 싸늘한 청빈을 맛보게 한다 하였으니,
    이 고고한 소나무의 향내음을 선미(禪味)로 대체한 것이다.

    여기서는 청한을 배우게 한다(學淸寒) 하였지만
    이는 세인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려 배운다 하였으니
    역시 스님으로서 되비침이요 겸손이라 하겠다.

    이렇듯 이 시는 송기밥이라는 소재로야
    누구나 할 수 있는 표현인 듯 하지만
    스님으로서 대중교화가 몸에 매이지 않고서는
    쉽게 이루기 어려운 한 편이다.
    형체를 갈아부순다 함이 바로 자신을 부숴
    대중을 일깨울 수 있다는 큰 자비의 마음이다"
    그것을 세상 맛에 섞는다 하였으니,
    이 부숴진 몸이 세속의 몸이 아님이 분명하다.
    진리의 깨달음으로 세속의 모든 맛을
    깨달음의 맛으로 변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대중구제를 자신의 몫으로 포옹하는 선사의 모습이 역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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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허 득통(涵虛得通)선사 1376~1433 ▣

    스님의 휘(諱)는 己和요 호는 득통(得通)이며 舊名은 守伊고 舊號는 無準이다.
    함허는 자모산(지금의 황해도 평산군 成佛山) 연봉사에 머물면서
    거실의 당호를 함허라 했기 때문에 생긴 별호이다.
    스님은 고려 禑王 2년(1376)에 중원(지금의 충주)에서 劉民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諱는 聰이고 벼슬은 典客寺事이며 어머니는 方氏이다.
    스님의 모친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어서 대성자모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스님은 아이들과 함께 장난하고 놀 때에도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며
    泮宮(성균관)에 나아가 공부할 때에는 하루에 수천 어를 기억하고
    조금 자라서는 一實의 道를 깊이 통달하였다고 한다.
    守伊는 21세가 되었을 때 同館의 벗이 죽는 것을 보고
    세상의 무상함과 봄의 허망함을 알고 두가지 생사(범부의 생사와 성인의 생사)를 
    벗어나 부처님의 열반을 구하며 도를 넓혀 四恩을 갚고 덕을길러
    三有에 이익(資)을 주고자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그는 관악산 의상암에 가서 머리를 깎고 병자년(1396)에 승려가 되었다.
    이듬해 丁丑年 이른 봄에 처음으로
    회암사에 가서 왕사 무학 妙嚴尊者를 만나 친히 법요를 들었다.
    이 인연으로 스님은 임제종 계통으로 제21세손이며 나옹 밑으로 제2세가 된다.

    병술년(1406) 여름에
    스님은 공덕산  대승사에 들어가 을축년에 이르기까지
    4년동안 반야(금강경)의 강석을 세 번 베풀고,
    경인년 여름에는 천마산 관음굴에 들어가
    覺樹[보리수]의 현풍을 크게 떨쳐 인연 있는 사람들을 모두 교화시켰다.

    또 스님은 신묘년 가을에 불회사에 가서 3년동안 결제하며 절을 수리하고
    여러 불자들을 모아 조풍을 드날렸다.
    갑오년(1414) 3월에는 자모산 연봉사에 가서 조그마한 방 하나를 정하여
    함허당이라 이름하고 3년 동안 수행을 부지런히 했다. 그 후로
    스님은 정유년에서 무술년까지 한 겨울 두 여름동안 [금강경오가해]의 강석을 베풀었다.

    이때 [오가해설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이후로 반야의 강석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스님의 나이 40여세로 반야사상이 완숙되었을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수행하되 마음대로 자유자재했다고 한다.

    스님의 세수는 58세이며 법랍은 38년이다.
    문하에 文秀 · 學眉 · 達明 · 智生 · 海修 · 道然 · 允悟 · 允澄 등이 있다.
    스님의 저서는[涵虛得通和尙語錄]에 보면 [圓覺經疏] 3권,[般若五家解說誼] 1권,
    [永嘉集說誼][顯正論] 1권, [般若懺文] 2질,[綸貫] 1권,[涵虛序] 1권,
    [對靈小參下語][倫釋質疑論]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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