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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5월 30일)
제목: ''관계(關係)의 온전(穩全)함''
말씀: 마태복음 22:37~40
찬양인도: 이원준 부목사님
기도: 유이삭 부목사님
사회: 윤하중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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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2:37~40,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인구 절벽 시대에 오늘 143명의 유아들이 세례를 받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 올려 드린다. 유아 세례는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대하여 거룩한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조주의 음성이 되는 것이다. 아이를 하나를 제대로 키우는 것이 대통령을 만드는 것보다 낫다. 우리는 그래서 모두 한국교회와 우리교회가 믿음의 계승을 이루어가야 한다. 오늘은 관계의 온전함 5번째 시리즈이다.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되어야 사람과의 관계와 자연과의 관계가 좋은 것이다.

오늘 본문운
*마태복음 22:35-36절을 보면,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질문하고 있다. “예수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제일 큽니까?” 라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신명기 6:5,을 인용하시면서 대답하신다.

첫째 된 계명=>*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된 계명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어서 39절에 다시 둘째를 말씀하신다.
둘째 된 계명=>*마태복음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네 이웃을 제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다.

*마태복음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신다.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말은 토대(土臺)요, 골자(骨子)요, 핵심(核心), 키(key), 기본(基本)이라는 뜻이다. 이 내용들을 주님 말씀하시는 배경은 바로 앞에 23절에 보면,
*마태복음 22: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사두개인을 이야기 하고 있다. 사도개인은 성경학자(scholar)였다. 그런데 부활이 없다고 말한다. 자기 높은 지식을 가지고 취사선택(取捨選擇)을 한다.
-다른 한 사람은 율법교사의 이야기이다. 그는 다 구약을 다 믿고 지키는데, 그런데 그 생명지식이 가슴에 연결이 안 되는 것이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종교인이다. 우리가 교회를 오래 몇 십 년을 다니다보면 나도 모르게 이러한 성향이 있을 수 있다. 편향적 성경지식, 머리지식이 가슴에까지 내려가지 못해서 생명지식이 되지 못한다. 오늘 이 유아세례와 이 예배를 통하여 그야말로 사두개인적인 것, 바리새인적인 것, 율법교사적인 것들이 정리가 되길 바란다. 생명지식이 되길 바란다.

그러면 생명지식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율법이 대강령이라고 토대요 골자요 키요 기본이라는데 이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더 이해를 잘 할 수 있는가?


I. 파격적 주님의 명령

-핵심은 네 이웃을 내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생명지식이 될 진데, 생명지식이 되는 것이다. 부부간에 이웃 간에 모두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인간의 죄성, 인간의죄의 뿌리를 잘라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죄의 뿌리를 잘라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 자기 행복만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관심 갖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되었다. 타락한 이후에 아담과 하와의 부부관계, 가인과 아벨의 형제관계가 깨어진 것처럼 관계가 깨어진 것이다. 21세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포스트코로나 이후에도 자기 행복만 계속 추구하고 남의 행복에 대해서는 둔감하고 관심을 갖지 않은 잘못된 자기 사랑이 죄의 뿌리이다. 오염된 관계를 정리하고 근본적으로 죄의 뿌리를 잘라내라 이다. 이것이 파격적인 명령이다. 하나님은 원래 사람을 창조하실 때 자연스럽게 자기사랑 하는 것은 창조질서였다. 음식을 먹고 자기가 보호받고 싶고 또 삶의 대한 보람을 갖고 싶고 안전하고 싶고, 편안한 집에 살고 싶고, 코로나 펜데믹 가운데서도 우리가 건강하게 살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범죄하고 난 다음에 인간이 죄로 오염되어서 창조 질서에 대한 자연스러운 자기 사랑이 오염되었다. 이것이 문제인 것은 자기만 만족하면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며 죄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착각이 죄이다. 조심스러운 것이다. 본인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태복음 22:40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오염된 자기 생각을 잘라내라는 것이다. 그래야 새로운 생명의 관계, 종교적이 아니라 참된 사랑의 은혜를 수여받는 것이다. 네 이웃을 위해서도 행복을 위해서 사용하고, 창조적 창의적 아이디어를 내고 살아야 한다. 이웃을 위해 힘을 쓰고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 우리 인생이 원더풀해진다. 우리 삶이 놀라워진다.


II. 네가 잘돼야 내가 잘된다.

-네가 살아야 내가 산다.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싶다면, 이웃을 참되게 사랑하면 참된 사랑이 되고, 삶의 질이 높아진다. 이웃의 필요에 배려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대하면 된다. 우리의 삶을 놀랍게 경험하게 되며, 창의력을 갖게 될 것이다. 잘 섬기면, 놀랍게도 끊임없이 신선하게 하나님이 주신다. 거룩하고 극대화되게 해주신다. 부족하지만 남을 사랑하고 섬기고 살아야 한다. 주님이 숨은 재능도 주실 것이다.

발명와 에디슨이 백여 년 전에 사람들에게 빛을 주고 싶었다. 하나님이 에디슨을 통해 빛을 만들게 하신 것이다. 빛이 들어오고 나서 귀신이 다 사라졌다. 삼국지의 조자룡을 좋아한다. 그른 남을 성공시킨 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찌된 일인지 남을 잡아당기고 내려뜨린다. 이제는 남을 잘되게 해야 리더가 되는 것이다. 남을 살리는 사람이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대표적인 분은 예수님이시다.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고 오셨다고 하신다. 이것이 내 자신을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남을 성공시키고, 자신의 생명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목숨도 버리셨다. 남을 섬기려 하면 창의력이 생길 것이다. 교회로 말하면 개척교회 심정으로 섬겨야 한다. 어떻게 하면 섬기는지를 생각해라. 그렇게 한다면, 멋진 기업인들이 나올 것이다. 이런 정신으로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 남을 끌어내리는데 전문가가 많다. 저 사람으로 인해서 내 파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파이를 창출해야 한다. 경쟁구도가 아니라 미션구도로 나아가야만 한다.

단순한 감정이 아닌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헌신된 삶으로 바꾸어야 한다. 경쟁구도가 아닌 함께 섬기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일을 창출해야 하고 함께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오병이어 사건을 보라. 어린아이 하나가 그것을 주면 못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섬기는 것처럼, 커져서 없어지는 것이 아닌 더 큰 축복으로 채우셨다.

*누가복음 4:25~26,
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 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이 상황 가운데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과부에게 갔다.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사렙다 과부는 기름병과 밀가루 남은 것을 엘리야에게 주게 되어, 그것으로 그 파이가 기근을 살려냈다. 끊임없이 기름과 밀가루가 생긴 것이다.

이제는 남이 잘되어야 내가 잘 된다. 어려운 사람을 잘 살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
남이 잘돼야 내가 잘된다. 잘 사는 사람 끌어내리지 말고, 더 밀어주며, 어려운 사람은 더 잘 살도록 끌러올려 주어라. 우리 민족은 정신적인 대 전환이 필요하다. 진정한 이웃사랑이 필요하다.


▶핵심은 하나님은 남이 잘되게 바라는 자를 그 자신도 잘 되게 하신다.
-남이 잘되어야 나도 잘 된다.



※LA 다운타운에 가면 금방은방이 많이 있는 곳이 있다. 어마한 금방이 모여 있다. 같이 자리하고 있어야 장사가 잘된다고 한다. 남이 잘돼야 내가 잘된다. 이것이 관계의 온전함의 key이다. 힘든 이웃이 다 포함된다.

*고린도후서11:24, 바울의 고백이다.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바울은 유대인들은 골육의 지체라 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죽지 않을 정도로 바울을 채찍질 하던 유대인들에게 지체라 했다. 이웃사랑, 형제 사랑을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다.

로마서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ㅡ이것이야말로 오염된 죄의 뿌리를 끊었고 그 이후로 바울은 창의적 신학자, 창의적 사도가 되었다.
손양원 목사님도 이 고봉을 쳐다보고 실천했다. 그런데 바울처럼 깊은 은혜의 신비에 도달한 사람은 없다. 우리가 다 기본적으로 율법이요 강령인 이웃사랑을 하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의 차원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주신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동일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연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자연은 본래 에덴동산에서 완벽함이 있었지만 창세기에서 자연이 저주를 받았다.

*창세기 3:17,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다. 환경오염과 자연오염은 인간의 죄악이 꽈리를 틀고 있다. 선지자 예레미야를 보면,

*에레미야 12:4,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 그 악함 때문에 자연도 저주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땅이 받은 저주가 로마서에 나와있다.

*로마서 8:19,21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모든 자연도 죄악 때문에 저주를 받았는데,

*골로새서 1:20,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으로 만물도, 땅도 회복된 줄로 확신한다. 우리의 죄만이 아니라 만물의 땅도 회복된다는 것이다. 복음이 들어가면 자연환경이 회복된다. 한국이 자연이 훼손되지 않고 친환경적이길 소원한다. 복음에 능력이 자연도 회복되게 할 줄 믿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이웃 사랑은 그냥 윤리로 끝나고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자연 사랑도 범신론적이다. 그런 것들을 돌파하는 신실한 올바른 관계의 주님의 종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없는 이웃사랑은 윤리와 어떤 세상의 규범으로 끝나고,
♤하나님 없는 자연사랑은 범신론적으로 끝난다.(나무 앞에 빌고 기도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는다. 오직 성령으로만이 되는 것이다.
이 시대는 인공지능 시대(AI시대,(artificial intelligence))이다.

이제는 이 관계에 관해서는 은혜를 주셔서 우리는
Spiritual Intelligence-영성지능 시대로 우리를 하나님은 우리를 치유하시고,
Servant Intelligence-섬김지능 시대로 개발되어 자연도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회복되고, 하나님께서 자연을 치유해 주시길 소망한다.

♣요약
-잘못된 자기 사랑으로 남을 끌어내리는 그 죄성 있는 뿌리를 잘라버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사랑의 능력으로 남을 잘되게 하고, 끊임없이 신선한 창의적으로 남과 이웃을 사랑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크고 놀라운 은혜로 인도하실 것이니 남이 잘되게 하여 주님과 온전한 관계가 되어야 한다.


ㅡ첫째 되고 큰 것이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해야 할 첫째 되고 큰 것이 되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받는다.
①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사랑할 것 :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37절)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사랑하는 것은 그가 우리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이며 우리의 하나님이신 그에게 순종하고 의지함으로써 그를 따르는 것이다.
②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 : 이 말들이
하나의 의미를 가진 똑같은 말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즉 온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의 말들이라고 한다. 또한 그 말들을 각각 구별하여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즉 마음과 목숨과 뜻은 각각 의지와 감정과 이해력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하며 단지 말과 혀로만 나타내는 사랑이 되어선 안된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강렬한 사랑이어야 하므로 우리는 가장 열성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독자적이면서도 최고의 사랑이어야 하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그 밖의 어떤 것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분산된 마음이 아니라 연합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께 드리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영혼의 온 힘을 바치며 하나님에게 그 영혼의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왜냐하면 이 계명에 대한 순종은 다른 모든 계명들에 대한 순종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순종은 사랑으로부터 나올 때에만 열납 될 수 있는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둘째로 큰 계명이다. 둘째는 그 같으니. 둘째로 큰 계명은 첫째 되는 큰 계명과 같이 둘째 돌비에 새겨져 있는 모든 계명들을 총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둘째 계명은 첫째 계명과 유사하다. 왜냐하면 둘째 계명은 첫째 계명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또한 첫째 계명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이 둘째 계명 속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며 또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부정한 자기 사랑이 있는데 이런 사랑은 제거되고 극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연적이며 가장 큰 의무의 규칙이 되는 자기 사랑은 보존되고 성화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곧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 속에 담긴 위엄을 적당히 존중하고 우리 자신의 영혼과 육체의 복지에 적당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 둘째 계명 속에는 또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규정되어 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고 존경해야 하며 어느 누구에게도 부당하게 대하며 감정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참되고 성실하게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이 계명들의 중요성과 위대성은 무엇인가?
모든 계명은 사랑의 율법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율법을 제거해 버리면 모든 계명들은 효력을 잃고 쓸모없이 될 것이다. 사랑은 모든 계명들보다 더 뛰어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율법의 정신으로서 율법에 생기를 준다. 그리고 사랑은 모든 다른 의무들의 원천으로서 성경 전체, 곧 율법과 선지자뿐 아니라 복음의 요약이 되는 것이다. 모든 계명들은 이 두 계명과 관계를 맺고 있다.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틀에 맞추듯 이 두 계명을 따라야 한다. 우리는 개념과 명칭과 언쟁에 힘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이 계명들을 지키고 증거 하는 일에 열정을 쏟아야 한다. 모든 것들은 이 두 계명의 강력한 힘 앞에 굴복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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