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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5월 25일)
제목: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말씀: 창세기 50:15-21
찬양인도: 이 다니엘 부목사님, 쉐키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임상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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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50:15-21,
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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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은혜를 사모하며 치유와 응답을 체험하는 수요저녁기도회에 나온 우리 모든 영 가족들을 주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한다. 오늘 이 기도회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은혜,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그 놀라운 신비(神祕)한 능력을 경험하길 소원한다.

 
‘버려짐’이라는 상처는 인간의 영혼을 황폐(荒廢)하게 만든다고 한다. 버려짐을 경험한 사람은 그의 마음 가운데 두려움이 자리 잡기 시작하고 또 누군가에 버려짐을 당할까봐 그의 삶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정지 상태에 들어간다고 한다.
 
어느 마을에 작을 실수를 한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은 그 실수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비난이라는 것이, 또 소문이라는 것이, 계속적으로 부풀지지 않는가? 그러다보니 이 소년에 대한 소문이 너무 나쁘게 퍼지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을 이 소년을 찾아온다. 그리고 돌을 던지기 시작한다. 소년을 하루하루가 너무 힘겨웠다. 사람들이 자기를 비난하는 것들도 힘겨운데 돌을 맞고 돌을 피하기도 하고 매일 매일이 죽을 것 같이 힘들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나의 실수를 용서해 주겠지. 그리고 나의 실수를 만회할 날이 반드시 오겠지’ 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넘기며 살고 있었다. 그렇게 고달픈 시간을 보내는 그 어느 날 그가 그토록 존경하고 신뢰하던 선생님이 그 소년 앞을 지나가는 것이다. 소년은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아, 다른 사람들은 나를 다 비난하고 나를 향하여 돌을 던질지라도 저 선생님만큼은 나를 품어줄 거야., 저 선생님만큼은 나를 반드시 용서해줄 거야.’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선생님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갑자기 이 소년을 보더니 주위의 시선을 훑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 앞에 있던 장미꽃 한 송이를 꺾은 다음 그 소년에게 집어던졌다. 그 장미꽃이 정확하게 그 소년의 가슴 밭 한 가운데 팍, 부딪혔다. 그동안 참고 견뎌왔던 이 소년이 그 장미꽃 한 송이에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돌이 힘이 센가? 장미꽃이 힘이 센가? 돌이 힘이 세다. 그런데, 그 소년은 장미꽃에 쓰러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돌보다 더 강력한 자기를 믿고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신뢰했던 그 누군가로부터 자기가 버려짐을 당했기 때문이다. 혹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분 가운데 믿고 사랑했던 그 누군가로부터 버려짐을 당해본 슬픔이 있는가? 아마도 우리가 가장 믿고 사랑하는 대상은 가족일 것이다. 그 가족이 상처를 주면 우리는 너무 괴로울 것이다. 가장 사랑했던 남편이 나를 외면한다. 가장 사랑하고 의지하던 아내가 나를 자꾸만 무시한다. 가장 믿고 사랑하는 엄마아빠가 나에게 실망감을 주고 나를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쳐다보지 않는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속에 상처를 받게 된다. 그리고 두려움 가운데 관계가 하나씩 하나씩 깨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사랑했던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그냥 버림의 정도가 아니라, 아주 처절하게 버림을 당했던 그 한 사람, 바로 요셉이 있다. 요셉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가운데 무너지고 쓰러졌다. 그의 삶을 되돌아보면 ‘아, 이제 끝이다. 이제 끝났다. 이제 더 이상 소망이 없다.’ 라고 말해야 되는데, 성경은 요셉을 가리켜, 요셉이 그 어디에도 복수의 길, 보복의 길, 그리고 자기 인생의 포기하는 길을 가지 않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도대체 요셉의 삶의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하나님은 이 요셉의 삶의 어떻게 역사하신 것인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요셉을 붙드시고 요셉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주목하면서 특별히 우리에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소원한다.
 
*창세기 50:15,
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창세기 50장은 야곱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야곱이 드디어 죽는다. 인간의 죽음은 신비이고, 인간은 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깊이 되돌아보게 된다. 야곱은 이 죽음의 앞에서 요셉은 정말 깊은 경외감과 아버지를 진실로 공경하는 그 마음을 담고 슬픔 가운데 처한다. 요셉은 아버지의 시신을 고이 모신다. 정성을 다해서 40일 동안 향을 처리한다. 향 처리 이후에 30일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애곡(哀哭)하며 정중히 장례를 치른다. 모든 애굽 사람들이 요셉과 더불어 이 야곱의 장례를 함께 슬퍼한다. 그리고 아버지 유언(遺言)대로 야곱은 가나안 땅으로 향하게 된다. 그런데 참 놀라운 일이 있다. 요셉의 형제들은 이 죽음이 그들에게 슬픔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셉의 형제들은 야곱의 죽음이 자신들의 마음을 옥죄어 오는 두려움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형제들이 모여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동안 아버지께서 살아계셨으니까, 요셉이 우리를 보복하지 않고 우리를 살려둔 거야, 이제 야곱이 죽었으니 우리는 어떻게 하지, 반드시 우리를 보복할 거야.” 라고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왜 그들은 그토록 두려움에 직면했는가?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이 요셉에게 행한 악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형들로부터 버려짐을 당했다. 요셉은 야곱에게 특별한 아들이었다. 요셉이 가장 사랑했던 라헬의 아들이었고 노년에 낳은 아들이었다. 그 요셉을 볼 때마다 마음이 흐뭇하다. 가끔 이렇게 교회를 지나가다가 보면 손자를 데리고 가시는 권사님과 장로님들이 보인다. 그런데 하나같이 얼굴에 미소가 절로 스며들어있다. 야곱에게 요셉은 그러한 존재였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가 채색 옷을 입었다라고 기록한다. 채색 옷을 입었던 요셉,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이 요셉을 바라보는 형들은 마음이 불편했다. 성경은 이렇게 표현했다.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다. 이 표현이 너무 좋지 않는가? 우리가 불편한 사람을 만나면 얼굴이 굳어진다. 말이 헛 나온다. 형들에게 요셉은 그러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요셉이 나이가 적지 않았다. 열일곱 살, 웬만큼 아는 나이였다. 그런데 어느 날 꿈을 꾼다. 그 꿈은 바로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이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꿈을 형들에게 말을 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 침묵은 자유이다. 말하지 말아야 하겠죠? 그러나 요셉은 형들에게 가서 말한다. “형, 내가 어제 꿈을 꾸었는데 형들이 나에게 다 절을 했어” 형들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또 꿈을 꾼다. 그 꿈은 더 나아가 아버지 어머니까지 자기에게 절을 하는 꿈이었다. 형들은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리고 요셉을 향하여 이런 마음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저 요셉,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한다.
 
*창세기 37:20,
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요셉이 가까이 오자 형들은 요셉을 잡아 구덩이 속에 집어던진다. 구덩이 속에 들어간 요셉이 소리를 친다. “형, 형 도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형 저를 꺼내주세요!” 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형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도리어 형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 요셉을 죽여버리자. 저 요셉을 없애버리자.”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만약 사랑하는 가족 누군가가 여러분을 구렁텅이에 빠뜨려 놓고 저 녀석을 죽여 버리자고 하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두렵고 얼마나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찢겨지겠는가? 요셉은 그 소리를 다 들으면서 애타게 형들을 찾으면서 부르짖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다. 요셉을 형들은 미디안 사람들에게 은 20에 팔아버린다. 요셉의 채색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그 옷을 찢을 때, 형들은 분노와 분개를 했던 것이다. 마치 찢겨진 옷처럼 요셉은 온몸에 갈기갈기 상처를 입고 광야의 길을 끌려가게 된다. 그렇게 형들에게 버려진 것만으로도 당한 것만으로도 힘들고 어렵지 않겠는가?
 
그런데 요셉은 애굽으로 와서 한 장군 보디발의 노예로 팔려간다. 명문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이제 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오직 하나, 그는 종이었다. 요셉은 하지만 거기서도 열심히 일했다. 그 모습을 눈여겨본 보디발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는다. 가정 총무로 맡기고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맡긴다. 무엇인가 풀리는 것 같다. 이제는 좀 회복의 길이 보이는 것 같다.
 
그런데 예고 없이 또 하나의 문제가 찾아온다. 바로 보디발의 아내였다.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한 아줌마가 요셉을 향하여 말한다. “요셉, 요셉”, 무슨 말인가? 자기와 동침(同寢)하자는 것이다. 요셉은 그 제안을 거절한다. 거부한다. 거절하고 거부한 일이 잘 한일인가? 잘못한 일인가? 잘한 일이다. 옳은 일이었다. 그런데 요셉은 주인에게 도리어 버려지게 된다. 그리고 그는 감옥으로 향하게 된다. 형들에게 버려지고 당한 일만해도 힘들고 어려운데, 요셉은 주인에게까지 자기에게 신뢰를 주고 사랑을 주었던 주인에게까지 버려짐을 당한다.
 
이제 장면이 옮겨진다. 요셉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監獄)에 갇혀있다. 그런데 참 놀랍게도 요셉은 거기서도 열심히 일한다. 불굴의 청년 같다. 최선을 다해 맡겨진 일들을 소화해 낸다. 이번에는 간수장(看守長)이 요셉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긴다. ‘아, 마지막 기회이다. 정말 마지막 기회이다’라고 하는 찰나(刹那)에 왕의 최측근이었던 술 팥은 관원장과 똥 맡은 관원장이 꿈을 꾼다.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는데 요셉만이 그 꿈을 해석한다. 그리고 그 꿈을 해석하는 대로 술 맡은 술 맡은 관원장이 왕에게 다시 복직한다. 그런데 참 가슴 아프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렸다. 라고 성경은 기록한다. 이제 마지막 남은 한 줄기의 빛, 그 희망의 빛마저도 사라졌다. 요셉은 진실했다. 정직하고 순결했다. 그런데 안 되는 인생이다. 뭘 해도 안 되는 인생, 그것이 요셉의 인생이 아닌가?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안 되는 요셉을 향하여, 우리가 생각하기에 납득이 안 되는 이상한 성경을 기록해 두었다. 우리가 39장 2절을 살펴보다.
 
*창세기 39:2,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요셉이 어떤 상황인가? 애굽의 노예(奴隸)로 팔려온 상황이다. 요셉이 버려진 상황이다. 형들에게 버려짐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노예로 끌려온 상황(狀況)이 아닌가?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라고 말한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완전한 버림을 받은 것 아닌가? 하나님마저 요셉을 버린 것처럼 모든 것이 끝나버린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다.”라고 말한다. 답답해 죽겠다. 그런데 39:21절에 다시 한 번 이런 말씀이 반복된다.
 
*창세기 39:21,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 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다시 한 번 말한다. 보디발의 아내 유혹을 거부해서 감옥에 갇힌 이 요셉을 향하여 성경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 라고 말씀한다. 회복된 상황이 아니다. 승진한 것도 아니다. 요셉이 여전히 감옥에 죄수(罪囚)가 된 상황이다.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함께하시고, 함께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헤쎄드의 은혜가 요셉 가운데 비추어질 뿐만 아니라, 요셉 가운데 더욱 더 큰 은혜가운데 베풀어 주고 계신다. 분명히 상처받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요셉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요셉이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성경이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해보지 않았는가? 가족들 다 있는데 나 혼자 외톨이 같다. 내가 열심히 섬기고 살아왔는데 마치 내가 버려진 것 같다. 버티고 버텼는데 내가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그래서 갈 곳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 앞으로 나온다. 교회로 발걸음이 향한다. 그리고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깜깜한 예배당에 홀로 앉아서 기도도 안 나오고 답답한 마음으로 가만히 앉아있는데 어느 순간에 우리를 만지시는 그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해 보지 않았는가? 요셉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호아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가 머리로만 알았던 하나님, 야곱의 품 안에서 품었던 그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그 생생한 살아 역사하시는 그 실체를 버려지고 또 버려지는 그 처참(悽慘)한 현장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다. 요셉은 처절한 침묵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는다. 절망스런 상황이었지만 그 상황 가운데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도리어 이제 조금씩 깨닫게 된다. 내가 노예이지만 내가 죄수이지만 내가 지금 하나님의 손아래 놓여 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할 때, 요셉은 분명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창세기 49장 9절에 보면,
*창세기 49;9,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에게 말한다. “우리 주인인 보디발이 아무것도 나에게 금하지 않았고, 금한 것은 딱 하나, 바로 당신이다.” 라고 이야기 하며 “당신은 그의 아내이고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겠는가?” 라며 요셉이 마지막으로 하는 고백이 바로 진짜 마음이었다.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요셉은 보디발에게 죄를 짓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보디발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보디발 위에 계신 하나님, 그분을 바라보고 살았기 때문에 요셉은 그 유혹을 전전했던 것이다. 요셉은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내가 하나님의 손아래 있는가?’ 가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이제 삶의 모든 주권과, 삶의 모든 해석을 하나님께 위탁하기 시작한다. 자기가 당한 고통, 고난, 버려짐, 이것을 나의 관점으로 해석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그 문제를 바라보고 해석하기 시작한다. 창세기 45장 5-8절을 살펴보면,
 
*창세기 45:5-8,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요셉이 드디어 형들을 만난다. 형들은 요셉을 보고 두려워한다. 두려워하는 형들을 보고 무어라고 고백하고 있는가? “애굽으로 보낸 분이 형들이 아니에요. 애굽으로 보낸 분은 하나님이시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 요셉을 먼저 보내신 이유는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지위, 자신의 위치, 그것을 누가 주신 것이라고 말하는가?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고백한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형들의 시기(猜忌), 욕망(慾望)으로 빛나는 것 같이 보였던 인생이었지만, 그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救援)계획(計劃)을 요셉이 발견한 것이다. 더 이상 삶의 어려움과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살지 않는다. 현실을 견뎌냈다. 현실을 결국 이겨낸 것이다. 무엇으로? 구원의 관점으로, 생명의 틀로 자신의 삶을 해석하면서 말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우리의 인생의 주어가 하나님이 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내 삶을 주관하고 계시고, 하나님이 내 삶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자가 되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한다.
 
요셉은 상처를 받았다.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그 상처와 아픔에 임한 더 큰 하나님을 은혜를 경험했다.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 요셉을 어루만져 주셨다. 요셉은 고요한 중에, 침묵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그 하나님의 손아래에서 요셉은 점점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가기 시작한다. 요셉은 이전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심정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애끓는 목자의 심정이 무엇인지 성숙한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 본문에 창세기 17장에 보면, 형들이 요셉에게 나와서 이렇게 말한다. “야곱이 이렇게 말했다고 말한다. ”요셉, 형들이 참 못났다. 형들이 정말 미안하다“ 고 말하면 되는데, 형들이 자신들이 죄가 무엇인지를 자신들이 행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직도 뉘우치지 못한다. 죽은 야곱의 유언을 끌고 와서 거짓말을 한다. 요셉도 형들이 하는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안다. 정말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라면, 아버지는 생전에 무슨 말 하셨는지를 안다. 이 말을 요셉은 듣고 운다. 뉘우침도 회개도 없이 두려움에 허우적거리는 형들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프다. 가슴이 저며 온다. ‘나는 이미 형들을 용서했는데, 형들을 사랑하는데, 그 용서를 믿지 못하고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형들을 바라보며 요셉은 억장이 무너진다. 형들은 요셉을 알지 못했다. 요셉이 하나님과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요셉이 하나님의 손아래 어떻게 빚어져 갔는지를 도무지 알지를 못한다. 요셉은 그저 눈물을 흘릴 뿐이다. 요셉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봤으면 형들이 요셉이 진짜 아프구나! 요셉이 우리 때문에 아팠구나! 이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요셉이 보복과 원한의 눈물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창세기 50:19,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형님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두려움에 떠는 형들을 오히려 위로한다. 요셉은 삶을 통해 배운 분명한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은 나를 버리고 세상은 나를 지켜주지 못할지라도 심지어 가족들마저도 시기와 질투로 죽음에 던져지게 했을지라도, 하나님만을 나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시고 나를 버리지 않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던 것이다. 그 앎의 고백이 그 믿음의 고백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요셉은 바보가 아니다. 형들이 행한 일을 다 기억하고 있다. 형들이 한 갈기갈기 찢긴 마음의 상처가 가슴에 흉터로 남아있다. 그런데 요셉은 그것을 더 이상 꺼내지 않는다. 상처와 아픔을 복수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 상처를 자기의 자신을 해하는 악으로도 사용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를 철저하게 지킨다. 하나님의 자리,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侵犯)하지 않는다. 내 힘과 내 능력과 내 원한(怨恨)과 내 복수심(復讐心)으로 인생을 불태워버리지 않는다. 도리어 형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
 
*창세기 50:20,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형님들이 저를 해하려고 했던 것을 압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도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아픔 속에, 그 악함 속에 그것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생명을 보존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을 살리시고 또한 수많은 영혼들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저를 건져내신 것입니다.”라고 고백한다. 요셉은 단 한번도 빈말을 하지 않는다.


*창세기 50:21,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말로만이 아니다. 내가 형님들을 진실로 용서하고 형님들을 품고 형님들의 자녀까지도 책임지겠다고 말한다. 이것이 요셉의 삶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
상처는 우리의 마음에 남는다. 때때로 그 상처가 우리의 마음을 마비(痲痹)시키기도 한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직장 동료와 친구,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믿음의 지체들과도 우리가 상처 때문에 마비될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상처받은 마음만 갖고 있으면,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교회생활도, 예배도 드리지만, 신앙의 기쁨과 은혜가 사라져버린다. 오늘 하나님, 그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임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간 우리 가운데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희 인생에 상처와 아픔이 있다는 것을 내가 알아, 그 상처는 감추고 지우려고 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란다. 너의 상처와 아픔, 그 슬픔을, 있는 모습 그대로 나에게 가지고 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역사하시면, 그 아픔은 반드시 극복된다. 누군가를 세우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이다.
 
*요한일서 4:20,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시는가? 다시 한 번 질문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내 옆에 있는 형제, 자매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나를 실망시킨 남편, 나를 힘들게 하는 아내, 제 멋대로 반항하는 아들과 딸을 사랑해야 한다. 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내 옆에 있는 형제, 자매를 미워하면, 거짓말하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두렵고 떨린 말씀이다. 요셉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요셉은 형들을 진심으로 용서한다. 용서할 때,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를 요셉이 먼저 경험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문구를 함께 읽어보자.
※사랑할 때, 죽음은 사라지고, 아픔이 길 잃을 때, 생명이 돋아난다. 사랑할 때, 우리의 관계 앞에 놓여 진 죽음은 조용히 안개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의 아픔이 우리의 상처가 길이 될 때,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돋다나기 시작한다. 주님 손에 맡기라. ‘내가 대신 하리이까?’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저의 삶을 받으시고 책임져 주시고 제가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던지 간에 하나님의 용서를 실천하는, 하나님이 만져주시고 하나님이 일하심을 경험하는, 참된 회복, 참된 부흥을 경험하는 믿음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고백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한다.
 
요약
우리의 삶에 놓여 진 수많은 아픔과 상처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마음이 있고 우리의 관계가 깨어질 때가 너무나 많지만, 하나님께서 버려진 요셉을 향하여 찾아오시고 그의 삶을 빚으셔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며, 우리의 상처가 변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거룩한 주의 용사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해야 한다. 나의 관점으로 해석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그 문제를 바라보고 해석하여서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여야 한다.
- 야곱이 죽은 후에 형들은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아버지의 이름을 빌어 용서를 구했다. 이에 요셉은 이미 용서한 자신의 진심을 다시 확인시켜 주어야 했다. 그러나 요셉은 결코 화를 내거나 앙심을 품지 않고 형들을 긍휼히 여기며 자신의 진심을 확인시켜 주었다. 요셉은 그들의 안전뿐만 아니라 그들 자녀들에 대한 양육까지도 책임지겠다고 약속한다. 성도는 용서해야 할 위치에 설 때에 주님의 진심을 바로 헤아려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야곱이 죽은 후 과거에 저지른 죄악으로 인하여 보복을 두려워하던 형들을 요셉이 간곡히 위로함으로써 이스라엘 공동체는 굳게 결속될 수 있었다. 요셉의 용서와 사랑이 열두 지파를 탄생시키는 중요한 촉매제가 된 것이다. 요셉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셨고 그는 하나님의 오묘한 뜻과 섭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형들의 과오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었다. 요셉의 형들에 대한 용서와 사랑은 이미 전에 나왔던 부부간의 사랑, 부자간의 사랑에 이어 가족 안에서의 형제 사랑의 모본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이 갖는 진정한 이해와 용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정립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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