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3월 2일)

제목: "솔로몬이 구한 것은"
말씀: 열왕기상 3:5-10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전승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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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3:5-10

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6 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8 왕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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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에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말씀이다. 우리가 솔로몬을 생각할 때, 솔로문은 지혜의 왕으로 기억한다. 특별히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이 솔로몬이 지혜의 왕이 되는 과정이라고 살펴볼 수가 있다.
 
저도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서 이 말씀을 참 많이 들었을 음을 기억한다. 특별히 어렸을 때, 이 말씀 가운데 제게 은혜로 다가온 말씀은 바로 13절의 말씀이다.
 
*열왕기상 3:13
13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 왜 이 말씀이 제게 은혜가 되었냐면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간구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간구한 내용을 들으시고 흡족해 하신다. 그리고 솔로몬에게 지혜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구하지 않은 것 부귀와 영화도 같이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어릴 때 이 말씀을 듣고 마치 전래동화 금도끼 은도끼를 말했을 때, 내 도끼는 새 도끼라고 그 할아버지가 두 도끼를 다 주었던 거처럼 저도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제가 하나님께 구했던 것, 받기를 원했던 것, 그것은 좋은 옷, 좋음 음식, 좋은 물질, 아무튼 내 눈에는 좋은 것들이 참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을 직접적으로 양심에는 찔림이 있었다. 그래서 솔로몬이 구했던 것처럼, 하나님, 저는 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솔로몬이 원했던 그 지혜를 허락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네가 구하지 아니한 것 그 안에 있는 것을 내가 너에게 주겠다.’ 그런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마치 그 지혜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만능키처럼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장성하고 목사가 된 다음에 너무나도 익숙했던 말씀을 묵상하게 되니까 이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단순하게 그렇게 지혜를 달라고 간구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늘 이 말씀은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1천 번의 번제를 드리고 난 이후에 등장하는 이야기 이다.
 
여러분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렸다. 혹자는 그 일천 번제가 횟수로 열 번의 번제라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일천 번의 번제가 합하여 하나님 앞에 드렸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찌 되었던 누구나 그렇게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제사이다. 그런데 솔로몬이 왜 예루살렘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 기드온까지는 약 10킬로나 떨어져 있다는데 그 기브온까지 가서 혼자서 간 것이 아니다.
여러분,
일천 번제를 드리기 위해서 이기에 일천 마리에 합당한 송아지와 양을 이끌고 그 기브온 산당까지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솔로몬이 왜 그 기브온 산당까지 가서 일천 번제를 드렸겠는가? 물론 자신을 이스라엘의 세 번째 왕으로 세우신 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 앞에 일 천 번제를 드렸을 것이다. 단순하게 그냥 감사의 의미로 일천 번제를 드린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이 역대 하 1장에 등장하고 있는데 역대 하 1장에서 솔로몬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쉽게 생각할 아마 솔로몬의 마음 가운데 정말로 뜨겁게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갈급함이 있었던 같다. 응답 받고자하는 응답 받고자 하는 기도의 제목이 있었던 것 같다.
 
여러분, 우리가 생각하기에 솔로몬은 왕이 되었다. 왕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호의호식하면서 편하게 살 수 있겠구나! 로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솔로몬 입장에서는 자기가 왕이 되었을 때 백성들을 어떻게 다스릴지를 고민했을 것이다. 솔로몬이 가진 큰 약점, 핸디캡을 살펴봐야 한다.
 
솔로몬이 가진
첫째 핸디캡은 무엇인지를 보자, 그것은 바로 나이이다. 오늘 본문에 말씀에서도 솔로몬이 이렇게 말씀한다.
 
*열왕기상 3:7,
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종은 작은 나이라 출입할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한다. 여러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은 40세에 왕이 되었다. 두 번째 왕 다윗은 30세에 왕이 되었다. 이 솔로몬은 아마 10대 후반이나 20대 전후에 왕위에 올랐을 것이라고 말한다. 솔로몬이 왕위에 올랐을 때, 단순히 나이가 어린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울은 40세에 왕이 되었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그들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왕이 있기를 원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을 왕으로 초대 왕으로 세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호성으로 기뻐한다. 두 번째 왕이었던 다윗은 이미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그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았다. 그렇게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세 번째 솔로몬은 그 전에 업적이 있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솔로몬은 다윗 왕이 50세쯤 늦게 얻은 아들이다. 얼마나 사랑하고 애지중지 했을 것이며 그냥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서 얻은 아들이며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이후 얻은 아들이기에 아마 다윗 왕에게는 그 어떤 왕자들보다 솔로몬을 사랑했을 것이다.
 
그렇게 솔로몬이 왕위에 올랐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솔로몬도 익히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 이 솔로몬이 가지고 있었던 핸디캡이 있었다면 잘 알려진 출생문제이다. 여러분, 다윗의 정상적인 부인을 통해서 얻은 아들이 결코 아니다. 다윗이 자신의 충신이었던 우리아를 전쟁터에게 죽게 만들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뺏어서 얻은 아들이 솔로몬이다. 여러분, 솔로몬이 생각하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왕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를 생각한 것이다. 여러분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락호락 했던 백성들이 아니다. 왕 앞이라고 벌벌 기면서 떠는 그러한 사람들이 아니다. 앞에서 알다시피 다윗이 골리앗을 무찔렀을 때, 다윗을 칭송한다. 무엇이라고 하는가? ‘사울이 죽인 자는 천 천 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라고 한다. 여러분 현직에 지금 사울이 있다. 그 와중에 사울을 깍아 내리는 일을 하고 있다. 이것은 그냥 다윗이 대단한 사람이다가 아니라 사울왕은 겁쟁이다.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떨었는데 이 다윗은 사울보다 열배나 더 용감하다고 말한다. 여러분 그렇게 말하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큰 출생의 약점을 가지고 있는 솔로몬이 왕위에 올랐다. 아마 그 마음과 떨림과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여러분 그리고 솔로몬이 여러 가지 사역도 있었겠지만 해야 될 사역이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 다윗이 그렇게 오랫동안 숙원 했던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것이다. 여러분, 이 성전을 지을 때 다윗이 모든 재원부터 건축할 것들을 준비했지만 이 건축을 누가 하는가? 이 건축은 사람이 하게 된다. 수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도해야 할 사람이 바로 이 솔로몬이다. 바로 자기가 다스릴 수 있을까? 과연 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으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에 두려움과 떨림이 바로 이 솔로몬에게 있지 않았겠는가? 역사적으로 보게 되면 어떠한 자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자리가 위태로우면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통치 방법이 있다. 피의 통치이다. 자기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내 피붙이라고 할지라도 다 숙청한다. 그리고 백성들이 아무 말도 못할지라도 억압과 핍박을 하며 피의 통치를 하게 된다. 솔로몬이 다른 왕들처럼 생각했다면 그렇게 동일한 방법으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한다.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면서 주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서 나아가 하나님께 지혜를 간구하였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오늘 본문의 내용과 똑 같은 내용이 역대하 1장에 등장한다고 했는데 물론 그렇게 나와 있다. 우리는 기브온 산당 그 지역 어디쯤에서 이 솔로몬이 하나님께 그렇게 간구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열왕기상 3장과 역대 하 1장에 나와 있는 내용에 약간의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바로 솔로몬과 하나님과 대화하는 그 공간적인 배경이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여러분 오늘 솔로몬과 하나님과 대화하는 공간이 바로 솔로몬의 꿈이다. 오늘 말씀에서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기브온에서 밤에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리라고 한다.
 
*열왕기상 3:5,
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열왕기상 3:15,
솔로몬이 깨어 보니 꿈이더라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서서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모든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하였더라.
-여러분, 여기 계신 분들 꿈을 한 번씩 다 꾸어보셨을 거라 생각한다. 꿈을 꾸게 되면 꿈속에 누가 등장한다. 내가 등장하지 않는 꿈은 거의 없다. 꿈은 내가 등장하기에 그 시점은 1인칭 시점일 것이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드려본다. 꿈에 여러분의 의지가 발현이 되는가? 쉽게 말하면 ABC가 있다고 가정해서 그중에서 내가 ‘A를 선택해야지, B를 선택해야지, 아니 C를 선택해야지’ 내 생각과 내 의지가 그 가운데 발현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내 꿈이고 내가 등장하지만 내 의지가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 꿈속에서 내가 그냥 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다. 이 시점이 일인칭 주인공 시점이 아니라 일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그래서 저는 혹시나 구약시대 때의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와 다르게 꾸나, 우리보다 고도로 발달되어서 그 꿈속에서 자기의 의지가 발현이 되었을까를 생각해서 다니엘과 요셉의 꿈을 살펴보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도 그 꿈속에서 지켜 볼 수가 있다. 무슨 말씀이냐면 우리는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만약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그 지혜를 구했다면 그는 그곳에서 일천 번제를 드리고 그는 계속 기브온 산당에서 머물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려야 될지 그 통치 방법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될지 모르고 있는 상황이다. 힘으로 해야 할지, 다른 무엇으로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꿈속에 찾아오신다. 그리고 네가 구해야 할 것이, 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스려야할 그 방법이 무엇인지를 그것을 가르쳐주신다. 그것이 무엇인가? 다른 열 왕 들처럼 힘으로 피의 통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혜로 솔로몬은 하나님의 지혜로 다스려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솔로몬이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솔로몬을 간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그 꿈을 통해서 가르쳐 주신다. 또 하나는 우리는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지혜를 간구했다라고 말을 한다. 맞다. 솔로몬이 구한 것은 맞다 역대 하에서도 그렇게 말씀한다. 오늘 말씀을 살펴보니 약간의 미묘한 차이가 있다.
 
*열왕기상 3:9,
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여기에서 솔로몬 엄격히 말하면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가르쳐주고 계시는데 지혜라고 언급하지 않으신다.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듣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성경이 개역개정인데 옛날 개역한글 여기에는 ‘지혜로운 마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했구나!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듣는 마음, 들을 수 있는 마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할 때, 듣는 마음이라고 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그것이 듣는 마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11절에서는
 
*열왕기상 3:11,
11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송사를 듣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과 솔로몬의 대화를 말하는가? 아니다. 송사는 사람과 사람과의 이야기이다. 그것을 듣는 마음을 원했던 것이다. 여러분 듣는 마음이 과연 무엇인가? 특히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가정에 어린 자녀나 손자들이 있는 분이 계실 것이다. 대 여섯 살 되는 아이들은 대체로 어린이 집이나 유치원을 다니게 되는데 그곳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내가 있었던 이야기가 있다고 할아버지 할머니께 들어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아이들이 말을 조리 있게 말을 못한다. 부모님이나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찾아와 이야기를 하면 긴장하게 된다. 이 아이가 하는 이야기 속에는 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맨 먼저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이 등장인물들, 그리고 우리 아이와의 관계를 속히 캐치해야 한다. 이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그 중에 누가 우리 아이와 친한지 누가 친하지 않는지를 구별해야 한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 빌런(악당)이 등장한다. 그래서 어떤 아이가 괴롭히는지, 어떤 아이가 친구를 괴롭히는지를 듣게 된다. 마치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을 때, 학창시절에 영어 듣기 평가를 듣는 것처럼 귀를 집중해야 된다. 무슨 이야기인지를 알아들을 수 없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를 듣고 그 알고 있는 단어를 통해서 전체를 유추할 수 있다. 그래서 아이가 어떤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가 들어가면 아! 그랬구나 하고 반응을 하게 된다. 부모님이나 할배 할매가 알아듣게 된다. 혹시나 아이가 이야기를 하는데 아이의 이야기를 중간에 끊고 아이야, 네게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도대체 하나도 못 듣겠어! 라고 하며 좀 더 생각해보고 천천히 이야기 해보라고 하는 분이 여기에 있는가? 그렇지 않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아이의 숨소리조차도 집중해서 듣고자 하는 모습이 있다. 왜 부모가 그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 아이의 목소리를 집중하며 듣는가? 바로 당연하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여러분 우리가 생각할 때, 세상의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라 이야길 할지 모르겠지만 오늘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셨던 그 지혜는 듣는 마음, 바로 그 사랑하는 한 영혼을 그 사랑 가운데 하나님이 지혜가 있음을 말씀하신다.
 
여러분 예수님이 그렇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한자는 누구인가? 예수님이 가까이 한 사람들인가? 아니다. 삽교를 보고, 수가성 여인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마리아 여인, 병든 자들의 모습을 볼 때, 유대인들은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신다. 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과 대화를 하신다.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신다. 놀라운 것은 그 듣는 예수님을 통하여서 그 가운데 신뢰의 역사가 나타나고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지혜는 바로 이러한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적인 지혜와 달리 내가 그 영혼을 향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을 때,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혜를 달라고 할 때, 그 지혜는 내 옆에 있는 지체에 대해서 그 사랑하는 마음, 듣는 마음이 가능할 때, 그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가 임하게 된다고 말한다. 본문 말씀을 읽지 않았지만 16절 이후에 보면 솔로몬의 재판의 내용이 등장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 잘 안다. 교회 나오지 않은 사람도 잘 알고 있다.
 
내용은 두 여인이 왕 앞에 나온다. 그리고 한 사내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솔로몬이 칼을 가져오라고 한다. 그리고 무엇이라고 명령하는가? 이 아이를 반으로 쪼개라. 그래서 이 두 여인에게 한 쪽씩 나누어 주라고 한다. 그 때 이 이야기를 들었던 한 여인이 왕이시여 그리 말하고 한다. 이 아이를 저 여인에게 주라고 말한다. 반대의 여인은 그리하시라고 한다. 어차피 내가 못 갖게 될지 모르니 서로 나누어서 갖겠다고 말한다. 이 때 솔로몬이 아이를 죽이지 말자고 말한 그 여인이 진정한 아이의 엄마이고 쪼개라고 말한 여인이 가짜라고 판결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로 솔로몬이 지혜의 왕이구나! 할 것이다. 이 단편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등장함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맞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묵상할 때, 핵심을 더 깊이 묵상하게 되면 솔로몬의 지혜가 단편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단지 그것은 아니다. 16절에 보면 이 여인이 어떠한 여인이라고 소개한가? 창기 두 여자이다. 창기는 이스라엘 회중에 들 수 없는 부정한 여인이다. 오늘날에도 어떠한 사람이 이런 일에 그런다면 언론이나 뉴스에 관심을 가질지는 모르겠다. 이 여인의 신분이 드러나게 되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듣기를 꺼릴 것이다. 그 이유는 부정한 여인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 아이는 사생아이니 너희는 그러한 여인인데 과연 모성애가 있겠냐는 것이다. 너희 둘 중에 아무나 누가 키운들 무슨 상관이냐고 그렇게 쉽게 생각할지 모른다. 여러분 이 두 여인이 아닌 진짜 어미가 더 맞는 말일 것이다. 진짜 어미가 처음부터 솔로몬 왕에게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왕을 만난다는 것은 그리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의 어마어마한 강대국에 그 통치하는 솔로몬을 만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만날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주위의 알고 있는 혹시나 아이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찾아갔을 것이다. 이 아이가 내 아이라고 봐달라며 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하기에 아무런 그 이야기를 듣지 않았던 것 같다. 결국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여인이 왕 앞에 찾아온다. 찾아왔을 때 그 궁전 앞에 몇 날 며칠을 울고 부르짖으며 왕을 만나기 위해서 외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 왕을 어렵게 만난다. 그리고 자기 이야기를 하게 된다. 세상 그 하나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기대도 하지 않았던 그 왕이 그 여인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 여인에 대해서 깊이 이해해보자. 여러분 이 여인이 처음부터 그렇게 음란한 곳에 빠졌겠는가? 아마 그곳에 갔을 때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과연 할 수 있는 마음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고 그 어떠한 사람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구나, 그런 밑바닥 같은 그런 자괴감으로 그 앞에 가지 않았겠는가? 어찌 보면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뜻하지 않게 계획했던 것은 아니지만 뱃속에 아이가 생긴 것이다. 나는 비록 사랑받지 못했지만 뱃속에 있는 아니는 너무나도 사랑하는 아이로 키우겠다고 출산을 다짐하며 기다린 것이다. 아무 희망도 없었던 그 아이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잃어버리는 일이 터지게 된다. 그런데 그때 솔로몬을 통해서 이 여인을 죽을 뻔 했고, 잃어버릴 뻔한 그 아들을 다시 찾게 된다. 이 여인에게 있어서 그 아이만 찾는 것을 끝났는가? 이 여인에게 있어서 더 구체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제가 상상하기로는 이 여인은 ‘나는 사랑 받지 못한 자니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으니 나는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그 마음 가운데 솔로몬의 그 듣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치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 여인을 두 번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여러분 우리가 듣는 마음을 가질 때, 나타나는 놀라운 치유와 역사, 회복이 바로 이것이다. 놀라운 지혜가 세상 적인 지혜로 말미암아 회복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지식과 지혜가 넘쳐난다고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반대로 힘들다고 한다. 그 어느 때 보다 힘들다고 말한다. 세상의 지혜와 지식은 어떠한가? 내가 옳다고 나의 가르침을 받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정말로 비참한 자리에 있는 그 영혼을 찾아가 그 어려운 이야기들을 들어주고 긍휼이 여기고 그렇게 함께 나눌 때 놀라운 회복이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치유와 회복이 여인에게 국한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솔로몬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여러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다. 그것은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 확신한 인식이 있을 때 그것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솔로몬은 핸디캡이 있다. 출생의 비밀이 있다. 솔로몬이 그런 생각을 안했겠는가? 나는 왜 정상적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게 태어나지 않았을까를 생각했을 것이다. 형들과 차이가 있고 형들에게도 구박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 나의 인생이 박하고 왜 이렇게 태어났을 것이라고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어떤 이름을 주시는가? “여디디야,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다. 너를 사랑한다.”는 이름을 준다. 그리고 그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왕이 되었을 때 나는 이제 왕이야 하면서 우쭐대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에게 있어서 정말로 미천한 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고 나를 세워주셨다고 그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고, 나에게 있어서 사람들은 창기라는 그 여인을 부정하고 말할 수 있지만 그에게 있어선 멀리하고자 하는 그런 영혼이 아니었다.
 
왜냐면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떠한 존재인지를 확고히 알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그렇다. 여러분들은 어떤 존재인가? 세상에서 어떤 권력을 잡고 있는가? 하나님은 그러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우리를 당신의 아들로 딸로 인 처 주셨기에 우리가 그러한 확고하다면 그 세상의 어느 이야기도 들어주지 못할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제가 사랑의교회 부임하기 전에 제가 겁을 좀 많이 먹었다. 제가 신대원에서 전도사들 가운데 사랑의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 전도사님이 하나도 없었다. 전도사들끼리 이야기를 많이 한다. 사랑의교회는 참 수준이 높다라고 말했다. 한 단편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목사님이 설교를 끝나고 난 다음에 내려가면 성도님들이 원어 성경책을 갖고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님, 오늘 보니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는데 어떤 것이 맞는지를 질문을 한다고 한다. 또 어떤 성도님은 주석책을 가져와서 목사님 아까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주석은 그렇게 표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임할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했다. 주님, 제가 설교한 다음에 그런 성도님을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참 감사하게 그런 성도님을 만나지 않았다. 모르겠다. 지금이라고 쫓아올지는 모르지만 그런데 제가 사랑의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전도사 시절에는 사랑의교회가 수준이 높다. 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사랑의교회 성도들은 참 지혜롭다는 표현을 참 달리 표현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다락방, 제자반 등에서 우리 성도님들의 듣는 연습이 너무나도 잘 되어있다. 청중의 모습이 아니다. 제가 제자반을 할 때, 한 여 집사님이 본인은 이야기를 한다. 가끔 평범하게 이야기를 하는데 저쪽 끝에서 한 집사님은 훌쩍 훌쩍 운다. 저는 고민한다. 저 집사님이 운다. 왜 울지를 생각해 보았다. 공감대가 있는지를 보게 된다. 돌이켜보니 다락방, 제자반 등에서 집사님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 마음이 준비가 되어 있고 그 사랑하는 마음을 집사님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다. 여러분 그렇게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실 줄 믿는다.
 
그 하나님의 지혜가 임할 때, 놀라운 치유와 응답을 경험하게 될 줄 믿는다. 오늘 모든 성도님들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받는 그러한 존재이다. 그런 성도님들임을 확신하며 그 사실을 잊지 말고 오늘 날 때로는 교회를 지탄하는 사람도 있다. 단 우리도 자녀들을 키우게 되면 부모님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 뭔가를 때리고 부수고 하는 아이들이 있다. 좀 잘못된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 아이는 그 행동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교회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를 할 때, 지금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하는 나에게 아우성이니 발견해야 하면서 그 영혼에게 다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가 임하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요약
-이 말씀을 솔로몬이 주님 앞에 듣는 마음을 간구했듯이 우리에게도 그 듣는 마음을 허락하시길 기도하며 세상의 지혜와 지식은 어던 것도 치유가 안 되듯이 우리는 한 영혼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며 듣는 마음을 가진 자가 되어 하나님의 지혜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의 자녀임을 깨달아서 그 사랑의 눈으로 옆에 지체들을 바라보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품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로 인해서 소외 되고 상처 받은 자들을 온전하게 주님의 자녀로 치유받고 회복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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