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주후 2020년 12월 23일)

제목: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
말씀: (레위기 10:1-7절)
설교자: 전승현 부목사님. 
--------------------------------

성경 말씀을 읽다보면 성경에는 참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인물들이 만들어 내는 사건들을 볼 수가 있다. 하나님은 이 인물들과 사건들을 통해서 또 하나님의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고  가르치시는 것을 볼 수 가 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런에 때로는 은혜보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은혜보다 마음에 큰 부담감이 있을 때가 있다. 말씀을 읽었는데 말씀 가운데 편치 않는 마음이 생길 때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을 통해서 큰 찔림이 있다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 오늘 본문 레위기 10장 1-7절은 개인에게는 은혜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마음에 불편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부담감과 불편함이 있다. 오늘 말씀에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나답과 아비후이다. 나답과 아비후라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한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가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에 그냥 평범한 히브리인이 아니었다. 그 12지파 가운데에 13개이지요. 12지파에 속하지 않고 따고 구별되어 있던 레이지파에 속했던 사람이고 또 이 나답과 아비후는 아론의 아들로서 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목사님이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즉사를 당한다. 그 자리에서 불이 나와 그들을 죽게 한다. 너무나도 끔직한 사건이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3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 말씀은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사장인데 성막에서 거하면서 주의 일을 감당했던 자들이다. 하나님과 가까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데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안타깝고 비참한 현실인가?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으며, 도대체 나답과 아비후는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말을 듣고 죽임을 당하게 될까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코로나로 말미암아서 성전에 가까이 나오지 못하는 그런 상황 가운데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 우리 말씀을 통해서 반면교사 삼고 은혜 나누는 이시간 되기를 바란다.

첫번째-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하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는 하나님의 그 거룩함을 분별할 수 있는 자여야 한다.
오늘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할 때 그들이 하나님 앞에 듣지 않았기
때문이며 잘못을 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절에 ~~
- 짧은 한 절의 말씀인데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나답과 아비후가 잘못한 3가지가 
살펴볼 수 있다.

1. 나답과 아비후가 분양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주의 일을 감당했던 제사장은 맞지만 제사장이 감당해야 할 일과 감당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분양단에 분양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제사장에게
맡기신 일이 아니다.
이것은 누구에게 맡기셨냐면 바로 아버지인 아론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대제사장이 할 일인 일을 월권을 하여서 하였다는 것이다.

2.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향로ㄴ를 옮기는 것은 정금으로 만든 그릇인 향로가 따로 있었다.
. 그런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무런 그릇이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으로 가져다가 이 불을 
옮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잘못된 모습이다.

3.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불이 아닌 다른 불을 담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분향단에 분양을 할때에 번제단에 불을 향로에 담아다 성소에 들어가 그 분향 단으로 분향을 해야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그 번제단에 있는 것을 가져다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자기 집에서 그냥 쉽게 볼 수 있는 불 종류를 하나님 앞에 분향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에 불이 나와 그들을 불사르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왜 나답과 아비후가 왜  이러한 실수를 했을까요??? 늘 본문에 10장에 보면 8장 9장 10장이 이어져 있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 일을 하찮게 여긴 것이다. 어찌보면 책무를 담당해야 하는데 거기에 메너리즘에 빠져서 지금 실수를 했을까요? 그렇지 않다. 8장에서 아론의 아들들이 위임식을 제사장들의 위임식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 앞에 제사장직을 받았을 때, 그들이 그 에봇옷을 입은지 불과 며칠 되지 않았다. 저역시 10여년 전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때에 하나님 앞에서 머리에 안수를 받고 목사 가운을 받았을 때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내가 무엇이관대 
목사로 나를 세우셨느지요? 했다. 주의 일을 감당을 하게 하심을 목숨을 다해서 하겠다고 결단했다. 나답과아비후는 잉크도 마르지 않았던 순수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메너리즘에  빠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실수로 이렇게 됐을지를 9장에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성막도 짓고 여러 성물들도 만들고 세사장 위임식을 하게 된다. 그리고나서 레위기 9장에서 첫 제사를 드린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제사를 드리는데 그 감격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어떤 제사보다 말로  형용할 수 없었던 제사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종살이 후 출애굽하여 처음으로 드렸던 제사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에서 십의 광야에 있을 때에 아픔이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특죄하게 된다. 바로 금송아지 사건이다.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을 버리게 된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시게 된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속에 그러한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우상을 만들었는데 행여나 하나님께서 이 광야에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까를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들은 금송아지 사건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혈육들이 죽어갔던 슬픔을 같이 가지고 있었다. 그런 두려움과 슬픔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9장 하반절 23-2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제사를 드렸던 그 제사를 흠향하시는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환호성을 지른다. 기뻐한다. 두려웠던 것 그리고 슬펐던 그 모든 것들이 이제 기쁨과 환희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순간 이스라엘 백성이 무엇을 베풀었겠는가? 아마도 축제를 벌렸을 것이다. 그리고 축제를 하면 빠지지 않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아마도 술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술을 많이 마셨던 것 같다. 10장 이후를 보면 아론과 아들들에게 주시는 주례이다. 9절에 -이 나답과 아비후 외에 동생들도 같이 술에 취한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성전을 섬기는 것에 열심은 있었던 것 같다. 그들 나름대로 아버지가 해야 될 일들을 그들이 대신하였고, 그리고 향로를 하나님 앞에 드릴 성물 향로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불을 가지고 분향을 해야 되는데 그들 나름대로 열심을 있었으나 분별을 못했다. 술취함으로 말미암아서이다. 그대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특죄를 하게 되고 하나님이 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10절에 말씀하신다. - 나답과 아비후는 술취함으로 거룩함을 분별하지 못했다. 그 거룩함을 분별하지 못했기에 결국은 하나님과 가까이 하지 못했다. 여기에서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라고 말씀 하신다. 우리는 거룩하고 속된 것이 서로 반대의 개념, 상반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과연 속된 것이 무엇인가? 거룩함을 알기 이전에 우리가 속된 것을 살펴보면, 히브리어 원어를 보게 되면, 이 속된 것으 하울이라고 말한다. NIV 영어 성경에는 이 속된 것을 무엇이라고 하냐면 COMMON이라고 표현한다. 바로 일반적인 것이다. 흔한 것, 평범한 것이다. 그 거룩이란 말씀이 너무도 귀하기 때문에 그 거룩의 반대의 개념은 추하고 부정하고 더러운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그 속된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나답과 아비후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지 아니한 그 불을 가져다가 하나님 앞에 분향했다. 그들이 가져간 번제단에 있는 불과 그들이 가져간 불이 화학적, 물리적으로 차이 있었겠나? 우리가 보기에는 같은 불이다. 우리의 인생도 그래요. 우리의 삶도 그렇다.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어떠한가?

우리의 모습도 세상 사람들고 별반 다르지 않다. 똑같이 먹고 자고 또 일하고, 학생들은 똑같이 공부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룩함을 나타내야 될 거룩한 모습은 무엇이고, 우리가 분별해야 할 거룩함이 무엇인가? 우리는 때로 그 거룩함에 대해서 그 거룩함을 너무 작은 의미로 축소하기도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생활이라 알면 우리는 하루 24시간 가운데 그렇게 기도하고 말씀보고 찬양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는 체 10%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 그 90%는 그저 세상에 속해 있는 우리의 모습인가이다. 아니다. 우리가 분별해야 될 거룩함의 모습은 바로 그 가운데 우리의 삶의 방향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무슨의미이냐면,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살아가는 모습은 같지만, 그러나 삶의 방향과 목적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 같이 먹고 마신다 할지라도 그 건강을 위해서도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이 식물을 통해서 건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모습, 그것이 '하나님 앞에 거룩'이라는 사실이다. 거룩이란 것이 고귀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내가 주어진 그 환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달려가는 모습이 바로 거룩함이다. 바로 분별하는 모습이며,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모습이다.  교구에 안수집사님과 권사님은 사랑부를 섬기시는 분이 계시다. 그 두 분을 심방하면서 여쭈어 본 기억이 있다. 그때 두분은 대답하신다. 목사님, 그 사랑부를 통해서 더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 새 힘을 얻는다고 대답하셨다. 몸에 육신에 연약함을 가진 자들의 지체들을 돌보는 것이 힘들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분은 말씀하신다. 최소한 사랑부 지체들이 육신의 장애는 있을지 모르리만 예배 드리는 순간 만큼은 그들이 비장애인이고 내가 장애인임을 느끼게 된다고 대답한다.  사랑부 지체들이 찬양을 할 때에 하나도 맞지 않지만, 화음이 다 다르다. 그러나 그 부부는 목청껏 찬양하게 된다. 하나님을 부르짖는 그 지체들을 보면 하나님을 향해서 외치는 것을 너무 간절히 느끼게 되었다. 거룩이 그렇다. 어떤 것으로 좋은 것으로 꾸민 것이 아니다. 부족해도 나의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이 바로 거룩함을 분별한 자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답과 아비후는 그것을 분별하지 못했다. 물론 술의 이유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 순간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했기 못했고, 하나님을 결국 가까이 하지 못했음으로 말미암아 그 앞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둘쩨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 그것은 하나님의 나에게 맡기신 관유를 수행할 수 있는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7절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 즉~~ 획막에 나가지 말라고 한다.
모세와 아론과 그의 두 아들은 죽었고, 세 번째, 네 번째 아들인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주는 말씀이다. 너희에게 관유가 있은즉 회막에 머물라고 명령하시고 있다. -바로 관유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올리브 기름에 향유와 몰약 계피를 섞어 만든 기름이다. 그리고 이 관유는 성막에 성물에 바를 때,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을 세울 때에 사용한다. 머리에 부은 것이 관유이다.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었지만 성경에서는 이 관유를 함부로 만들면 죽임을 당한다고 말씀한다. 관유는 오직 제사장들만 만들고 관리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 모세를 통해서 아론과 두 아들들에게 그러니까 조카들에게 말하고 있다. 명령한다. '관유가 있은즉'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형이 두명이나 죽임을 당했다. 슬펐을 것이다. 본문에 6절에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에게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고 한다. 슬픔을 표현하는 행동을 못하게 하신다. 슬픔을 이기라고 한다. 그 이유는 관유가 너희에게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각자의 관유가 있다는 것이다.
상징적인 말씀으로 그 관유가 섬김의 자리이다. 교회 안에서는 어떤 직책이 될 수도 있다. 또한 훈련생들에게는 훈련이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관유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떠한 상황이나, 여건으로 말미암아서 그이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는 것, 내 목숨을 다해서 감당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나아가는 제자되고 자녀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기어해야 한다. 슬픔조차도 이기라고 말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되기를 바란다.

셋째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가 어떤 자인가?
-앞에 두 말씀을 뒤집는 표현일지 모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가까이 갈 수 있다. 어린 자녀들을 보면, 엄마 아빠 곁을 떠나지 않는 아이들을 보고 아빠엄마 껌딱지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 아이가 엄마아빠에게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엄마아빠가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언제나 늘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한다. 당연히 믿지요. 때론 우리가 삶 가운데 의심을 할 때가 참 많다. 우리가 이틀 뒤면 성탄절을 보내게 된다. 성탄의 의미가 무엇인가?, 독생자 예수, 성자 하나님이 그 육신을 이끌고 이 땅에 오신 것이 바로 성탄이다.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고 하신다. 하ㅏ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이며, 바로 그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성자되신 성육신 사건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역하셨던 모습을 보라. 예수님이 먼저 제자들을 찾아가시고 예수님이 먼저 죄인들을 찾아가시고, 예수님이 먼저 병든자와 약한 자를 찾아가셨다. 가까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삭개를 봐도, 수가성 여인을 봐도 알 수 있다.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하고 있다는 사실이 성경을 통해서 다 살펴볼 수 있지만 요한 복음 21장에게 나와있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사건이 하나님이 예수님이 우리와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계신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그 사건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베드로를 찾아오신 것을 보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수님을 베드로가 모른다고 했는데도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너는 나를 사랑하냐고 하신다. 세번의 질문을 하시고 계신다. 뒤끝 장렬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도 우리 예수님은 인격적이시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21장 15절에 네가 나를 사랑하냐고 하시는데 조반 먹은 후의 시간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침을 차려주시고 말씀하신다. 그 질문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이 질문을 식사전에나 식사 중간에 했다면 베드로가 어떠겠는가?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혼낼때는 혼내시더라도 먹이고서 혼내심을 본다. 인격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 우리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내가 나를 사랑하냐고 세 번을 하셨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해서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를 듣고 기록해 놓았는데,,, 그저 아람어에서 헬라어로 옮긴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대화를 서로 다른 단어를 사용했다.

아가페와 필레오로 쓰고 있다. 아마도 다른 단어를 쓴 이유는 두 사람이 서로 대화했던 의미와 의도가 달랐음을 보여주고자 다른 단어를 썼다고 여겨진다.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냐고 세번의 질문을 하는데 그 질문은 동일하지 않다.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냐고 하신 것이다. 이 표현은 예수님을 이 비교 선상에 올려놓고 한 말이 아니다. 바로 베드로를 올려 놓고 있다. 베드로에게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많이 따라왔지만 그 사람들 가운데 바로 너인 베드로라고 질문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냐고 하신다. 그때 아가페라는 말을 쓰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현을 하신 것이다. 결국에는 이 질문이 "베드로야 그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는 자는 바로 너이겠지?"라고 하신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너도 나를 사랑하냐고 질문하신다. 베드로는 대답에 필레오로 하고 있다. 친구를 사랑하듯이 내가 주를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신다고 말하고 있다. 두번째도 앞에 나온 조건이 빠지고 아가페로 하신다.

그때 베드로는 필레오라는 것을 대답하며 친구를 사랑하듯이 말한다. 세번째는 아가페로 질문하시지 않는다. 이제는 필레오로 질문하신다. 네가 친구처럼 정말 사랑하냐고 하신다. 그때 베드로가 다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잘 아신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무엇을 질문하면서 말씀하시는 것인가?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는지 확인하고자 질문을 하셨는가? 깨닫게 하기 위해서인가?  그렇지 않다. 누군가를 사랑해보면 어떤가? 내가 사랑한 만큼 그렇게 해주길 원한다. 그것은 대단히 개인주의적이다.  사람이 하는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다.

우리 인간이 가진 사랑 중에서 절대적 사랑은 바로 부모의 사랑일 것이다. 부모들이 자녀를 사랑할 때 자녀들이 사랑을 하지 않아도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생명도 바칠 수 있다. 자녀가 나를 위해서 생명을 위해 바치는 자는 없다. 자녀에게 내가 그 만큼 사랑한다고 알아주라고는 할 지는 모르지만 동일하게 사랑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질문이 너도 목숨도 아끼면서 나를 사랑하라고 강요하시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3번의 질문을 하신 것인가? 목사님의 딸이 4살인데 아빠가 나를 좋아하냐고 한다. 너무 자주하면 장난이 치게 된다. 아니 안 좋아 한다고 했더니 다시 말해 보라고 한다. 결국은 대답은 좋아하는데 조금 좋아한다고 대답했더니 나는 아빠를많이 좋아한다고 대답한다고 한다. 다시 요한 복음을 묵상하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질문으로 보이지 않았다. 왜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것인가? 지금 갈릴리 바다에서 그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가? 세번이나 부정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났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을지 모른다고 할때, 예수님은 사랑하냐고 질문을 하신다.

그 질문이 아닌 예수님은 모두의 질문이 아닌 고백이다. '베드로야 나는 너의 친구란다' 하시는 것으로 묵상되었다. 너를 가장 사랑한다고 하신다고 하신 말씀으로 여겨졌다. 그 이후에 모습을 보면 베드로가 에수님께 찾아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다. 베드로에게 나아오셔서 만져주시고 만나 주시는 것이다.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계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있는 그곳에서 멀리 계신다고 느껴져도 주님을 만나겠다고 하면 돌아서는 그 순간 주님이 계심을 믿어야 한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심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것을 믿는 자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이다.

요약
-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 즉 제단에서 사르는 불이 아닌 다른 불로 분향을 했다. 그들은 여호와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한 것이다. 그들은 직무를 다하려는 열심이 있었지만 잘못된 신앙관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고 말았다. 따라서 교회에서의 봉사도 나 자신의 판단이나 경험에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방법과, 명령에 따라야 한다. 나답과 아비후는 불이 삼킴으로 여호와 앞에서 죽었다. 이처럼 영적인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제사를 소홀히 한 죄는 중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며 아론은 두 아들의 죽음 앞에 충격을 받았겠지만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현재 벌어진 사건을 묵묵히 인정했다. 우리에게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닥칠 때에도 그러한 상황을 허락하신 주님의 손길을 인정하며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참고 견디는 믿음이 필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코로나로 인해 부활절, 성탄절을 모두 현장예배를 못드리고 있다. 하나님 전에 나아오는 것이 쉽지 않지만,
하나님을 사랑했는지를 생각해 보고 낙망하지 말고, 그러한 삶가운데 주님은 함께 하심을 말씀하시고 너를 사랑한다고 하신다. 그 주님을 바라보면서 이 상황을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도록, 새해를 맞이해야 한다. 살아계신 한 분만을 붙잡는 자 되어야 한다.  주님의 사랑을 감사하며, 많은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무리 되어지는 이 시간들이 주님 앞에 온전히 나아갔는지 회개하게 된다. 그 가운데 주님 앞에 부족하지만 이 말씀으로 기억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자 되기를 사모하며 주님이 항상 먼저 함께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찬송하며 예배하기를 기도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거룩하게 살아야 하고, 이 어려운 코로나 시기에도 주님과 늘 가까이 하여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해 내어야 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