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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9월 17일) 제목: "고통에서 믿음으로 가는 길"(1부) 말씀: 마가복음 5:21~24, 35~43 찬양인도: 쉐키나(이다니엘 부목사님),영광찬양대 대표기도: 장은진 부목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시지 삐레이라 깔데스 목사님)-초빙-브라질 멕켄지장로교단 총재(1부)-통역 조영규 목사님 ----------------- *마가복음 5:21~24, 35~43, *마가복음 5:21~25,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마가복음 5:35~43,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좋은 아침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제가 이곳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함께 묵상하는 것이 저에게는 큰 영광이 됩니다. 먼저 감사드리는 것은 우리 오정현 목사님 저희를 이렇게 정중하게 환대해 주시고, 또 이렇게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먼저 저는 매켄지 장로교 대학교 153년 된 이 대학교의 이름으로 여러분들한테 문안을 드립니다. 그리고 특별히 저희가 150주년을 맞이해서 맥켄지 장로대학교에서는 오정현 목사님에게 명예박사를 받을 수 있는 그런 귀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오정현 목사님도 저희 매켄지에 대한 일원이십니다. 아멘. 저는 참 먼 데서 왔습니다. 불행하게도 저는 여기 한 분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리오데 자르에서 전용 비행기를 타고 뮌헨을 거쳐서 이에서 다시 이렇게 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동안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도대체 여기 와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때 저에게 확 떠올린 것은 바로 다름 아닌 그것은 바로 나, 역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제자이기 때문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기 때문에 일맥상통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로 하여금 이것을 목격했고 제가 아무도 모르는 사람 같지만 사실 이것이 저로 하여금 이 강단까지도 친근함을 주고 여러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눈 것이 우리가 한 형제임을 다시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유, 이 한 가지 때문에 우리는 이 자리에 함께 모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그 삶에 대해서 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에 대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해변을 중심으로 해서 사역하시고 여러 가지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예수님은 이 땅의 생애에 있어서 갈릴리의 그 광경을 통해서 여러 가지 일들을 활동했고 사역했던 것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해 주셨고, 그 예수님이 치유한 것 때문에 예수님은 질책을 받았고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았습니다. 특히 이 전에는 이 사람들이 돼지 떼를 잃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들보다 돼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내가 여기서 자리를 옮겨야 되겠구나!... 그리고 내가 꼭 내가 만나야 할 사람들, 나를 만나야 할 사람들을 향해 내가 말하겠다. 바로 오늘 이 장면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죽음을 맞이했으니까요. 여러분이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 주변에 있어 우리는 죽음을 늘 대면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여기도 분명히 많은 성도님들이 죽음에서 또 죽음 같은 그런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 이유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삶속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 우리를 죽음으로 끌고 갔으며,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앞에 만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도를 받게 되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바로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로 죽음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던 그 장면입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으로 찾아간 사람입니다. 먼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사람은 지금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환란 속에 처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사랑하는 딸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외향적이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고난과 환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에서 오신 것은 단순히 우리의 고통이 사라져버리고 우리의 모든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가 고통과 환란과 역병을 통해서 어떻게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 생명의 길로 찾아가는 것인지, 인도되는 것을 밝혀준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환란과 고통은 우리의 인생을 허무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로 하는 환란과 역경과 고난은 생명을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알아갑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이 환란과 역경 속에서 예수님 앞에 더욱더 가깝게 나가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김장 이문은 바로 그 회당장입니다. 그 회당에서 리더급 되는 야이로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종교인이고, 그 주변에서는 인정받는 사람이고, 그는 월납 사람으로서 정말 율법을 잘 아는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심지어는 자기의 위험과 자기 자격과 자기의 체면까지도 다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그는 믿었습니다. ‘나는 이분을 꼭 만나야 된다.’ 기쁘게 만나야 된다. 용기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은 늘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담대하라 용감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늘 우리 얘기한다. 담대하고 기다려라. 여러분, 이 담대함이 사실 우리는 표현되어지고 사람들한테 보여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야이로는 자기의 불안과 환란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세 가지 모습으로 드러냅니다. 오늘 저 마침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제 야이로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여러분 누가 꿈을 꿨습니까? 이 사람 겸손한 사람입니다. 누가 무릎을 꿇습니까? 자기가 이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무릎을 꿇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협과 능력이 확실한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사위로는 예수님과 대화를 했습니다. 이 야이로는 적극적으로 예수님과 대화를 했습니다. 그는 한 아버지로서 죽어가는 자기 딸의 그 형편을 인정했고, 그것을 이실 직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새로운 변화를 일으켜 주실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가정에서 자기 가족 중에 자기 딸의 죽음에서 살아나야 하는 일을 직시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주님을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주님 앞에 드러내야 할 것이 무엇인가? 내가 이토록 주님을 간절히 찾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이렇게 주님을 만나야 하고 드러내야 할 말씀의 이유는 무엇인가? 야이로는 예수님을 좋아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인정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가고,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은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의 딸이 살아날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무의식 속에서 이것은 좀 부정적인 생각과 힘든 건데 이것은 어려운 건데 이런 무의식적인 부정적인 생각을 없애야 합니다. 우리는 무의식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그 주변의 환경과 역경을 통해서 생각합니다. 나한테는 도무지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길이고, 나한테는 일어날 수 없는 길이며, 나는 안 되는 사람인가 보다. 라고 하는 그 생각을 없애야 합니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믿음은 삶까지도 움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의 고통과 환란을 인정하고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담대하십시오. 그 싸우기 전과 너무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는 담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우리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마당을 통해서 이 장면 속에서 이 사람 통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그를 인도하는지 아주 그것을 단계적으로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35절 이하부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그때서부터 예수님은 이제 야유의 집으로 사랑하시고 그 집에 있는 모든 문제를 변화시키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잘 아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저쪽 편에서 배를 타고 오셨습니다. 해변을 내리셨습니다. 그때 야이로는 그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는 잘 알다시피 야이로는 정말 예수님을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의 길을 향해서 가고 있는 도중에 이 중간에 정말 불청객이 뛰어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은 예수님은 마침내 그 회담장 야이로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에 들어가 있는데 여기에 보면 거기에 벌써 어떤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야이로의 집에 벌써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그 야이로의 집에 있었을까? 저는 잘 모릅니다. 우리는 그 이름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 아이로와 그 가정과 굉장히 밀접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담대 하라! 그리고 믿어라! 그리고 그렇게 확신적인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야이의 집에서 온 그 전달자는 얘기 했습니다. “예수님을 더 이상 괴롭히게 하지마! 그렇게 하지 마라 더 이상 예수님을 귀찮게 하지 마라. 당신의 딸이 이미 죽었다.” 이것은 사탄의 공격이요 이거는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그 간섭에 대해서 우리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도대체 누굽니까? 우리가 누굽니까? 말하기는 이제 협상 방법이 없습니다. 이젠 난 안 됩니다. 당신이 누구 길래? 이런 확신이 당신의 경험이 얼마나 많길래? 이거는 안 돼. 나도 해봤어 이제는 이거는 안 되는 일이야 세상을 봐 이것을 봐 이건 도무지 안 돼 당신이 보내신 누구 이길래?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또 여기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한테 더 이상 예수님을 괴롭히지 마라. 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그런 말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예수님을 생각해서 얘기한 것처럼, 예수님을 귀찮게 하지 마라 당신은 벌써 이미 다 끝났다 하고 얘기를 하지만은 이것은 오히려 예수님이 마치 예수님을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어떤 능력과 한계성을 알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완전히 상실한 것으로 하나님의 개입을 완전히 폐쇄한 것이며 그건 거짓말입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 것들이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제는 제가 뭐가 바로 진짜가 뭐가 정말 정말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왜? 예수님이 그와 함께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일어나는 일들이 아직 그 사건이 우리에게 부정적이고 그것이 불가능하게 보여도,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하리라. 36절에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야유에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5:36,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그것이 진짜입니다. 뭐가 진짜입니까? 담대하라. 믿기만 하라. 그대로 한다고 하시는 그 말씀이 정말입니다. 더 계속해야 할 것은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지금 우리의 머리를 얘기합니다. 니가 이해되는 것만 믿어라. 그리고 나의 경험을 봐라. 경험으로서는 무덤에서 돌아오는 사람이 없다. 우리의 감정은 완전히 우리의 감정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 상황과 분위기 모든 것들이 우리를 위축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바로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 그리고 믿어라! 내가 바로 너의 오직 한 소망이다. 내가 너의 길이요. 생명이다.” 이것은 우리가 브라질에서 부르는 찬양 찬송입니다. ♬절대로 낙심하지 마라 하나님의 모든 것을 얘기하신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기를 하나님이 날개로 너를 덮어주신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모든 것을 드러내신다. 하나님께서 너희의 고통 속에서 모든 것을 지켜주신다 내가 사랑으로 너를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널 지키실 것이다. ~~♪ 그러나 여러분들 기억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들어가셔서 그 집에서 모든 사람을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삶속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들까지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삶 속에서 우리가 정말 밖으로 버려야 될 것, 벗어버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회담장 야이로의 집에서 어떤 일들을 하셨습니까? 37절에 보면 예수님은 그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동반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5:37,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그 모든 무리들은 그 집에서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 집에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도 다 나라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모든 영향을 주는 사람들도 다 나가라고 했습니다. 내용 그 주님은 오직 그 야이로와 아내 그 부부와 그리고 자기의 새 제자 밖에는 없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자치 장례식은 다 끝났습니다. 이 구원의 핵심 구원의 다이아몬드 같은 핵심은 바로 죽음에서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간증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고,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하게 됐는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간증을 하다 보면 이런 것들로 그냥 우리는 습관화돼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전혀 새로운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또 이 중에 누군가는 오늘서부터 새롭게 정말 새 삶으로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모여 있는 우리들도 때로는 우리 가정을 우리의 삶을 청소해야 되고, 정리 정돈을 해야 합니다.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새로운 길로 가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에선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의 권세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그 야이로의 딸이 있는 곳에 들어오셨습니다. 그 두 손을 잡았으니 달리다굼! 이라고 얘기하셨습니다. 그 소녀는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12살 먹은 사춘기의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모든 사람이 놀랐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참 경이롭고 거기에 대해서 정말 그 환희를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죽음의 마지막 단어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아야 할 간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다시 새 생명을 얻었고, 그 구활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번에 영생을 갖고,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 우리의 간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성도의 자기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죽음을 향해서 창조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은 여기서 마지막 장면을 보면 얼마나 친밀하시고, 아주 개인적이고, 적극적이었는지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말했습니다. 시편 25편 14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시편 25:14, 1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유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오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주님은 친밀하십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과의 그 친밀한, 긴밀한 그 교제를 누리셔야 합니다. 잘못하면 우리도 이 야이로 회장단 집에 있었던 그 죽음 때문에 모이고, 죽음 때문에 말하는 사람들처럼 살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돕는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늘 부정적으로 죽음에 쫓기고 있고 그런 생각을 갖고 살게 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여기 야외 회담장 집에 모여서 정말 통곡하고 울고 괴로워하고 하는 거 우리는 늘 우는 걸로만 표현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긴밀한 교제의 자리에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다 바깥으로 나가게 했습니다. 이제 그 과정에는 그 가정 사도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제자들 또는 예수 그리스도 일도 있고 새 생명을 찾는 사람들만 거기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는 이제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사람들만 남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를 죽음의 상황에서 끄집어내어서 우리로 하여금 생명 새로운 삶을 살라고 그렇게 인도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야 할 믿음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의 가정을 청소해 주십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은 꼭 필요한 사람들을 우리 가정에 머물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죽음은 쫓겨났어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생명을 주기 위함이며 풍성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드립니다. ♧요약 죽음 같은 고난이 닥쳐올 때, 사망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과 능력을 의지하여 모든 불신을 몰아내고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낙심하지 말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야이로는 어린 딸의 죽음이라는 심각한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로 나아왔다. 이 문제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야이로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주님이 오셔서 손을 얹으시기만 하면 죽은 자신의 딸이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도 기도하며 믿음으로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야 한다. 이 길이 곧 문제 해답의 길이다. ‘달리다굼’의 의미 ( 5:41-42 )이 말은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는 뜻이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이적 중에서 죽은 자를 살리신 최초의 기적이다. 성도들은 믿음을 통하여 핍박과 환란 중에 도우시는 주님을 경험함으로써 위로를 받고, 부활의 소망으로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나가야 한다. 예수님께서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은, 육체의 죽음 후에는 부활이 있고,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리는 신적 권능의 소유자이시며, 예수님 안에 있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부활을 암시하셨다. 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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