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주후 2023년 1월15일)
제목: "세속화 극복"
말씀: 호세아 7:8~10,
11:8~9
찬양인도: 쉐키나(),영광찬양대(1부)
대표기도: 조충현 부목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 (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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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7:8~10,
7 그들이 다 화덕 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들의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그들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8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에 혼합되니 그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9 이방인들이 그의 힘을 삼켰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무성할지라도 알지 못하는도다.
10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들이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

*호세아 11:8~9,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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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오늘 말씀을 육신의 귀로만 듣지 말고 마음으로 영으로 말씀을 듣기를 바란다. 오늘 제목은 ‘세속화 극복’이란 말씀이다. 지난주일 날 우리가 갈렙을 통해서 40세때는 믿음복고 1.0을 썼고 85세에 45년이 지나서 믿음보고 2.0을 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래서 우리 사랑의 교회가 올해 45주년을 맞이하면서 믿음 보고 2.0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믿음 보고 2.0을 가록 막는 장애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오늘 이 말씀, 세속화를 놓고 우리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게 되었다. 우리가 어느 정도 세속화가 되었는지, 우리가 측정을 해보면 좋겠다. 세속화가 되어 있는데 이쪽은 순전하고 1로 잡고 세속화가 10이라면 1-10까지의 범위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인가? 2. 5, 8, 어쩌면 좀 오히려 정결한 분일수록 더 내가 오염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인류역사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기는 가장 부유하고 풍요롭게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상상치 못한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가정이 완전히 파괴가 되고 제가 말씀 안 드려도 너무나 타락한 문화들이 많다. 특별히 이 세속화에 프론트 라인에 세워져 있다. 그들이 배우는 역사, 그들의 교육, 문화, 디지털, 그들의 예술에 대한 모든 시각들,,, 어마 하게 세속화가 되어있다. 강력한 세속화게 찌들어 있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가운데 신앙과 삶이 분리되어 있다고 오래 전부터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세속화의 문제는 이중성에 관한 것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뒤집지 않는 전병(煎餠)이 나오는데 전은 구울 전이며 병은 떡 병 자이다. 그러니까 구운 떡을 말하는 것인데 이중적이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을 보면,
 
*마태복음 7:22~23,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어떻게 보면 신앙 좋고 어떻게 보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우리들 같은 경우는 이런 말씀을 들으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러니까 사람 앞에 있을 때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하나님과 나와 독대할 때 나는 과연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이다. 이것이 이중성에 관한 이야기 이다. 섬뜩한 것이다. 겉으로는 말씀도 잘 아는 것 같고, 대단한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신앙의 이중성을 주님은 지금 이중성을 질타(叱咤)하고 계신다. 그러니까 이중성의 대한 극복이 세속화의 극복인 것이다.
 
저는 국밥은 따로 국밥을 좋아한다. 그런데 삶은 따로 국밥이 되면 안 된다. 이중성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교회생활은 열심히 하는데, 사회생활이나 생활 인격은 바뀌지 않는 자가 있다고 치면 교회생활과 사회 삶이 따로 논다. 이것이 이중적이 되는 것이며, 이게 왜 이렇게 큰 문제가 되는가? 선대 옥한흠 목사님은 제자훈련에 대한 말씀을 할 때, “만일 이중적인 이런 사람들이 겉으로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삶은 따라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만약에 이런 사람들이 제자훈련의 대한 과정을 마쳤다는 이유로 이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인정한다면 그것은 교회 세속(世俗)화(化)를 촉진(促進)하는 화를 자초(自初)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우리는 예수 믿지 않은 사람들은 그냥 도덕적인 본능이라든지, 그 다음에 어떤 육신적인 본능이 있다. 그러나 영적인 본능인 새로운 본능의 자아가 생겼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중성의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오죽하면 바울 사도 같은 경우는
 
*로마서 7:24,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에게 다 말은 못하지만 나름 이중적인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거는 죄 성을 가진 인간, 우리가 완전히 주님 앞에 도달하지 않을 데까지는 우리가 약점들이 다 있기 때문에 영원한 과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는 이중성의 문제가 심각해질 때에는 영적인 힘을 다 잃어버리는 것이다. 영적으로 약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보고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 그리스도인은 세속화의 거친 파도에 맞서가지고 힘을 다하여 사력을 다하여 자신을 지켜야 하는가? 세속화를, 신앙을 잃게 하는 마치 삼손에게 있어서 힘의 근원인 머리카락을 자르는 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속화는 그리스도인을 오합지졸(烏合之卒)로 만드는, 삼손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가위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인의 수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세속화 되어 있다면 삶의 영역에서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이다. 세속화에 물드는 신앙인은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뿜어내지 못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영향을 끼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드릴라의 그 여인의 가위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맡긴 삼손을 보면서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세속화의 가위가 우리의 머리카락을 자른 것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심한 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드릴라가 삼손의 머리를 잘라서 세계 최초의 미용사가 드릴라이다. 그런데 삼손이 자기의 영적인 힘이 나가는 줄도 몰랐다. 어떻게 보면 삼손이 세속화인 것이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가 세속화 될 때 어떤 위험이 일어나는가? 껍데기는 변한 것 같은데 속이 변화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예수 믿는 사람이 세속화 되어서 영적으로 병들거나 약해 보일 때, 우리 주님이 얼마나 안타까워하실까? 를 가지고 살펴보도록 하겠다. 뒤집지 않는 전병과 보이지 않는 백발을 말씀하겠다. 오늘 이 말씀의 본문의 배경은 2700여 년 전에 살았던 호세아 선지자가 당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하는 것이다. 그 시대 사람들도 오늘 날과 비슷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영적인 능력이 탈진되고 세속화 되고 이중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뜨럽게 표현한 본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8절을 보자.
 
I. 뒤집지 않는 전병, 보이지 않는 백발.
 
*호세아 7:8,
8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에 혼합되니 그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에브라임 혼합주의를 질타하는 것이다. 잘 아시듯이 북쪽 이스라엘 나라는 이제 열 지파로 되어 있었는데, 오늘 여기를 보니까 이스라엘을 거의 에브라임이라 이스라엘이나 같이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에 호세아 시대에, 북쪽 이스라엘 이 시대에 여로보암 시대인데 이때는 북쪽 이스라엘이 세상 적으로 볼 때는 가장 강력하고 경제적으로 번성하고 강력한 나라였다. 사실 이 에브라임은 에브라임의 어머니가 아스낫이라고 이집트의 제사장의 딸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집트의 어떤 문화가 있었던 사람인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요셉과 결혼함으로 말미암아 에브람임이 나왔다. 에브라임은 둘째 아들이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인데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 요셉 대신에, 야곱을 통하여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야곱이 마치 손자를 아들처럼 양자처럼 삼았다. 그러면 그것이 너무 감사해서 그냥 충성하고 한 결 같아야 되는데 그런 에브라임이 오늘 같이 와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북왕국 이스라엘이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세상과 섞여서 아주 그냥 혼합화 되어서 세속화 되어서 혼잡이 되었다. 문제는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부끄러워하고 죄송해야 하는데 오히려 자신만만하고 교만했다.
 
*호세아 7:10,
10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들이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북 왕국은 가장 강력하고 경제적으로 번성하고 강력한 나라였다. 그런데 그 내면을 살펴보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면 앞에 4절을 보면 알 수 있다.
 
*호세아 7:4,
4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라 과자 만드는 자에 의해 달궈진 화덕과 같도다 그가 반죽을 뭉침으로 발효되기까지만 불 일으키기를 그칠 뿐이니라.
-화덕은 우리식으로 말하면 아궁이 같다는 뜻이다. 달구어진 화덕, 달구어진 아궁이와 같다는데 이것은 늘 마음이 늘 달궈져서 언제든지 영적인 간음을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소위 혼합적인 것이다. 세속화 되어진 것이다. 달궈진 화덕이란 말은 희브리어로 돌아가면 습관적인 죄를 범한다. 는 뜻이다. 주일에 말씀을 들을 때는 도전도 받는 것 같고 깨끗해지는 것 같다가도 집에만 가면 똑 같은 죄를 또 범하고 또 범하는 것이다. 이런 악한 사람들에 대해서 6절에 보면,

*호세아 7:6,
6 그들이 가까이 올 때에 그들의 마음은 간교하여 화덕 같으니 그들의 분노는 밤새도록 자고 아침에 피우는 불 꽃 같도다.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하지만 속마음은 화덕처럼 아주 그냥 이글이글 뜨거워지는 것이다.정치적 이중성 때문에 그들은 네 번이나 반역을 했고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하지만 속마음은 화덕처럼 이글이글 하고 있고, 뜨거워져 있다. 실제로 이들은 정치적인 이중성 때문에 북 왕국 말기에 네 번이나 반역(反逆)을 해서 왕조가 네 번이나 바뀌는 아주 궁중 안에 (음모)陰毛와 반역과 (배신(背信)이 횡횡하고 頻煩(빈번)했다. 이런 문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7절에 보면,
 
*호세아 7:7,
7 그들이 다 화덕 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들의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그들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이 세속화를 심각하게 생각해서 이 세속화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고민하면서 주님께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지금 응답하고 싶어 하시고, 하나님은 지금 세속화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시고, 하나님은 지금 사람을 바로 해드리고 싶어 하시는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고 있는데, 구하는 자가 없다고 하신다. 영적으로 무디어져가지고 신경세포가 죽어버렸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은 에브라임 지파 이스라엘에게 많은 은혜를 주시는데 영적으로 세속화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면서 영적인 가난뱅이 생활을 하면서 세상 적으로 차이도 없고 영적으로 동화되어가지고 물에 물탄 듯 미지근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 이것은 우리와 비슷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속성이 다 있는 것을 가지고 고민 고민하고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속성이 다 있다는 걸 가지고 고민한다. 어떻게 보면 그 시대의 사람들이나 오늘 이 시대를 돌아보면 우리 속에 있는 어떤 이중성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도긴 개긴 이다. 그때나 지금이 도친 개친 이다. 지난 70년 한국을 이와 같이 8.15해방, 6.25, 지난 70년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하늘의 복을 열어가지고 꾸어줄 질지언정 꾸지 않은 나라가 되게 하시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세속화의 덫에 걸려버렸다. 그래서 8절에 보면,
 
*호세아 7:8,
8절에 에브라임 여러 민족 가운데에 혼합되니 그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
-우리 개인도 이런 성향이 있고 우리 민족도 이런 뒤집지 않은 전병 같은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달궈진 화덕 위에 떡을 굽는데 어느 시점에 되어가지고 딱 뒤집지 않으면 한 쪽은 새까맣게 타고, 한 쪽은 설익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무디어져서 자기가 설익은 있는지도 모르고 뒤집지 않아가지고 겉으로 보기에는 다 익은 것 떡 같지만 적적할 때 뒤집지 않으니까 설익은 떡이 되니까 이걸 보고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고 한다. 한 쪽은 새까맣게 타고, 한 쪽은 설익게 되어 요즘처럼 오븐이 있거나, 전자레인지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뒤집지 않으면 한 쪽은 새까맣게 타고, 한 쪽은 설익고 중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도 그런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소위 반쪽짜리 숙성이라는 것이다. 온전하지 못한 모습인 것이다. 성경에서 야곱이 말한 대로 두 마음을 품은자이다. 이중적인 생활이다. 예배할 때는 그럴듯한데, 나가면 세상 사람들과 똑 같다는 것이다. 공적예배와 생활예배가 완전히 이중적이라는 것이다. 겉으로는 예수 믿는 사람 같은데 세상 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정통적인 신앙 행위가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뒤집지 않은 전병이 도니까 영적으로 약해져 버린 것이다. 내면이 실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9절에 보면,
 
*호세아 7:9,
9 이방인들이 그의 힘을 삼켰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무성할지라도 알지 못하는도다.
-속 사람의 힘이 다 빠져가지고 백발이 무성할지라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백발이 얼룩해서 진액이 빠지게 된 뜻이다. 겉으로는 백발이 무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맥이 빠진 것이다. 젊음의 신앙이 영적 패기가 사라지고 젖줄이 끊어진 아이처럼 얼굴이 노랗게 되어서 가시밭에 떨어진 것 같이 진액이 빠져서 메마르고 노래진 것이다. 무디어진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무감각해지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신경이 죽으면 아프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신경이 죽으니까 무디어진 것이다. 여기서 받는 교훈은 하나님의 자녀가 동요되어 뒤집지 않는 전병처럼 사는 속사람이 힘을 잃고 영혼의 사람이 얼룩얼룩 백발같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번 주에 여성분들, 권사님들께서 이제 전(煎) 부칠 때, 전을 딱 뒤집으면서 “주여, 뒤집지 않는 전병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하기를 바란다. 다시 뒤집지 않은 전병(煎餠)은 한 쪽만 익은 전병은 절반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 너무나 절반의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헌신을 드리는 것 같은데, 아나니와 삽비라처럼 절반의 헌신을 드리고,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고, 절반의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 온전한 그리스도인대, 절반의 그리스도인, 하나님은 우리를 절반의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지 않으신 줄 믿는다. 주님의 구원(救援) 역사는 절반의 구언역사가 아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한 피의 역사는 온(溫)전(全)한 역사인 줄로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을 보라, 온전한 구원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올려 드려야 하는 것도 절반의 헌신(獻身)이 아니라 온전한 헌신, 온전한 예배(禮拜), 온전한 드림이다. 그래서 절반의 헌신, 이중적인 신앙에 대해서 오늘 보면 어떤 것이 대표적인가를 보여준다. 요한일서 1장을 보면,
 
▷이중적인 신앙, 절반의 그리스도인.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는 자(요일 1:6).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요일 2:9).
*겉은 깨끗하나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자(눅 11:39)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요일 4:20)
-아주 이중적이다.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삶의 현장에서 겉으로는 교회생활 열심히 하고, 아주 단정하고, 참 신앙생활 잘 하는 것 같은데, 특히 남자 성도 분들 가운데 집에서는 가족들에 대해서 함부로 말을 하고 상처를 주고 자신의 분노(憤怒)를 제어(制御)하지 못하고 폭발(暴發)하고 가정을 살얼음판을 만들고 그리고 항상 자신이 옳다고 한다면 이것은 뒤집지 않는 전병이다. 어떤 권사님은 교회에서는 친절한데 집에 가면 자녀들이나 며느리들한테 쌍심지를 켠다는 것이다. 뒤집지 않은 전병이다. 요새는 또, 며느리들도 며느리 시집살이를 시키는 며느리들도 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가 100%의 자유로운 사람이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 부족하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이 도전이 되는 것이고 이런 말씀을 통과해야 우리가 부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으로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씀이 내게 와 닿고 내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영적 신경이 살아있는 것이고, 들어도 무 덤덤 하는 자는 설익은 사람이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 교회 모두, 다시 한 번 한국교회가 2023년이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가게 해달라는 원년이 되도록 우리 마음의 소원이 있고 기도의 제목이 있다면 설익은 뒤집지 않는 전병 같은 분들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떡하면 좋는가? 오늘 본문에 11:8-9절에 보면, 주보에 요절처럼 올려놓아다.

*호세아 11:8,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며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붙들듯 하도다.
-주님의 목자의 심정을 오늘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이중성과 세속화에 대해서 제가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도 하나씩은 다 관계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 있다. “하나님 아버지, 그렇다고 우리가 나가떨어지면 안 됩니다. 주님의 심정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아드마와 같이 내가 스보임 같이 너를 놓겠느냐는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같이 불탄 성들이다. 어찌 너희가 내가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한 대로 그냥 둘 것인가!!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 주님은 우리의 마음이 우리가 이렇게 좀 부족하다고 해서 우리가 연약하다고 해서 스스로 자책을 해서 나가떨어진다거나, 주님은 그냥 우리를 꾸짖기만 하신다거나, 아니면 우리를 질타하고만 하신다거나 우리를 찌르시고 우리를 상처주시는 것이 주님의 목표가 아니다. 주님은 어떠하든지 우리를 회복하게 원하시는 것이다. 싸매어 주시려 하신다. 어떠하든지 베드로가 이 마음을 깨닫고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베드로후서 3:9b,
9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신구약 전체를 통틀어서 우리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 모두가 다 뒤집지 않는 전병 신세가 되어가지고 설익어서 식탁에 제대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맛을 잃은 소금처럼 버려지는 것을 주님은 안 원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오늘 영저인 센스와 통찰력을 다시 회복하여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주님의 심정을 깨달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주님의 목자의 심정을 깨달을 수 있는가? 다른 것 없다. 말씀의 거울에 우리가 규칙적으로 우리가 되돌아보아야 한다. 말씀의 거울을 가지고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여러분은 거울을 안 보면 이에 영구처럼 이빨에 낀 것처럼 낀 것도 모른다. 부끄러운가? 말씀으로 우리를 살펴야 한다. 지난 2주간 동안 큐티를 하든 주일 메시지를 듣든 성경을 통독을 하든 훈련을 통해서 말씀과 접해서 지난 2주일 간 한 번도 말씀을 통하여 도전 받는 일이 없다면 그러면 마음이 틀어져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6개월을 접해도 도전이 없다면 이것은 심각하고 영 세포가 죽은 것이다.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은 말씀의 거울로만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가 있는 것이다.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추어보면 나의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간절히 매어달릴 수밖에 없다. 주님의 목자의 심장을 깨달은 자는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는 사람과 같다. 도대체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춘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가? 이런 뜻이다.
 
※어떤 사람이 당뇨와 혈압 때문에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지금 체중조절 안 하면 큰일 났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제 체중조절 해야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체중조절 교실에 갔다. 건강을 위하여 체중조절 하는 김에 자기의 어떤 몸도 개선하고 싶어가지고 남자든 여자든 그녀로, 다이어트 교실에 등록을 했는데 PT 트레이너가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뭐냐면, 당신이 거울에다가 당신이 되고 싶은 몸 모습을 한 번 그려보라고 했다. 그런데 자기가 거울에다 자기의 모습을 그려놓았는데 자기의 모습을 자기의 몸과 대입해 보니까 엄청 났다. 넘쳐났다. 초과되었다. 그래서 그분은 운동을 하고 음식을 조절하고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몸은 줄기는 했지만 거울에는 윤곽에 아직 다다르지 못했다. 더 조심하고 더욱더 열심히 운동을 하고 엄격하게 음식을 조절하고 그러던 어느 날 그 거울에다가 걸어놓은 자기의 몸매의 모습과 딱 들어맞았다. 이때는 아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가 말하는 요지는 이것이다.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의 모습이 있다. 저도 모습, 하나님의 원하시는 저의 모습이 있다. 이중적이지 않는 세속화 되지 않는 저의 모습이 있다.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저의 모습에 말씀과 기도의 컨트롤, 말씀과 기도의 훈련과 다이어트를 통하여 맞춘 것이다. 그래서 주의 말씀에 거울에 비추어진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세상적인 욕심으로 아니면 죄가 주는 쾌락으로 혹은 미움의 마음으로 또 습관적인 죄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몸매와는 거리가 먼 것은 아닐까? 여러분 다이어트가 쉽지가 않다. 세속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그만큼 쉽지가 않는 것이다. 다른 길이 없다.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추어보는 것이다. 규칙적으로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이다. 우리가 영혼의 사람이 약해지면 우리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결국 영혼의 속사람과 영혼의 사람이 약해지는 것이다. 남편 잘못만나서, 아내 잘못 만나가지고, 무슨 물질의 문제가 있어가지고, 누구누구 때문에, 이런 것은 둘째 치고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의 영혼의 사람이 약해진 것이다. 육체가 아무리 건강해도 영혼이 망가지면 우리 영이 썩어지면 인생이 고목처럼 쓰러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 영혼이 건강하려면 이중성 세속화 뒤집지 않은 전병 신세를 뛰어넘어야 할 줄 확신한다. 그러니까 말씀의 거울 앞에 돌아오고, 주님의 심정 앞에 돌아와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이 너무 어렵다. 이유가 무어냐? 스마트 폰 때문이다. 퇴직하고 나면 대부분 스마트폰을 보면서 본인에게 맞는 알고리즘에 시간을 보내고 있다. 좀 재정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치고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다. 젊은이들은 젊은이대로 대한민국은 모두가 다 전철을 타면 모두가 다 기도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말씀 앞에 거울 앞에 내 자신을 비쳐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우리는 이중성의 세속화를 극복하기가 너무 어려움에 당면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사람들은 하루 평균 5시간 정도 스마트 폰에 시간을 보내지만 한국 사람들은 잘 아시듯이 평균 8시간이라고 한다. 말씀 앞에 자기를 돌아볼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고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볼 그런 삶의 현장이 실제적으로 안 되는 것 같다. 그러니 이것을 미리 예견하고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딤전 4:13,
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읽는 것은 Reading이고, 권하는 것은 Preching이고, 그리고 가르치는 것은 Teaching이다. 말씀을 리딩 하고, 말씀을 프리칭 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것인데 디모데 입장에서는 이렇지만 디모데의 이 말씀을 통하여 사역의 대상인 그 회중들의 입장에서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 리스닝 하는 것이다. 이것을 듣는 것이다. 설교를 듣는 것이다. 그리고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우리 교회로 말하면 가르침을 받고 만약에 말씀을 통하여 양육되어서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디사이플 메이킹을 하는 것이다. 영적 재생산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의 몸매를 자기가 원하는 수준으로 갈 수 있도록 사랑의 교회는 제자훈련이 있다. 매일 성경을 읽기가 있다. 사랑의 교회는 ‘날마다 솟는 샘물’ 큐티 책이 있다. 심지어 큐티 틴에이저도 있고 일본, 중국 사람도 큐티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말씀의 거울 앞에 자기를 비추어볼 수 있도록 그리고 깊이 있게 살펴보려면 사랑글로벌 아카데미 같은 그런 프로그램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이러한 우리가 이 한 해 동안 말씀 앞에 자신을 돌아보고 적어도 2주일에 한 번은 말씀을 통한 깊은 도전을 가지고 세속화의 어떤 속성 가운데 이쪽으로 넘어가지 아니하고 더 주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반절만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길 소원한다. 이걸 호세아가 미리 깨닫고 호세아 6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호세아 6:1~3,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와 우리 민족도 주님 앞에 돌아가자.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를 신뢰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믿음보고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하나님이 우리를 낫게 하시고, 우리를 싸매어 주시고, 살리시고, 일으키실 것을 믿고 말씀으로 달려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믿음으로 2.0 믿음보고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3절에 보면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뒤집지 않는 전병 신세를 그만 두고 머리가 얼룩얼룩 해서 영적인 속사람이 능력이 약해진 것을 그만 두고 결과가 그렇게 된다.
 
*호세아 7:11,
11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
-애굽으로 가야되나, 아니면 앗수르로 가야되나, 막 횟갈리는 것이다. 어리석어서, 방향도 이러 저리 흔들려서 방향도 못 잡는 그런 뒤집지 않는 전병 결과로 백발이 얼룩 얼룩 하는 것과 그런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되지 말고 어떻게 되는가? 여호와를 알고 힘써 알자, 사랑의 교회나 한국교회에 베풀어 주시는 이 말씀의 앞에 자신을 거울 앞에 비추어보는 무엇보다도 사랑의 교회는 다락방이 있다. 이제 2월 달부터 다락방이 오픈을 할 텐데 방학 지나고 말씀 앞에서 우리가 돌이켜 볼 때, 스가랴를 통해서 자신을 돌이켜 볼 때 , 하나님께서 우리의 세속화와 이중성을 방지해 주실 줄 믿는다. 제가 이 말씀인 호세아서를 보면서 제일 감동된 부분이 호세아 14장 8절이다.
 
*호세아 14:8,
8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하나님이 푸른 잣나무이시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푸른 잣나무가 될 수 있다. 그런 푸른 잣나무가 되어가지고 우리가 세속화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시대를 향하여 수많은 믿음의 열매를 맺도록 만들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의 열매를 맺도록 만들어 주시는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적용하여 말씀의 거울 앞에 우리가 서서 함께 돌이켜 보자 많은 사람들이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을 돌아보며 훈련을 받으라고 하면 시간이 없다고 한다. 왜 말씀 앞에 이 중요한 시간을 내지 않는가? 아직도 한국교회 내에 교회 다니는 분들 중에 뒤집지 않는 전병들이 너무 많다. 뒤집지 않는 전병을 극복한 신실한 주의 종들을 통하여 모두가 다 이런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집중하여서 이 겹, 삼 겹줄이 되어 오 겹줄이 되어가지고 다시 한 번 한국교회가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기를 소망한다. 우리 속에 이중적인 것과 세속화 된 것들을 습관적인 죄악들, 달구어진 화덕들, 뒤집지 않은 전병들이 정리되는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길 소망한다.
 
요약
-아직도 세속화의 거친 파도 앞에 굴복되어져서 뒤집지 않는 전병처럼, 어리석은 비둘기처럼 우리 성도들이 있다면 말씀에 비추어져서 주님 앞에 다시 돌아오는 자가 되어 말씀의 능력으로 치유하시고 싸매어주시고 일으켜 주심을 확신하여 푸른 잣나무처럼 열매 맺는 평생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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