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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예배(주후 2020년 8월23일)

제목: ''위험을 무릎쓰고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

말씀: 46:1~7

설교자: 김지찬 목사님 초빙(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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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이때 일수록 당당하고 품위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 지금 펜데믹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말하려고 한다. 따라서 성경에서 찾는 동시에 신앙의 선배들이 전염병의 펜데믹에서 어떻게 과거에 대처했는지를 알고 싶어서 마틴 루터가 흑사병을 경험하고 서신을 기록해 놓은 것을 번역했다. 루터 시대에는 흑사병의 펜데믹이 있었기 때문이다. 흑사병은 피부에 종기가 생기면서 피부가 까맣게 생기는 전염병으로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발병한지 8일 만에 사망하는 치사율이 높은 병이었다. 유럽을 간헐적으로 몰사를 당하는 일이 있었다. 모두가 무서워서 상가도 의원도 문을 닫았다고 한다. 임신 아내도 팽개치고 피신하는 자들도 있었다고 할 정도이다. 그런데 종교개혁이후 흑사병이 루터 동네인 비히텐부르크를 덮치게 되었는데, 루터는 도시에 나가서 피신하지 않는 자들을 위해 영적으로 위로하고 돌보는 사역을 감당했다. 주위 친한 사람들이 다 죽게 되었고, 부인도 임신 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집을 병원으로 사용했다. 그만큼 그도 자주 현기증으로 뇌빈혈로 자구 쓰러지게 되어 설교를 멈추게 되었다. 지속적으로 일어나자, 후배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심각한 지병을 앓았으며 그는 흑사병을 앓는 자들을 보살피며 돌봤다. 그 위기에서도 그는 남아서 신자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주는 강한 성이요’를 작사하고 작곡한 것은 사탄을 물리치고 흑사병으로부터 이기고 주님의 위로를 받기 위한 곡이다. 우리도 이 펜데믹에서 이겨낼 힘은 바로 위로이다. 이 큰 환란 가운데 루터가 가장 위로가 되었던 말씀은 시편 46편이었다. 4절 5절에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이 시편을 읽고 감동을 받아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가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시인이 천재지변과 같은 재난 가운데서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떠한 천재지변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안전한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여기에서 용기를 얻어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시를 썼듯이 우리의 삶이 절망하게 될 때의 유일한 피난처는 세상의 권력과 부귀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품이다. 시편 기자는 자연재해를 말한다. 지진으로 흔들리고, 산, 해일, 바다로 모든 것이 흔들려도 시편 기자는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피난처인 하나님은 환난 중에 피난처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것과 왕국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

 

  ▷산 ↔ 왕국, 바닷물 소리  ↔ 뭍나라가 소리침.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연재앙과 인간 재앙을 나누지 않고 서로 시편 기자는 연결하기를 원한 것으로 보인다.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자연재앙이나 인간재앙등도 인간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코로나 19사태도 마찬가지로 자연재해와 인간재해가 연관되면서 우리의 고통은 배가 시키고 있다. 처음에는 자연재앙으로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정치, 사회에 연결되면서 국가와 사회와 존재의 기반이 심각하게 흔들리는 것을 우리가 지금 온 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강대국 지도자들의 말 한 마디에 전 세계가 요동을 치고, 나라마다 감염 병 대책을 놓고 내부적으로 균열을 일으키며 흔들리고 있다. 정부의 지도자들이 백성들의 안전을 겸손하게 최우선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들의 정치적인 욕망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총체적인 계산을 하게 되면 자연재앙이 인간재앙으로 바뀌고 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단순히 자연재해만이 아니다. 인간의 죄 된 본성이 다 쏟아져 나오면서 인간의 사악함의 펜데믹을 만들어 내고 있는 실정이다. 어찌되었던 루터는 흑사병을 적대자인 교황과 황제가 만들어내는 안간 재앙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은 항상 그의 곁에 존재하는 도움이시며, 매우 현재적인 도움임을 경험했다. 루터는 엄청난 시련을 겪었지만, 파문을 당했기에 너무도 어렵고 누구에게도 도움도 없게 되었는데도, 심각한 종교개혁이 최초에 놓이게 되어가도, 루터는 개인, 교회, 정치, 신학적, 사회적 상황은 시편의 46편과 매우 흡사하다. 뭍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리고 개인적으로는 박해와 시련으로 불완전한 상황에서 세상과 싸워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시편 46편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와 힘이시니 환난 가운데 항상 현존하는 도움이라” 이것이 루터에게는 위로였으며 또한 ‘내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양시를 작사 작곡했던 것이다. 가사를 보면 정말 위로가 된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

 

요약

마틴 루터 흑사병 이후 (치사율75%,쥐벼룩)

비히텐베르크 교회에서 환자들 돌보게 되었다. 친한 신자 부목사 아내아이 흑사병 걸림으로 집을 오픈하고 환자들 치료에 도움을 주었다. 루터도 뇌빈혈로 쇼크가 자주 오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내주는 강한성이요 라는 찬양곡을 작사 작곡하여 하나님께 집중 의지한다.

 

우리는 전염병으로부터 피신해도 되는가? 흑사병속에서도 하나님 주신 생명을 지켜야한다. 내 이웃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남아야한다고 루터는 말하고 있다. 목사, 공직자(시장, 판사), 의사 남아야 사회를 지키기 위해 모든 사람들도 자기 자리를 지켜야한다. 사랑의 법이란 고통당하는 자를 돌봐야 한다. 목회자로서도 이 어려움은 징벌을 위함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을 테스트하시는 하나님 위로임을 알고, 우리는 위로를 나눠야 한다. 당신의 유일한 위가 누구이신가를 말하면 무엇이라고 답을 할 수 있는가?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유일한 위로는 하나님이시다. 머리털 하나도 떨어지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생사간의 유일한 위로이신 하나님이시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만이 위로이다.

an ever-present help in trouble.​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 하리로다.

 

▶그러면 우리가 생사간의 유일한 위로를 유지하고 계속적으로 살 수 있는가?

→ 첫째. 우리는 사람들에게 교회에 참여하여 설교를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지에 대해 배우라고 權勉해야 한다.

→ 둘째. 모든 사람은 죽음에 대해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죄를 고백하고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현대인들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당장 닥친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에 흑사병이 만연한데 교회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굳이 현장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를 걱정하는 그리스도인도 많다. 물론 일리가 있다. 기저질환이나 어린이는 조심해야 하지만, 식당과 카페는 우굴 버글 하는데, 그 얼굴에서 두려움의 얼굴을 보시 못했다. 그런 곳은 두렵지 않으면서 가면서도 교회 오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지금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일이다. 국가의 방역 조치를 잘 따르고, 개인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는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라면 그리스도인은 존재의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 비대면 예배는 비상 대책이어야 한다. 치사율이 75%인 흑사병인 대유행 앞에서도 교회에 참석하여 설교들 들음으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지에 대해 배워야 한다. 고백하고 성찬에 참여함으로 죽음을 준비하라는 루터의 권고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예배를 등한이 한다면, 어디서 우리는 생사간의 유일한 위로를 얻을 수 이 있는가?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이 코로나를 이길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셋째. 루터가 위험을 무릎 쓰고 비히텐베르크에 남아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가?

위험을 무릎 쓰지 않고는 결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루터는 ‘자신의 안전이나 재산에 손해가 나는 것이 힘들어서 다른 사람을 돕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이웃을 도울 수 없다’라고 말한다. 이웃을 도울 때는 언제나 위험을 甘受해야 하는 일이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危險을 무릎 쓰지 않고는 도울 수 없다고 루터는 통찰하고 있다. 한 500년 전 루터를 보면서 정말 대단함을 느낀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 19는 치사율이 1.8%에 불과하다. 흑사병은 그때는 치료약도 없었다. 두려워말고 이웃을 위해 사랑을 권고한다. 루터는 시편 46편을 보면서 ‘내주는 강한 성이요’를 작사하면서 사탄마귀 로 다 빼앗긴데도, 내 몸도 다 가져간다고 해도 우리 왕국은 영원하다‘라고 했다. 생사간의 유일한 위로가 있기에 흑사병의 펜데믹 안에서도 그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었다. 그런 루터로 인해서 루터의 그 의지를 보면서 지지하는 사람들로 인해 종교개혁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

 

▶ 우한의 선교사는

사명 자는 사명에 따라 움직여야 하며 상황에 따라 움직여서는 안 된다. 사람을 세워가는 일은 말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교회가 병원을 세운 것이 현대의 역사인데,,, 우리는 생사 간에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사역 가운데서 발견하고 생사간의 위로를 가지고 코로나 사태를 주님의 이름으로 이겨내길 소원한다.

 

♧느낀 점.

지금 이렇게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됨을 나도 절실히 무섭게 느껴진다. 세상은 계속 정치와 이슈로 더욱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시점을 세상의 이슈나 간사한 정치에 귀 기울이지 않고 이 시점이 분명, 하나님의 징계라고 여겨지기에 더 조심하면서 주님을 사모하고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나의 부족함을 아시는 주님이시기에 나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납작 엎드리면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주님의 예배를 고대하며 기도할 것이다. 어제 예배에 나간 사람들은 용기가 대단하다. 허탕을 치고 돌아갈 것을 왜 그들은 모른가를 나쁘게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만큼 하나님의 예배를 사모하는 자들임을 보면서 나는 내심 부끄러웠다. 어떤 죽을 상황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 하겠다면서 나는 그냥 교회의 지킴을 따라갈 뿐이라며 핑계를 되 뇌였다. 이제 주님 앞에서 과감하고 용기 있는 선택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또한 루터처럼 위험을 무릎 쓰고 과연 이웃을 얼마나 사랑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고, 회개하는 시간이 되었다. 남의 생각을 믿지 말고 나의 판단을 주님께서 주관해 주실 것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모든 삶은 고난의 연속이고, 그 고난이 주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면 기꺼이 사랑하고 이웃에게 더 나누고 품는 자 되기를 간구한다. 또한 한국교회 그리고 우리 교회의 예언자적인 말씀과 사랑으로 김지찬 목사님(총신대 교수님)을 초빙하셔서 우리에게 주님에 대한 올바른 이치와 진리를 우리 교회에 오셔서 하나님 앞에서 나를 더 깊이 깨닫게 해 주심을 감사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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