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부흥헌신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3년 3월 11일) 제목: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볼 때 II. 말씀: 마태복음 27:27-36 대표기도: 권오정 집사님(남 사역훈련) 찬양인도: 제자, 사역훈련생 찬양대 말씀읽기: 김하임 어린이(초등부), 김승현 어린이(유년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 * 마태복음 27:27-36,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 ▶오정현 담임목사님 -이 새벽에 우리를 불러주시는 주님을 찬양한다. 한결 같은 은혜이다. 우리 아이들, 승현이와 하임이! 둘 다 저 위 성경읽기에 올라갔기에 평생 못 잊을 것이다. 오늘 계속해서 지난주에 이어서 ‘십자가에 대한 깊은 각성’을 하도록 하겠다. 여러분들은 순서 지를 보기를 바란다. 1면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우주 최대의 러브스토리이다. 십자가는 사랑의 예수님이 한 손에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부인했던 베드로와 같은 부족한 인생인 우리를 붙잡으시고, 또 한 손은 하나님의 손을 붙잡으며 나를 향한 사랑의 고백을 하다가 사랑의 심장인 터지는 것이다. 이게 무언지 깨달은 은혜주심을 알고 오늘은 한 절 한 절 강의를 하지 않겠다. 뭉뚱그려서 십자가의 각성, 십자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 십자가의 은혜의 내용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를 바라며~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어제 저녁에 생각한 찬양이, ’말할 수 없는 주의 크신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 놀라운 사랑이 내게 임했네.~~‘~~, 우리가 십 년 전에 부른 곡이다. 십자가에 대한 각성은 놀라운 사랑에 대한 각성이다. 또 나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이나 각성이다. 그러니까 이 지팡이가 그냥 물건이긴 하지만 여기에 마음을 담아서 “주님, 십자가에 대한 깊은 통찰과 깨달음과 각성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오늘 단순히 기도지팡이를 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든다고 생각해야 한다. 오늘은 기도지팡이와 무엇을 든다고 했는가? ‘주님의 십자가를 든다.’라고 생각하라. 말할 수 없는 주의 크신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 놀라운 사랑이 내게 임했네. ♬말할 수 없는 주의 크신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 내게 임했네... 놀라운 사랑이 내게 임했네. 말할 수 없는 주의 크신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 놀라운 사랑이 내게 임했네. 놀라운 은혜가 내게 임했네. 놀라운 은혜가 내게 임했네. 놀라운 은혜가 내게 임했네.~~~ -십자가의 은혜가 오늘 이 아침 내 심장을 덮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능력으로 충만케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무도 그냥 돌아가지 않게 하시길 소원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27장 본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세 가지이다. 하나는 정신적인 수치, 육체의 고통, 영적인 큰 짐을 지신 것이다. 1)정신적인 수치 2)육체적인 큰 고통 3)영적인 큰 짐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주님은 너무나도 수치스럽고 아주 말로 다할 수 없는 모욕의 과정을 거쳤다. 아무리 잘못된 죄인이라도 심지어 총살을 시키는 죄인이라도 얼굴은 가려주고 몸은 가려서 형벌은 가하는데, 예수님은 벌거벗겨져 가지고 아무도 예수님을 막아주는 인격적인 대우를 해주는 그런 일이 없는 수치를 당하셨다. 그러니까 최악의 모욕과 수치를 당하신 것이다. 헨델은 이것을 가지고 그 주님의 모욕과 수치를 당한 이사야 53장을 연결시켜서 메시아를 주님의 고난과 수치를 담은 곡을 만든 것이며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만든 곳이다. 예수님의 수치와 멸시를 느끼고 그것을 보는 친구가 주님의 모욕과 육체적인 고통과 영적인 큰 짐은 이것을 준비하면서 사순절의 기간 동안에 다시 한 번 마음속에 각인이 된다. 그 이유의 핵심은 내가 받아야 하고, 내가 감당해야 하고, 내가 모욕을 당해야 할 것을 그 주님이 대신 가 주신 것이다. 내가 받아야 할 그 자리에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주님이 대신 가 주신 것이다. 복음과 십자가의 은혜는 항상, 그러니까 나 무슨 말로 주께,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나를 위하여 수치와 멸시와 조롱을 당했다는 것이, 주님이 대신 받았다는 그것을 우리가 열 번 듣고, 백번 듣고, 수백 번 듣고 심지어 천 번을 들었더라도 이게 형식으로 지나가면 안 되고 여기에 늘 마음이 와 닿아야 한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크신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 놀라운 사랑이 내게 임했네.’~~~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가 지금 여러분에게 기름부음이 체험되기를 바란다. 그럴러면 그것이 내게 와 닿아야 되는 것이고, 내 것으로 고백이 되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복음의 핵심은 내가 서야할, 내가 받아야 할, 내가 담당해야 할, 그 모욕과 그 수치의 자리에 주님이 대신 거기에 서셨다는 것이다. 주님이 거기 계셨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이다. 그 당대에 1세기에 그레꼬로망, 고대근동 로마시대에 그때 이 사람들의 세계관, 일반 사람들의 이 정신적 세계관, 내세관은 뭐냐면, 일단 사람은 죽으면 편안하게 그냥 고통이 다 없어지고 죽으면 편안해진다고 여기고 죽으면 안식하고 편안하게 쉰다는 하는 것이다. 그 로마 고대근동 사회에 정신세계에 내세관이었다. 그러니까 로마의 위정자들은 아주 극악한 죄수들이나 극악한 흉악범들을 처리할 때에 갑자기 죽어버리면 바로 편안한 쉼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러면 안 된다고 해자가지고 죽기는 죽되, 오랫동안 치욕스럽고, ‘오랫동안 최고의 고통과 수치스러움을 겪으면서 죽을 수 있는 형벌이 무얼까?’ 를 고안하다가 고안해 낸 것이 십자가의 형벌이었다. 그래서 나이든 사람은 십자가를 맞으면 그냥 죽을 수 있지만, 젊은 사람들 가운데는 양발과 양손에 못이 박혀가지고 매달려 있을 때, 어떤 사람은 일주일씩 심지어 최장, 십일씩 대롱대롱 매달려서 목숨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죽이지 아니하고 십자가의 형벌로 고통을 오랫동안 하도록, 바로 죽으면 그냥 편안한 세계에 들어가니까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 아심을 믿고,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갈보리 산에 주님을 바라 볼 때’ 할 때, 우리가 이 지팡이를 들면서 십자가에 대한 각성을 하게 되는데,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죽음이었는지, 어떤 그리스도인이 써 놓은 것을 읽어본다. ‘참으로 끝없는 참으로 고통의 시간이었다. 뒤틀리는 고통, 관절을 꺾는 고통, 간헐적으로 찾아 든 질식 상태, 몸을 위 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그 거친 통나무에 찢겨진 그 등이 마찰되면서 살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으셨다. 그것만이 끝이 아니었다. 심하게 혈장이 점점 차오르며 심장을 압박하자,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 찾아왔다. 예수님의 생명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살 속에 수액이 빠져나가면서 심장은 걸쭉하고 진한 피를 핏줄로 보내기 위해 펌프질을 해댔다. 고통스런 폐도 최후에 노력을 하고 있었다. 탈수 상태에 놓인 세포조직들은 모든 자극과 고통으로...’ 정신적인 수치, 모멸감, 육체적 큰 고통, 영적인 고통의 큰 짐을 다 거기에 포함된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제대로 깨달으면 왜? 기독교가 우리가 복음이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의 별을 상징하고, 불교 같은 것은 만자, 저 만자를 상징하는데 그 다음에 이슬람 사람들은 초승달을 상징하지만, 우리는 왜 십자가를 기독교의 십자가를 상징하는가? 여러분, 창조주 하나님은 이미 그때 예수님께서 함께 참여하신 것이다. 성부,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삼위일체 하나님은 완벽한 교제와 완벽한 팔로우 십이 있기 때문에 우주를 창조하지 않더라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더라도 삼위 하나님이 완벽한 교제 때문에 아무런 불편이 없으실 텐데, 왜 우리를 돌보시고, 왜 우리를 보호하시는가? 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는가? 왜? 죄 없으신 주님께서 이런 처절한 수치와 모욕을 당하시는가? 왜 그러한가? 오늘 주님께서 이 커다란 십자가의 고통과 그 고난을 당하신 핵심이 무얼까? 하나님은 그만큼 우리가 서야할 자리에 주님이 서셨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죄의 무겁다는 것이다. 여러분과 제가 지금까지 해왔던 앞으로 수많은 부족함의 다 우리가 총량을 재어보면, 우리의 죄의 무게가 이 십자가의 고통이 이렇게 가져올 정도로 무겁다는 것이다. 왜 주님은 왜 그러셨을까? 그래서 왜 죄의 무게가 무겁고 우리가 각성을 해야 하고 말할 수 없는 주의 크신 사랑이 갈보리 십자가!!~` 이런 찬송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서 오늘 이 토요비전새벽예배에 이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우리의 죄의 무게가 무거워서 주님께서 돌아가셨음에 우리가 각성을 해야 되는데, 두 가지 각성을 해야 한다. 첫째는, 인생의 짐 고통 가운데, 나를 헤칠 사람은 나밖에 없다. -주님께서 당하신 그 고통의 무게가 우리로 하여금 어떤 도전을 주냐면 여러분이나 저나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짐을 지고 온갖 고통을 당하는데 많은 경우는 여러분 헤칠 사람은 궁극적으로 말하면 여러분 자신, 나 자신 밖에 헤칠 사람이 없다. 남들이 나에게 고통을 주고 힘들게 하지만, 결국은 내가 나를 헤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상처주고 내가 나를 나가떨어지고 내가 스스로 좌절하고, 내가 그 트라우마 가운데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우리의 죄의 각성과 고통과 무게가 그만큼 큰데, 주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위해 당하신 고통이 너무 큰데,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스스로 상처받고 내가 스스로 어려워하고 그럴 때에 저는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의 무게를 다 희석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나를 상처 줄 사람은 나 밖에 없다. 예수님의 깊은 십자가 복음이 들어가면 내가 나를 상처준 것으로부터 내가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환경적으로 어려운 것이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환경이 나를 상처 주는 것이 아니다. 물론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나를 파괴시킬 사람은 나 자신이며 나를 파괴시키는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깊은 각성을 하면 내가 나를 상처 주는 자리에서 나를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파괴하는 자리에서 내가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다시 한 번 믿음의 부요함과 회복을 통하여 내가 나를 상처 주던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다시 한 번 회복의 능력을 주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것을 들을 때마다 마음의 각성을 하는 것이다. 갈보리 십자가를 주님을 바라볼 때에 여러분,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수많은 짐을 지고, 인생을 살다보면 수많은 일들이 지나지만 그러나 한 가지 우리의 마음속에 다짐해야한다.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내가 나를 스스로 크라우마를 갖고 좌절하고 상처받고 내가 나를 어렵게 하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받는 그런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새벽은 아주 영광스런 자리이다. 여러분, 여기서 치유가 일어나고, 여기서 자유가 일어나고, 여기서 힐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들을 때마다, “주님, 내가 나에게 스스로 어려워하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하겠습니다.” 내가 서야할 그 고통과 수치와 부끄러움의 그 자리에 주님이 대신 서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랑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다. 내가 나를 상처 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둘째는, 이 십자가의 깊은 비밀을 깨달으면 십자가의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늘 우리가 고백하는 ‘구주를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것이다.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그 일이 너무 고마워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수록 내가 상처의 자리에서 뛰어나갈 뿐만이 아니라 주님을 더 고백을 하는 것이다. 한 번 생각해 보라. 주님은 그렇게 고난의 십자가에 달리실 분이 아니셨다. 그렇게 죽어서도 안 되시는 분이셨다. 그런 비참한 일이 일어나도 안 되는 분이셨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신 그분이 그런 죽음의 저주를 당해야 하는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데, 그러니까 십자가의 깊은 은혜를 깨달을수록 제가 복음을 이야기 할 때마다 누가 돌아가셨는지, 창조주 하나님이 돌아가셨다.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왜 돌아가셨나? 죄인인 나를 너무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죄인인 나 같은 사람을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있어서는 안 되는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깨닫는 순간 주님의 사랑을 절제하지 않는다. 성령의 아홉 가지 가운데 첫 번째가 사랑이다. 마지막이 절제인데 주님의 사랑만큼은 절제하지 말고 주님의 대한 사랑을 우리가 온통 내 마음과 내 평생을 드려도 이것은 답이 없다. 그러니까 평생 주님을 사랑하고 이 사랑이 이 동기가 되고 이 사랑이 여러분에게 고백이 될 때, 저와 여러분이 얼굴이 달라지는 것이다. 늘 말씀하지만 잘 생기고, 못 생기고를 떠나서 예수님을 이 십자가를 받고 나에 대한 상처를 극복하고 예수님을 진실로 다른 것 못해도 주님 사랑을 절제하지 아니하고 살다보면 얼굴이 달라지고 품위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오늘 ‘말할 수 없는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 놀라운 사랑이 내게 임했네.’ 이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은 내가 나를 파멸시키려고 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주님을 위한 사랑만이 절제가 없는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제 오늘 주님이 어떻게 되셨는지 성경 읽기를 통하여 나에 대한 모든 연약함을 회개하면서 그 모든 내가 서야할 그 수치와 모욕과 육신적 고통과 정신적인 수치와 영적인 큰 짐을 주님이 내 대신 짊어지셨다는 그 사실 앞에 다시 한 번 각성하고 주님을 향한 사랑의 영역과 방향이 나에게 와 닿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마태복음 27장을 조용히 듣고 주님이 터치에 주시기를 바란다. ♣요약 우리가 흑암에 갇힌 세상을 합심하여 기도의 지팡이를 높이 들고 전진할 때, 순전한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밝히시는 만군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날마다 승리함을 믿고, 제자, 사역훈련생들이 자기 부인을 통해 회색지대가 없는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로 무장되고, 하나님의 역사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이 시대의 거룩한 비밀병기가 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드리는 진정한 회개와 각성을 통해 믿음으로 이 나라와 민족을 세워가는 부흥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 나를 헤칠 사람은 나밖에 없고, 십자가의 깊은 비밀을 깨달으면 십자가의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니, 십자가에 못 박는 죄에서 돌이켜 온전한 기도로 나아가 안아주심의 본당이 온가족과 함께 갈보리 십자가를 모두가 바라보는 미스바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 -본문에선 우리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내용이 나타난다. |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