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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한시...

 

- 題僧舍 / 李崇仁 [제승사 / 이숭인] -

 

山北山南細路分 [산북산남세로분] 산 아래 위쪽으로 오솔길이 나있고  

      松花含雨落繽紛 [송화함우락빈분] 송홧가루 비 머금고 어지러이 떨어지네. 
道人汲井歸茅舍 [도인급정귀모사] 도인이 물을 길어 띠집으로 가더니만

  一帶靑烟染白雲 [일대청연염백운] 한 줄기 푸른 연기 흰 구름을 물들이네.

조그만 오솔길이 나있는 외딴 산길이다.

이번엔 노란 송홧가루가 바람에 날린다고 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5월초쯤이었던 모양이다.

 

아래위로 난 산길을 따라 시인은 스님의 암자를 찾아간다.

비를 머금어 날이 잔뜩 흐렸다.

산 위 쪽은 흰 구름에 포근히 잠겨있다.

비가 오기 전에 빨리 절을 찾아들어야겠는데 절은 좀체 눈에 보이질 않는다.

 

혹시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닐까?

마음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자꾸 고개를 들어 불안해진다.

그때 저 멀리 웬 스님 한 분이 물을 길러 나왔다.

반가워 빨리 가서 절 있는 곳을 물어보려고 서둘러 갔더니만,

그 사이에 스님은 산모롱이를 돌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잠시 후에 그 너머 어디에서 한 오리 푸른 연기가 한 줄기 하늘로 올라간다.

하얀 흰 구름 사이로 생가지를 태우는 푸른 연기가 경계선을 그으며

구불구불구불 올라가고 있다.

한 폭의 그림이다.

 

옛날 송나라 때 휘종 황제는 그림을 몹시 좋아하던 임금이었다.

그 자신이 또한 훌륭한 화가이기도 했다.

그는 툭하면 옛 시의 한 구절을 가지고 화가들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곤 했다.

한번은 이런 제목이 나왔다.

 

"亂山藏古寺 [란산장고사] 어지러운 산 옛 절을 감추었네."

 

어지러운 산 봉우리 속에 감춰져 잘 보이지 않는 옛절을 그리라고 한 것이다.

절을 그려야 하지만, 감춰져 있는 절이라야 한다.

그래서 화가들은 깊은 산 숲 속에 절의 지붕 처마만 삐죽이 나와있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또 어떤 화가는 탑이 숲 속 나뭇가지 위로 삐쭉 솟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런데 1등한 그림은 화면 어디에도 절을 그리지 않았다.

다만 숲속 오솔길에 스님 한 분이 물동이를 지고 물을 길어 올라가는 장면을 그렸다.

스님이 물을 지러 나왔으니 분명히 그 근처 어딘가에 절이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산이 하도 많아서 가리워져 보이지 않는다는 뜻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자!

절을 그리라고 했는데,

절을 그리지 않고, 물 길러 나온 스님을 그렸다.

절이 그곳에 있다는 것은 이 스님만 보면 누구나 알 수가 있다.

이것이 그리지 않고 그리기이다.

 

시인도 이 이야기를 들었던 것일까?

그도 또한 스님의 집을 찾아 길을 헤매다가

숲 저편 너머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푸른 연기를 보고,

그곳에 절이 있음을 겨우 알아차리고, 휴우하며 마음을 놓고 있다.

흰 구름 속에 절을 감춰두고 산은 나그네의 발걸음을 지치게 한다.

 

정말 소중한 것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잘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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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한시...
 
 

 

              - 怨歌行[원가행] 원망의 노래를 부르다 -  班婕妤[반첩여]

       

          新裂齊紈素 [신열제환소] 새로 재단한 제나라 흰 비단이

            皎潔如霜雪 [교결여상설] 서리나 눈 같이 희고 깨끗하네.

       

            裁爲合歡扇 [재위합환선] : 마름질해 합환선 만드니
            團圓似明月 [단원사명월] : 밝은 달처럼 둥글구나.
            出入君懷袖 [출입군회수] : 님의 품과 소매를 드나들며
            動搖微風發 [동요미풍발] : 흔들어서 미풍을 일으켰네.

       

            常恐秋節至 [상공추절지] : 늘 두려운 것은 가을이 되면
            凉飇奪炎熱 [량표탈염열] : 서늘한 바람이 더위를 앗아가

            棄捐篋筍中 [기연협순중] : 대나무 상자안에  버려지듯이
            恩情中道絶 [은정중도절] : 님의 정 중도에 끊어질까 함이네.
        

            新裂[신열] : 새로 뜯어내다. 새로 자르다.

            齊紈素[제환소] : 제나라에서 생산된 무늬가 없고 고운 비단.

            合歡扇[합환선] : 남녀간의 애정과 결합을 상징하는 부채.

            棄捐[기연] : 버리다. 그만두다.

            篋筍[협순] : 옷이나 책 따위를 보관하는 대나무로 만든 사각 상자.

 

            이 시는 부채를 통해 버림받은 여인의 원망을 표현한 작품이다. 

            작품의 소재인 부채는 곧 작가 자신으로, 자신의 감정을 사물에 이입시켰다. 

            전반부에서는 부채의 재질과 모습이 깨끗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출생,

            성품, 미모를 은유적으로 나타냈고, 이어서 더위를 쫓는 기능을

            황제를 위한 자신의 헌신적인 시중으로 비유하였으며, 끝 구절에서는 가을이 되어

            필요 없게 된 부채 신세가 되었음을 한탄하고 있다.

       

            사람이 쓸모 없는 가을부채 신세가 되는 것,

            환경이 바뀐다고 해서 가까웠던 사람에게 잊어지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가을부채는 다시 찾을 날 있어도,

            이 몸은 님이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 신세가 되었다며

            시에서 노래하듯이 부채는 여름이 오면 다시 찾아주지만,

            사람은 버림받으면 세월이 흘러도 다시 찾아주지 않는 신세가 되기 십상이다.

            애인 사이만이 아니다. 친구나 직장동료 간에서도 마찬가지다.

 

 

          반첩여는 과연 어떤 여인이었는가?

   

 

반희(班姬)는 흔이 반첩여(班婕妤) 라고 일컬어지는데,

성이 반이고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첩여는 후궁들에게 주어지는 직첩의 일종이었다. 

반황(班況)의 딸이자 역사가인 반고(班固)의 고모할머니로 알려져 있다. 

 

그의 생몰연대는 BC 48~BC 6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하지 않고,

어려서 재주가 있었고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으며 자라면서 교양이 매우 높고

언행에 절도가 있었다고 한다. 

한나라 성제(成帝)가 즉위한 후 후궁으로 선발되었고 소사(少使), 대행(大幸)을 거쳐

첩여로 발탁되었다.

 

그의 총명함을 보여주는 일화 한토막이 전한다. 

하루는 성제가 궁궐 뒤의 정원을 산책하다가 자기의 수레에 같이 타자고 했다. 

그러자 반첩여가 말하기를

 

觀古圖書        [관고도서] 옛날의 그림을 보오니

聖賢之君        [성현지군] 성현이 된 임금은

皆有名臣在側 [개유명신재측] 모두 옆에 명신이 있었는데

三代末主        [삼대물주] 하,은,주 삼대 말의 임금들은

有嬖女           [유폐녀] 옆에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得無近似之乎 [득무근사지호] 제가 상감과 더불어 수레를 타면 그와 같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성제는 반첩여를 매우 총애했으나 시간이 흐르자

사랑이 조비연에게로 옮겨갔다. 

이때 성제의 후실인 반첩여가 황후 허씨와 짜고

임금의 사랑을 받고 있는 후궁들을 저주하고, 

또 임금에 대한 중상을 했다는 혐의로 하옥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사실은 임금의 총애를 독점하던 조비연자매가 일을 꾸며

허황후와 반첩여를 무고하는 옥사가 일어났다. 

후에 반첩여의 혐의는 풀렸지만

그녀의 처지는 그 옛날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때와

같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별궁에 유폐되어 있는 허황후의 말벗이 되겠다고 자청하여

성제의 허락을 받았다.

이후 장신궁(長信宮)에 머물면서 과거 임금의 사랑을 받던 일을 회상하고

현재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자도부(自悼賦), 도소부(悼素賦), 원가행(怨歌行) 등

세 편의 시가를 지었으나 후세에는 겨우 원가행 한 편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지만

일 문사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고 한다. 

 

황태후의 말벗을 하면서 호젓하고 쓸쓸한 나날을 보내던 반첩여는

성제가 죽은 후에 그의 무덤을 돌보는 정절을 보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40여세의 나이로

처연한 일생을 마감했다.

 

조비연은 어떤 여인이며 반첩여와의 관계는 어떠하였는가?

 

중국에서 미인을 표현 하는 대표적인 어휘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沈魚落雁[침어낙안], 閉月羞花[폐월수화]이다.

 

西施 [서시]
沈魚[침어] : 서시의 미모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조차 잊은 채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王昭君 [왕소군]
落雁[낙안] : 왕소군의 미모에 기러기가 날개짓 하는 것조차 잊고 땅으로 떨어졌다.

貂嬋 [초선]
閉月[폐월] : 초선의 미모에 달도 부끄러워서 구름 사이로 숨어 버렸다.

楊貴妃 [양귀비]
羞花[수화] : 양귀비의 미모에 꽃도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아쉽게 4대미인에서 탈락한 미녀가 있으니 그녀가 바로 趙飛燕[조비연]이다.

그녀를 지칭할 때는 항상 4대 미인의 한 사람인 양귀비와 더불어 거론된다.

바로 '燕瘦環肥[연수환비]'라는 성어인데 그 뜻은 다음과 같다.
趙飛燕[조비연]은 말랐으나 瘦[여윌 수] 미인이었고,
양귀비[본명 : 楊玉環(양옥환)]는 뚱뚱했으나 肥[살찍 비] 미인이였다.

또한 흔히 일컬어 조비연은 날씬한 미인의 대명사로 臨風楊柳[임풍양류]형 미인,
양귀비는 풍만한 미인의 대명사로 富貴牡丹[부귀모란]형 미인이라 한다.
 

혼군(昏君)인 성제는 사방으로 유람을 하였는데

어느 날 우연히 양아공주(良阿公主)의 집을 들였다.

공주는 가녀(歌女) 수 명을 불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게 하여 성제를 즐겁게 했다. 

그 중의 한 여인이 목소리도 곱고 춤추는 자태도 매우 날렵해 보였는데 성제가 환궁한 후에

공주에게 그 여인을 보내 달라 해서 얻은 여인이 바로 중국사대미인 중의 하나요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추었다는 일화를 남긴 저 유명한 조비연이다. 

그에게는 자매가 있었는데 언니가 조의주(趙宜主: 조비연의 본명)요, 

동생이 조합덕(趙合德)이었다. 

 

조씨자매는 차례로 성제를 모셨고 성제도 다른 후궁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오로지 그들만 총애했고 황후인 허씨도 냉대를 받아 내심 불만이 많았다. 

이때 조비연이 황후자리를 노리고 황제에게 참소했다.

허황후가 후궁들을 저주하고 황제를 모함했다는

죄명을 씌우고 후궁들도 이에 연루시켰다. 

 

성제는 매우 분노해서 황후의 인수를 회수하고 별궁에 유폐시켰다. 

반첩여는 총명하여 황후가 유폐된 장신궁으로 몸을 옮기고

허황후와 외로움을 나누면서

목숨을 보존하고 시와 부를 지으면서 세월을 보냈다. 

 

성제는 비록 음란했지만 나이 40이 넘도록 자식이 없자 후궁들을 기웃거렸고

조씨자매는 질투심이 많아 이를 심히 경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후궁에게서 차례로 아들이 태어났고

두 후궁과 두 아들은 모두 조씨자매에 의하여 목숨을 잃고 말았으며

황제도 이를 막지 못했다고 하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랬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결국은 왕망(王莽)에게 정권을 빼앗기어 전한(前漢)이 망하고

잠시나마 신(新)나라가 세워졌지 않았던가.

 

당시 장안에는 동요 하나가 유행하였는데

'燕飛來 啄皇孫[연비래 탁황손] 제비가 날아와서 황손을 쪼았다' 는 뜻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조비연자매가 황손을 해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후에 성제는 조합덕의 침상에서 급사했다.

조합덕이 성제를 독살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에 자기가 저질렀던 일들을 떠올리고

독주를 마시고 자결하였다고 한다.

조비연은 나중에 황후가 되기도 하였지만 왕망이 정권을 잡자 신분이 계속 하락하여

후에는 서인(庶人)이 되었고 어쩔 수 없이 그도 자결하고 말았다고 하니

조씨자매야 자업자득이라 하겠지만

행실이 바르고 명민했던 여류시인 반첩여의 생애가 더욱 애처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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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내신 연꽃송이

     

    연꽃을 군자라고 하지만, 강남의 채련곡(采蓮曲)을 들을 때면

    반드시 오희월녀(吳姬越女),

    즉 강남의 아가씨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 신앙 때문에 연꽃을 너무나 신성시하여

    도리어 그 참된 아름다움을 감상하는데 장애가 된다.

    고려에서는 연뿌리나 연밥을 모두 감히 따지 않는다.

    나라사람들이 모두 그것이 부처님의 발이 올라앉으신 곳이라고들 말한다.

    고려 사람들이 연뿌리와 연밥송이도 감히 건드리지 못한 것은

    그것이 부처의 보좌(寶座)인줄로 알았기 때문이다.

    연꽃은 거의 천편일률로 종교적 색채를 띤 이야기뿐이어서

    따뜻한 인정미 있는 일화를 좀체 기대하기 어렵다.

    불교 국가는 어디든지 대부분 같지만,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더 심한 편이다.

     

    그러나 연꽃에 대해 예외적으로 운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하나 전해진다.

    예전 고려 충선왕(忠宣王)께서 원나라 서울인 연경에 계실 때

    어쩌다 한 아름다운 여인과 가연(佳緣)을 맺어 애정이 자못 깊었었다.

    그러다가 충선왕이 하루 아침에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그녀에게 사랑의 정표로 연꽃 한 송이를 주었다.

    생이별의 괴로움에 울던 그녀는 충선왕에게 시를 보냈는데 그 시는 이렇다

     

    贈遺蓮花片 [증송연화편] 보내신 연꽃 송이
    初來灼灼紅 [초래작작홍] 붉은 빛 작작터니
    辭支今幾日 [사지금기일] 가지떠나 몇날인가
    憔悴與人同 [초췌인여동] 나 처럼 여위였네

    한시가 아름답고 교묘하여 이야기와 함께 길이 전할만 하다.

    서양풍속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궁화나 장미를 준다고 한다.

    충선왕이 그녀에게 연꽃을 준 것은 자못 운치가 있다.

    이것이 우리 역사상에 나타난 연꽃에 얽힌 로맨스로는 대표적인 것이다.

     
    연꽃은 순백과 담홍의 두 가지 색이 흔하다.

    불경에는 이따금 청련(靑蓮)이 나타난다.

    옛날에는 있던 것이 오늘날 없어지고 말았는지,

    인도 본토에서도 청련은 볼 수가 없다고 한다.

    북경에는 자주색에 가까운 홍련이 있다고 한다.

     

    위 시에서 여인에게 꺾어준 연꽃을 두고 시에서 '작작홍(灼灼紅)'

    즉 불타듯 붉다고 노래한 것만 보더라도 그것이 흰 색 꽃은 아니고,

    담홍 혹은 아주 붉은 홍련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홍색이란 원래 정성을 나타내는 뜻으로 쓰니 애인에게 주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이다.

    더욱이 진흙탕에 더럽히지 않는 정결한 꽃이니,

    멀리 떠나는 애인에게 주는 것이 또한 의미가 깊다.

     

    충선왕이 스스로 이런 것을 의식하고 주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꽃을 기념으로 받은 그 여인은 충선왕이 떠난 뒤

    항상 몸을 정결히 지키면서 그를 오매불망하였다.

    충선왕은 그녀를 잊을 수 없어 이제현을 돌려보내

    그녀가 어찌 지내고 있는지 알아보라 하였다.

    이제현이 가보니 그녀는 식음을 전폐하고 거의 다 죽어갈 지경이었다.

     

    이제현을 본 그녀는 왕에게 전해 달라며 위의 시를 써 주었다.

    그러나 이제현은 충선왕의 마음이 흔들릴까 염려하여 그 시를 전하지 않고,

    충선왕이 그녀의 안부를 묻자,

    술집에 나가 젊은이들과 노느라 찾을 수가 없었노라고 거짓으로 아뢰었다.

    왕은 침을 뱉고 그녀를 잊었다.

     

    1년 뒤 왕의 생일날 이제현이 사죄하며

    그녀의 시를 왕에게 올리며 사실대로 아뢰었다.

    충선왕은 이 시를 읽고 울면서,

    "만일 그때 이 시를 보았더라면 귀국하지 않고 그녀에게도 돌아갔을 것이다."라고 하며,

    이제현을 책망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의 충성과 의리를 가상하다고 칭찬하였다 한다.

     

    우리 지난 역사를 되돌이켜보면
    개개인의 능력으로 볼 때
    뛰어난 인재들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런 인재들이
    니편, 내편, 가재편, 게편
    편가르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개개인의 능력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뒤안길로 사라져간 것을 보면
    이도 우리민족의 타고난 운명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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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한시...
 
고려 때 승려 시인 혜심(慧諶)의 詩.
 
1에서 10까지 차례로 늘어나고 있다.
물론 운자도 지켰다.
원 제목은
'차금성경사록종일지십운[次錦城慶司祿從一至十]'
이다.
차금성경사록종일지십운[次錦城慶司祿從一至十] 
隨業
受身
苦樂果
善惡因
不循邪妄
常行正眞
粃糠兮富貴
甲胄兮仁義
況須參玄得眞
自然換骨淸神
體不是火風地水
心亦非緣慮垢塵
沒縫塔中燈燃不夜
無根樹上花發恒春
風磨白月兮誰病誰藥
雲合靑山也何舊何新
一道通方爲聖賢之所履
千車共轍故古今而同進
 


수업
수신
고락과
선악인
부순사망
상행정진
비강혜부귀
갑주혜인의
황수참현득진
자연환골청신
체부시화풍지수
심역비연려구진
몰봉탑중등연부야
무근수상화발항춘
풍마백월혜수병수약
운합청산야하구하신
일도통방위성현지소리
천차공철고고금이동진 


 
사람
사람.
업을 따라
그 몸을 받네.
괴로움과 즐거움은
선함 악함의 인과로다.
사악함 망녕됨 따르지 말고
언제나 바르고 참됨을 행하라.
부귀라 하는 것 쌀 겨와 같다면
인의라 하는 것은 갑옷과 투구로다.
하물며 오묘한 이치 깨쳐 참됨 얻으면
저절로 바탕이 바뀌고 정신도 맑아지리.
내 이 몸은 불과 바람, 땅과 흙이 아니며
마음은 인연과 염려, 티끌 먼지 아닐래라.
이어 붙인 자취 없는 탑에 등불은 밤이 없고
뿌리도 없는 나무 위에 꽃이 피니 늘 봄이라.
바람이 밝은 달을 갈 때에 뉘 병들고 나았으며
구름이 청산과 하나 되니 옛것과 새것 그 뉘러뇨.
시원스레 뚫린 이 길은 성현들께서 밟아오신 바이니
온갖 수레 바퀴가 같아 예나 지금이나 함께 전진하네.
 
 
불교의 가르침을 쉽게 풀어 설명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전생의 업을 받고 태어난다.
현세의 괴로움과 즐거움은 전생의 선악의 업보일 뿐이다.
 
그러므로 한 때의 덧 없는 부귀에 얽메여 바른 길에서 벗어나기 보다는,
무봉탑(無縫塔)에 등불이 환하고,
무근수(無根樹)에 꽃이 핌과 같이
그 마음을 광명대도의 세계에서 노닐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내용이다.
 
여기서 무봉탑과 무근수란 자아를 일컫는 말이다.
실제로 그가 쌓아 놓은 글자의 배열이
또한 무봉탑의 형상을 하고 있어 더욱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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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한시- 솔개와 까마귀


                  漫  成          심심해서 한 수 짓다

          조식(曺植) 1501(연산군 7) ~ 1572(선조 5)

    天風振大漠     하늘을 흔드는 바람 소리

    疾雲紛蔽虧     빠르게 어지러이 움직이는 구름

    鳶騰固其宜     솔개야 응당 이 기운 타고 날아야 하나

    烏戾而何爲     까마귀가 높이 날아 무얼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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