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11월 16일)

제목: "지붕에서 내린 사랑"
말씀: 마가복음 2:1~12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강도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김대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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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1~12,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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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규 부목사님
-딸 셋과 함께 아주 평온하게 화목하게 살 던 어느 가정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가정에 고난이 찾아온다. 둘 째 딸, 딸아이에게 원인 모를 병이 찾아오고 아이의 배가 아파서 점점 부풀어 오르게 된다.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검사한 결과 이 아이가 나을 수 없는 불치병이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시골에 살던 엄마와 딸은 어떻게든 치료를 해보기 위해 멀리 떨어진 보스톤의 한 병원에 찾아간다. 수많은 환자로 인해서 병원은 많은 사람이 있었고, 의사조차 만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엄마는 병원을 찾아가 호소하게 되고 불행 중 다행히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진료를 받게 된다. 비행기로 오고가는 거리가 멀고 또 병원비가 만만치 않고 마련해야 되는 병원비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보험 한도가 넘어선다. 많은 경제적 부담이 있지만 부모는 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큰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병을 보이고, 진료를 하고 수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그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더 이상 딸의 병은 차도가 없다. 엄마는 절망에 빠졌고, 엄마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지만 점점 신앙을 잃어가게 된다. 병을 고치지 못한 채 돌아온 아이는 어느 날 언니와 함께 그 아이는 집 앞 큰 나무에 오르게 된다. 그 나무는 그 아이가 아프지 않을 때, 늘 언니와 함께 오르며 놀던 나무이다. 나무에 오르던 중 나뭇가지가 부러지게 되고 아이는 나무 사이 구멍 속, 나무 아래로 추락하게 된다. 소방차가 출동하고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커다란 나무 중앙으로 떨어진 아이를 구조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아이의 생사를 알지 못한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엄마는 다시금 하나님께 매달려 간절히 기도한다. 몇 시간이 지난 후에 아이는 구조되었고, 의식을 잃은 아이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런데 병원으로 이송된 아이의 검사 결과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아이가 추락하면서 긁힌 상처 외에는 뇌에도 이상이 없고 뼈도 한 군데도 부러진 데가 없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추락 후에 검사 결과, 아이의 불치의 병이 깨끗이 나았다는 것이다. 엄마는 다시금 신앙을 회복하게 되고 아이와 함께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간증을 하면서 이야기가 마무리 된다. 제가 드린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미라클 프롬 헤븐’이라는 영화의 내용이다.
 
오늘 이와 같은 기적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본문에 등장한다. 그곳은 가버나움이다. 오늘 가버나움 한 집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성경은 문 앞까지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이 모여 있는 것인가? 한 사람, 한 분 때문이다. 당시 유명인이었던 요즘 젊은이들의 말로는 핵 인 싸, 핵인싸 인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집 앞에 모여든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던 이유는 참 다양했다. 예수님에게 병을 고치기 위해서 그 예수님이 기적을 한 번 누려보기 위해서 온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기적의 현장을 내 눈으로 목격하자는 마음에 온 사람들도 있다. 또한 그 중에는 예수님의 허물을 찾기 위해 몰래 숨어들었던 서기관 같은 자들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친구와 같이 가자고 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따라왔던 사람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모인 곳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성경대로 도를 말씀하고 계신다. 설교를 하시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선포하고 계신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에 놀라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전히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목적은 분명하다. 자신이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심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셔야만 한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권위 있는 말씀에 놀라며 그가 누구인지를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 때 몇 명의 무리들이 도착한다. 네 사람이 한 사람을 침상에 누인 채, 들것에 들어서 그 집 앞까지 왔다. 네 사람이 직접 자신들의 수고로 이곳까지 그 사람을 옮겨와야만 한다. 침상에 누워있는 사람은 중풍 병(中風病)자(者)이다. 움직일 수 없었고, 말하는 것조차 힘든 사람이다. 성경이 이야기 하는 것은 이 네 사람이 누구의 강요나 의무 때문에 이 사람을 매고 예수님이 계신 이곳까지 온 것은 아니다. 이 사람들은 자발적 의지를 가지고 이 사람을 스스로 메고 왔다. 이렇게 이 사람들이 자발적 의지를 가지고 이 중풍 병 걸린 사람을 메고 예수님이 계신 집 앞까지 온 목적, 기대는 분명하다. 예수님께서 침상에 누워있는 이 사람을 고쳐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이 이 네 사람과 중풍 병자에게는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계신 곳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마주한 상황이 어떠했는가? 사람들이 문 앞까지 가득 들어차서 예수님의 얼굴조차 볼 수 없는 아주 난감한 상황을 대하게 된다.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는가? 보기를 드려볼까?
 
1번 사람들이 다 빠질 때까지 기다린다.
2번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군중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간다.
3번 포기하고 다음 기회에 다시 한 번 찾아온다.
여러분 몇 번 선택을 하겠는가? 각자 선택한 것이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사람들이 다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예수님을 만난다. 여러분 쉽지 않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다 나올 때까지, 언제 나올지 기다리는 것, 장담할 수가 없다. 오늘 예수님이 뭐하고 계셨는가? 도를 말씀하고 계신다. 설교하시고 계신다. 여러분 우리는 보통 한 20-40분의 설교를 듣는다. 요즘은 길어도 한 시간 넘어가는 설교를 듣는 것이 쉽지가 않다. 어느 교회에서 한 시간 넘게, 두 시간씩 설교하면 사람들이 그 교회에 많이 가겠는가? 쉽지가 않을 것이다. 제가 어릴 적 상황을 떠올려보면 부흥회 때는 예전에 길게 설교하시는 목사님들이 계셨던 것 같다. 목사님들이 앞에서 설교하시는 것을 막 은혜를 받다가 30분이 넘어가면 조금씩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 시간이 넘어가면 입으로는 아멘 하는데, 머릿속으로는 목사님께서 ‘언제 과연 설교가 끝나시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끝나지 않으면 뒤에 있는 어머니들께서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운다. 그리고 울게 만든다. 그리고 아이들을 풀어놓는다. 설교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어지고,,, 그런 기억이 떠오른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설교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은 절대로 한 시간 이내에 끝내셨던 것 같지가 않다. 한 번 말씀을 전하시면 반나절씩, 몇 시간씩,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말씀에 대해서 전하셨다. 그러니까, 오병(五甁)이(二)어(魚) 같은 기적이 있지 않은가? 때문에 예수님께서 설교를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참 쉬운 일은 이 사람들에게 아니다.
 
두 번째는 군중 속을 비집고 양해를 구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혼자 왔다면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왔는가? 이 중풍 병 걸린 사람을 네 사람이 메어가지고 왔다.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비켜 주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각자 자기의 필요와 자기의 간절함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다. 가버나움이란 동네가 예수님의 사역에 본거지와 같은 곳이다. 물론 가버나움 동네에서 온 사람들도 있겠지만 필경은 멀리서 불치병에 걸려서 극심한 아픔 때문에 아침 일찍, 자신 스스로, 또한 자녀들을 업고, 부모님을 모시고 먼 길을 걸어서 온 사람들도 아주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앞에 있는데 이 네 명의 사람들이 여기 중풍 병 걸린 사람이 있으니까 제발 길 좀 비켜주세요. 라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이 사람만 힘든 게 아니고 나도 힘들어서 왔으니까 순서 지키라고 분명히 이야기 했을 것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세 번째는 일단 포기하고 다음 기회에 다시 온다. 제 생각에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며 우리가 모두 선택할 수 있는 대안 같다. 중풍 병 걸린 사람과 함께 이곳에 열심히 왔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들 보다. 아주 많이 늦었다. 아마도 들것을 들고 오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늦었을 것이다. 늦어서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렵고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들이 포기하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중풍병자에게 아쉽지만 다음에는 좀 더 일찍 먼저 와서 우리가 기다려보자고 하면서 돌아갈 수 있다. 여러분 그렇게 말하더라도 중풍병자는 이미 자기를 메고 여기까지 온 네 명이 사람들이 고마워서 충분히 감사한 마음을 표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1번도, 2번도, 3번도 아닌 창의적인 4번에 답을 누군가 제시하게 된다. ‘우리가 지붕으로 올라가자.’ 당시 가버나움의 집 구조를 보면, 외부로 난 계단이나 사다리가 지붕위로 나 있어서 올라가는 것이 가능은 했다. 하지만 이 네 명이 한 침상을 들고 올라가는 것은 굉장히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나무로 된 대들보 집을 덮고 더 빡빡하게 엮인 진흙으로 된 진흙 구멍을 뚫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자만 지붕위로 올라가자는 누군가의 제안에 그들은 한 마음이 되어서 지붕위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굉장히 힘들고 위험한 일이지만 지붕위로 올라온 이들을 진흙을 파내고 지붕을 뜯기 시작한다. 예나 지금이나 굉장히 창의적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네 사람들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창의적인 방법을 생각해 내고 이 방법을 실행해 낸다. 하지만 이 지붕을 뜯어냈을 때에 여러분 지붕 밑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 말씀에 집중하면서 아멘! 아멘! 하면서 듣던 사람들의 머리로 흙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소동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들보 사이에서 줄이 달아내려지는 중풍 병에 걸린 사람을 보았을 것이다. 지붕위에 있던 네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님을 향해서 지붕위에서 소리쳤을 것이다. “이 사람이 얼마나 불쌍하고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예수님,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우리를 이해해 주시고, 이 사람을 꼭 고쳐 주십시오.” 라고 예수님께 간청했을 것이다. 예수님과 별개로 이 장면을 밑에서 보던 사람들은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사람들을 향해서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험한 말로 이들의 행동을 사람들은 질책했을 것이다. 성질 급하고 또 왕년에 한 가닥 했던 분들은 욕하면서 협박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꼭 고쳐 주시기를 바랐을 것이다.
 
여러분 이 네 사람들, 정말 용기 있지 않은가? 이 사람들의 용기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이들이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한 번 비교해 보자. 새 생명 축제를 앞두고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그분들이 예수님께로 가기를 바라고 기도하고 있다. 비단 새 생명 축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서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내 가족들, 내 친구들, 내 이웃들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예수 믿고 구원 받기를 소망할 것이다. 우리 남편이, 우리 형제가, 우리 자녀가, 우리 부모님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우리 가운데 있다. 그리고 그들을 이곳으로 안아주심의 본당으로 함께 와서 예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 데려오는 것이 쉬운가? 어렵다. 쉽지 않다. 그들 교회 모셔 와서 예수님 만나게 하는 것 너무 힘든 일이다. 중풍 병 걸린 일을 예수님께서 계신 곳까지 데려왔지만 문 앞까지 들어 선 사람들로 인하여서 예수님 만나는 것조차 힘든 어려운 상황처럼, 한 영혼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 역시, 수많은 어려움들이 기다리고 있다. 많은 경우 ‘그들에게 교회 와야 한다.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라고 입을 떼는 것조차 어려움을 느낄 때가 많이 있다.
 
여러분, 우리는 왜 이렇게 초청하고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 어려운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작정한 태신 자들을, 우리가 마음에 품은 가족, 형제들, 부모님, 이웃들을 주님 앞으로 데려올 수 있겠는가?
 
이 네 명의 친구들 모습 속에서 답을 한 번 찾아보겠다.
 
첫 번째, 믿음이 있었다. 먼저 이 네 명의 친구들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자신 앞에 내린 중풍 병자를 만나셨을 때에 가장 먼저 하셨던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무엇인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신 그들의 믿음이 무엇이었을까? 예수님께서 보신 그들의 믿음은 이 중풍 병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반드시 예수님에게 있다는 믿음이다. 그 믿음이 있었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 있었다. 반드시 확실히 예수님만 만나면 된다. 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만일 그들이 100% 확신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지붕까지 힘들게 중풍 병 걸린 이를 메고 올라가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조금의 힘든 수고, 사람들의 비난, 이 모든 것들을 충분히 감내해 낼 수가 있었다. 다른 사람의 지붕을 뚫는 것, 사람들에게 욕먹는 것, 조롱 받는 것, 그런 것들은 자신의 아픈 친구가 예수님 만난 후에 생각해 볼 문제라는 확실한 생각이, 믿음이 이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이들만큼 확고한 믿음이 있는가? 예수님만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될 것이라는 믿음,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다. 먼저 나의 인생에 대해 이와 같은 믿음이 있어야지만 모든 문제의 해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확신이 들 것이고, 그 확신이 우리를, 여러분들을 움직이게 할 것이다. 그와 같은 확신이 없다면 누구에게도 예수님을 담대히 전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왜? 나도 확실히 믿지 못하는 것을 누군가에게 전하는 것,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안에 먼저 온전한 믿음이 있기를 소망한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인가? 온전히 맡기고 믿는 것이다. 모든 것을 의지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그와 같은 분이신가? 그 믿음이 우리를 움직이게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영혼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이들이 중풍 병자에게 가진 마음, 그 사랑이 무엇인가? 이 사람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고, 이 사람의 간절함이 곧 나의 간절함이다. 여러분, 사랑은 나를 넘어서는 것이다. 사랑은 그의 아픔에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가? 부모가 그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같다. 자녀가 아파할 때, 부모는 더 마음 아파하고 그 아픔이 온전히 내 아픔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자녀가 가슴아파하고 눈물 흘릴 때에 그 아픔을 끌어안고 나만 아픔을 바라는 것이 부모의 간절한 마음이다. 나를 넘어서는 사랑, 하나님의 온전한 마음과 사랑으로 누군가를 바라볼 때에 안타까움과 간절함, 그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부어질 수 있기를 믿어야 한다. 여러분
 
세 번째는 문제의식이다. 이 네 명의 사람들은 중풍 병에 걸린 이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잘 알고 있었다. 이 병 때문에 생긴 어려움, 이 병 때문에 희망 없이 살아가야 하는 아픔, 심각한 절망, 그 절망감을 이 네 명의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움직였고, 이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을 바라볼 때에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심각한 문제인지,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여러분 제가 묻겠다. 중품 병이 중한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없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인가? 그렇다. 우리는 입으로는 예수 생명 없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중풍 병 걸린 우리 가족은 우리가 바라보지 못한다. 당장에 병원에 데려간다. 하지만 예수 생명 없는 가족들은 1년, 2년 5년, 10년,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 그런가? 그것은 주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중풍 병보다 심각한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수많은 장애물과 어려움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이유가 어디 있었는가?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 중풍 병에 걸린 사람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에 대한 인식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전도를 하는 것에 있어서 새 생명 축제를 앞두고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며 이 자리에 초대하는 것, 예수 생명을 이 본당으로 오게 하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환경과 제약이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어려움, 장애물을 뛰어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저는 앞서 말씀드린 세 가지라고 분명하게 이야기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나의 굳건한 믿음, 그 영혼을 향한 나의 간절한 사랑, 예수 사랑이 없는 것에 대한 심각한 문제의식이 우리 안에 있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이 중풍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첫 번째 하신 말씀하신 일이 무엇인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죄 사함을 선포해 주신다. 이 사람이 중풍 병에 걸린 것인지를 성경에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고 있다. 성경은 병에 직접적인 문제가 죄로 온다라고 하는 본문도 있다. 또 이 본문을 해석할 때에 이 사람이 중풍 병을 걸리기 전에 죄를 아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만났을 때에 죄 사함을 먼저 선포하셨다. 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땅에 모든 아픔, 모든 고통의 문제, 고난의 문제는 우리의 죄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의 아픔, 우리 사회의 고통, 현실의 어려움에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것은 회개(悔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중풍 병자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가장 먼저 기대했던 이 중풍 병자를 위해 지붕을 뚫고 내려 보낸 이 네 명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기대했던 것, 이 사람과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보면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가장 기대했던 것이 무엇인가? 이 사람의 병을 단번에 고치시는 예수님의 기적(奇蹟)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왜? 이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다급한 문제, 이 중풍 병자에게 가장 큰 고난, 그 고통이 바로 중풍 병이라고 모두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우선순위의 문제의 고통은 그것이 아니다. “이 중풍 병자에게 가장 급한 것, 가장 필요한 것,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죄(罪) 사(赦)함이다.” 라고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사람의 고통의 근원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죄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는 죄 용서(容恕)가 먼저 필요한 것이었다. 자신의 죄를 먼저 바라보는 것, 그것이 그 어떤 것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이 사람이 여러분, 죄 용서를 받지 않은 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의 기대대로, 친구들의 기대대로, 모인 사람들의 기대대로, 그의 육신만을 치료받고 돌아갔다면 이 사람의 삶은 어떠했을까? 오히려 중풍 병에 걸려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더 나을 뻔한 인생이 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한가? 왜 예수님을 아무도 보지 못하는 문제를 우리는 보게 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인생에게 직접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여러분, 새 생명축제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에 아무도 알지 못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 그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은혜를 통해서 보게 될 것이며, 그 문제가 해결함을 받을 때에 그 인생의 진정한 자유 함을 얻게 될 것이다. 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한가? 예수님을 통해서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인생에게 직접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여러분 새 생명축제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에 아무도 알지 못하고 예상하지 못한 문제, 그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은혜를 통해서 보게 될 것이며, 그 문제가 해결함을 받을 때에 그 인생에 진정한 자유 함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라고 말씀하신다. 이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육신, 삶의 어려움, 환경의 어려움, 아픔, 이 모든 것들을 온전히 회복시키신다. 중풍병자를 만난 예수님은 세 가지 명령을 하신다. “일어나 걸어라. 네 상을 가지라. 집으로 가라.”이다.
 
첫 번째는 일어나라이다. 회복이다. 주저앉은 곳에서 일어나라, 누워있는 곳에서 일어나라. 이것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얻을 수 있는 소망이다. 복이다.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생명이 없는 인생은 그대로 누워있을 수밖에 없다. 죽은 자는 움직일 수 없다. 살아있는 듯하나, 예수 생명이 없으면 죽은 자요, 죽은 그 인생은 의미 없이 누워있는 인생과 같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인생은 의미가 없고 허무하며 목적지가 없는 것이다. 목적지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움직일 필요가 없다. 열심히 움직이며 사는 것 같으나 그 인생을 늘 제 자리이다. 그러한 인생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생명을 주시며 “네 자리에서 일어나라.” 이다. 새 생명 축제에서 말씀을 들은 영혼들, 예수 새명을 얻게 된 영혼들은 그 자리에서 일어날 줄 믿는다.
두 번째는 네 상을 가져라. 예수님께서 굳이 “일어나서 가라” 하시면 되시지, 왜 굳이 “네 침상을 들고 가라.”고 하셨는가? 여러분 그 침상은 중풍 병자에게는 아픔의 장소이다. 죽고 싶지 않은 장소이다. 자신이 의지했던 곳, 자신의 아픔이 있던 곳, 절망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제 그 침상은 더 이상 아픔과 절망의 장소가 아니다. 같은 침상이지만 이제는 자신이 당당히 들고 걸어갈 수 있는 침상이 된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변화가 무엇인가?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도 여전히 문제는 곁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그곳에 누워있지 않는다. 우린 더 이상 그곳에 기대하지 않는다. 우리가 머문 곳은 더 이상, 아픔의 장소, 절망의 장소로 남아있지 않는다. 우리는 그곳을 복음의 장소로, 희망의 장소로 바꿀 수 있다. 극복할 힘이 우리 가운데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곳은 절망의 장소가 아닌 희망의 장소이다. 수많은 삶의 고통의 문제 속에 누워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네 상을 들고 일어나라, “네 상을 눕지 말고 그것을 들고 나아가라.” 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당당히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능력, 이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복음이다. 그 복음의 능력을 전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요, 새 생명축제임을 믿는다.
 
세 번째는 집으로 가라. 이제 그는 스스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집은 그에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늘 머물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 집을 벗어날 수만 있으면 벗어나고 싶은 곳이 집이었다. 그러나 이제 집은 그가 돌아갈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다른 이들과 같이 지치고 피곤한 일상에 쉼을 주는 곳이 되었다. 같은 장소인데 다른 장소가 되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변화가 무엇인가? 같은 대상을 보고 같은 곳을 보더라도 벗어나고 싶은 곳, 그곳이 아닌 내가 가야할 곳, 내가 있어야 할 곳, 내가 쉬고 싶은 곳이 되는 곳이다. 소망의 장소로 다가온 것이다. 다른 의미로 내 삶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지체 없이 자신의 침상을 들고 일어났을 때에 여러분,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12절에 말씀을 함께 읽어보다.
 
*마가복음 2:12,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도무지 못한 모든 일을 모든 사람이 보게 되었고 모든 이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게 된다. 2022년 11월 22일부터 시작될 새 생명축제를 통해 도무자 보지 못한 이곳에서 일어나기를 믿으며 소망한다. 중풍 병자와 같은, 아니 그보다 더 지치고 절망적이고 소망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심기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자신의 문제거리인 침상에 누워 이곳으로 올지라도 예수 복음 듣고 그 침상을 들고 당당히 일어나 생명을 소유하고 돌아가는 일들을 우리가 많이 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 일을 통해 우리 모두가 놀라게 될 것이며, 우리 모두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우리 사랑의 교회를 향하신 온전하신 뜻이며, 우리 교회에게 주신 온전한 사명임을 우리 모두가 꼭 기억해야 한다. 온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사랑의 교회의 축제가 될 기대를 기대하고 소망하며 지붕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사랑을 달아 내린 자들처럼 우리 모두가 주의 사랑을 달아 내리는 신실한 주의 종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요약
한 영혼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지금 이 시간에도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으시는 주님을 생각하고 의지하여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때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주실 줄 믿고, 한 영혼의 안타까움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사랑으로 우리의 가족과 친지들이 주님을 알지 못하는 것에 문제의식이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향하여 강한 촉매제가 되어야 함을 기도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주님을 만나 옛 것을 떨쳐내고 주님 안에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날 것을 확신해야 한다.
-이들의 믿음은 장애물을 극복한 불굴의 믿음이었고, 위험을 감수한 담대한 믿음이며, 타인을 위한 이타적 믿음이요, 구원의 열매를 맺은 결실의 믿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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