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주후 2022년 11월 13일)-성찬식
제목: "부흥을 잉태하는 마음"
말씀: 창세기 42:12-15
대표기도: 백승준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헌금송(영광여성중창단-생명의 양식)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



*창세기 42:12-15,
12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13 그들이 이르되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14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 
15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

▶ 함께 43장 14절부터 본문을 보겠다. 주보를 보라.

*창세기 43:14,
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오늘은 성찬을 앞에 놓고 부흥 시리즈, 회복과 부흥의 세 번째에 ‘부흥을 잉태하는 마음’이 오늘 이 말씀이 부흥의 문을 여는 은혜의 비밀 패스워드가 되며 비밀 열쇠가 되길 바란다. 제가 이 부흥 시리즈를 하면서 오늘 야곱에 대해 마무리를 하는데 야곱의 인생 여정에서 커튼을 열어보았다.
 
여러분, 야곱의 인생 가운데 영적으로 언제가 최고의 순간인가? 야곱의 영적인 깊이의 최고의 수준이 도달할 때가 언제였는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 생을 살아가는데, 저와 여러분의 신앙의 어떤 높은 순간, 어떤 높은 고지에 올라갔을 때가 언제였을까? 형에서를 만나기 전에 얍복 강가에서 철야기도하고 철야 씨름할 때가 그때였을까? 아니면 세겜에서 집안 전체가 멸문치하를 당할 때, 절체절명의 위기 때에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엘벧엘 하나님을 경험할 때였을까? 뭐 그런 순간도 다 좋았지만, 제가 볼 때는 42장, 43장 이 부분에서 야곱의 영적인 최고의 순간, 최고의 신앙고백을 하는 순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본문에 42장 43장의 배경은 야곱의 나이가 130세 때이다. 야곱은 그의 고백대로 창세기 47장에 보면, “내가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 “지극히 어려움의 세월을 보냈다.” 야곱이 지난번에 벧엘에서 서원을 지키고 아버지 이삭이 살았던 고향 땅에 헤브론으로 돌아온 이후에 그 다음부터 엘벧엘 하나님을 만나고 모든 것이 순적해지니까 인생은 그렇지 않다. 자기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인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고향에 돌아온 지 일 년 정도 지난 후에 야곱이 그렇게 애지중지 하던 아들 요셉을 형들의 묘략 때문에 잃어버렸다. 요셉이 죽은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은 20년쯤 지나서 요셉을 그 20년의 세월을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린 그 아픔을 부여잡고 고통을 했다. 그리고 물리적으로 지난 2년간 그 애굽의 요셉이 총리가 되고 난 다음에 7년간 풍년이 지났고, 흉년을 7년을 지나게 되는데 그 7년 가운데 2년이 지나가는 중에 극심한 기근(饑饉)이 들어서 애굽 뿐만이 아니라, 고대근동 사회가 다 먹을 것이 없었다. 야곱에게는 수많은 가축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축들도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봐야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풍년 기간 동안에 창고를 만들어 쌓아놓았다는 그 정보를 듣고 자식들을 애굽으로 보내어 양식을 사오게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이다. 그리고 자식들을 보내는데 10명을 보내가지고 애굽에서 곡식을 사오게 하는데, 한 명은 예외였다. 한 명이 누구인가? 주일학교를 잘 나와야 한다. ‘베냐민’이라는 막내를 야곱이 너무 애지중지 했다. 야곱은 베냐민을 분신보다 더 사랑했던 아들이었다. 요셉까지 없으니까, 야곱게 사랑했던 아내는 라헬이었다. 라헬이 낳은 두 아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다. 요셉은 죽은 줄 알았고, 베냐민은 늘 품에 안고 있었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 열 명이 애굽에 가서 곡식을 얻기 위하여 애굽의 총리 앞에 넓적 절을 했을 때, 요셉은 형들인 줄 단숨에 알아보았지만 형들은 요셉을 못 알아보았다. 애굽의 그 궁전의 위엄과 떨어져 있어서 못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모른 척하고 너희는 곡식을 사러온 것이 아니라, 정탐(偵探)하러 온 것이라고 몰아세웠다. 열 명의 형제들이 우리는 정탐꾼이 아니라고 정탐꾼이라면 어떻게 열 명의 형제들이 다 올 수 있냐고 하면서 그건 아니라고 한다. 가족 전체가 정탐꾼이 될 수가 없다고 하니까, 진짜이냐고 묻는다. 그리고 형들에게 동생을 물었다. 동생은 집에 있다고 했다. 그러면 그 막내가 있다고 했는데 그 막내까지 데려오면 내가 믿어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시므온만 볼모로 잡아 놓는다. 보면서 ‘요셉도 뒤끝 작렬이다.’는 생각을 했다.
 
이 후에 곡식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서 애굽에서 갖고 온 그 곡식을 가지고 얼마간 버텼지만, 곡식이 다 떨어지니까,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라. 곡식자루에다 요셉이 곡식자루에 돈 같은 것을 다 넣어버렸다. 그리고 야곱이 다시 자식들에게 곡식을 사오라고 한다. 그러자 자식들이 “아버지, 베냐민 데리고 가지 않으면, 곡식을 못 사옵니다.”라고 한다. 야곱이 베냐민은 내 생명처럼 아끼는데 안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나마 넷째 아들 유다가 인격적 신뢰를 받았다. “아버지, 제가 생명을 걸겠습니다.” 생명을 걸 테니까, 베냐민을 데리고 가게 해달라고 한다. 이런 벼랑끝 상황에서 야곱의 결단을 보는 장면이 오늘 본문이다.
 
*창세기 43:14,
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야곱은 베냐민을 앞에 놓고 내가 자식을 잃으면 잃게 되리로다. 한다. 제가 보기에는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야곱의 인생에서 이 순간만큼 장엄한 시간이 없다. 이 야곱의 벼랑 끝 한계 상황에서 고백하는 이 내용은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이것은 자포자기의 고백이 아니라, 자신의 힘을 완전히 빼고 하나님께 온전히 맡긴다는 절대적 신뢰의 결단이 된 것이다. 그래서 한 마디로 야곱이 하나님께 전적 위탁하는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이다. 아시는 대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라헬의 큰 아들 요셉도 잃고 이제 마지막 남은 베냐민만 겨우 살았는데, 44장 뒤에 보면, 아버지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있다. 베냐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버지의 생명과 묶여 있다며 서로 하나다. 라고 그렇게 목숨처럼 사랑하는 베냐민을 잃게 되면 잃겠다. 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 같은 베냐민을 포기하는 포기선언이다.
 
여러분,
어떻게 보면, 자식을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생에서 끝까지 붙잡고 있던 것, 이것은 절대로 안 되는 것, 그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제가 야곱의 신앙여정 가운데 영적으로 최고의 순간이 이 순간이 아닌가 한다. 피 말리는 아픔이 있고, 자신을 죽이는 아픔이 있고, 그리스도께 전적위탁이다.
 
지난 한 주간 우리는 제자훈련 세미나를 했다. 전 세계 14개국에서 오신 목사님들과 씨름을 하는데, 제자훈련은 단순히 교회 성장, 반복이 아니고, 목회의 본질이며 교회 론이다. 교회가 뭐냐? 교회는 ㅔ상을 향하여 부름 받은 특권이 아니라, 안주하지 말고 세상을 향하여 보냄 받은 제자들, 사명자로 키워야 하는데, 어떤 전략적 표준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제자의 전략적 표준, 그 표준이 없다면, 이탈하게 되고, 이탈하게 되면 어긋나게 되고, 어긋나게 되면 사역의 열매가 없다. 자기 잘못된 방향이 된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마음인데 온전한 제자의 표준, 넘버원이 무엇이냐면, 전적 위탁이다. 종의 마음, 증인의 마음, 다 필요하지만 전적위탁의 마음, 첫째이다. 우리가 제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가려면,
 
▷부흥을 잉태하는 마음- 첫 번째 전략적 기준이 전적 위탁이다.
그래서 야곱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자기 버림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이나 저의 인생에 반드시 ‘내가 잃으면 잃으리로다.’의 고백이 없는 생활은 사실은 다 껍데기이다. 내가 잃으면 잃으리로다. 의 고백은 그냥 겉만 좋은 것이다. 제가 저도 어려움을 겪어보니까, 조언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냥 편하게 살고 잘나가고 좋은 평판 받고 자기 이름 지키는 분들이 조언하는 것과 ‘내가 잃으면 잃으리로다.’하는 죽음을 통과하는 분들의 조언이 달랐다. 저는 죽음을 통과한 분들의 기도가 없었으면,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설교를 못한다. 그러면 죽음을 통과했다. ‘내가 잃으면 잃으리로다.’ 이게 평생의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잃으면 잃으리로다. 하는 고백을 한 번도 안했다면 피상적이고 퇴패 적인데, 그냥 신앙생활하고 적당히 자기 힘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다. 신앙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사는 것인 줄 확신한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기념하면서 이것을 체험해야 한다. ‘내가 잃으면 잃으리로다.’ 이 고백을 가지고 나중에 이 보혈의 잔을 높이 들 때에 오늘 주님 은혜 주셔서, 정말 하늘에 불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고, 영적으로 깊은 은혜를 체험하기를 바란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아이구야!! 너무 쎈 거 아니야?’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게 쎈게 아니고 신앙생활의 정상적인 것이다. 이렇게 될 때에 여러분과 제가 주의 신앙이 더 깊어지고 목자의 심정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의 사건이 무엇인가? 예수님이 “엘리엘리 사박다니 하나님이 나를 어찌하여 버리셨나이까?” 그런 우리의 죄악이 깊기 때문에 주님의 그 고통의 외침이다. 주님은 결국 “내가 내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 결국은 우리가 복음적 깨달음은 ‘내가 잃으면 잃으리로다.’ 이 사건이 예수님의 입장에서 내가 내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 일맥상통하고 있다.
 
제 생애 가운데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책을 통하여 좋은 영향을 끼친 분 중에 한 분이 ‘폴 드로니에’이다. 스위스의 좋은 신학자이다, 신앙인이었다. 그는 기독교와 심리학을 통합했다. 그리고 그가 말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인격의학’이란 말이 있다. 인격의학이란(Medicine of the person), 이것을 인격의학을 이야기 하면서 세계 의학계와 크리스천 상담학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아버지가 목사님이셨고,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어릴 적부터 기독교 신앙을 가졌지만 그의 삶에 예수 믿겠다고 회심만큼이나 그의 신앙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이 있었다. 그의 고백이다.
-30년 전 나를 바꾸는 새로운 발걸음을 내 디뎠다. 그때까지 나의 신앙은 지적인 면이 강하였다. 하나님 그리스도, 우리 인간의 삶의 영역에서 지적인 면을 중시하는 사고의 세계를 갖고 있었다. -‘폴 투르니에-

-오늘 앞 예배는 지성인들이 많이 계실 것이다. 이런 분일수록 우리가 지성신앙이 더 많다. 그것도 귀하다. 그런데 ‘폴 드로니에’가 이야기 한 것은 지성중심의 신앙은 늘 한계에 부닥쳤다. 그래서 지성중심의 신앙이 아니라, 영성의 은혜로, 지성에서 영성으로 옮기는 큰 계기 있었다. 뭐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이런 글을 썼다.
 
내 신앙에 없던 것이 내 뜻을 포기하고 매일 실제의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일이었다. 나는 어느 날 스위스 제네바 근교 어느 숲으로 가서 전심으로 진심으로 나를 포기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날 하나님과 맺는 포기의 약속은 내 인생길에 수많은 굴곡의 역사 가운데 최고의 버팀목이 되었다.
-‘폴 투르니에-’



-지성중심의 신앙이 다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전인격적인 소위 인격의학, 자기를 포기하는 전적위탁의 선언이다. 오늘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잃으면 잃으리로다.’.와 같다. 그가 남은 인생에 최고의 버팀목이 되었다는 것이며 제네바 숲 속에 가서 나를 포기하는 기도를 드렸다는 것이 그의 신앙을 질적으로 한 단계 올라가게 한 것이다. 이 내용이야 말로 폴 드로니에의 하나님의 전적 위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단조로운 신앙생활을, 왜 생기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얼까? 왜 결혼 생활이 권태인가? 자기가 갖고 있는 보화를 내려놓고 진정으로 하나님께 위탁하는 신앙생활을 한다면 모든 권태의 신앙에서 생기의 신앙으로 거듭날 수가 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장에서도 말씀하신다. ‘자기의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자기 생명을 잃고자 하는 자는 얻을 것이다.’ 십자가 보혈의 사건이 우리가 경험되는 것인데, 여러분, 이런 위탁의 은혜가 주님 앞에 진실 되게 있을 때 우리의 권태롭고 메마르고 단조롭고 답답한 이 신앙생활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줄 믿는다. 우리가 갖고 있는 보화를 다 내려놓아야 한다는 무슨 뜻인가 이냐면, 내가 중요하다고 움키고 쥐고 있는 것을 힘 빼기를 통하여 내려놓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위탁한다는 것이다.
 
야곱이 베냐민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내려놓을 수 있는 마지막 한 방울을 내려놓은 것이다. 오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삶이 메마르고 답답한가? 왜 그런가? 왜 풍성한 신앙의 단비를 경험하지 못하는가? 복잡한 것 다 정리하면 주님 앞에서 저와 여러분의 포기각서를 못써서 그렇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폴 드로니에’가 제네바 숲 속에 그 기도의 장소에 가서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위탁을 하겠다는 결단의 기도를 드릴 때, 이 메마른 신앙생활을 탈피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제네바까지 안 가도 된다. 오늘 성찬식일 때, 하나님의 은혜의 품안에 전적으로 위탁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전적 위탁이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위탁이다. 오늘 이 잔과 떡을 기념하면서, 우리가 전적 위탁이 될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하실 것이다. 여러분이 중요하다고 여기고 움켜쥐고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힘 빼기 작업을 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위탁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언제나 예!!! 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순종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해가 안 가겠지만 고린도교회가 하도 답답하니까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말씀한다.
 
*고린도후서 1:18-19,
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지금 이야기 한 그 내용이다. 예, 만 있다는 것이다. 힘 빼기 작업이다. 잃으면 잃게 되리라. 그렇게 한 뒤에 전적 위탁의 결과는 무엇인가? 자신의 생명과 같은 베냐민을 내려놓는 그 야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창세기 43:14,
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야곱은 마침내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야곱이 자기 입으로 고백을 한 번도 못했다. 처음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의 입술로 처음 고백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지성으로 알던 하나님을 드디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진정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진정한 자유 함을 얻게 되었다. 자유 함이 찾아왔다.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성찬을 통하여 진정한 자유 함을 얻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런 내면 적 변화와 함께 자유 함을 가지고 변화가 따라온 것은 무엇인가? 전능하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긴 야곱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본문 뒤에 보면 애굽에 갖다온 아들들이 뭐라고 하냐면, “아버지, 요셉이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잃으면 잃으리로다. 라고 진실로 고백할 때, 요셉이 아직 살았다고 이 소식을 들은 야곱은 45장에서 보면,
 
*창세기 45:26,
26 알리어 이르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 하더니.
-그걸 믿지 못해가지고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해 어리둥절하고 볼을 꼬집으면서 꿈이냐 생시냐 했다. 그런데 어떻게 믿었냐면 요셉이 보낸 수레를 보고 믿었다.고 한다. 요즘 말하면 금장 딱지 롤스로이드를 보낸 것이다. 그제서야 기운이 소생했다. 수레를 보고 기운이 소생했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을 다시 얻었다. 거의 부활을 체험했다. ‘내가 잃으면 잃으리로다.’라고 하나님께 완전히 의탁했더니 잃었던 자식까지 찾게 된 것이다. 여기서 닭이 먼저이냐? 닭 알이 먼저이냐? 라고 이야기 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이런 일을 기대하기 때문에 전적 위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순전하게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이 그것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하신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우리 하나님은 내 전적 위탁이 필요 없다. 내가 전적 위탁을 하면 여러분과 제가 전적위탁을 하게 되면 내가 좋은 것이지 하나님이 달라지는 게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순전한 마음으로 전적으로 위탁을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들을 다시 돌려주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야곱은 너무나 은혜가 되어서 45장 28절에
 
*창세기 45:28,
28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
-그리고 내려가서 ‘족하도다.’ 라고 한다. 진심으로 ‘잃으면 잃으리로다.’라고 하나님 앞에 하면 하나님은 ‘족하도다.’는 그런 단어를 주실 것이다. 여러분 이게 믿음이다. 드디어 부자 상봉을 하게 된다. 그리던 요셉을, 내면은 하나님을 통하여 자유 함을 얻고, 그의 열매는 이제 부자는 끌어안고 한 참을 울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
 
*창세기 46:30,
30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 ‘죽어도 족하도다.’ 한다. ‘잃으면 잃으리로다.’라고 전심으로 하면, 우리가 믿음이 있으면, 죽어도 족한 것이다. 지금 죽어도 족하다. 지금 오늘 성찬을 통하여 이런 은혜가 되길 바란다. 17세에 잃어버린 요셉이 이 순간 39년의 세월이 흘렀다. 39년의 중년이 되었다. 야곱은 23년 동안 17세에 잃어버리고, 요셉이 애굽의 총리 될 때가 30세이니까 13년에다가 7년 풍년이 지나고 2년 흉년이 더하고 일 년이 지났다. 23년이 지난 것이다. 야곱의 23년 동안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을 것이다. 요셉도 17세 때는 철부지였다. 자기 마음에 있는 생각을 품지 못하고 형들에게 막 이야기 하다가 시기 질투를 받았는데 그 때 하나님이 내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나를 먼저 보냈다고 이제는 형들을 위로하는 큰 그릇이 되었다. 여러분 이런 것들이 부흥인 줄 믿는다. 그리고 요셉은 젊을 때부터 ‘내가 잃으면 잃으리로다.’ 아마 요셉이 감옥에서 자기가 꿈 해석해준 사람이 2년 동안 아무 끔쩍도 안 했을 때, 하나님 앞에 섭섭함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잃으면 잃으리로다.’ 했다. 만약 평탄했으면 요셉은 애굽에서 감옥에서 하급 관리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보디발의 집안에서 그렇게 모함 당하고 어려움도 있었을 때, 화가 나서 난리 치지 않고, ‘내가 잃으면 잃으리로다.’ 그렇게 하니까 가정 총무 정도의 수준에서 하나님께서 이 시간, 형들 앞에서 형들에게 복수도 할 수 있었지만 ‘내가 잃으면 잃으리로다.’ 라는 마음이 있어서 아마 하나님 앞에서 ‘내가 잃으면 잃으리로다.’ 그런 요셉의 환경 환경이 늘 추워졌지만, 그걸 잘 감당을 안 했으면, 그 당시 고대 근동에 큰 기근이 있을 때에 자신도 형제 가운데 끼어 있을 것이다. 마지막 야곱은 그가 부흥을 경험하고 유명한 49장 22절에 자식을 축복할 때, 특별하게 요셉에게
 
*창세기 49:22,
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요셉으로 말미암아 주위를 다 살렸다. 자식 교육에 있어서 답답한 게 많다. 자녀를 양육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우리는 성공하기 위하여, 행복을 위하여 자식을 키우는 것도 나름 나쁘지 않다. 대부분의 교육의 목적은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하여, 부모와 자녀 간에 친밀한 관계를 가지 위해서, 남편과 아내의 다리역할을 하기 위하여, 혹은 노년에 부양할 노년을 위하여, 그것 다 일리가 있다. 그래서 행복하고 성공하고, 그러나 여러분 자녀 양육은 달라야 한다. 그리스도인 부모는 전적으로 자녀를 위탁하는 자녀로 키워야 한다. 요셉처럼 ‘내가 잃으면 잃으리로다.’ 해야 한다. 그리하려면 우리 자녀들 그런 환경을 갖게 해야 한다. 야곱의 가장 문제 중에 하나가 편애였다. 하나님께서 ‘내가 잃으면 잃으리로다.’ 하고 이렇게 용광로로 집어넣는 이유가 뭐냐면, 야곱의 엄마가 리브가가 이삭은 에서를 더 좋아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더 좋아했다. 그 편애가 야곱에게도 그대로 흘렀다. 그것을 요셉과 베냐민을 처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들을 처리하기 위하여 ‘내가 잃으면 잃으리로다.’라는 환경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전적 위탁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요셉의 아들의 축복도 누리시길 바란다. 우리가 그런 꿈을 가지고 성찬에 참여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다. 토비새에 교회를 데리고 나오면 아이들은 달라진다.
 
♣요약
십자가의 보혈의 잔을 높이 들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였으니 ‘내가 잃으면 잃으리로다.’ 는 전적 위탁을 하여 시대의 요셉을 키우는 평생이 되고 내 인생의 힘을 빼 내는 포기각서를 하나님 앞에 내어 드릴 때에 내가 애지중지 하던 베냐민을 해결해 주신 것처럼 ‘내가 잃으면 잃으리로다.’ 로 하나님 앞에 나도 전적 위탁을 하여 순전한 신양생활로 주님 기뻐하시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요셉은 자기에게 절하는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모른 체하고 그들을 정탐꾼으로 몰아치면서 혐의를 벗으려면 막내인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했다. 요셉은 자기를 죽이려고 한 형들이 베냐민에게는 어떻게 대했는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형들의 잘못을 기억케 함으로써 회개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사흘 간 가둠으로써 형들의 본심을 알아보고 과거를 반성할 시간적 여유를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형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할 수 있었고 더욱 진실한 회개를 할 수 있었다.
 


























+ Recent posts